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미켈란젤로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이탈리아의 조각가·건축가. 르네상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1]

개요[편집]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피렌체, 로마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1550년대 이후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열두 점의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그의 만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2]

생애[편집]

미켈란젤로(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였고,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나쁜 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 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彫像)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과 《성모자상》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1534년에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磔刑)》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 대한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앓았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564년 89세를 일기로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르네상스 미술[편집]

르네상스 미술(Renaissance art)은 14세기 후반~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미술 경향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미술 경향을 말한다. 일찍이 정치 경제적 근대화를 통해 시민의식이 왕성했던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이후 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여러 도시로 파급되었고, 16세기 이후에는 알프스 북부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다. 이 시기 영향력을 넓혀가던 휴머니즘적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 가치와 모범들을 추구하였다. 통상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dome)을 착공한 1420년을 그 시작점으로 보며, 마니에리스모(manierism)로 옮겨가는 1525~30년경 쇠퇴한 것으로 본다.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확산되었고, 각 지역에서 특색 있는 미술 문화를 형성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자연 탐구에 의한 사실(寫實)과 고전에 대한 연구를 두 개의 큰 축으로 삼아 예술적, 사상적 전환을 극히 이지적(理知的)이고 논리적으로 추진해나갔다. 그중 회화, 조각, 건축 등 미술 분야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고전주의의 부활, 휴머니즘, 자연에 대한 재발견, 개인의 창조성에 대한 인식과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특징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이미 13세기 후반~14세기 초 치마부에, 카발리니 및 조각가 피사노와 캄비오 등의 활동에서 르네상스의 전조가 나타났다고 보며, 15세기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치오, 보티첼리 등을 통해 발전, 16세기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고 요약된다.

고전주의[편집]

고전주의(classicism,古典主義)는 조화 ·균정(均整) ·명석(明晳)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사조. 르네상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심취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이성을 존중하는 경향과 부합되어 17세기에 문학 분야, 특히 프랑스 희곡문학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발전(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 곧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다(J.드라이든, A.포프, G.E.레싱 등).

18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음악·회화·조각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통일성 ·이론성의 주장이 일어났으며,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오스트리아 고전파 음악, J.L.다비드, J.A.D.앵그르 등의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시대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예술을 갖가지 미(美)의 법칙으로 규제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였으므로, 19세기부터는 보다 자유롭고 정서적인 낭만주의가 대두되었다. 고전주의는 후에 생겨난 많은 예술사조의 한 정점을 이룬다.

미켈란젤로의 주요 업적[편집]

다윗은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조각 중 하나로, 1501년에서 1504년에 만들어졌다. 5m에 이르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상징적으로 이기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기술과 해부학적인 이해를 보여주며, 특히 비롯된 근육과 자세의 표현이 돋보인다. 피에타는 1498년에 마련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가 단 23세 때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첫 번째 마블 조각 작품 중 하나이다.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받아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우아하고 감동적인 조각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스틴 성소 천장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틴 성소 천장에 천장화를 진행한 것이다. 이 작품은 창조기, 아담과 하나님의 손, 신약성서 인물 등을 다양한 장면으로 표현한 것으로, 예술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원을 받는 자들의 신곡은 시스틴 성소 남쪽 벽에 그려진 작품으로, 1536년에서 1541년까지 진행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을 다룬 작품으로, 그의 독창적인 회화 기술과 인체 표현 능력이 돋보인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성당의 성제단을 디자인하고 건축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건축적인 업적 중 하나로, 기하학적인 형태와 규칙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며, 이탈리아르네센스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퀴리날레 캠프리오니는 로렌초 궁으로부터 의뢰받아 만든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을 위한 묘지로, 메디치 가문 가장의 무덤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기술이 훌륭하게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미켈란젤로는 노년 시기에 종교적으로 깊이 몸담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작업을 수행했다. 미켈란젤로의 종교적 신념은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으며, 종교적 표현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이 기간에 그가 창작한 작품 중 하나는 성 대니엘의 마지막 싸움을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생을 다한 지난날에도 예술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성 대니엘의 마지막 싸움을 다룬 것으로, 이 작품은 그의 노년 시기의 예술적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그의 예술 경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편집]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州) 피렌체에 있는 광장이다. 니콜로 다리 건너 아르노강(江) 오른쪽에 있다. 1871년 조성되었으며, 광장 중앙에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 복제품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피렌체의 전경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르노강과 그 위를 지나는 유서 깊은 베키오 다리,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미켈란젤로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