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윤보선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윤보선

윤보선(尹潽善)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다

개요[편집]

  •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치가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1963년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였다. 호 해위(海葦).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韓英)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國民黨)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저서에 《구국(救國)의 가시밭길》이 있다.[1]
  • 윤보선은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아무리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2]
  • 윤보선은 1897년(광무 원년) 조선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2년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칩거하다가,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문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맡았다. 1952년 발췌 개헌을 계기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이후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정면 대결하여 1.5%p 가량 차이로 석패하였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서거하였다.[3]
  • 윤보선은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모산면 신촌[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 일가가 중앙 관직에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10세에 한성으로 올라와 지금의 안국동에 있는 안동장에서 생활하며 한성고등소학교와 일출소학교를 다녔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다녔으나 1915년 학업을 접고, 국내로 돌아왔다. 1963년 7월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2월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고, 야권 세력을 하나로 모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1967년 또 한 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는 등 정권에 대항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정책 자문 역할을 하였다.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 의장, 석오이동녕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고, 1990년 사망하였다. 윤보선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해평윤씨의 일가 묘역에 있다. 생존 당시 "독재자와 함께 누울 수 없다"며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1960년 8월 12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1984년 3월 20일에는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4]

윤보선의 가계[편집]

  • 윤보선(1897~1990)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해위(海葦)이다.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이자 1920~1930년대 민족 운동에 참여했던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 의관이었던 이재룡의 장녀 이범숙(李範淑)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안성, 남포군수, 강계부사, 대한제국 육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윤영렬(尹英烈, 1854~1939)이며, 종조할아버지(할아버지의 남자 형제)는 병조판서, 군부대신, 법부대신, 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다. 작은아버지는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尹致暎, 1898~1996)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당숙)인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개화파로 한성부판윤, 독립신문사 사장 등을 지내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민주선언[편집]

  • 3·1민주선언(三一民主宣言)은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 ·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이다. 이를 빌미로 하여 정부는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대량 구속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을 명동사건 또는 삼일민주구국선언사건이라고도 한다. 사건 직후 검찰은 "구정치인들과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분자들을 규합,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수련회·집회 등의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철폐·정권퇴진 등을 요구하는 불법적인 구호를 내세워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기도회의 마지막 순서에서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라는 내용의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한 것이었다.
  • 3·1민주선언 사건으로 윤보선·김대중·정일형을 비롯하여 함석헌·윤반웅·문익환·함세웅·신현봉·김승훈·이문영·서남동 등 모두 18명이 기소되었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과 변호인단 총사퇴 등으로 파란을 일으켜 관련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피고들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미친 파장이 컸으며, 재판과정에서 정치적·법률적 체제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거부와 항의를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1970년대 명망가 중심의 운동을 대표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와 정치인, 신교와 구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연대을 강화하게 되었다.

안국동 윤보선가[편집]

  •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 尹潽善家)는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였다. 대한민국의 임시 의정원 의원과 제4대 대통령과 상공부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정치인 겸 독립운동가 윤보선의 사저였다. 99칸의 대저택으로 일부는 해방 직후 6.25 전쟁 때 일부 소실되기 전까지 형태를 유지하였다.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저택으로도 유명한 이 집은 1870년대에 민영익의 아들 민규식이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종이 이 집을 사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금릉위 박영효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윤보선 전 대통령 선친인 윤치소가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안동장(安洞莊) 또는 안국동 사저로도 부른다. 경내가 넓어서 일명 안동궁(安洞宮)으로도 불렸다. 1978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4월 10일 현재의 문화재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2002년 1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38호로 승격되었다.

아산 윤보선 대통령 생가[편집]

  • 아산 윤보선 대통령 생가 (牙山 尹潽善 大統領 生家)는 넓은 평지마을 한가운데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은 것이라고 전하나, 바깥사랑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안사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안사랑채의 왼쪽 모서리에 'ㄴ'자형의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ㄴ'자형의 바깥사랑채가 배치되었다.
  • 안채는 부엌이 동쪽에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바깥사랑채는 높은 누마루집으로 다른 건물과 별도로 담을 돌리고 대문을 내었다. 중문간은 일반적으로 밖에는 대문을 달고 안마당쪽은 개방되어 있는데, 이 집은 양쪽에 모두 대문을 달고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어 특이하다. 행랑채는 안사랑채에 지붕을 아래로 한단 겹치면서 잇대어 짓고 앞쪽으로 솟을대문을 내었다. 행랑채의 서쪽에 있는 부속채는 동부지역에만 분포하는 '양통집'이며,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후대에 부분적인 개조가 있었지만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구성을 한 상류주택이다.

윤보선에 대한 평가[편집]

  • 윤보선은 제2공화국이 채 2년도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졌기에 대중에게는 보통 최규하 전 대통령과 함께 존재감이 미약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의원내각제 체제 속에서 윤보선 본인은 상징적 국가원수로 옹립된 것이기에 제2공화국의 실권자인 장면 전 총리에게 인지도도 밀린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빼고 장면 전 국무총리를 넣는 경우가 많다.
  • 윤보선 대통령은 도덕성, 민주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며, 박정희 정부에 맞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5.16 당시 진압을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박정희의 쿠데타를 승인해서 합법적으로 군정체제가 들어설 수 있게 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이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들어 매카시즘 공세를 펼치다가 역풍을 맞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말년에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일각에서는 변절자라고 혹평한다.
  • 기념비적인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국가원수로서 실질적 권력이 적었던 점, 4.19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군부 쿠데타를 야기한 무능한 정부였다는 세간의 이미지, 보수적인 성향, 신군부에 호의적이었던 태도 등 복합적인 이유로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현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윤보선과 윤보선의 민주당 역시도 더불어민주당이 지나온 역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당사에도 민주당계 전직 대통령인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과 마찬가지로 윤보선의 사진도 걸어놓으며 상징성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윤보선(尹潽善,1897.8.26.~1990.7.18)〉, 《두산백과》
  2. 윤보선〉, 《위키백과》
  3. 윤보선〉, 《나무위키》
  4. 윤보선〉,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윤보선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