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도·전라도에 퍼져 있었으며, 월지국(目支)[1]·백제(伯濟)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가 마한 세력을 병합, 흡수했다.
369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영토를 잃고 근초고왕대에 영토를 상당부분 잃었으며 530년경에 최종적으로 백제에 흡수된다. 마한은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소국들의 연맹체였다. 기원전 18년 이후의 군주의 이름, 시호는 기록이 실전되었다.
개요[편집]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북특별자치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특별자치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삼한시대 마한이, 진한과 변한을 모두 지배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역사[편집]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처럼 북방계 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3세기 전반 마한소국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와 연합해 한반도 서남부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돌방을 만드는 백제의 무덤과 달리 흙을 쌓아서 그 위에 돌방을 만들고 옹관묘를 안치하는 마한식 무덤이 출토되고 있는 점, 백제의 행정구역이 6세기 중엽에 이르러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뀌는 점, 6세기 즈음 백제의 양식과 다른 금동관이 발견된 점을 들어 마한의 잔여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2023년 11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유물을 공개했다.
문화와 언어[편집]
두막루의 문화는 부여의 문화와 동일했다. 주변의 물길과 실위가 유목, 수렵, 어로에 종사했던 것과 달리, 두막루 사람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오곡(五穀)을 기르고 집과 창고를 지었다. 《위서》(魏書) 물길전에 따르면, 물길(勿吉)은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들도 이를 두렵게 여긴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두막루는 농경 민족으로서 물길과 실위 등 유목 민족의 침략을 상당히 두려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두막루의 군장(君長)은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금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 등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을 사용했던 부여의 풍습과 일치한다. 두막루국에서 "대인(大人)은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부여의 풍속과 완전히 동일하다.
두막루의 문화는 대개 부여와 동일했으나 의복의 경우 일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두막루에는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선비족의 모용씨 세력이 쇠퇴하여 부여가 사실상 고구려의 세력권 안으로 귀속되면서, 부여가 고구려의 의복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두막루의 언어는 실위(失韋)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서》 실위전에 따르면,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두막루를 몽골족 계통의 민족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두막루의 언어가 초기에는 부여어와 동일했으나 후기에는 거란어가 많이 유입되어 혼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문화 사회적 특징[편집]
마한의 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성곽은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 청동기 유물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 옥을 좋아하고, 금, 은, 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 농업과 양잠업에 힘썼다.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마한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제정은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각각 따로 두어 이를 천군(天君)이라 일렀다. 그리고 마한 여러 나라의 특별한 지역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인데, 본래 이것은 단군설화에 보이는 신단수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서 만주 풍속의 신간(神竿)과도 같이 신역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하는 악기였던 것이다.
이 신역에서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 역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鄕巫 : 골무당 또는 단골무당)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이 밖에 마한에서는 연중행사로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주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수십 명이 같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가며 추었다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술래’와 같은 노래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에서는 이러한 제삿노래를 10월에도 행하였다 하는데, 이는 상고 농업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것으로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이고 10월에는 풍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후하게 지냈다.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을 쓰고 곽(槨)은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도 모두 장사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축을 순장(殉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습은 뒷날 백제의 문화 기초가 되었다.
마한 54개국[편집]
마한의 인구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며, 총 10여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추산한 총인구수는 약 50만 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편집]
- 〈마한〉,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