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민
이의민(李義旼)은 고려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이자 무신정권 시절 사람이다.
개요[편집]
- 이의민은 고려 시대의 무신이다. 정중부의 난에 가담했고 의종 복위음모와 조위총의 난을 평정했다. 경대승이 죽은 후 무신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 본관 정선.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手搏)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 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에 은거해 있었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난을 일으킬까 도읍으로 불러들였다. 공부상서(工部尙書)·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였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권세에 의지하여 탐학을 자행했다.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1]
- 이의민은 고려의 무신(武臣)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제4대 집권자로 계림의 천민 출신 한량에서 시작해 고려를 호령하는 권신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나 이렇듯 출세했지만 탐욕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해 여러 난행을 벌였고, 그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경주 출신이며,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출생지 때문에 경주 이씨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의민의 본관이 경주로 적혀 있다. 3남 중 막내로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篩)를 팔던 장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옥룡사라는 절의 노비였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은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은 채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고 깨어난 뒤 이의민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기골이 장대해 키가 무려 8척, 환산하면 약 196cm 수준에 완력이 유달리 빼어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형들과 함께 횡포를 부리다 경주 안렴사 김자양의 손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두 형들은 옥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혼자 살아남았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김자양이 이의민을 무관으로 발탁하였고, 아내와 함께 개경으로 상경해 경군에 속하게 되었다. 수박 실력이 뛰어났던 그를 의종이 눈여겨 보아 최하급 장교인 대정에서 단번에 정7품 별장까지 파격 승진시켜줬다.[2]
- 이의민은 본관이 정선(旌善)이다. 1184년부터 1196년까지 12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의방의 명령으로 의종의 유배지로 찾아가 의종을 암살했으며, 경대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집권하였다. 1173년 반 무신 운동인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상장군에 올랐다. 한때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신봉하여 경주 민란군과 내통하기도 했다. 집권 이후 권력을 남용하다가 1196년 이른 봄 아들 이지영이 동부녹사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으로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정변에 휘말려 암살되었다. 경주 출신이다. 그가 죽자 최충헌이 명종에게 공신각에 그려 두었던 그의 초상화를 없애라고 건의하자, 명종은 그 위에 덧칠을 하도록 했다. 그의 사촌 형제인 이희민과 조카 이성순까지 화를 당했다. 일부 친족들은 살아남아 후에 최충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희민의 며느리인 여흥 민씨가 종손인 이연을 데리고 강원도 정선군으로 이주, 은신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정선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정선으로 숨은 이연의 아들 이우원은 신분을 숨기고 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국자감생원이 되었다. 이의민이 살해되었을 때 최충헌은 명종에게 상주하여 한광연(韓光衍)을 경주로 보내 이의민의 가까운 친척들과 집안 사람들, 집안의 노비들까지 색출해서 모두 살해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이의민 일족은 경주 이씨로 보았으나, 1990년대 이후 후손들이 조선 말 후대에 창작된 정선이씨세보를 이용하여 이의민이 정선 이씨임을 밝히기도 했다.[3]
- 이의민은 고려 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집권자.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비(婢)로서 천계(賤系) 출신이었다. 1170년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하였고, 1174년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속히 출세하였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184년(명종 14) 정월부터 1196년(명종 26)까지 약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의민집권기는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무신들과 천계 출신 무신들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기였으며 전체 무신정권기(1170∼1270) 가운데 전기의 말엽에 해당한다. 신장이 8척에 이를 정도로 장대했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京軍)에 선발된 뒤 수박(手搏)을 잘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가담해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의민의 빠른 진급에 대해 『고려사』에는 이의민이 무신정변 때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해 의종 복위를 꾀하자, 유배지인 거제에서 경주로 나와 있던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그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의 난 때에는 정동대장군 지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事)가 되어 토벌했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이의민은 1196년(명종 26) 아들 이지영(李至榮)이 최충헌(崔忠獻)의 동생인 최충수(崔忠粹)의 비둘기를 뺏은 것을 계기로 살해되었다. 최충헌은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이었지만 이의민의 정권 하에서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제약을 받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나 가문 출신이 좋은 무반들은 최충헌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이의민의 죽음은 이의민정권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비둘기 쟁탈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그 불만을 폭발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의민 정권이 붕괴되자 최씨무신정권시대가 개막되어 4대 62년간 지속되었다.[4]
이의민의 출신과 가계[편집]
- 이의민의 출생 년도는 미상으로 경주의 소금장수 이선을 아버지로 영일현(지금의 포항시 연일읍)에 있던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을 어머니로 하여 경주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3형제였는데 그가 막내였다 한다. 1196년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피살되고 일가가 몰살된 뒤에도 한동안 이의민의 친척들은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이의민의 부모는 미천한 소금장수이며 옥령사의 여종이였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정선이씨세보에선 이의민의 조상을 베트남 대월국 리왕조의 후손으로 이양혼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창조되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신종 때, 경주 출신 이사경(李思敬) 등 이의민의 다른 친척들도 경주에 촌수로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의민의 친척인 이사경은 백유(佰瑜), 직재(直才) 등과도 인척이었다 한다. 한때 경주 이씨로 알려졌으나 그의 사촌 이희민의 손자가 강원도 정선군에 정착하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정선 이씨가 되었다.
- 정선 이씨 세보에 의하면 이의민의 5대조는 이양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송 휘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중서문하평장사 검교태사 수사공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송 휘종은 송 흠종 등과 함께 금나라로 끌려갔다. 그래서 혼란을 피해 이양혼은 다시 일가를 이끌고 배를 타고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 경상도 경주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나 이양혼은 1127년에도 살아있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의민은 1168년도에도 활동했던 사람이다. 정선(旌善) 이씨(李氏)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이양곤(李陽焜)이고, 이의민은 그의 5대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양곤은 베트남 이조의 제5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동생이며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영 무리가 있는데, 먼저 이양곤의 망명 자체를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제위 다툼에서 밀려난 후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1123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재차 망명했다고 하는데 신종이 1116년생이므로 이양곤은 아무리 일찍 태어났어도 1117년생이고, 이 말은 7세에 불과한 어린이가 2번이나 망명을 했다는 말이다.
- 베트남 황손설은 정선 이씨 문중의 족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정선 이씨의 첫 족보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인 1677년에 가서야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이 베트남의 황손이라는 설은 전형적인 숭조미화의 허황된 이야기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서를 구해 읽어보는 게 어렵지 않았으므로 숭조(崇祖) 과정에서 《송서》 등을 참고하여 만든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의민은 1181년 형부상서 겸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기해정변) 중방을 무력화시킨 후, 무신정권 제3대 집권자로 군림하면서 폐왕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을 죽이겠다며 사병 조직인 도방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그를 위협하자 4월에 병을 핑계대고 개경보다는 나름대로 기반이 있는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낙향했다. 이때 이의민이 받은 신변의 위협은 꽤나 컸던 모양으로 위협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노비들을 무장시켜 대비하기도 했으나 노비들인 그의 사병들은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받은 경대승의 도방 병력에 상대가 될 수 없었기에 무관의 최고직인 상장군 직위마저 내버리고 낙향했다.
이의민의 권력장악[편집]
- 의종을 시해한 이후로 이의민은 승승장구하였다. 1174년(명종 4)부터 1176년(명종 6)까지 서북 지방을 뒤흔들었던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무신정권에 대한 역쿠데타를 진압하는 데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맞고서도 진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는 일화마저 전해진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할 때 세운 공으로 이의민은 고려 무반의 최고봉인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최고의 무신권력자 중 한 사람으로 등극한 것이다. 당시는 정중부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기였다. 이의민은 1177년(명종 7)에도 조위총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전공을 쌓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이의민에게 제동이 걸린 것은 1179년(명종 9) 9월, 경대승(慶大升)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경대승은 당시 정권을 농단하던 정중부를 습격하여 목을 베고 그 세력을 제거하였다. 경대승은 자신도 무신이었으나,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할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라고 『고려사절요』에서 평가되었다.
- 경대승의 기세에 이의민은 몸을 사렸다. 이의민은 자신의 집에 정예 병력을 모아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경대승도 자신의 무력 기반으로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백 수십 명의 용사를 기르고 있었다. 도방에서 이의민 세력을 노린다는 소문에 이의민은 자신의 마을에 큰 문을 세우고 경계병을 세웠다. 양측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아무리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이라고 해도 이의민을 마음대로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기반이 취약했고, 경대승의 복고적 정책에 반기를 드는 무신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1181년(명종 11)에 형부상서 상장군(刑部尙書 上將軍)을 제수 받고 변경에 병마사로 출진하였다. 이때, 경대승이 자신의 측근이었던 허승(許升)을 제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공을 믿고 방자하게 군다는 이유에서였다. 1183년(명종 13) 7월, 서른 살에 불과했던 경대승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이에 국왕은 이의민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이의민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1190년(명종 20), 이의민은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의 지위에 올랐다. 노비의 아들이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신분제가 존재했던 전근대에 이의민의 입신양명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차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특수한 경우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이의민〉, 《나무위키》
- 〈이의민〉, 《위키백과》
- 〈이의민(李義旼,?~1196)〉, 《두산백과》
- 〈이의민 (李義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사랑옵다, 〈고려 무인시대 이의민 불량배 출신이었다?〉, 《네이버블로그》, 2024-09-07
- 앤, 〈이의민은 어떻게 왕의 척추를 꺾었나〉, 《네이버블로그》, 2024-05-09
- 피오나, 〈왕이 되고자 했던 천민, 무신 이의민〉, 《네이버블로그》, 2024-03-31
- 달뫼, 〈4월 9일 / 최충헌, 이의민 죽여 권력 잡음〉, 《네이버블로그》, 2023-04-0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