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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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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동예(東濊, 기원전 82년 ~ 5세기, 6세기경)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동옥저와 자리잡았던 초기 부족 국가의 하나이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른다.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강원도 강릉(명주)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이르렀고 영서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하였는데, 서쪽의 마한·백제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5세기에는 광개토대왕에 병합되었다. 6세기에 일부 영역이 신라의 진흥왕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신라의 하슬라주(何瑟羅州)로 편입되었다. 진흥왕은 옛 동예 영토의 위쪽 지방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움으로써 신라의 영토임을 확실시하였다.

역사[편집]

기원전 82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오늘날의 함경남도 남부 원산 부근에서 강원도 강릉시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던 예맥계 부족사회 집단이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에 접했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전한에 의해 세워진 한사군 중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과 합쳐졌고(BC 82), 현도군이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BC 75)한 뒤 이 중 영동 7현을 낙랑군 동부도위가 담당하게 되었으나, 훗날 후한 광무제 건무 6년 동부도위가 폐지(AD 30)된 뒤 영동 7현이 독립하면서 부조현은 옥저로, 나머지 6현은 동예로 귀속되었다. 한사군에 의한 점령 시절 통치제도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남쪽의 실직국 등 주변국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그럭저럭 지냈다. 불내예국, 화려국 등이 있었다. 후술하는 불내예국이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동예계 국가가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함경남도 안변군 지역의 불내예국(不耐穢國)이다. 245년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동예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불내예후(不耐濊侯)는 위나라가 침입하자 투항하였고, 247년에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쳐 불내예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통치력이 미약하였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대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 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동예의 영역이 울진, 영덕, 포항 등에 미쳤던 만큼 일부는 신라에도 병합되었다.

멸망[편집]

6세기 이후, 동예의 옛 땅은 확실히 신라의 영토가 되었음이 문헌과 금석문, 발굴을 통해 입증되었다. 현재 멸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몇가지 가설이 제시되어 있다.

신라의 정복[편집]

신라가 전성기일 때 함경도 일대 동해안까지 진출함으로써 신라에 정복되었다는 설이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북진으로 신라에 완전 병합되어 하슬라주가 된 사실과, 강원도 위쪽 지방인 함경남도에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된 사실로 볼 때, 가장 유력한 설로 평가된다.

자연적 멸망[편집]

동예의 정치형태는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군장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왕권이 한곳으로 모이지 못했다. 따라서 내부적인 분열, 반란 등에 의해 스스로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기타[편집]

고구려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지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병합하자 동예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는 가설이다. 다만 동예가 고구려의 정식 영토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속국의 형태로 예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예의 직접적인 멸망에 대해 학계에서 인정받는 가설은 아니다. 또한 해외 유목민 또는 북방민족들의 이주로 인해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위치[편집]

예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니 본시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위나라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나라 안에 옛 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맥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삼국지 부여전 등)에서 부여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라고 기술하여, 동예의 위치를 지금의 강릉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는가’라고 기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라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강릉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그 수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28만 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학회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두 사서의 예를 별개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정치·문화[편집]

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한편 책화(責禍)라는 씨족 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책화란 다른 마을을 침범할 경우에는 재물과 가축으로서 그를 보상한다는 제도이다. 또, 아래 족외혼에도 역시 씨족사회의 유습이 드러난다. 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특산물[편집]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9]
  •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풍습[편집]

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족외혼),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별점).

참고자료[편집]

  • 동예〉, 《위키백과》
  • 동예〉, 《나무위키》
  • 동예〉, 《두피디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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