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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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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東國通鑑)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아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사서(史書)이다.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는 자료 부족으로 외기(外紀)로 따로 분류하여 책머리에 다루었다.

6권 28책으로 이루어진 활자본(活字本)이다.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이 책의 편찬은 원래 세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조는 우리나라의 기존 사서(史書)가 탈락이 많아 자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사의 체계가 서있지 못하고, 편년체(編年體) 통사(通史)가 없기 때문에 상고 이래의 통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목적으로 중국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준하는 사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1458년(세조 4)에 세조의 명으로 편찬사업이 시작되었으나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이듬해 9월 세조의 죽음으로 완전히 중지되었다. 그후 성종대에 들어와 1483년(성종 14) 10월 서거정의 발의로 다시 시작되어 1484년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찬자들의 사론(史論)이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일단 완성된 《동국통감》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그 이듬해인 1485년 56권으로 다시 신편하였다. 당시 수사관(修史官)은 서거정 등 10명이다.

조선 전기 대표적 관찬사서(官撰史書)의 하나로 꼽히며, 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편집]

새로 완성된 《동국통감》은 편년체 사서이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는 책머리에 외기(外紀)로 다루었고, 삼국의 건국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말까지를 고려기로 구분하여 서술했다.

이 책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다. 그중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써놓은 것이다. 찬자들이 쓴 204편의 사론 중 절반이 넘는 118편이 최부(崔溥)가 쓴 것이다. 사론의 대부분은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된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강상윤리(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사람을 칭송하였으며, 군신·부자·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지절(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특징[편집]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체계적인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며,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국 중 어느 한 나라, 즉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우지는 않았고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연대 표기에 있어서도 《동국사략》의 서술인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삼국 당시의 제도대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삼국의 연기는 연호로써 표기하지 않았고 중국과 삼국의 연기를 아울러 썼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하였다.

이 책은 정치적 차원에서 아직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함으로써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반영되었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세조와 그 훈신(勳臣)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았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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