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고대 이집트어: 𓆎𓅓𓏏𓊖 케메트)는 이집트 나일강 하류와 수에즈운하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 및 국가의 총칭이다.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강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목차
지리[편집]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나 시나이반도는 서남아시아에 있다. 이 나라는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남쪽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으로는 가자 지방과 이스라엘을 마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뉜다. 나일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을 향해 흐른다. 이집트의 인구는 대부분 나일강을 둘러싸고 집중되어 있다. 이 강은 석기시대와 나카다문화 시대로부터 근근히 이어져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다.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기후와 자연환경[편집]
나일 계곡은 에티오피아(Ethiopia)의 고원에서부터 그 물줄기가 갈라져 내려온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 지대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수단 중북부의 앗바라까지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간간이 생기는 오아시스 주변을 빼고는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왕조의 성립과 사회 구조[편집]
이집트 제1왕조[편집]
기원전 31세기 초에 나르메르(영어: Narmer)라는 왕(마네토가 기록한 메네스와 동일인물일 수도 있음)이 당시 남북으로 나뉘어 있던 고대 이집트 왕국을 통합하여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집트 제1왕조의 수도는 멤피스(현재의 카이로 부근.)였었다. 그는 최초의 보편 종교라 할 수 있는 황소 신앙을 왕국 전역에 전파시켰다.
나르메르의 업적을 기록한 나르메르 팔레트를 보면, 나르메르가 몽둥이를 들고 적의 머리채를 잡은 채 그를 내려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집트 역사에서 군주의 정복 장면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주변 문명권들도 나르메르의 이러한 자세를 되풀이해서 따라하게 된다.
나르메르의 상하이집트 통일 이후 그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가 훗날 '제1왕조'라 불리게 되며, 이집트 최초의 왕조이다. 제1왕조의 파라오들은 순장의 풍습이 있었고, 확실한 왕권을 구축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워낙 오래전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제1왕조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마네토의 연대기와 여러 가지 유물,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적들을 토대로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다.
역대 파라오[편집]
- 나르메르 (재위기간 30년 이상) : 마네토가 기록한 메네스와 동일 인물로 추정될 수 있다. 상하이집트를 통일한 왕. 나르메르 전에 '전갈'이라는 왕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수도인 멤피스를 건설했다.
- 호르-아하 : (기원전 3050년경) 나르메르의 아들로 추정되며, 통일 왕권을 확립하였다.
- 제르 (재위기간 57년) : (기원전 3050년경 ~ 기원전 2990년경)
- (메르네이트) : 제르의 왕비로 덴이 어렸을 때 섭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 제트(기원전 2980년경)
- 덴 (재위기간 14~20년) : (기원전 2970년경)
- 아네지브 (재위기간 26년) : 후계자인 세메르케트와 갈등이 있었다.
- 세메르케트 (재위기간 9~18년)
- 카아 (재위기간 26년?)
- 네페르카 : 마지막 파라오
이집트 제2왕조[편집]
이집트 제2왕조는 이집트 초기왕조의 하나로, 기원전 2890년경부터 기원전 2686년까지 존속하였다. 제2왕조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고고학적 흔적도 적다. 제2왕조의 1대 파라오인 헤텝세켐위는 순장 풍습을 폐지했으며, 4대 파라오인 세트-페리브센은 기존의 호루스 이름을 버리고 세트 이름을 사용하였다. 다음 파라오인 카세켐위는 하이집트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이름도 호루스와 세트를 모두 상징할 수 있는 이름으로 바꿨다.
마네토의 연대기에는 9명의 파라오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인정된 파라오는 다음의 다섯 명이다.
또한, 아비도스 왕 목록에 따르면, 니네체르 뒤에 웨네그와 세네지라는 두 파라오가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 제3왕조[편집]
이집트 제3왕조는 이집트 고왕국 시기를 연 왕조로, 기원전 2686년부터 기원전 2613년까지 존속하였다. 제3왕조의 첫 파라오인 사나크테는 제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세켐위의 사위로, 시나이반도의 광산을 개척하였다. 그 뒤를 이은 [[[조세르]]는 화려한 계단형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완전한 형태의 석조 건축물이다. 조세르의 뒤를 이은 두 파라오도 계단형 피라미드를 추구하였으나 짧은 치세때문에 완성되지 못하였다. 마지막 파라오인 후니의 피라미드는 최초의 제4왕조 식 전형적인 스타일의 정방형 피라미드이다. 제3왕조의 파라오들의 역사적인 기록은 빈약한 편이지만, 조세르 대에 크게 융성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량이 제4왕조의 황금기의 바탕이 되었다.
역대 파라오[편집]
- 사나크테 (기원전 2686년 ~ 기원전 2668년)
- 조세르(기원전 2668년 ~ 기원전 2649년) : 거대한 석조 건축물인 계단형 피라미드를 남겼다.
- 세켐케트 (기원전 2649년 ~ 기원전 2643년)
- 카바 (기원전 2643년 ~ 기원전 2637년)
- 후니 (기원전 2637년 ~ 기원전 2613년) : 최초의 정방형 피라미드를 남겼다.
이집트 제4왕조[편집]
이집트 제4왕조는 이집트 고왕국의 황금 시기로, 기원전 2613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존속하였다.
제3왕조의 사나크테가 카세켐위의 사위의 자격으로 제3왕조를 열었던 것처럼, 스네프루 역시 후니의 사위가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였다.
제4왕조의 파라오들은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인지 헤로도토스조차 자신의 책 《역사》에서 제4왕조 시기가 최근에 있었던 것처럼 잘못 묘사하고 있다.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로 이어지는 3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를 남겼다. 특히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서기 1300년까지 3000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쿠푸와 카프레의 거대한 피라미드 공사 때문인지, 그 뒤를 이은 멘카우레와 솁세스카프의 치세에는 별다른 대공사도, 해외 원정도, 이민족의 침략도 없는 평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솁세스카프의 사후 멘카우레의 사위인 우세르카프가 파라오 자리를 계승하여 이집트 제5왕조를 열게 된다.
역대 파라오[편집]
- 스네프루 (기원전 2613년 ~ 기원전 2589년)
- 쿠푸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지었다.
- 제데프레 (기원전 2566년 ~ 기원전 2558년)
- 카프레 (기원전 2558년 ~ 기원전 2532년) : 제2피라미드를 지었다.
- 멘카우레 (기원전 2532년 ~ 기원전 2504년) : 제3피라미드를 지었다.
- 솁세스카프 (기원전 2504년 ~ 기원전 2500년)
이집트 제5왕조[편집]
이집트 제5왕조는 이집트 고왕국의 한 시기로, 기원전 2498년부터 기원전 2345년까지 존속하였다. 제4왕조의 스네프루가 후니의 사위의 자격으로 제4왕조를 열었던 것처럼, 우세르카프도 제4왕조의 파라오 멘카우레의 사위이자 제데프레의 손자의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였다.
역대 파라오[편집]
- 우세르카프 (기원전 2498년 ~ 기원전 2491년)
- 사후레 (기원전 2491년 ~ 기원전 2477년)
-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기원전 2477년 ~ 기원전 2467년)
- 솁세스카레 (기원전 2467년 ~ 기원전 2460년)
- 네페레프레 (기원전 2460년 ~ 기원전 2458년)
- 니우세르레 (기원전 2458년 ~ 기원전 2422년)
- 멘카우호르 (기원전 2422년 ~ 기원전 2414년)
- 제드카레 (기원전 2414년 ~ 기원전 2375년)
- 우나스 (기원전 2375년 ~ 기원전 2345년)
이집트 제6왕조[편집]
이집트 제6왕조는 이집트 고왕국의 한 시기로, 기원전 2345년부터 기원전 2181년까지 존속하였다. 페피 2세 사후 파라오는 허수아비가 되고 귀족들과 사제들이 파라오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제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의 사위 테티가 우나스의 자리를 열어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였다. 하지만 첫 왕인 테티부터 경호원에 살해당하는 등, 제6왕조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페피 1세, 2세 때는 파라오가 긴 기간 동안 통치했으나, 안정적 통치는 아니었으며, 시간이 흐르자 지방 귀족들이 파라오의 권위에게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페피 2세 이후의 파라오들은 문헌에만 등장하며 마네토의 기록에는 아예 수록되지 않았고 그 어떤 고고학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페피 2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6왕조도 종말을 고하고, 동시에 고왕국 시대도 끝이 난다. 이후 혼란스러운 이집트 제1중간기가 이어진다.
역대 파라오[편집]
- 테티 (기원전 2345년 ~ 기원전 2333년)
- 우세르카레 - 아비도스 왕 목록과 마네토의 기록에 나오는 파라오.
- 페피 1세 (기원전 2332년 ~ 기원전 2283년)
- 메렌레 (기원전 2283년 ~ 기원전 2278년)
- 페피 2세 (기원전 2278년 ~ 기원전 2184년)
- 네페르카? (기원전 2184년?)
- 네페르? (기원전 2184년?)
- 아바? (기원전 2184년?)
- 정체불명의 왕 (기원전 2184년?)
- 메렌레 2세 (기원전 2184년) : 페피 2세의 아들
- 니토크리스 (기원전 2184년 ~ 기원전 2181년) : 메렌레 2세의 부인으로 헤로도토스의 저서에 등장.
이집트 제7왕조와 8왕조[편집]
이집트 제7왕조와 8왕조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한 시기로, 극심한 혼란의 시기이다.
마네토에 의하면, 제6왕조의 뒤를 이은 제7왕조에는 70일간 재위한 70명의 파라오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곧이어 17여 명에 달하는 파라오가 통치한 제8왕조가 뒤따랐지만, 이들의 지배권은 모든 이집트의 영토를 잃고 멤피스 일대로 한정됨은 물론, 8왕조 자체도 20년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7, 8왕조 기간 동안 델타 지역은 아시아인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중부의 헤라클레오폴리스와 남부의 테베는 각각 독립된 수많은 지방 왕국이 세워졌다고 한다. 다만 마네토의 저술은 오류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이 기록들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를 보면 이 시기의 이집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알 수 있다.
제7왕조 파라오[편집]
- 네티에르카레 : 니토크리스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아비도스 왕 목록의 40번이다.
- 멘카레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레 2세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레 네비 : 아비도스 왕 목록에 등장하며, 다른 파라오들보다 명확하게 쓰여져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인 안케센페피의 무덤과 석관에 나타난다.
- 제드카레 셰마이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레 켄두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메렌호르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민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니카레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레 테레루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 네페르카호르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제8왕조 파라오[편집]
- 네페르카레 페피세네브 :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등장한다. 토리노 파피루스가 제7왕조의 파라오들을 생략함에 따라, 제8왕조의 첫 파라오로 간주되고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 네페르카민 아누 :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등장한다.
- 카카레 이비 : 알려진 바로는 사카라에 작은 피라미드를 남긴 제8왕조의 유일한 파라오이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의하면 2년 1달 1일을 통치하였다.
- 네페르카우레 2세 :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등장한다. 토리노 파피루스 상으로는 제8왕조의 파라오들 중 가장 긴 4년 2달을 통치하였다.
- 네페르카우호르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한다. 같은 위치의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그의 이름이 유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 네페리르카레 : 아비도스 왕 목록에만 등장하며, 같은 위치의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그의 이름이 유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비도스 왕 목록 상으로는 제1중간기의 마지막 파라오이며, 그의 다음에는 이집트 제11왕조의 파라오가 나타난다.
- 와지카레 : 데미지브타위(Demedj-ib-taui)라는 호루스 이름이 남아 있으며, 칙령을 남긴 흔적이 있으나, 왕 목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록[편집]
- 마네토: 마네토의 기록 자체는 현존하지 않으나, 여러 역사가들에게 인용된 부분을 통해 그의 기록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사가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마네토를 인용하며, 70명의 파라오가 70일 동안 제7왕조를 다스렸으며, 27명의 파라오가 146년간 제8왕조를 다스렸다고 한다.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한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제7왕조의 경우 5명의 파라오가 75일간 다스렸으며, 제8왕조의 경우 5명의 파라오가 100년을 다스렸다고 한다.
제7왕조의 기록의 경우, 섹스투스의 기록이 좀 더 본래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제 통치 기간과 파라오의 숫자를 나타냈다기보다는, 당시의 혼란상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토리노 파피루스와 아비도스 왕 목록: 위의 두 문서는 이집트인들의 기록으로, 역대 파라오의 목록을 나타낸다. 아비도스 왕 목록에는 제6왕조의 메렌레 2세와, 11왕조 사이에 17명의 왕 이름이 있는데(40번에서 56번까지), 이 이름들은 9, 10왕조의 파라오들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 왕들이 2개의 왕조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또한 심하게 훼손된 토리노 파피루스는 아비도스 왕 목록의 53번에 해당되는 카카레 이비의 이름이 등장한다.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아비도스 왕 목록의 42~50번에 해당되는 이름이 빠져있는 대신 51번~55번에 해당되는 왕 목록이 등장하는데(이 중 남아있는 부분은 카카레 이비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당시 이집트인들도 제7왕조와 제8왕조를 구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토리노 파피루스와 아비도스 왕 목록도 마네토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기록을 추정하지는 못했다.
이집트 제9왕조[편집]
이집트 제9왕조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한 시기이다. 왕조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2160년부터 기원전 2130년까지 30년간을 지속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집트 제6왕조가 무너진 후, 전국에 있는 지방 세력들이 각자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한다. 제9왕조의 창설자들은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지방 소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알려진 역대 파라오[편집]
앞선 제7, 제8왕조와 마찬가지로, 제9왕조의 파라오들도 확실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아비도스 왕 목록과 사카라 석판에 이 시기를 고대 이집트의 안좋은 역사로 간주하여 이들의 존재를 고의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마네토 역시 케티 1세만 언급하고 나머지 파라오들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 케티 1세
- 네페르카레 7세
- 케티 2세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1)
- 세넨???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2)
- 케티 3세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3)
- 케티 4세(메리이브레)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4)
- 정체불명의 파라오
- 셰드???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5)
- 흐???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등장(토리노 4-26)
- 정체불명의 파라오 3명
이집트 제10왕조[편집]
이집트 제10왕조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한 시대이다. 혼란스러운 이집트 제9왕조가 끝난 기원전 2130년부터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가 이집트를 재통일한 기원전 2040년 경까지 90여년간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제10왕조는 제9왕조의 뒤를 이어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작은 소국으로 자리잡았다. 제10왕조에 대한 기록은 제9왕조보다도 훨씬 적으며 그나마도 알려진 인물이 메리카레가 전부이다.
알려진 역대 파라오[편집]
-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9, 10왕조를 합쳐 총 18명의 파라오가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 제11왕조[편집]
이집트 제11왕조는 이집트 제1중간기 때에 건립되어 중왕국 시대의 문을 연 왕조이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2134년부터 기원전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왕조의 개창자인 멘투호테프 1세는 테베의 총독이었으나, 멤피스의 중앙정부가 무너진 이후 독립하여 헤라클레오폴리스의 9, 10왕조와 대립하였다. 인테프 1세부터는 파라오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이후 3대에 걸쳐 서서히 헤라클레오폴리스가 있는 북쪽으로 진격한다.
4대째인 멘투호테프 2세 대에 이르러 제11왕조는 제10왕조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멘투호테프 2세 사후 20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손자 멘투호테프 4세가 재상 아메넴헤트(아메넴헤트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혹은 왕위강탈) 왕조의 역사가 끝난다.
역대 파라오[편집]
- 멘투호테프 1세 - 테베의 총독
- [[인테프 1세](기원전 2134년~기원전 2117년)
- 인테프 2세(기원전 2117년~기원전 2069년)
- 인테프 3세(기원전 2069년~기원전 2060년)
- 멘투호테프 2세(기원전 2060년~기원전 2010년)
- 멘투호테프 3세(기원전 2010년~기원전 1998년)
- 멘투호테프 4세(기원전 1998년~기원전 1991년)
이집트 제12왕조[편집]
이집트 제12왕조는 이집트 중왕국의 한 시기이다. 12왕조의 왕들 역시 11왕조와 마찬가지로 테베 출신이었다.
마네토는 이 시기에 일곱 명의 파라오가 다스렸다고 기록하였다. 아비도스 왕 목록을 비롯한 다른 사료들 역시 마네토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오류로 점철된 마네토의 기록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일치한 시기이다. 또한 12왕조 중 세누스레트 1세 시절부터는 공동 통치제가 도입되었다.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소베크네프루라는 여왕의 존재가 추가되었는데, 소바크네프루는 마네토의 기록에 의하면 아메넴헤트 4세와 공동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소베크네프루의 존재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공동 통치는 파라오가 재위 말기에 왕세자를 미리 왕으로 승격하는 제도이다. 이 때문에 12왕조 파라오들의 재위기간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역대 파라오[편집]
- 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1991년 ~ 기원전 1962년)
- 세누스레트 1세(기원전 1971년 ~ 기원전 1926년)
- 아메넴헤트 2세(기원전 1929년 ~ 기원전 1895년)
- 세누스레트 2세(기원전 1897년 ~ 기원전 1878년)
- 세누스레트 3세(기원전 1878년 ~ 기원전 1841년)
- 아메넴헤트 3세(기원전 1842년 ~ 기원전 1797년)
- 아메넴헤트 4세(기원전 1798년 ~ 기원전 1786년)
- 소베크네프루(기원전 1785년 ~ 기원전 1782년)
이집트 제18왕조[편집]
이집트 제18왕조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왕조로, 기원전 1567년부터 기원전 1220년까지 존속하였다.
제18왕조를 개창한 이는 아흐모세 1세로, 그는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의 동생이었다. 이 시기 동안 고대 이집트 문명은 고왕국 시대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며, 이집트 제19왕조의 황금기의 기틀을 놓았다.
역대 파라오[편집]
- 아흐모세 1세(기원전 1567년 ~ 기원전 1546년)
- 아멘호테프 1세(기원전 1546 ~ 기원전 1526년)
- 투트모세 1세(기원전 1526년 ~ 기원전 1512년)
- 투트모세 2세(기원전 1512년 ~ 기원전 1504년)
- 하트솁수트(기원전 1503년 ~ 기원전 1482년)
- 투트모세 3세(기원전 1504년 ~ 기원전 1482년)
- 아멘호테프 2세(기원전 1450년 ~ 기원전 1425년)
- 투트모세 4세(기원전 1400년 ~ 기원전 1390년)
- [[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90년 ~ 기원전 1352년)
- 티예
-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52년 ~ 기원전 1335년)
- 스멘크카레(기원전 1334년 ~ 기원전 1333년)
- 네프루네프루 아텐 (기원전 1333년 ~ 기원전 1331년)
- 투탕카멘(기원전 1331년 ~ 기원전 1332년)
- 아이(기원전 1322년 ~ 기원전 1318년)
- 호렘헤브(기원전 1318년 ~ 기원전 1304년)
이집트 제19왕조[편집]
이집트 제19왕조(기원전 1293년 ~ 기원전 1185년)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왕조로, 고대 이집트 시대의 최전성기이자 신왕국 시대의 황금기이다.
이집트의 신과 신앙[편집]
이집트 신화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확산되기 이전에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생각해온 신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은 대략 3000년에 걸친 긴 기간에 그 사이에 여러번 변화를 거듭해왔다. 일반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에서 신앙되고 있던 엔네아드를 바탕으로 말해지는 것이 많다.
신전[편집]
이집트 각지에 신전이 세워져 신들이 숭배되고 있다. 신들의 서열은 지방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 각각의 지역에서 신앙하는 신의 신전이 건설되었다. 파라오가 이집트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호루스의 후계자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많은 성전이 지어졌다.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부 심벨 신전이다.
사후세계[편집]
이집트 신화에서 인간은 육체, 바 (Ba), 카 (Ka)의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언어와 문자[편집]
신성 문자[편집]
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는 고대 이집트의 돌이나 나무에 새긴 (상형) 문자를 지칭하는 낱말로서, 고대 그리스어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Hieroglyphica grammata: "신성하게 새긴 말")의 줄인 말이다. "능력의 말"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메두 네체르"(Medu Netjer)를 번역한 데서 온 이 용어는 기원전 약 4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신성 문자는 서기의 신인 토트가 발명하여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 전해진다. 더러는 마야 문명·아스테카 문명의 문자 등 기타 상형문자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히에로글리프 이외에 두가지 다른 문자들(신관 문자, 민중 문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는 로제타석의 발견과 더불어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되었다.
기원[편집]
중동지역에서 나타난 문자 중에서 최초로 발생한 선 형태 문자이다. 중동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지역의 표음문자 대부분은 이집트 신성문자 및 신관문자, 민중문자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20세기까지 쐐기문자가 연결된 글자로 쐐기문자의 후대 변형이라고 여겼으나, 신성문자를 기원전 33세기 쐐기문자보다 더욱 온전한 형태로 사용하였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현재는 쐐기문자와 신성문자가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자의 구성[편집]
각 글자들은 각종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모습을 하고 있다. 글자들은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리 글자로, 그 모습과 상관없이 단어의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두 번째는 의미 글자(Determinatives)로, 소리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의 맨 뒤에 붙어 그 단어의 뜻을 결정한다. 세 번째는 소리-의미 글자(Ideograms)인데, 그 자체로 소리와 의미를 모두 가진다.
문자의 해독[편집]
신성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의 세 가지 방법으로 기록된다. 문자에 등장하는 사람, 동물, 새의 머리는 언제나 글이 시작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으므로 문자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작하면 된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읽는 법은 없다. 모아쓰기가 이루어지는데 한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아쓰기된 글자들은 원래 읽는 방향대로 차례로 읽어가면 된다. 왕의 이름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카르투슈(Cartouche)라고 한다. 이것이 로제타 돌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
신관 문자[편집]
신관 문자(神官文字)는 이집트 신성 문자의 흘림체로, 이집트 제1왕조(약 기원전 2925년~기원전 2775년) 때 처음 사용되었다. 신관 문자는 파피루스 위에 갈대 펜과 잉크로 써졌으며, 기원전 700년경 민중 문자에 밀려났으나, 신관들 사이에서 수 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
민중 문자[편집]
민중 문자(民衆文字, Demotic)는 신성 문자, 신관 문자와 함께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한 문자로서, 속용 문자(俗用文字)라고도 한다. 민중 문자가 소개된 이후 신관 문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게 되었으며, 민중 문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관 문자와 달리 민중 문자는 주로 돌이나 나무에 새겨졌다.
역사[편집]
기원전 70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이미 고대 이집트의 주요 문자가 되어 있었다. 4세기에 들어서며 민중 문자 대신 고대 그리스어 자모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451년 필라이의 사원 벽에 새겨진 것이다.
해독[편집]
민중 문자는 로제타 돌에 쓰여진 두 번째 문자이다. 이는 상형문자가 해독되기 이전에 이미 해독되었고,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은 실베스트르 드 사시(Silvestre de Sacy)이다. 1799년 로제타석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어와 이집트 민중 문자, 이집트 상형문자로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콥트어에 대한 지식과 함께 이집트 문자들을 해독할 수 있었다. 민중 문자에 대한 전문가인 이집트 학자들과, 언어학자, 파피루스 학자들을 데모티스트라고 부른다.
미술[편집]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작품은 아니다. 신전(神殿)은 '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이집트의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 한 거기에는 엄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선다.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닭이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 활동의 역사는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한다.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다.
아마르나 미술[편집]
제18왕조 아크나톤 치하의 독특한 풍조와 미술인데 새로 도읍한 이크나톤의 현 지명인 아마르나(Amarna)를 따라 부르고 있다. 아톤 신(神) 신앙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정신과 병행하여 예술계에도 종래의 고정화한 양식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조각과 회화에 개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집트 미술사상 매우 특이한 한 시기를 이룬 것이며, 이크나톤 자신에 의한 별종(別種)의 양식화라고도 생각된다.
회화[편집]
이집트 화가의 사명은 사물의 형태나 본성이나 특징을 묘사하는 일이어서 회화는 신이 정한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존하는 자료는 거의 모두가 묘의 벽화이고 그것은 사자(使者)의 영원한 생명이 생활하기 위하여 묘실 내에 현세를 재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부조(浮彫)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집트 회화의 특징은 원근법의 결여와 물체 묘사에 있어서 측면도와 정면도의 혼용이다. 특히 인체에서 머리는 항상 측면이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이며 허리에서 아래 부분은 다시 측면이 되고, 얼굴의 정면도는 예외였다. 동물은 기본적으로 측면이다. 이 형식은 왕조문화의 발생과 동시에 결정되었다. 벽화는 진흙 연와의 벽이나 바위 벽에 정제(精製)한 점토 또는 석고질(石膏質)의 모르타르를 바른 위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집트 회화사(繪畵史)의 성쇠는 정치적 번영의 역사와 일치한다. 선왕조시대에는 암벽화(岩壁畵)나 토기 표면의 장식이 있고 그 말기인 히에라콘폴리스 벽화에는 권력자의 도상(圖像) 표현에 있어서 이집트 양식의 기초를 볼 수 있다. 초기왕조시대의 분묘에는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가 있을 뿐 형상적인 회화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왕국시대에는 <메이둠의 오리>(제4왕조)가 나왔다. 유례(類例)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 진흙 연와벽이 파손되기 쉽고 작품의 대부분은 소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조의 밑그림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중왕국시대의 회화는 베니하산의 암굴분(岩窟墳)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데생은 진보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채색을 보였다. 신왕국시대, 특히 제18왕조는 황금기이다. 전반 토트메스 3세 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아르카이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후반에는 감수성이 풍부한 선과 정묘한 색채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크트와 멘나의 묘에 있는 벽화(모두 그르나에 있음)는 이집트 회화 전성기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아마르나 양식은 조각만큼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제19왕조에는 기교에 치우쳐 조방하게 되었고, 제20왕조 이후에는 서서히 회화활동이 침체되어 겨우 파피루스 문서의 삽화 등에 그 전통을 남겼을 뿐이었다.
색채[편집]
안료(顔料)로서, 흑(黑)은 그을음, 청(靑)은 구리 계통의 유질(釉質)의 분말, 녹(綠)은 공작석(孔雀石)이나 녹색 글레이즈의 분말, 적(赤)은 자토, 황은 황토(黃土), 백은 석회 등이 사용되었다. 또 이집트인에게는 독특한 종교적 색채 상징관념이 있어서 각기의 색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백은 기쁨, 흑은 재생(再生), 적은 악마, 황은 신성, 녹은 활력을 의미하여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종교적인 공예품의 채색이 결정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는 화가가 관찰한 대로 자연스럽게 채색되었다.
부조[편집]
부조(浮彫)의 수법에는 통상적으로 양각(陽刻)과 음각(陰刻)이 있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상아의 세공에도 보였지만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묘나 신전의 벽면에 그려졌다. 도상(圖像)의 표현법은 거의 회화와 같이 채색되었다. 제5왕조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중왕국시대에는 그것을 답습하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궁정 아틀리에의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조잡하게 이루어졌다. 신전에는 거대한 구도가 채용(採用)되어 그 외벽면(外壁面)에는 음각을 하였고 내면은 양각을 하였다. 사이스 시대에는 고왕국시대의 양식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운동이 있었다.
조각[편집]
'생명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라 불리는 이집트 조각사(彫刻師)의 사명은 명제(命題)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도록 충실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조각의 종류에는 신상(神像)·왕상·개인상·풍속상 및 동물상 등인데 묘에 안치된다든지 신전에 모셔 두었으며, 그 크기도 20m 이상의 거상(巨像)에서 몇 cm의 소상(小像)에 이르렀고, 돌·나무·금속·상아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왕조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상 등의 토제(土製)나 상아 조각이 있었으나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회암·화강암·편암(片岩) 등의 조각이 출현하여 이미 이집트 조각의 시조적(始祖的)인 모형이 형성되었다. 고왕국 시대는 조각 사상(史上)의 고전기로 되어 이집트 양식이 완성되었다. 제4왕조의 카프라왕의 섬록암상(閃綠岩像), 라호테프 부처상(夫妻像), 카이페르 목상(木像=村長像), 페피 1세 동상(銅像) 등이 대표작이다. 목상과 석회암상은 채색되어 있다. 형식은 입상(立像)·의좌상(椅座像)·호좌서기상(胡座書記像) 등이 있고, 개인의 단신상(單身像) 외에 부부나 가족 군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상은 신전에 두었고 일반인의 인물상은 묘의 세르다브에 안치되는 이른바 '카 상(像)'이었다. 옥안(玉顔)을 붙인 예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실적 기법에서 출발하였고 일종의 이상화(理想化)에 성공한 멤피스파(派)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왕국시대에는 이것에 테베파의 사실주의가 가하여져서 특히 인물의 개성 표현이 특징이었고, 대표작은 제12왕조 제왕(諸王)의 초상(肖像)이다. 신왕국시대의 경향은 당초 제18왕조에 현저하게 이상화(理想化)되어 우아함이 가해졌으나 얼마간 유형적이었다. 그러나 신상과 석비(石碑)를 받드는 신형식이 출현하여 중왕국시대에 그 조형(祖型)을 보았던 안 바케(方形彫刻)가 더욱 형상화되었다. 제19왕조 이후는 왕상의 거대성이 증대되었으나 대체로 조잡·형식·추종에 빠져 버렸다. 이 사이의 이크나톤과 네페르티이트상을 절정으로 하는 아마르나 양식의 자연주의는 특이한 존재이다. 목조(木彫)에는 제 나라의 것과 남방의 흑단(黑檀),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후기왕조시대에는 제25왕조에서의 사실주의의 부활, 제26왕조의 고왕조시대 양식을 지향하는 복고 운동이 있었고, 한편 청동조각에 의한 인물상 외에 특히 소형의 주동신상(鑄銅神像)이 성행하고 목조(木彫)나 석조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정한 인물의 표현이 아닌 풍속상은, 고왕국시대에는 석조(石造)의 노동자나 시종의 상이 있었지만 중왕국시대 이후에는 생활의 각 분야를 표현한 채색 목조의 군집상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많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건축[편집]
고대 이집트의 건축은 풍부한 석재(石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였으나 제2왕조 이후 왕릉(王陵, 피라미드)과 신전(神殿)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고 요소에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왕궁메리과 주택은 왕조시대를 통하여 벽돌과 목재를 썼다. 석재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투르의 석회암, 시르시라의 사암(砂岩), 하트느바의 알라바스터 등이 특히 유명하고 목재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신전[편집]
선(先)왕조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의 신전은 간단한 오두막을 짓는 식인 듯하였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되고 후에 석재를 주재로 하고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도, 기본적으로 정면 입구의 탑문(塔門)과 중정(中庭), 전실(前室) 및 지성소(至聖所)로 되어 있고, 여기에 성지(聖地)와 나일강 수량계(水量計) 및 후기 왕조에는 특히 탄생전(誕生殿)이 부설되고 경내(境內)를 연와(煉瓦)벽으로 둘러쌌다. 탑문 앞에 왕조의 거상(巨像)과 오벨리스크가 각각 한 쌍씩 세워지고 벽면 전체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업적을 표시하는 채색부조(彩色浮彫)가 되어 있으며 앞칸은 다주실(多柱室)로 되어 있다. 장제전(葬祭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新)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하트솁수트(제18왕조) 여왕의 장제전은 테라스식(式)인데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암굴 신전은 절벽을 이용하여 파서 만든 것으로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석주와 기둥머리[편집]
건축용 기둥에는 목재도 사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석재이다. 거의 모두가 식물을 모형으로 했는데 야자수형 기둥은 연 줄기 묶음의 기둥에 꽃의 봉오리나 활짝 핀 꽃의 기둥머리를 붙인 것이며 파피루스형 기둥도 그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면 이러한 복합형도 열 종류가 있다. 주두에 하트홀 여신 얼굴의 주두를 붙인 것도 있다. 화강암·석회암·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개만으로 된 돌 기둥이나 드럼형(型)의 돌을 쌓아올린 기둥도 있고 비문(碑文)을 파서 채색한 경우도 있다.
오벨리스크[편집]
오벨리스크(obelisk)는 신전(神殿)의 탑문(塔門) 앞에 좌우 일기(一基)마다 설치된, 약간 끝이 가는 4각형의 거대한 석주로, 끝은 4각추(四角錐)이며 기둥의 표면에는 히에로글리프비(碑)가 있다.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통상적으로 아스완의 화강암을 끓어 낸 것으로서 하트솁수트 여왕의 것은 높이가 30m, 300t 이상에 달한다. 지금까지 50기(基) 이상이 침입자의 기념품으로 해외에 가지고 나가게 되어 원위치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안녕하세요
분묘[편집]
영혼 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은 묘, 즉 영원한 집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원(圓) 또는 타원형의 수혈(竪穴)이었으나 제1왕조경부터 마스타바분(mastaba墳)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직 4각형 평면의 피라미드를 단두(斷頭)한 모양인데 기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지고,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사당(祠堂)은 지상에 설치하였다. 초기 왕조의 묘도 이 형식이다. 사당의 방 벽면은 각종의 광경이 부조로 덮여 있으며, 맨 안쪽에 영혼이 출입하는 위문(僞門)을 만들어 두었다. 제3왕조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묘(王墓)가 되어 제17왕조까지 답습되었다. 제18왕조로부터 왕묘는 인적이 드문 산중의 암굴분(岩窟墳)이 되고, 신전은 분리하여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귀족의 묘도 단애(斷崖)나 경사진 사면을 이용한 암굴분이 되어 입구 위쪽으로 피라미드를 구축한 예도 있다. 벽면은 회화 또는 부조로 덮여 있어 회화사(繪畵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묘의 경우에는 긴 종교문서 비문(碑文)을 새겨 두었다. 정중한 장례가 당시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다량에 이르러 이집트 미술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피라미드[편집]
피라미드(pyramid)는 제3왕조부터 출현한 왕릉의 한 형식이다. 완성을 본 것은 제4왕조 쿠푸왕의, 높이 약 147m의 석축(石築)으로, 거대한 4각추형의 본체와 상·하 신전과 참도(參道) 등의 복합으로서 현실은 본체 내부나 또는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중(中)왕국시대에는 석재 대신으로 햇볕에 말린 벽돌도 사용되었으며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귀족의 분묘에도 규모가 작은 것을 받아들여 나파타·메로에서의 왕묘 형식으로 이어져 갔고 로마에도 이것을 모방한 묘가 있다.
스핑크스[편집]
스핑크스(sphinx)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주택[편집]
이집트에서는 신전이나 묘는 석재이기 때문에 유적으로서 많이 남아 있으나 주택의 예는 적다. 이것은 건축 재료가 소멸되기 쉬운 볕에 말린 벽돌이나 나무 또는 갈대 등이었고 택지도 현대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나 유적이나 묘의 벽화, 그리고 가옥의 모형(부장품) 등으로 대략은 알 수 있다. 즉 대저택은 연와(煉瓦)로 담을 둘러싼 정원에 못을 파고 수목을 심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방이 열개 이상인 것도 있으며 원주(圓柱)가 있는 파브리크의 방으로 나뉘어서 시중들의 방·부엌·욕실·변조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가구는 침대·의자·작은 탁자·장궤(長櫃) 등이고 벽걸이와 일종의 양탄자 같은 것도 애호되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이에 만들어져서 외부의 열을 차단하였다. 부지내에 성당(聖堂)을 세우고 담벼락에 연하여 가축의 우리나 사일로를 설치하였다. 일반의 가옥은 훨씬 간단하여 현대의 농가와 유사하고 이층집의 경우에는 아래층이 창고가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쪽에 시원한 바람을 쏘일 테라스를 붙이고 있다. 묘를 파는 인부 등은 방이 이어달린 긴 집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도시와 유적지[편집]
기자[편집]
기자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쪽 연안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카프라·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지인 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아랍연합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편집]
사카라는 카이로 남방 25 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를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편집]
아비도스(Abydos)는 카이로 남방 약 550 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 시대에는 오시리스 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 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 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편집]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이고 룩소르가 부전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 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투탕카멘 왕의 보물[편집]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
누비아[편집]
누비아(Nubia)는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 성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 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을 받아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편집]
아부심벨 신전은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 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
참고자료[편집]
- 〈고대 이집트〉, 《위키백과》
- 〈이집트 제1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2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3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4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5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6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7, 8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9왕조〉, 《위키백과》
- 〈이집트 제10왕조〉, 《위키백과》
- 〈고대 이집트의 미술〉, 《위키백과》
- 〈이집트의 건축〉,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