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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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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왕소군(중국어:王昭君wáng zhāo jūn)은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이다.

개요[편집]

왕소군은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졌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鴈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1]

왕소군(王昭君)은 B.C. 33년 한원제(漢元帝)가 한나라와 흉노(匈奴)의 화친을 위해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单于)에게 하사한 여성이다. 그녀보다 앞서 화친을 목적으로 외국에 보내진 14명의 여성은 모두 한나라 황실의 공주라는 신분이었고, 그녀들 가운데에는 화친 여성 문학의 시작과 화친 여성 서사의 완결성을 갖춘 여성도 존재했다. 그런데, 왕소군은 이들보다 신분도 낮고, 구체적 서사도 허약하지만, 화친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중국 여성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지게 된다. 왕소군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문학적 재서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미녀라는 통속적 가치 외에, 역사적·민족적 의의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생애[편집]

왕소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류약제 선우(復株絫若鞮單于)의 연지(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서시, 양귀비,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왕소군은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전한의 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여성을 연지로 달라고 해, 왕소군이 선택되어 그의 장남을 낳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류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 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 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호한야선우[편집]

호한야선우(呼韩邪单于)는 동흉노의 선우이다. 허려권거선우의 아들이며 질지골도후선우의 동생이다. 성명은 연제계후산(攣鞮稽侯狦). 한나라에 항복한 것이나 왕소군(王昭君)의 남편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36년, 질지골도후선우는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와 서역부교위(西域副校尉) 진탕(陳湯)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호한야선우는 기뻐하면서도 한나라를 두려워하여 기원전 33년 재차 입조하였다. 이때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바랬고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녕호연지(寧胡閼氏)로 하사했다.

호한야선우는 흉노가 분열하여 5명의 선우가 일어난 중의 하나로서 형인 질지선우와 싸우고 패한 뒤 몽골 본토로 돌아가 전한(前漢)과 화친 관계를 갖고 왕소군(王昭君)을 아내로 맞았다. 또한, 손자 중에 이름이 같은 남흉노의 초대 선우 호한야선우(재위 48∼53)가 있다. 그는 선우의 계승문제를 놓고 선우인 포노(蒲奴)와 대립, 마침내 후한(後漢)에 항복하여 그 때문에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가 영도하는 남흉노의 여러 부족은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살며 후한의 북변을 방비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것이 후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난의 원인이 되었다.

흉노[편집]

흉노(匈奴)는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북아시아 스텝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유라시아 스텝 동부에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살고 있었다. 기원전 209년 이후 묵돌 선우는 흉노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 제국을 세웠다. 유라시아 스텝을 이전에 지배했던 월지를 몰아내고 흉노는 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고,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삼았다. 흉노의 활동 영역은 시베리아, 내몽골, 신장, 간쑤성 등도 포함되었다. 흉노 지역의 동남부와 국경을 접한 중국의 왕조들과 흉노의 관계는 복잡했다. 흉노와 중국의 왕조는 평화롭게 지내기도 하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서로 복종시키기도 했다. 흉노는 한나라와의 오랜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였고, 흉노는 결국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리되었으며, 한나라는 흉노족을 강제로 한나라와의 국경 지역에 정착시켰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오호 중 하나였던 흉노는 장성 이남으로 내려와 전조나 하와 같은 여러 왕조를 세웠다.

흉노는 유목민족으로써, 경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을 영위하는 주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흉노는 때로는 중국을 침략·약탈하고 때로는 조공이나 세폐를 통해 평화적으로 물자를 확보하였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은 국력을 기울여 장성을 쌓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도 하였다. 중국 측 역사에 의하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중국이 전한 무제 때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흉노 부족의 일부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신하라고 자칭했었다고 한다. 전한의 원제는 궁녀 왕소군을 공주로 만들어 흉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비교적 장기간 국경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혼 동맹을 통해서 양국과 우호관계를 담보하기 위한 행위였다.[2]

왕소군과 흉노의 인연[편집]

중국 고대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은 모피를 댄 망토를 걸치고 말 탄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곤 한다. 소중히 여기는 비파를 품에 안은 그녀는 눈물을 꾹 참으며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다. 왕소군은 기원전 1세기 서한 황실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와 지성, 재능을 겸비해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했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왕소군은 특별한 사명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이라고 한다. 바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왕소군은 명문가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사현 비파 연주로 듣는 이를 사로잡았으며, 또한 선비의 사예(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에도 능했다. 한나라 황제 원제(元帝)가 전국에 명문가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칙령을 내리자 왕소군은 고향의 대표로 뽑혔다. 가족과 헤어져야 했지만 칙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관례에 따라 황제는 궁녀를 그린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선택했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화공들이 뇌물 없이는 제대로 된 초상화를 그려주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왕소군은 뇌물이라는 수단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빼어난 아름다움과 탁월한 재능을 지닌 왕소군이었지만 후궁으로 간택 받지 못했다. 이후 왕소군은 시녀로 남아 외롭게 보냈고, 황제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당시 중국 국경 너머 거친 초원에는 유목민인 흉노족이 살고 있었다. 흉노족은 한나라가 수립되기 직전 여러 부족들이 모여 연합체를 수립했다. 연합체로서 흉노족은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다. 흉노족은 한나라에 말과 가축을 주고 대신 중국 차, 증류 음료, 쌀, 그리고 비단을 가져가는 무역을 했다. 하지만 약탈과 습격도 일삼았다. 한나라 황제들은 군대를 보내 싸우기도 하고, 평화 사절을 보내 협상을 하는 등 흉노족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양국 관계는 늘 긴장 상태였다.

기원전 33년 흉노족의 수장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 수도를 방문해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상대적으로 원만했던 당시 양국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흉노 수장은 조공을 바쳤고 대신 황제로부터 후한 보답을 받았다. 하지만 호한야 선우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한나라 공주였다. 바로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흉노 수장은 세 번이나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금쪽같은 딸을 유목민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근심은 커져만 갔다. 그런데 문득 선대 황제들이 혼인에 의한 평화협정을 맺을 때 황실 친척의 딸이나 궁녀에게 '공주' 칭호를 내리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자신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궁녀를 선택한 결과가 왕소군이었다.

평가[편집]

한 제국이 지평선 너머 사라지자 왕소군은 비파를 꺼냈고 가슴 먹먹해지는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그녀의 아름다움과 노래에 사로잡혀 날갯짓을 하는 것조차 잊어버려 곧바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떨어진 기러기'를 뜻하는 낙안(落雁)이 왕소군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초원에 도착한 왕소군은 유목민의 삶에 적응했고 백성이 사랑하는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었다. 흉노족 지도자들을 설득해 평화를 유지하도록 촉구했다. 또 흉노족에게 한나라 법률, 관습, 문화를 가르쳤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생애 마지막까지 흉노족과 함께 했다. 이후 60년간 두 왕국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참으로 엄청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중국 고대 4대 미녀는 비범하게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탁월한 여성들이었다. 4대 미녀 중에 왕소군은 이타적인 희생정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왕소군의 업적은 한나라 최고 장수들의 업적에 비견할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왕소군(王昭君,?~?)〉, 《두산백과》
  2. 흉노〉,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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