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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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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철기시대(Iron Age,鐵器時代)는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하는 고고학상의 3시기법(석기 ·청동기 ·철기)에 따른 제3단계시대이다. 이 시대는 청동야금술(靑銅冶金術)뿐만 아니라 철의 야금술이 발명 ·보급되어, 이기가 철로 제작된 시대를 말한다.

원자력이 사용되는 오늘날에도 철이 주요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의 철기시대는 현대도 포함되나, 일반적인 고고학적 의미의 철기시대는 철의 야금술이 알려진 시대를 의미하고 있다. 신대륙에서는 고도의 고대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구대륙에서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구대륙 모두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된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는 신석기시대가 오래 지속되었다가 직접 철기시대로 이행한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이집트는 제외)이다. 이것은 청동야금술 전파의 지체, 구리나 주석 산지(産地)의 제한성, 또는 이 지역 주민들이 구체제에 만족하고 기술적 혁신에 대한 관심이 적었거나, 문화적 수준이 청동야금술을 받아들일 정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구분은 지극히 기술사적(技術史的)인 시대구분이다. 철의 야금술의 존재는 철기와 쇠똥(슬래그), 목제품에 보이는 철제의 흔적 등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즉물적(卽物的)으로 내보일 수 있는 점에서 철기시대란, 유물 ·유적을 다루는 고고학자들에게는 편리한 시대구분이다. 그러나 기술사적 시대구분은, 문화 전반을 파악한 뒤의 시대구분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원고사(遠古史) 서술에서 고고학자 자신도 ‘철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점차 감소되고 있다.

발전

철은 구리나 주석과는 달리 사철(砂鐵), 운철(隕鐵:隕石), 광석의 형태로서 지표상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최초로 사용되었던 것은 운철로서, 이집트 제4왕조오스만 투르크아라자 유구(遺丘:청동기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철을 사용한 장신구, 드물게 보이는 단검류는 BC 3000년대 이래 제작되기는 하였으나 고온의 노(爐)가 없었던 것과 원료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량생산은 불가능했고, 또 가격도 황금의 몇 배 이상 되는 귀금속이었다. 또 철광을 제련하여 얻은 괴철(塊鐵)에서 소량의 연철(鍊鐵)을 얻었으나 연철은 약해서 청동보다도 사용가치가 뒤졌다.

그 후 목탄(木炭)과 접촉시키면서 가열하고 작은 망치로 두드리면서 탄소와 화합시켜 강인한 철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이 기술은 BC 15세기경 아르메니아 지역과 소아시아 서부지역에서 개발되어 미타니인(人)과 히타이트인(人)에게 전해졌고, BC 13세기경에는 당시 진행중이던 민족이동 경로를 따라 각지에 보급되었다.

강철은 무기 ·농구의 재료로 청동보다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이 기술이 전파된 곳에서는 도처에서 철기시대가 열렸다. 즉 메소포타미아에는 BC 13세기, 이집트에는 BC 12세기, 인도에는 BC 10세기경에 보급되어 철주(鐵柱)가 제작되었고, BC 9세기경에는 이탈리아에서도 초기 철기문화가 시작되었다.

유럽 중부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주요 생산지로 하여, 할슈타트 문화(BC 800?∼BC 400?)와 라텐 문화(BC 500?∼BC 1세기 말)가 번영하였다.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BC 800년경부터 철의 야금술이 도입되어, 주민들의 유목기마민족화(遊牧騎馬民族化)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남러시아 지역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의 철기문화는 이러한 강철 제조 기술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여 소아시아, 아시리아, 중국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마민족 문화를 형성시켰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인 BC 4세기 초부터 이기(利器), 특히 무기가 철로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전한(前漢)시대에는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기술혁신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 고대국가 형성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으며, 일본에도 파급되었다.

중국에 유입되어 발전된 철기문화는 BC 4∼BC 3세기경에 이미 한반도로 유입되던 이주민들을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철기뿐 아니라 중국 계통의 청동기도 함께 전래되었다. BC 2세기 초 위만(衛滿)조선의 성립으로 대동강 유역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공존하였으며, BC 1세기 말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와 함께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발달하여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북방지역 부족국가와 삼한이 지속되던 남방지역 부족국가에 급속히 전파되어 철기 부족국가 형성에 기틀이 되었다.

철기시대의 유물은 대체로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土壙墓]에서 발굴되며, 철기문화의 전파는 씨족공동체사회를 친족공동체사회로 변환시켰으며,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농경방식이 개발되어 생산력을 증가시켜 사회구조에 일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철기문화는 1세기경에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뒤이어 백제 ·신라의 3국을 형성하였다.

한편, 동아시아의 철기가 중국에서 단선적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철기 전통이 존재했다는 학설도 있다. 2008년 한국러시아 국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약 70㎞ 떨어진 바라바시 마을에서 초기 철기시대인 BC 7~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 가공작업장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BC 5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을 근거로 동아시아의 철기문화는 BC 4세기 이전으로 올릴 수 없다고 보는 기존 통설에 반하는 것이다.

영향

철제품의 출현은 장신구, 용기 등에 대한 청동의 대량 사용을 가능케 했다. 철기시대가 되면서 청동을 많이 사용한 기물이 오히려 증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의 야금술 개발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철제기구는 청동제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수량도 풍부하며 가격도 저렴하였다. 따라서 서민 출신의 병사들도 철제 공격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발언권 또한 증대하였다.

철제 공구(工具)는 삼림의 대규모 벌채를 가능하게 하였고, 또 철제 농구(農具)는 일정 시간 내에 보다 넓은 경작지를 보다 깊이 경작하는 일과 소택지(沼澤地)를 관개(灌漑)하는 일을 용이하게 하였다. 철제 등자(鐙子)의 고안은 기마민족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고, 또한 각 지방에서의 철 생산지의 출현은 물자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그런 뜻에서 철의 야금술 개발과 이용은 청동의 경우에 비하여 훨씬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의의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철기시대는 어디까지나 기술사적인 시대구분이며, 일반사적인 시대구분으로는 아직도 적절하다고 보기가 곤란하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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