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
무굴제국(페르시아어: امپراتوری مغول 샤하네 모굴,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무갈 바드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330년 동안 존속했던 몽골-튀르크계 무슬림 왕조이며,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무굴제국은 1526년 티무르왕조의 일원이었던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본거지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전투를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술탄국의 로디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강력하게 저항하던 아프간계 세력들을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피신했다. 그 사이 북인도에서는 후마윤을 물리친 셰르 샤 수리가 수르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왕조는 겨우 16~18년 만을 존속하다가 사파비제국의 지원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 데칸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제국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지즈야)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4대 황제 자한기르와 5대 황제 샤 자한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고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또한 아우랑제브가 전개하는 정복 사업은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세금 액수의 증가로 이어져 농민들과 소영주들의 불만을 증가시켰다. 때문에 아우랑제브 생전부터 제국에 반발하는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브 사후, 반란 세력 중 가장 강대했던 마라타제국이 데칸고원 일대에서 발흥했고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인도 중북부 대부분을 휩쓸었다. 한편 북인도의 라지푸트족과 시크교도들은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무굴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18세기 초부터 무굴제국은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페르시아의나디르 샤와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제국의 침략을 받으며 더욱 약화된 무굴제국은, 18세기 말에는 델리 근교만을 통치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한편 무굴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진출이 시작되었는데, 다른 열강들을 꺾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757년 플라시전투에서 무굴-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19세기 무렵이 되면 인도반도 대부분의 토후국과 왕국들이 영국에게 복속되었다. 무굴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전 인도의 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직접 통치를 선언했고, 마지막 무굴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킨 후 미얀마로 유배시켰다. 이로써 무굴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무굴제국은 군사적인 정복과 전쟁을 통해 탄생하고 유지되었지만 피지배층이었던 토착 인도인들과 소수민족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행정 제도와 다양한 통치 수단 등을 통해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주고 여러 관직들에 등용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표준화된 통치를 이끌었다. 무굴제국 정책들의 기반은 3대 황제 악바르가 제정한 농업 세금이었는데, 이는 농민들이 생산하는 양의 절반을 훨씬 넘는 금액이 국가가 주도하는 신뢰 가능한 은화로 지불된 것이었다.
정치학자 J.C. 샤르만은 무굴제국을 인구(Population), 부(Wealth), 군사력(Military) 등의 측면에서 동시대의 유럽 국가들을 왜소하게 만든 아시아의 강대국이라고 설명한다. 17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무굴제국에 의해 유지된 평화는 인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한 요인이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인도양에서 유럽인들의 입지가 급성장하고, 인도산 원자재 및 제품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무굴제국은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무굴제국의 지배층들은 회화, 문학, 직물업, 건축 등의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계속했고, 그 결과 무굴제국의 정복과 함께 유입된 티무르 제국의 튀르크-페르시아 문화와 인도에서 발전하던 힌두 문화의 혼합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훌륭한 예술품과 건축물들이 탄생했다. 특히 무굴제국 4대 황제인 샤 자한 시기에 무굴제국의 문화는 절정에 달했다. 무굴제국 시대에 지어지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그라 요새, 파테푸르 시크리, 붉은 요새, 후마윤의 무덤, 라호르 요새, 샬라마 정원, 그리고 "인도 이슬람 예술의 보석이자 세계 유산들 가운데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걸작 중 하나"인 타지마할이 있다.
목차
국호[편집]
무굴제국의 공식 국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악바르나마(Akbarnama)』에도 기록되어 있는 힌두스탄(페르시아어: هِندوستان, 영어: Hindustan)이다. 또한 아우랑제브 시기의 비문과 무굴 행정 기록들을 보면 '힌두의 영역(Wilāyat-i-Hindustān 윌라야트-이 힌두스탄)', '힌두의 나라(Bilād-i-Hind 빌라드-이 힌드)', 또는 '힌두의 술탄국(Salṭanat(i) al-Hindīyyah 살타나트 알 힌디야)'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 청나라의 연대기들 또한 무굴제국을 '힌두스탄(Héndūsītǎn)'이라고 기록했다.
그들 스스로는 구르칸 왕조(영어: Gurkani 구르카니[*], 페르시아어: گورکانیان Gūrkāniyān)로 불렀는데, 이는 티무르왕조의 지배자들이 칭기즈칸 일족과의 결혼을 통해 ‘구르칸’(부마) 칭호를 사용한데서 유래했다. 실제로 당대의 타국인들은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을 ‘차가타이인’이라 불렀다. 또한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표장은 차가타이 울루스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실제 무굴제국의 국가 공식 명칭이 '티무르 왕조(al-Timurriya 알 티무리야)', 혹은 '구르칸 왕조(Gurkhani 구르카니)' 내지는 '힌두스탄(Hindustān)'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양에 처음 알려질 때 '무굴'로 알려진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인도 현지인들이 일반적으로 지배층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에는 매우 보편적인 인식이었는데, 17세기 초 무굴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 최초의 공식 사신은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이 '무굴인'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였으며, 반세기 후 인도를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무굴황제들이 스스로 칭기스 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무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무굴제국 스스로도 지배계층을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칭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유목제국이나, 혹은 유목민들에게서 기원한 정복왕조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칭기스 칸의 계승을 자긍심으로 여겼다.
스티븐 데일은 바부르의 왕조가 티무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양자 모두를 계승했으며, 스스로도 그런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무굴제국의 지배 왕가를 지칭할 때 티무르-무굴 왕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바부르의 왕조가 인도로 들어온 티무르 왕조라하여, 이를 인도-티무르 왕조라 일컫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스티븐 데일은 이 명칭이 티무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사이의 연관성을 표시해주지 못 하기 때문에 티무르-무굴 왕조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역사[편집]
바부르 (1526~1530)[편집]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본래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투르크-몽골 정복자 티무르의 5대 후손으로, 1483년 2월 14일 우즈베키스탄 시르다리야 강 상류에 위치한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그는 몽골에서 기원했지만 언어적으로는 튀르크화하고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화했던 바를라스 부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가 태어날 무렵, 티무르제국은 여러 왕족들로 인해 분열된 채로 북방의 우즈베크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바부르는 1494년~1513년 사이 본거지인 페르가나를 굳건히 하고, 제국의 옛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조상인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힘썼다. 그러나 1491년과 1503년에 두 번씩이나 사마르칸트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우즈베크인에게 밀려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당대 우즈베크인들의 칸인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1505년에 사마르칸트를, 2년 뒤에는 티무르왕조 최후의 보루였던 발흐와 헤라트까지 점령하면서 티무르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고토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쫒겨난 바부르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1504년부터 인도 서북부를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해 바부르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고, 이곳을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로 하였다. 이후 무함마드 샤이바니를 물리친 이스마일 1세의 지원을 받아 잠시 중앙아시아 일대를 수복했지만, 우즈베크인들의 반격에 재차 잃어버린 뒤로부터는 다시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려는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에 1513년부터 바부르는 풍요롭고 부유한 남쪽의 인도 아대륙으로 관심을 돌렸다. 바부르는 1525년부터 본격적인 인도 공격에 나섰다. 당시 인도에서는 아프간 출신인 로디 왕조의 술탄이 다스리고 있었다. 바부르는 이듬해인 1526년 4월, 로디 왕조(1451~1526)의 이브라힘 로디 술탄을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 전투는 인도 역사상 가장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전투 중 하나로, 이후 2세기 동안 북인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바부르는 델리에서 아그라(Agra)로 밀고 들어가 스스로 '인도의 파디샤'임을 선언함으로써 무굴제국을 건국하였고, 이후 벌어진 칸와 전투에서는 라지푸트인들에게 대승을 거두어 북인도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제국의 수도는 카불에서 아그라로 이전되었다.
한편 바부르는 페르시아 양식의 정원을 여럿 만들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위치한 '바부르의 정원(Bagh e-Babur)'인데, 이곳은 바부르가 묻힌 영묘이기도 하다.
후마윤 (1530~1556)[편집]
1530년 2월,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이 제 2대 황제로 즉위했는데, 그는 아직 미숙한 군주였으며 무굴제국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그의 이복형제들은 제국 곳곳을 봉토로 수여받고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내부가 혼란스러웠고, 대외적으로는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술탄과 비하르의 세르 샤 수리가 무굴제국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북인도에서의 무굴 패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1540년 세르 샤에게 패배한 후마윤은 북인도를 떠나 페르시아의 사파비제국으로 망명했고, 무굴제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이후 세르 샤 수리는 북인도에 수르제국을 건국한다)
타르사막을 건너 사파비 왕조 치하의 헤라트에 도착한 후마윤은, 당대 동부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그곳에서 대단히 번성한 페르시아 문화를 접하고 영감을 받았다. 후마윤의 페르시아 망명으로 사파비 제국과 무굴제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체결되었고, 무굴제국에서의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이 한 층 더 증대되었다. 1555년, 후마윤은 칸다하르 지방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사파비 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수르왕조를 공격했다. 당시 수르 왕조는 세르 샤 수리 사후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같은해 6월, 후마윤은 시르힌드에서 수르 왕조의 군대를 대파하고 델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악바르 대제 (1556~1605)[편집]
후마윤이 대단히 어이없게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악바르가 무굴제국의 제 3대 황제로 즉위했다. 무굴제국은 그의 치세에 크게 발전하였는데, 우선 악바르는 주변 지역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 옛 수르왕조의 잔당을 소탕함으로써 북인도에서의 무굴제국의 세력을 확고히 하였고, 라자스탄 지방의 소국들을 병합하거나 군사 원정을 통해 항복시켰다. 또한 악바르는 1573년 구자라트, 1576년 벵골을 점령하고,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일대를 침략하는 우즈베크인들을 격퇴하여 북부 국경선을 안정화시켰다. 이후로도 정복 사업은 계속되어, 1590년대에 이르면 악바르는 남으로는 고다비리강 유역에서부터 북으로는 카슈미르 일대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여 무굴제국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한편 악바르 시기에는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종교 관용책이 이루어져 내부가 매우 안정되었다. 행정 면에서 악바르는 종파를 가리지 않았고, 피지배층들 대다수를 차지하던 힌두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브라만 계급층과 타협했으며, 라지푸트 족의 왕비를 맞이하는 등 유화 정책을 펼쳤다. 경제 면에서 악바르는 수르제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행정부의 토지 수입을 개혁했고, 농업의 개선과 경작지 확장 등을 통해 세수를 크게 늘렸다.
종교적으로는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지즈야)등을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능력에 따라 관료를 임명함으로써 지방의 통치나 토지 측량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힌두교도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외에도 힌두교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신이 몸소 실천해보거나, 시크교도들과 토론하면서 견해를 주고받은 것, '딘-이-일라히(Din-i-Ilahi)'라는 정책을 통해 모든 종교를 일신론 유일사상으로 묶어 장려하고 타 종교들 간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한 것 등이 있다.
악바르 시대에 티무르제국의 튀르크-페르시아 및 이슬람문화와 토착 인도 문화가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탄생했다. 델리, 아그라, 파테푸르 시크리에 있는 궁정에서는 수많은 시인들과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와 장인들이 황제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고, 당대 인도의 예술·문화·학문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자한기르 (1605~1627)[편집]
이러한 악바르의 개혁과 정복활동은 4대 황제 자한기르(Jahangir)에 계승되었다. 그의 치세는 무굴제국의 점진적인 팽창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문화적인 성취의 발전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다만 그는 종교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처럼 극도로 관용적인 정책을 취한 것은 아니었고, 시크교가 자신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하자 당대 시크교 지도자인 아르준 데브(Arjan Dev)를 처형하는 등 이슬람을 제외한 타 종교에 대해 비교적 덜 관대했다. 그럼에도 종교적 관용책은 계속 실시되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자한기르 치하에서 여전히 무굴제국은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누렸고, 데칸 지역으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으며, 사파비제국과 오스만제국 및 다른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대외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영국 동인도회사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이 인도에 진출하기도 했다.
샤 자한 (1627~1657/58)[편집]
제5대 황제인 샤 자한 1세 또한 선조들의 관용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하면서 무굴제국의 영토를 넓혔다. 당시 무굴제국의 주요 대외 관심사는 데칸 지역에 있던 데칸 술탄국들이었다. 1632년에 아마드나가르 술탄국의 다울라타바드 요새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1635년에는 골콘다 술탄국, 1636년에는 비자푸르 술탄국을 제국의 영향권 아래 넣었다.
군사적인 업적 외에도, 내치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계몽인이었던 샤 자한은 사회의 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가 발전하자 자연스럽게 제국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치세에는 경제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융성했고 사회 분위기 또한 극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당대의 무굴제국은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 대국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는 왕비였던 뭄타즈 마할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샤 자한은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타지마할을 건설하도록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지었다. 타지마할 건축은 심각한 국고 낭비를 유발시켰으며, 곧 국력도 쇠퇴하게 되어서 샤 자한은 민심을 잃었다.
그가 와병하던 사이에, 그의 아들이었던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그 와중에 샤 자한이 총애하던 장남 다라 시코는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후 목이 잘렸다. 샤 자한은 1658년 폐위된 뒤 아그라 요새로 유배되었다가 8년만에 죽었다.
아우랑제브 (1658~1707)[편집]
샤 자한이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자, 그의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고 무굴제국의 6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강경한 이슬람주의자였던 동시에 꽤나 야심만만하고 극도로 호전적인 인물이었으므로, 즉위 직후부터 곧바로 정복 사업을 전개했다.
1663년에는 라다크 지방을 방문해 제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고 봉신 왕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1664년에는 샤이스타 칸 수베다르를 벵골의 나와브(총독)로 임명했는데, 수베다르 나와브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쫒아내고 아라칸의 해적들을 격파했으며, 1666년에는 주요 항구였던 치타공을 정복하는 등 무굴제국의 상행로를 훌륭히 보호했다.
1685년에는 아들 무함마드 아잠 샤(훗날 바하두르 샤 1세)에게 5만 명의 군대를 맡겨 비자푸르의 시칸다르 아딜 샤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비자푸르 요새의 막강한 대포 화력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여 8일 만에 비자푸르를 함락시켰다.
유일하게 남은 데칸 술탄국인 골콘다의 술탄 아불 하산 쿠트브 샤는 항복을 거부했다. 골콘다 요새는 높이 약 122m에 달하는 화강암 절벽 위에, 도시를 둘러싸는 12km에 달하는 성벽이 건설되어 있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비록 베테랑 지휘관과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아우랑제브는 8개월 간의 포위 끝에 기발한 전술로 성을 함락시켰다. 따라서 더 이상 남인도에서 무굴제국에게 대적할 세력은 마이소르 왕국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쇠퇴와 멸망 (1707~1858)[편집]
무굴제국은 정복활동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고, 정복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엄청난 유지비를 감당해야 했으므로, 재정난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것은 특히 세금을 내는 소영주들이나 일반 농민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기존의 종교 융합정책을 포기하였고, 토후 세력과의 소모전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아우랑제브 치세 말기에는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를 부활하고, 대표적인 힌두교 세력이었던 라지푸트 족에 대해서도 엄격한 정책을 취하면서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했던 소영주와 농민들, 심지어 궁정 귀족들까지도 정부에 대해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펀자브지방에는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674년 힌두교도들이 서부 데칸 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남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에 아우랑제브가 데칸 일대를 원정하던 도중 사망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강력한 군주가 뒤를 잇지 못한 채로 귀족들의 부패와 호족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졌다.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고, 여러 각지에 반란 진압으로 인한 재정난과 힌두 제후들의 할거 등으로 무굴제국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마라타 동맹, 시크교도 세력 그리고 일부 라지푸트 소국들은 무굴의 중앙 정부에 격렬히 대응하였으며, 이것은 무굴의 재정적인 수입과 영토를 감소시켰다. 즉, 많은 수의 독립된 혹은 준독립된 상태의 제후 세력들이 등장하였던 시기로, 아래와 같은 대표적인 세력들이 있다.
- 데칸지역에 기반을 둔 하이데라바드 족
- 남인도에 일대 세력을 구축한 하이데르 알리의 마이소르 왕국
- 무굴제국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떠오른 마라타 제국
-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크교도 세력
- 델리 중심지역의 라지푸트
- 자트 농민 세력
- 중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와드 족
이들은 대체적으로 법·행정·조세 등의 정책을 새롭게 수립하고 사회·경제·군사 분야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총체적인 사회변화와 경제위기의 극복에 실패하였다.
17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의 델리 침공 및 약탈으로 무굴제국은 크게 약화된 채 사실상 패망 직전이었다. 여기에 인도지역에 들어온 영국(동인도 회사)은 인도 정복에 발을 내밀게 되었다.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편집]
15~16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신항로의 발견을 전후로 각국에서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한 무역기지를 확보하고자 인도의 각 지역을 점령하였다. 다른나라들에 비해 뒤늦게 진출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스라트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인도에 대한 침략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18세기 초, 인도에는 각 지방에서 무굴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정권들이 등장하면서 분열하였다. 영국동인도회사는 이 틈을 타 인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아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프랑스와 벵골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세력 다툼을 벌였다. 특히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찌르고, 벵골과 오디샤, 비하르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인도 지배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후로 영국동인도회사는 인도인으로 구성된 유럽식 군인 용병인 세포이를 양성함으로써 인도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영국은 1799년에 마이소르를, 1805년에 마라타동맹을 해체하고, 그 영토를 흡수 합병하였다. 또한 1843년 신드를 합병하고, 1849년에는 펀자브를 병합하였으며, 인도 내에 델후지 총독을 둠으로써 마라타를 비롯한 인도 내의 소규모 제후국들을 흡수, 합병하였다.
또한, 영국동인회사는 자국 영국의 면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수입 관세를 높이고,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인도의 수입관세를 최대한 낮추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수공업에 의존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인도는 영국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 시장으로 전락되었다. 영국동인도회사는 이에 나아가 인도인을 고용하여 면화와 차, 아편 등의 상품 작물을 강제 재배하는 등 농촌들을 수탈하였으며, 이에 인도 민중들은 반영운동 기운이 높아져만 갔다.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 침략과 수탈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1857년, 영국동인도회사에 고용된 군인 용병들인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항쟁으로 인도인들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특히, 세포이들과 각 주둔지에서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인도인들이 델리에 집결한 뒤,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다. 봉기는 점점 확대되어 인도 북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인도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세포이항쟁은 영국동인도회사의 수탈로 피해를 입은 수공업자와 농민, 상인 등 폭넓은 민중들이 참여한 반란이기도 했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이 반란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영국동인도회사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세포이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의 지위마저 폐위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이어서, 1877년에는 영국 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는 인도제국을 성립시켰다.
경제[편집]
무굴제국 시대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흥성하였으며, 화폐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광대한 영역이 하나의 통치권 아래 놓이면서 법과 질서의 체계가 수립되고 전국이 도로와 통신망으로 연결됨으로써 부강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무역부분에서도 크게 발달했었다. 서아시아, 유럽 등과 매우 활발하게 무역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의 교역은 무굴제국 국내 산업의 발달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인도의 제품이 유럽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무굴제국의 수출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면직물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경제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토지의 산성화로 인한 농업 생산력이 감소가 이 시기부터 뚜렷이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경작 기술이나 농업 과학 등의 발전이 뒤따르지 못하였다. 반면에 매관매직으로 인하여 관리들 특히, 봉토의 토지세 징수권을 가진 관리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가 빈발하여 곧 농민의 피폐와 직결되었다. 여기에 귀족 계층의 소비와 사치 생활이 이어져 많은 경제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또한, 무굴제국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국가의 경제력은 막대한 낭비를 가져왔고, 사회변혁의 실패로 직계됨으로써 과학 기술의 후퇴, 해양 산업과 해군력의 취약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문화[편집]
무굴제국은 이슬람교가 국교였으나, 힌두 문화와 융합하여 인도, 이슬람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종교면에서는 16세기초, 나나크가 힌두교를 개혁하여 시크교를 만들었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일신교로 우상과 카스트 제도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언어면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공식 언어였지만, 군대에서는 힌디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 언어의 어휘를 섞은 말들을 사용하였다. 건축에서는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때, 타지마할이라는 뛰어난 묘당을 세웠는데, 장식에서는 페르시아의 세밀화의 영향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무굴제국은 세밀화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크게 두 화파로 나뉜다. 하나는 민간신앙을 표현한 '라지푸트 회화'이고, 또 하나는 황족과 귀족을 그린 무굴제국의 '궁정 세밀화'이다. '라지푸트 회화'는 16세기경에 라지푸타나에서 발달한 양식으로 붉은 바탕에 빈틈없는 부조 모양의 구도를 가진 세밀화였는데, 힌두교나 민중예술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신비적인 관념세계를 그린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궁정 세밀화'는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인도 전통 수법인 '라지푸트 회화'의 영향 아래 발달한 것으로, 황족과 귀족들의 초상화와 생활모습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세필을 써서 색채를 선명하게 그린 것이다. 또한, 투시적 원근법과 음영을 이용하여 주제를 사실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배경을 장식적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역대 황제
- 바부르 1526 - 1530
- 후마윤 1530 - 1540 / 1555 - 1556
- 악바르 1세 1556 - 1605
- 자한기르 1605 - 1628
- 샤 자한 1세 1628 - 1658
- 아우랑제브 1세 1658 - 1707
- 바하두르 샤 1세 (샤 알람 1세) 1707 - 1712
- 자한다르 샤 1712 - 1713
- 플루크시야르 1713 - 1719
- 샤 자한 2세 1719
- 라피 우드 다울라트 1719
- 니쿠시야르 1719
- 모하메드 샤 1719 - 1720 / 1720 - 1748
- 모하메드 이브라힘 1720
- 아메드 샤 바하두르 1748 - 1754
- 알람기르 2세 1754 - 1759
- 샤 자한 3세 1759
- 샤 알람 2세 1759 - 1806
- 악바르 2세 1806 - 1837
- 바하두르 샤 2세 1837 - 1857
참고자료[편집]
- 〈무굴 제국〉,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