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플라톤(Platon)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기도 하다.[1]
목차
개요[편집]
플라톤은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객관적 관념론(objective idealism)의 창시자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며, 대학의 원형인 고등 교육 기관 '아카데메이아'의 교육자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에 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그의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수많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가져오거나 발전시켰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하였다.[2]
생애[편집]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경 아테네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대 사료들은 그의 아버지 아리스톤(Ariston)을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Codros)의 자손으로,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ctione)를 그리스 7현인 가운데 하나인 솔론(Solon)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어린 시절 유명 문학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레슬링 선수 아리스톤에게 몸을 단련하는 법을 배웠다.
플라톤은 스무 살 무렵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사상에 매료된 후 플라톤은 문학보다는 철학에 매진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당시 그리스 정치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아테네 내부에서는 민주주의 세력과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적인 시각은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의 국가통치 이론을 내세웠으며 시민 가운데 통치자 계급을 따로 두어 정치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큰 상실감을 겪은 플라톤은 다른 제자들처럼 아테네를 떠났다. 그는 메가라(Megara),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종파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 시기의 독특한 경험은 그의 사상과 저작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마흔 살이 지나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Acadēmeia)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불린 이 학교는 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366년과 361년경 플라톤은 '이상국가'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직접 실행하기 위해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갔으나,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Dionysios II)는 플라톤의 교육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폭군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보수 세력들의 반발로 시라쿠사의 그리스인을 통합하는 일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시칠리아의 반역자 혐의를 벗고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온 플라톤은 80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보냈다.
그리스철학[편집]
그리스철학(Greek philosophy)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이다.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이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 ·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고 자기 삶을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완수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것이란 인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사물을 '수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것은 그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정신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라고 보고,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 ·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식에서의 탈출(황홀)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상고(上告)라는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
플라톤의 교육방법[편집]
플라톤은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가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플라톤학파[편집]
플라톤학파는 협의로는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의 학통을 계승하는 아카데메이아파(派)이다. 플라톤이 죽은 후에 학원을 계승한 스페우시포스와 크세노크라테스는 스승이 만년에 가르쳐준 수학적 사변과 결부된 형이상학설(이데아數의 說이라고 함)을 체계화하여 지엽적인 사변(思辨)으로 흘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수학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 것은 그들에 대해서이다. 폴레몬, 크라테스 등 BC 3세기 초까지의 사람들을 고(古)아카데메이아파라고 한다.
BC 270년에 학원을 계승한 아르케실라오스는 궁극적인 지혜는 문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애지(愛知:철학)는 애지자 간에 교환되는 진리의 대화탐구(對話探究)로써만 구현된다고 말한 플라톤학설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진리는 발견되지 않고 탐구될 뿐이다'라는 회의론을 제창하였다. 그 후 아카데메이아파는 회의론을 대표하여, 일정한 도그마(dogma)를 제창한 스토아파나 에피쿠로스파와 대립하였다. 이것을 신(新)아카데메이아파라 한다. BC 2세기에는 카르네아데스가 있다. BC 2세기 말에 피론과 안티오코스가 회의론을 버림으로써 아카데메이아파는 끝났다. 이 두 사람에게서 배운 키케로의 책을 통해서 그 회의주의는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광의로는 플라톤주의의 철학을 주창하는 사람들. 일정한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1∼2세기경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로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경향을 강조한 사상가들을 중기(中期) 플라톤학파라고 총칭한다. 《플루타크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 맥시무스 등이며,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여러 학파의 영향이 현저하여 절충파로 불렸고, 신플라톤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3세기에 플로티노스에 의하여 시작된 신플라톤학파도 광의로는 플라톤학파이다.
플라톤의 사상과 저작[편집]
플라톤의 저작 대부분은 대화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30여 편이 넘는 대화편들이 전해지는데 주요 저작들은 연대와 사상적 흐름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변론(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e)》, 《크리톤(Kriton)》,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고르기아스(Gorgias)》 등은 초창기 대화록들이다. 이 저작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립하는 면이 강하며 윤리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서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했다는 소크라테스의 죄목들이 왜 타당하지 않는지를 다루고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 부에 앞서는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톤》은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거부하는 소크라테스와 그를 설득하려는 제자 크리톤의 논쟁을 통해 법의 준수 문제를 다룬다. 도주는 법에 위배되고 법에 위배되는 것은 선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피스트와의 논쟁을 통해 덕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두 번째로 《메논(Menon)》, 《파이돈(Paidon)》, 《파이드로스(Phaidros)》, 《국가》 등은 여행 이후 플라톤이 독자적인 사상을 완성해 나가던 시기에 작성된 문서들이다. 《메논》은 덕과 앎의 관계를 논하고 인식의 본질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전생의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등 피타고라스학파와 연관성을 보인다.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동료들과 나눈 대화이다. 영혼불멸을 논의하는 작품으로 '이데아론'이 드러난다. 《파이드로스》에서는 영혼을 능동적인 것으로 육체를 수동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육체와 분리된 귀중한 영혼들은 이데아의 세계인 천상에 도달한다. 반면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는 인간의 앎은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국가》에는 본질과 그림자에 비유되는 이데아론과 그것이 반영된 정치철학이 담겨있다. 최선의 법이 적용되고 있는 이상 국가의 시민은 관리자(통치자), 군인(수호자), 서민(생업 종사자) 세 계급으로 나뉜다. 이상 국가의 법은 덕과 앎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관리자들은 앎을 통해 덕을 추구하는 사람, 즉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티마이오스(Timaios)》, 《폴리티코스(Politikos)》, 《법률》 등은 더 심오해진 노년기의 철학을 보여준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와 땅 위의 생명에 관한 자연철학적 논의가 전개된다. 인과법칙으로 자연을 설명하는 기존 철학과 달리 이데아와 그 반영이라는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폴리티코스》와 《법률》에서 그의 정치철학은 더욱 구체화되고 광범위해진다. 다양한 정치형태와 통치자들이 논의되고 있으며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교육, 기관, 국방, 국가윤리 등이 제시된다.
플라톤 사상에는 스승 소크라테스 사상뿐 아니라 고대 자연철학, 엘레아학파, 피타고라스학파, 소피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정된 존재, 생성과 다원성, 윤회와 정화, 구원, 영원성, 영혼 등 모든 것들이 플라톤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플라톤 사상은 기존 그리스 전통을 뛰어넘는 면모를 보인다. 그는 아테네 정치이론에 회의를 품었으며, 그리스 예술과 문학적 전통의 가치에 한계선을 그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 고대 인도 철학과 유사한 요소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데아론을 비롯한 플라톤의 철학은 중세 기독교 철학 및 근현대 사상체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시대 지배 논리인 세 위계 이론(성직자, 귀족, 제3신분), 세계를 신의 나라(이데아)와 인간의 세상(그림자)으로 나누는 신국론(神國論),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차이[편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의 두 거장이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으며, 각각의 사상은 철학적 전통과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사상을 통해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했으며, 그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이고 직관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를 중시하며, 경험과 관찰을 통해 지식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은 현실주의적이고 과학적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으로 유명하다. 이데아론은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질이 이데아라는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형태에 있다는 사상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현실 세계는 불완전하고 변하기 쉬운 모방에 불과하다.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완전하고 불변하는 진정한 실재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상적인 국가를 제시하며,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지혜와 덕을 갖춘 철학자가 이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국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그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며, 현실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사물이 형태와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형태는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며, 질료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관찰과 논리를 중시했다. 그는 자연과학, 생물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행복을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고, 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중용이라고 보았으며, 극단을 피하고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플라톤은 진리를 이데아의 세계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감각적인 경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이데아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진정한 지식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인식론은 이성적이고 직관적인 접근을 중시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경험을 중요한 지식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경험과 관찰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추론을 통해 일반적인 원리를 도출하고, 연역적 추론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접근은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가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플라톤은 존재를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로 이분화했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를 진정한 실재로 보고, 감각의 세계는 그 모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이상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의 존재를 중시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이데아에 있지 않고, 개별 사물 자체에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태와 질료의 결합을 통해 사물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존재론은 현실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으며, 물질적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과 덕을 중심으로 하지만 접근 방식은 다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와 개인의 조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는 정의와 덕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철학자가 이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윤리학은 공동체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덕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는 행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덕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강조하며, 극단을 피하고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윤리학은 개인적이고 현실주의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철학에서도 다른 입장을 보였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제시하며,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적인 국가가 정의와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이상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정치체제를 강조했다. 그는 정치체제를 군주제, 귀족제, 중우정치로 분류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원리를 적용하여 혼합정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정치 철학은 현실주의적이고 경험적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플라톤(Platon,Plato,BC 428/427~BC 348/347)〉, 《두산백과》
- ↑ 〈플라톤〉,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플라톤(Platon,Plato,BC 428/427~BC 348/347)〉, 《두산백과》
- 〈플라톤〉, 《위키백과》
- 〈플라톤〉, 《나무위키》
- 무화, 〈(정치/철학) 플라톤의 국가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네이버블로그》, 2024-04-09
- 철하기, 〈기독교와 고대철학(7) - 플라톤과 정치〉, 《네이버블로그》, 2024-11-25
- 글세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비교〉, 《네이버블로그》, 2024-05-28
- 에포케, 〈13. 플라톤 사상의 근원〉, 《네이버블로그》, 2023-04-23
- 보라보라, 〈플라톤〉, 《네이버블로그》, 2023-05-20
- 이진우 선생님, 〈플라톤의 행복론(통합사회 심화 주제)〉, 《네이버블로그》, 2024-12-19
- 소리울림, 〈서양철학사 강독회. 러셀 서양철학사_소크라테스, 스파르타의 영향, 플라톤 사상의 근원〉, 《네이버블로그》, 2023-03-21
- 별아해,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서양철학 사상의 핵심〉, 《네이버블로그》, 2024-10-17
같이 보기[편집]
- 그리스
- 아리스토텔레스
- 피치노
- 이데아
- 철인정치
- 소크라테스의 변명
- 소크라테스
- 에우독소스
- 크세노크라테스
- 그리스철학
- 페리클레스
- 피타고라스
- 멜리나 메르쿠리
- 레오니다스 1세
- 아르키메데스
- 데모크리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