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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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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시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개요[편집]

  • 김부식은 고려 시대의 문신·학자.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지냈고 묘청 등의 서경천도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을 지휘하며 난을 제압하였다.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부식·부필(富弼)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 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1]
  • 김부식은 고려 평장사 직책을 지낸 고려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이다.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인 김위영을 고려 태조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2]
  • 김부식은 고려의 관료이다. 개경파 문벌귀족.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하며 1135년(고려 인종 13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한 한국사의 대표적 권신이다. 자녀로는 무신정변의 발단이 된 김돈중이 있다. 김부식은 인종 대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중신이었기에 여러 관작을 거쳤다. 김부식의 집안은 아버지 대까지만 하더라도 중앙 귀족에 못 미치는 수준의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김부식 대에 입신양명에 성공하여 가문이 크게 흥해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문벌귀족으로 되었던 것. 김부식의 조부와 부친은 높은 직위에 있지는 않았는데 김부식의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면서 가문의 위세가 급상승하게 된다. 김부식의 형제 중 큰형은 과거에 급제한 후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공을 세웠고 뒤이어 다섯 형제들도 과거에 급제하면서 입시계에 전설로 통하는 집안이 된 것이다. 덕분에 5형제의 어머니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큰 포상을 받기도 했다. 김부식 5형제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순식간에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으로 부상하였는데 당대의 권신 이자겸 다음가는 정도의 위세를 지니게 되었다.[3]
  •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문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김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김부식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김근(金覲) 때부터였다.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 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부식은 13 ·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김부식을 포함해 4형제의 이름은 송나라 문호인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4형제 모두 과거에 합격해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김부식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았고 매년 임금이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김부식과 둘째 형 김부일(金富佾), 동생 김부철(金富轍, 뒤에 金富儀로 개명함)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때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아들들이 임금의 은총으로 이미 녹을 받고 있음도 감사한데 그 위에 또다시 포상을 받을 수 없다 하여 받지 않았다고 한다. 1153년(의종 7)에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4]

김부식의 생애[편집]

  • 김부식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 사록(司錄)과 참군 녹사(參軍錄事)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 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또한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 11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김부식에 대한 평가[편집]

  • 김부식은 경주 김씨로 증조 김위영은 경주의 향리인 주장(州長)이었고, 아버지 김근(金覲)은 향리계층에서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5품의 좌간의대부에 올랐다. 김부식은 1096(숙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안서대호부 사록참군사에 초임되었다. 1116(예종11) 7월 송나라에 사신 행렬에 문한관으로 따라갔다가 1117년 3월에 귀국하면서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구해와 고려의 역사학이 정치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김부식은 학문 증흥정책을 쓴 예종과 인종에게 청연각에서 '서경', '주역'을 강하였고, 왕의 외조인 이자겸이 왕에게 칭신(稱臣)하지 않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자 이를 예법에 어긋난다고 중국의 예를 들어 조목조목 반대하였다. 왕위를 노리던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어 국정을 논하는 재추의 중심 관료가 되었고, 동덕찬화공신에 책봉되었다. 인종 6년(1128) 3월 한림학사 승지로 임용되어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올랐고, 6월 판삼사사, 12월 정당문학 겸 수국사, 인종 10년(1132) 12월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하였고,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임용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 인종 12년 묘청은 금국정벌론과 칭제건원을 주장하며 서경에서 인종 13년(1135)에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중군 원수에 임명되어 그 진압책임을 맡아 1136년 2월에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에 봉하여지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 국사 겸 태자대보로 승진되었으며, 판예부사(判禮部事),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를 겸임하였다. 인종 18년(1140)에는 국왕에게 시폐 10조를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국왕이 사면령을 반포하자 김부식은 정년 18개월을 남겨두고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후 인종의 도움을 받아 신진관료 8명과 함께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1145년에 왕에게 이를 바쳤다. 삼국사기는 한국의 중세의 역사관을 정립한 역사서로 정치적 교훈서로서의 역사학, 유교적 도덕사관, 문헌중심주의 역사학, 합리적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종 2년에 고려를 방문하였던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을 고금의 학문에 박식한 고려의 대표적 학자로 소개하였으며, 의종 5년에 세상을 떠나자 김부식은 인종의 묘정에 수태부 중서령 낙랑후 문렬공으로 배향되었다.
  • 김부식은 고려 문신, 재상, 유학자, 고문체(古文體)의 보급에 힘씀. 예종·인종실록 및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29년(1075)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에 세상을 떠났다. 예종, 인종의 학문 숭상기에 중심적 학자로 유학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 유학자였으며,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문학자였고, 이자겸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왕조의 안정에 기여한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고대 역사학을 극복하여 중세의 역사관을 정립한 역사가였다.

삼국사기[편집]

  •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 조선 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 이온문(李溫文) · 허홍재(許洪材) · 서안정(徐安貞) · 박동계(朴東桂) · 이황중(李黃中) · 최우보(崔祐甫) ·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부식(金富軾,1075~1151)〉, 《두산백과》
  2. 김부식〉, 《위키백과》
  3. 김부식〉, 《나무위키》
  4. 김부식(金富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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