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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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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

류사오치(중국어:刘少奇liú shǎo qí)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이다.

개요[편집]

류사오치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지내고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반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으로 격렬한 비판을 받고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그의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은 점차 마오쩌둥의 사상과는 차이점이 있음이 드러났고, 1966년 이래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는 '반(反)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 '중국의 흐루쇼프'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196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정식으로 당에서 제명되고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그 후 덩샤오핑(鄧小平) 체제가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1980년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중전회(제5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 폐막성명을 통하여 류사오치의 사후복권(死後復權)이 선언되었다.[1]

생애[편집]

류사오치(1898년 11월 24일 ~ 1969년 11월 12일)는 후난성 출신이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국본토의 임시부수반을,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을 역임했다. 1959년 4월부터 1968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을 역임했다.

마오쩌둥의 고향 사오산과 가까운 청나라 후난성 창사 부 닝샹 구역(호남성 장사 영향)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청나라 허난성 카이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13년 창사의 주셩중학을 졸업하고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갔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22년 중국에 돌아와 노동운동에서 활약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하여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지하운동으로 전환하여 후베이성과 상하이의 당조직을 이끌었다. 1927년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932년 푸젠성 당비서에 임명되었다. 마오쩌둥이 주로 농촌에서 유격전을 통해 혁명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지하운동을 통한 혁명활동에 주력했다.

류사오치는 1943년 옌안(延安)으로 돌아와 중앙서기처 서기,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5년 중국공산당 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당의 조직을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고,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부주석 ·중앙서기처 서기가 되어 마오쩌둥(毛澤東) 다음가는 이론가로 꼽혔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의 부주석을 맡았고, 1956년부터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 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펼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 경제위기가 도래하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2천만 명 넘는 기아자,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의 확산을 우려한 마오쩌둥은 1959년 국가주석직을 사퇴한다. 류사오치는 그 뒤를 이어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표면상 최고권력자로 부상하였다. 류사오치는 특히 농촌에 큰 피해를 입힌 대약진운동의 충격을 극복하고자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 등과 손잡고 경제정책의 수정을 계획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그는 마오쩌둥과 수시로 마찰하였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권력 회복을 노리는 마오쩌둥과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적 인물)의 우두머리", "반혁명분자"로 비판을 받았고, 1966년에 당 부주석에서 물러났다. 1968년 중앙정부에서 실각한데다가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1968년 7월 18일에는 홍위병이 자택을 습격하여 두 시간 동안 폭행, 폭언을 당했다. 이후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난방도 되지 않은 가택에서 별다른 의료처치를 받지 못하여 지병이 악화되어 1969년 11월 12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화장되었고, 중국정부는 그의 사인을 "병사"라고 발표하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였으며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 또한 회복되었고 모든 당직도 복권되었다. 생전에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라이벌이면서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혁명을 방해한 정치인으로 규탄받다 사망하였으나, 마오쩌둥과 류를 평소에 모두 존경하던 덩샤오핑에 의하여 1981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무죄로 인정되어 류사오치의 사후복권(死後復權)이 전격 선언되었다. 1987년의 발행된 중국의 런민비 지폐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4인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상이 실렸다.

주자파[편집]

주자파(走資派)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파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문혁파(文革派)에 의하여 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실권파(實權派)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가 1967년부터 복권된 간부들 중 여전히 자본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자로 비판받은 자들을 말한다. 실권파는 공산당의 당기관, 중앙 ·지방의 정부기관 및 기업과 단체의 지도 ·관리부문에서 정치지도상 및 행정상의 권한을 장악하고, 그를 통하여 자본주의 노선으로 지도함으로써 공산당과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당내 최대의 실권파는 류사오치[劉少奇]라고 지목받아 류사오치 등 많은 간부들이 실각 ·숙청 당하였다. 이들 중에서 일부의 간부들이 복권되었는데, 복권된 간부들 가운데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덩샤오핑(鄧小平) 등 일파를 여전히 자본주의 노선의 부활을 지향하는 자들로 몰아 실각시켰으나, 1976년 10월 장칭(江靑) 등 사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다시 복권되었다.

대약진[편집]

대약진(大躍進)은 중국정부가 추진한 경제의 고도성장정책. 중국은 제2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하여 제기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주도하에 경제의 대약진과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설립하는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삼면홍기(三面紅旗)는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3가지 경제정책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의 발표에 의하면, 제2차 5개년 계획의 첫해인 58년의 농공업생산 총액은 전년비 48% 증가를 보였다고 하고, 그 후 계속 비약적인 신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성장지수는 과장된 보고에 의한 것이었으며 59년부터 계속 3년간 자연재해가 있었고, 구(舊)소련이 60년 이래로 경제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데다 중 ·소관계가 악화된 점 등의 원인으로 대약진정책은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60년부터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나서서 조정노선을 채택, 자류지(自留地)에 의한 농민의 무마 등으로 5∼6년 후까지는 1억 8000만 t 대를 겨우 유지하였고, 강철생산도 중지하였으며 대약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마오쩌둥도 일시 뒤로 물러났다. 이것이 그 후 문화대혁명에 의한 마오쩌둥의 보복(전면 무정부주의화 및 류사오치의 감금)으로 나타나 중국의 경제를 20년이나 후퇴시켰다.

4인방[편집]

4인방(四人幇)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 정치국 위원인 장칭(江靑)·야오원위안(姚文元) 등 4인의 소위 '반당집단(反黨集團)'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후 중국공산당 내부 지도층 간에 격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자,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중심으로 한 '문혁파(文革派)'들이 전면적으로 마오쩌둥의 권력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장칭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왕훙원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으로, 장춘차오를 국무원 총리로 임명하려고 준비하다가 기밀이 사전에 누설되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인 화궈펑(華國鋒)과 군부 지도자들인 예젠잉(葉劍英)·리셴녠(李先念)·천시롄(陳錫聯)·왕둥싱(汪東興) 등이 연합하여, 1976년 10월 이들 일당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를 통하여 이들을 반당집단으로 결정하였으며 그 죄상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죄상은 마오쩌둥의 지시로 자의를 수정하였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모함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를 장악하고 당과 군부 책임자를 자기파 인원으로 교체하여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권을 찬탈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뒤엎어 자본주의를 재생시키려 하였다는 것이다. 1980년 11월부터 베이징(北京)에서 이들에 대한 공개재판이 시작되어 1981년 1월 결심(結審)을 보았다. '4인방'의 체포와 재판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종결되었다고 선언하였고, 그 후 문혁파(文革派)들은 권력에서 숙청되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문화대혁명[편집]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이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수천만 명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이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생겨났다.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중노선을 주장하였으나,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각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무너진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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