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ies,地理上─發見)은 지리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색항해(探索航海)를 시도한 것은 고대로부터 적지 않았지만, 지리상의 발견시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처럼 활발하고 대규모적인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즉,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의 아프리카 항로 개척을 시작으로 하여 15세기 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거쳐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 각국민의 탐험 및 항해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대의 발견의 특색은 당시 유럽이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대규모의 항해 및 발견을 통하여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비서구지역에 대한 정치지배 ·교역통상 등의 체계가 이루어져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목차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개척[편집]
1415년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가 중심이 되어 서아프리카 연안의 탐험을 위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항해 동기는 서아프리카의 모로코 상인이 행한 소금·황금·상아(象牙)·노예 등의 무역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내지는 아시아의 어디엔가 있다고 믿은 전설적인 그리스도교왕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발견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어 이슬람교도의 우세를 꺾으려 한 정치·종교적인 의도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엔히크가 파견한 최초의 탐험선은 15년 카나리아 제도(諸島)에까지 항해하여, 이후 10여 년 간은 마데이라·포르토산토·아조레스 등 대서양제도 및 그 근해의 답사가 진행되었지만, 1434년에 비로소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串)을 회항(回航)하였고, 그 이후 세네갈강·제바강까지 남하하였다. 엔히크 왕자가 죽기까지는(1460) 코나크리 부근까지의 아프리카 서해안이 밝혀졌다.
1469년 포르투갈인의 항해가 다시 시작되어 상아해안·황금해안 등에 탐험선이 진출하였다. 1482년에 장래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된 에루미나에 성채(城砦)가 구축되고, 같은 해 콩고·앙골라 지방에 발견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어 1487년 말부터 다음해 초까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대륙 남단의 희망봉(希望峰)을 넘어 그레이트피시강까지 동진하여 인도양에 이르는 항로를 열었다.
디아스의 업적을 계승한 것이 바스코 다 가마로서, 그는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베르데곶 제도(諸島)를 경유하여 11월 초 희망봉 근처의 센트헬레나만에 도착한 뒤 동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를 경유하여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의 캘리컷에 입항하였다. 인도항로 발견을 기뻐한 포르투갈은 대규모 선대(船隊)를 파견하여 힘으로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의 세력을 제압하고, 1508년 2월 디우 앞바다에서 이슬람의 연합함대를 격멸하였으며, 2년 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요충인 말라카 공략에 성공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편집]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직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4회에 걸쳐 행해졌지만, 1492년의 제1회 항해에서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섬을 발견한 데 이어 쿠바 ·히스파니올라 ·소앤틸리스제도 ·트리니다드섬 ·베네수엘라 ·중앙아메리카 해안 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콜럼버스는 이들 지역이 독립된 대륙 및 그에 부속된 섬들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인디아스로 확신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생각한 인디아스란 현재의 인도보다 훨씬 넓은 지리적 관념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관념을 수정하여 아메리카가 신대륙이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이다.
세계 일주 항해[편집]
아메리카대륙 발견 후에도 스페인인은 대륙 그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히스파니올라섬을 근거지로 하여 동양의 바다로 빠져나가는 해협을 찾기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멕시코만(灣)·카리브해 등에 대한 연안항해가 시도되었으나, 해협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점차 남아메리카 남해안에 대한 항해가 계속되어 1515년에는 솔리스가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그 당시 포르투갈인 페르디난드 마젤란(마갈랴잉시)은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에 해협이 있을 것을 확신하여, 1519년 9월 20일 스페인를 떠나 남아메리카의 동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1520년 10월 21일 드디어 해협을 발견하였다. 11월 28일 해협을 통과한 마젤란 선대(船隊)는 태평양을 천신만고 끝에 횡단하여 1521년 3월 16일 필리핀제도의 사마르섬에 도착하였다.
그 직후인 4월 26일 마크탄섬에서 원주민과의 교전 중에 마젤란은 전사하였으나, 부하들은 2척의 배로 보르네오를 경유하여 향료제도(香料諸島:몰루카 제도)에 이르렀으며, 그 중 1척인 빅토리아호는 서진(西進)을 계속하여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6일 산루카르항(港)에 귀항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를 완수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로의 진출[편집]
아메리카 대륙 내부에 대한 관심은, 콜럼버스의 발견 후 10여 년 동안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파나마 지방을 탐험한 발보아가 남아메리카 대륙 내부에 황금국(黃金國)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513년 파나마지협(地峽)을 횡단하여 태평양 연안에 도달한 결과, 선단(船團)을 만들어 남진할 계획을 세웠다. 발보아의 이러한 의도는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총독과 대립함으로써 반역죄로 1519년에 처형되어 좌절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우연한 기회에 쿠바섬에 식민하였던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고 마야의 높은 문화권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 중부 아메리카 내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518년 후안 데 그리할바의 항해로 멕시코 중앙고원에 있던 아스텍왕국이 알려져, 쿠바 총독은 코르테스를 지휘자로 하는 수백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코르테스는 1519년 11월 아스텍왕국의 수도에 들어가 통치자 몬테수마 2세를 포로로 했지만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아 일시 패퇴하고, 1521년 다시 아스텍족을 공격하여 동년 8월 13일 완전 정복했다. 그 뒤 코르테스는 캘리포니아 방면과 과테말라 등에도 탐험을 하였다.
파나마 지방에서는 발보아의 유지(遺志)를 이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24년 이후 남아메리카의 태평양안을 항해하여 어려운 탐험을 계속하다가 1528년에 페루의 잉카제국을 발견하였다. 그는 1531년 18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정복에 나서 다음해 11월 15일 안데스고원의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잉카 황제를 포로로 하여 안데스 대제국의 실권을 잡았다. 피사로는 다음해 11월 15일에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였으며, 부하들을 칠레 ·에콰도르 방면에 파견하여 황금을 찾게 하였다.
피사로, 코르테스 이후의 아메리카 대륙 내부의 탐험은, 그들의 경이적인 발견에 자극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케사다의 치프차 왕국(현 콜롬비아) 발견(1537), 코르나도의 미국 남서부 탐험(1540∼42), 오렐랴나의 아마존강 항하(航下:1541∼42), 데 소도의 미시시피강 발견(1539∼42) 등이었다.
아시아와 태평양[편집]
인도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이 1511년 말라카를 공략한 직후 포르투갈 사람 안토니오 데 아부레우의 선대(船隊)가 향료제도로 향하였다. 또 그가 귀착(歸着)한 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에도 선대가 파견되었다. 그의 선대 중에서 프란시스코 세란은 암보이나섬을 거쳐 향료제도 가운데 테르나테섬에 도착하고, 1520년에는 포르투갈군의 성채가 이 섬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1521년에는 마젤란 선대가 향료제도에 내항하고, 1526년에는 스페인도 티도레섬에 요새를 축조하여 스페인 ·포르투갈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향료제도의 포르투갈 귀속이 결정되자, 스페인는 멕시코 경유로 필리핀제도의 경영에만 주력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아스텍왕국을 정복한 뒤 멕시코로부터는 여러 차례 필리핀 방면으로 선대가 파견되었으나,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1564년에 행하여진 레가스피와 우르다네타의 항해이다. 이들은 스페인 식민의 기초를 이루고 동시에 비로소 대권(大圈) 항로에 따라 필리핀에서 아메리카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여, 뒤에 마닐라 항로를 여는 선구가 되었다.
스페인이 필리핀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에, 포르투갈은 동아시아 무역체계 확립에 힘쓰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550년대로부터 마카오에 동아시아 무역의 근거지를 정하였다.
16세기 후반 스페인는 태평양의 항해 ·발견을 계속했지만, 1567년 페루를 출범하여 솔로몬제도에 이른 멘다냐, 사르미엔트의 항해, 1595년 멘다냐, 키로스의 남태평양 항해 등의 지리학상의 의미가 크다. 키로스는 1605년에도 태평양을 항해하여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발견하고, 그 부하인 바에스 데 토레스는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여 뉴기니가 섬임을 확인하고 마닐라까지 항해하였다.
북방항로에 대한 탐험[편집]
영국 ·프랑스 등, 뒤늦게 대항해에 참가한 나라들은 이미 스페인 ·포르투갈의 세력이 확립된 지역에 파고들든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양국은 카리브해 또는 그 밖의 신대륙 여러 지방에 사략선(私掠船)을 보냈고, 또 영국은 F.드레이크 등을 스페인의 내해(內海)로 간주되던 태평양에 보내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국은 북방항로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선 스칸디나비아를 북동으로 돌아 북극해에 들어가 동진하는 북동항로의 탐색을 런던의 모험적인 상인과 세바스티안 카보토가 수행하였다. 최초의 시도는 1553년 윌로비의 항해로서 노바야젬랴섬이 발견되었다.
그 후에도 찬셀러 ·페트 ·자크만 등의 항해가 계속되었고, 네덜란드도 뒤따랐다. 아메리카 대륙 북부에 대해서는 1534∼35년에 프랑스의 카르티에가 탐색 항해를 하였으며, 76년 후로빗샤의 항해를 시작으로 북서항로 탐색이 진전되면서 그린란드 ·뉴펀들랜드 ·허드슨만 ·배핀만 등의 지형이 밝혀졌다.
시베리아에 대한 진출[편집]
서유럽 여러 나라의 세계 각지로 향한 발전에 자극되어, 이반 4세 때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주력하고 있던 러시아도 16세기 후반부터 동으로 눈을 돌려 시베리아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1581년 카자크의 수장 에르마크가 우랄 산맥을 넘어, 이르티시 하반(河畔)에서 시비르 한국군을 격파하고, 17세기에 들어서자 러시아의 동진은 갑자기 활기를 띠어 1637년에 야쿠츠크를 건설하고, 1643년에 바이칼호(湖)를 발견하였으며, 1649년에는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헤이룽강) 지역 등을 탐험하였다. 1725∼30년 표트르 1세의 명령에 따라 베링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대륙이 붙어 연속되는가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하여 탐험하였다.
참고자료[편집]
- 〈지리상의 발견〉, 《두피디아》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