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
오자서(중국어:伍子胥wǔ zǐ xū)는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개요[편집]
오자서는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로 초나라 사람이었으나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한 뒤 오나라를 섬겨 복수하였다. 오나라 왕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키웠으나,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모함을 받아 자결하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오자서전(伍子胥傳)〉에서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 당(唐)나라 때에는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고사성어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장쑤성 쑤저우에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려 세운 사당 우샹츠(伍相祠)가 남아 있다.[1]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오(呉)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오자서가 죽고 월나라를 경계하는 자가 없어지자 오는 파멸의 길로 나가게 된다. 오자서의 예언대로 와신상담한 구천의 월나라는 오를 쳐서 없앴다. 부차는 죽기 전 이제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오자서의 얼굴을 보겠느냐며 천으로 얼굴을 가린 뒤 자결했다. 사기 오자서 열전에 따르면 백비 역시 나라를 망친 간신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했다.
생애[편집]
오자서는 중국 춘추 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자서(子胥)는 자이며, 이름은 운(員)이다. 본래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와 형이 평왕(平王)의 노여움을 사 처형된 뒤 초나라를 떠났다. 그 뒤 오나라의 약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점점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사이가 벌어져 목숨을 잃었다.[2]
오자서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에서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사가 평왕의 아들인 태자 건(建)의 스승으로서 태부(太傅) 직책에 있을 때, 평왕이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태자를 죽이려 하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평왕을 부추겨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상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름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나 오자서는 복수를 기약하며 도주하였다.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吳)나라로 간 오자서는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BC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 오자서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다. 이에 평왕의 묘를 찾아 시신을 파낸 뒤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오자서는 그의 혹독한 행동을 나무라는 친구 신포서(申包胥)에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함락시킨 공으로 신(申) 땅에 봉해져 신서(申胥)라 불리게 되었다.
국세가 점점 번성한 오나라는 주변국들을 공격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한번은 월(越)나라를 공격하였다가 월왕 구천(句踐)의 반격에 밀려 패퇴하였으며 합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죽고 말았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와신(臥薪)의 생활을 하며 원한을 되새긴 끝에 월나라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구천은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자서는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뱃속의 질병과 같으므로 지금 멸망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는데,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점차 그를 멀리하였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앞날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는데, 그와 사이가 나쁜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이 일을 내세워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屬鏤)라는 명검을 내려 자결하도록 명하였다. 오자서는 한탄하며 문객(門客)에게 자신이 죽으면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눈알을 도려내서 동문(東門) 위에 걸어달라고 당부하고는 자결하였다. 부차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말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강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胥山)이라고 명명하였다. 9년 후,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패망하였으며,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오자서는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는 어느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열정적인 사람으로서 원대한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 열정 때문에 최후는 주군과 대립해 소외당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범려는 냉정하게 시류를 읽는 사람이나 월을 떠나, 최후는 제로 가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는 관도 대전의 때에 투항해 온 장합 등을 마중 나갈 때에 오자서의 최후를 인용해, 「오자서는 시중드는 군주를 오인한 일을 깨닫는 것이 늦었다. 너가 나에게 항복한 것은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반해 주를 시중들어 한신이 항우의 아래를 떠나 유방을 시중든 것과 같은 정당한 행동이다」라고 해 편장군으로 임명해, 도정후에 봉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건은 중상모략에 떨어져 오사에 이르렀다. 상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으나 오원은 달아나 오에 갔다.」라고 열전의 6권에 「오자서 열전」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부차[편집]
부차(夫差)는 춘추시대 말기의 오(吳)나라 왕(재위 BC 496∼BC 473)이다. 아버지가 월왕 구천에게 패해 죽자 월나라에 복수했다. 책사 오자서가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듣지 않아 결국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망했다. 부차는 합려(闔閭)의 아들이며 오나라의 군주. 아버지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그 유언을 받들어, 와신(臥薪)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마침내 BC 494년 월(越)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굴복시켰다. 책사(策士)였던 오자서(伍子胥)가 구천(勾踐)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구천을 콰이지산(會稽山)에서 근신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월나라의 대부였던 범려(范蠡)가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지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치는 미인계를 술책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월나라를 굴복시킨 부차는 북진(北進)정책에만 신경을 쓰며 제(齊)나라를 공격하는 동안에, 설욕에 여념이 없던 구천이 범려 등의 보좌로 공격해와 태자를 사로잡았다. 부차는 구천에게 화의(和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2~3차례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내가 죽어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우샹츠[편집]
우샹츠(伍相祠)는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있는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오(吳)나라를 섬겨 충신으로 만고에 이름을 남긴 오자서를 기려 후인들이 세운 사당이다. 쑤저우의 판먼징취[盤門景區]에 있으며, 현존하는 사당은 1988년 개축된 것이다. 사당은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으로 나뉜다. 동원에는 청당(廳堂)과 낭정(廊亭), 화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서원에는 정전인 사당이 3칸으로 지어져 있다. 사당 안에는 "기장산하(氣壯山河)"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고, 높이 약 4m에 이르는 오자서의 소상(塑像)이 세워져 있으며, 오자서와 춘추시대 오나라와 관련된 사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진정지곡[편집]
진정지곡(秦庭之哭)은 '진(秦)나라의 조정에서 곡을 하다'라는 뜻으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신포서(申包胥)와 오자서(伍子胥)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진정곡(秦庭哭) 또는 곡진정(哭秦庭), 진정지읍(秦庭之泣)이라고도 한다.
오자서는 초(楚)나라 평왕(平王)이 아버지와 형을 살해하자 초나라를 멸망시켜 복수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여서는 안 된다며, 만약 오자서가 초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자신이 반드시 나라를 부흥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오자서는 오(吳)나라의 합려(闔閭)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초나라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수도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고, 그의 아들 소왕(昭王)은 피신하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에서 시신을 파내어 채찍질을 300번 가하고 나서야 원한을 풀었다.
신포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소왕을 찾아가서 나라를 부흥시킬 계획을 상의하였으나 힘이 없었다. 신포서는 소왕의 외할아버지인 애공(哀公)이 다스리는 진(秦)나라로 가서 초나라가 망하면 진나라도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며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애공은 전쟁을 벌일 마음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 신포서는 진나라 궁정의 담벼락에 기대 앉아서는 7일 동안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곡을 하였다(立依於庭牆而哭, 日夜不絶聲, 勺飮不入口, 七日). 애공은 결국 신포서의 충정에 감동하여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左氏傳)》의 "정공(定公) 4년" 조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진정지곡은 신포서가 진나라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오자서(伍子胥,?~BC 484)〉, 《두산백과》
- ↑ 〈오자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오자서(伍子胥,?~BC 484)〉, 《두산백과》
- 〈오자서〉, 《위키백과》
- 〈오자서〉, 《나무위키》
- 늘 행복한 이, 〈만고의 영웅 오자서의 기구한 일생은 이렇게 끝난다 <동주 열국지 9. 섶에 누워 쓸개를 핥다>〉, 《네이버블로그》, 2024-10-31
- 책개미, 〈복수귀 오자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사기史記)〉, 《네이버블로그》, 2024-07-12
- 숨고르기, 〈'사이다' 복수에 열광하는 요즘, 오자서의 생애를 통해 복수의 윤리학을 모색한다〉, 《네이버블로그》, 2023-06-13
- 사건탐구 과거탐구, 〈오자서. 우여곡절 끝에 재상이 되어 복수에 성공했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물〉, 《네이버블로그》, 2023-03-25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