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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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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Socrates)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1]

개요[편집]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2]

생애[편집]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말년에는 아테네의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편집]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소크라테스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 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다.

산파술[편집]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편집]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Sōkratous)은 플라톤이 저술한 철학서이다.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神)들을 믿지 않고,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발되었으나, 그는 이에 대하여 당당한 변론을 시도하였다. 이 변론은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의 세 부분으로 되었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眞髓)로서, 또한 소크라테스의 고발·판결·사형의 관련을 밝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한 소크라테스 문학은 때로 작자의 창작이 섞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저작의 주요 부분은 역사적으로도 충실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문체로서는 플라톤의 작품 중 백미(白眉)에 속하고, 예로부터 그리스 문학사상 산문문학의 주옥편으로 중히 여겨왔다.

소크라테스학파[편집]

소크라테스학파(Socratic Schools)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학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메가라학파, 키레네학파, 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 등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플라톤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학파도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사용한 논의와 이를 통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는 교육법, 기존과는 다른 철학적 사고방식, 절제된 행동양식 등으로 동시대 대중과 철학자는 물론 후대 사상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직접적인 저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플라톤(Plato), 크세노폰(Xenophon) 등 다른 인물의 저작을 통해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소크라테스 고유의 철학적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거나, 다른 작가들의 저서에 실린 그의 언행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를 증명하기는 어렵다. 소크라테스학파를 분류하는 기준 역시 모호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학파라 함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언행 일부를 계승하거나 차용하여 발전시킨 학파들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각자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해석하고, 전체가 아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을 '소(小)소크라테스 학파(Small Socratic Schools)'라 부르기도 한다.

유죄판결로 독배를 마시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 당시 그리스와 그 주변 지역에는 플라톤을 비롯해 소크라테스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철학자와 학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일정 기간 동안 나름의 세를 형성한 대표적인 학파는 메가라학파(Megarian school), 키레네학파(Cyrenaic school), 키니코스학파(Cynicism)이다. 아카데메이아학파(Acadēmeia)와 페리파토스학파(Peripatetic school) 역시 소크라테스 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넓게는 소크라테스학파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 각각은 소크라테스와 분리되는 독자적인 특징이 있고, 그 자체로도 중요한 위상을 지니기 때문에 학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자의 이름을 따라 전자는 플라톤학파,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무지의 지[편집]

무지의 지(Bewusstsein des Nichtwissens)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특징짓는 유명한 말이다. 그리스어 'philosophos'는 철학자(愛知者)라는 의미이며, 피타고라스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는 신(神)만이 지자(知者: sophos)이다. 인간은 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지(知: sophia)를 애구(愛求)하는 유한적(有限的) 존재이다. 따라서, 'philosophia'는 소위 현자(賢者)나 지혜의 본성이 신에 비교한다면 무(無)와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자각(自覺)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적(本來的)인 지의 이데아에서 자기의 무지(無知)를 자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무지의 지이고, 소크라테스의 우월(優越)은 이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

무지의 지는 소극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미망(迷妄)을 밝혀주어 진실한 지에의 문을 열게 되며, 이러한 자각을 자기의 본질적 계기로 하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한 신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 ‘philosophos’의 목표로 설정된다.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또 사람들에게 이 자각을 주어 본래적인 지의 이데아로 시점(視點)을 전환하도록 노력하였으며, 그 내용은 플라톤의 《대화편(對話篇)》에 서술되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소크라테스(Socrates,BC 469?~BC 399)〉, 《두산백과》
  2. 소크라테스〉,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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