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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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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2)이다.

개요[편집]

  • 광개토대왕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한국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1]
  • 광개토대왕은 혹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은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재위 : 391년 음력 5월 ~ 412년 음력 10월)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중국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2]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이다. 이름은 담덕.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로 가장 자주 불리는 군주이기도 하다. 18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정복 사업과 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한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정복군주로 잘 알려져 있다. 즉위 시 불안했던 대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주요 적국이었던 백제를 쳐서 항복시키는 동시에 서쪽의 후연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광대한 요동 지역을 차지했으며, 북쪽의 유목 민족들을 정벌하여 만주를 포함한 넓은 땅을 영토로 삼고 말갈 등 유목 민족들을 휘하에 두어 북쪽 영토를 크게 넓힘으로써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힘입어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전쟁에서의 예외적인 업적으로 인해 여러 창작물에서 다루어지는 인물이기도 하며, 정복군주이면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으로 인해 한국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자주 비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3]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제19대(재위: 391년~413년) 왕이며 재위시간은 391∼412년이다. 이 재위연대는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한 것이며, 『삼국사기』에는 재위 기간이 22년임은 같지만 재위연대는 392∼413년으로 실려 있다. 재위 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 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으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또한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 · 중국 · 일본 3국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4]

광개토대왕의 업적[편집]

  •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을 탈환하고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능은 소재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호칭[편집]

  •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은 당대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광개토왕이라 표기하였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인 표기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며,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을 줄인 광개토태왕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되어 비문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학자 장푸위(張福有, 장복유)가 해석한 비문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본명이 '평안'이라는 기사를 적어 두었다.(國罡上太王 號平安) 또한 다른 중국 왕조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안'이라고 칭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안 고구려비의 진위 논란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지안 고구려비는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을 시도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다른 유물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석만 공개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 고구려가 세워졌을 때는 중국식 시호 제도나 고구려식 시호 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초기에는 그저 이름만으로 전해지다가 이후에 가서야 묘지의 장소를 기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초기와 다르게 발전했을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편집]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중요한 군주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고구려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374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고국원왕(高國元王)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제18대 왕인 미천왕(美川王)이다. 미천왕의 사후 광개토대왕은 391년에 왕위에 올랐다.
  • 광개토대왕은 391년에 즉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적, 정치적 강화를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즉위 직후부터 군사적 정복과 외교적 관계의 확대에 주력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북방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였다. 400년에는 만주 지역의 숙신과 거란을 정복하였다. 406년에는 동호를 정복하고, 북방의 강력한 민족들을 제압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남쪽으로도 정복 전쟁을 통해 백제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400년에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였고, 403년에는 신라의 수도인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한반도까지 넓혔다. 408년에는 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벌여 이 지역에서 고구려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96년에는 요동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 승리는 고구려의 북방 방어선 강화를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백제와의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어 백제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의 서남쪽 방면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였다. 그의 외교 정책은 고구려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문화와 학문을 장려하여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을 도왔다. 특히, 고구려의 역사적 기록과 서사시가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문화적 성과는 고구려의 전통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414년에 세워졌다. 이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승리와 영토 확장, 외교적 성과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주요 군사 작전과 외교적 성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문의 내용은 고대 한국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광개토대왕의 평가[편집]

  • 광개토대왕은 41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은 고구려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국가의 안정성과 군사적 위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국가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 아래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의 통치 아래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과 외교적 관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상징하며,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편집]

  •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영락[편집]

  • 영락(永樂)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사용된 연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연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구려 중심 사상인 천하관(天下觀)이 잘 나타나 있다.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밖으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표명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나타내었다. 다른 고구려 연호와 마찬가지로 금석문(金石文)에서 발견되는데, 만주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의 광개토대왕릉 비문과 평남 대안시 덕흥리 벽화고분에 있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묵서명(墨書銘)에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서는 영락 연호를 사용하여 광개토대왕을 영락대왕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4~412)〉, 《두산백과》
  2. 광개토대왕〉, 《위키백과》
  3. 광개토대왕〉, 《나무위키》
  4. 광개토왕(廣開土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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