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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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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檀君朝鮮)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전해지는 나라이다. 《삼국유사》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왕조 또는 지배자에 따라 구분하여 단군이 다스렸던 첫 번째 시기를 지칭한다. 단군이 나라를 세워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전조선(前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역사[편집]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당시 고조선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로,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단군조선은 단군이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약 1000여 년 동안 단군조선을 다스리다가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또는 기자가 오기 164년 전인 기원전 1286년에 왕위를 떠났다고 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단군조선이 소멸되었다는 내용 역시 인정되지 않으며 위만조선이 성립되는 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단군조선 및 고조선의 역사로 보고 있다.

초기 단군조선의 강역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한반도 북부(평안도 및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또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난하 요서설" 등을 근거로 요서 일대를 단군조선의 강역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동검을 통해 추측되는 강역은 랴오닝성과 한반도 북부 지역이다. 단군조선의 유물이 두 유물인 것은 확실시되고 있으나 두 유물의 출토지가 모두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현전하는 중국의 조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기원전 7세기 무렵의 문헌인 《관자》에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랜 것이다. 기원전 323년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서기전 3세기 초에 연의 공격으로 2천여 리의 강토를 상실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이 무렵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있다.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否)가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 말기의 혼란기에 중국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기원전 195년, 위만의 망명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역사적 평가[편집]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단군조선은 국가의 시조로서 중요시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지배자인 단군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고대 국가였던 탓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가 시조로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성 중심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어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담은 서술 지침을 발표하였다.

문헌[편집]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東國通鑑·外紀(동국통감·외기)》〈徐居正·崔溥 等 共撰(서거정·최부 등 공찬)〉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기타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건국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20세기 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부도지》 등이 역사서의 형식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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