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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開放)은 연다는 뜻의 한자어이다. 공간을 열어 드나들게 한다는 의미와 금지하던 것을 풀어 허용한다는 의미가 있다. 반의어는 폐쇄이다. 전기회로에서는 한쪽이 전류가 흐르지 않는, 즉 저항이 무한대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교환기의 접속 또는 동작하고 있던 스위치, 계전기 등이 평상상태로 복귀하는 것도 개방이라고 한다.
태도나 생각 따위가 거리낌 없고 열려 있는 것은 '개방적이다'라고 한다.
개방경제(開放經濟, open economy)는 거시 경제 측면에서 외국과의 금융 · 무역 거래를 하는 경제이다. 반의어는 폐쇄경제이다.
문호개방(門戶開放)은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여 다른 나라가 무역이나 경제적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문호개방정책[편집]
문호개방정책(門戶開放政策, Open Door Policy)은 중국에서 통상상의 기회균등과 중국의 영토적 보전을 위하여 20세기 초에 추진한 미국의 극동외교정책이다.
1898년의 미국-에스파냐전쟁 결과 필리핀을 차지하여 극동(極東) 진출의 발판을 얻은 미국이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의 위기를 해소시키고, 극동에서의 세력경쟁에 뒤진 자국의 입장을 만회하기 위하여 이 정책을 내세웠다.
즉, 1899년 미국 국무장관 J.M.헤이는 청(淸)나라에서 각국이 평등한 관세·철도요금·입항세(入港稅)·통상권을 승인할 것을 촉구하고, 1900년 청나라의 영토보존도 이에 부수하여 주장하였다. 그 후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만주 진출, 일본의 대(對)중국 21개조 요구(1915) 등에 대해서 이 정책을 내걸고 반대하였으며, 1921∼22년 워싱턴 9개국 조약에서 정식으로 각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에 어긋나는 정책을 취하였고, 이것이 미·일 관계를 악화시켜 태평양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선의 문호개방[편집]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조선 정부는 좀더 많은 국가들과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본격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876년에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라는 사절단을 보내 근대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1880년에는 2차 수신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 때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김홍집은 황쭌셴(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책자를 가져와 고종에게 바쳤다. 당시 동경에 파견되었던 중국 사신 황쭌셴이 저술한 "조선책략"의 주요 내용은, 개방의 시기에 조선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동맹관계의 수립이라는 것이었다. 황쭌셴은 특히 미국을 정의의 편에 서서 유럽 열강의 사악한 행위를 견제하는 국가로 이해하여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청국과 친하고, 일본과 힘을 합치며, 미국과 연대하여(親淸·結日·聯美)'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황쭌셴의 "조선책략"이 옳았느냐 틀렸느냐 하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 책자는 조선 정부, 특히 고종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고종은 이 책을 숙독한 후 대신들에게도 일독을 권했으며, 곧바로 외교와 국방의 기능을 특화시킨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신설기구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밀리에 조사하기 위하여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곧바로 일본측에 노출되어 일본 정계의 거물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직접 이들을 맞아 근대식 공장과 조선소, 병기창, 학교를 견학시키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황쭌셴의 책략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착수했다. 사실 황쭌셴의 책략은 이미 청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리훙장(李鴻章)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외교전략이었다. 리훙장은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서 진행했다. 그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체결과정에서 "i자에 점을 찍고 t자에 가로선 치는 걸 빼고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조선정부는 제켜놓은 채 리훙장과 미국의 슈펠트(Robert W. Schufeldt) 제독 사이에서 조약의 내용이 비밀리에 검토되었으며, 심지어는 조선의 국기도 그들 사이의 논의과정에서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리훙장과 슈펠트의 협상에 의해 합의된 내용이 최종 조약문서로 작성된 후 비로소 조선정부에 넘겨졌다.
슈펠트는 미국정부의 특사자격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조선땅을 두 번째로 밟게 되었다. 그는 ‘은자의 나라’의 빗장을 연 것에 대해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슈펠트의 첫 번째 조선방문은 1880년 5월에 있었다. 당시 슈펠트는 일본의 이노우에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부산을 방문하여 교류를 청했으나, 동래부사 심동신(沈東臣)은 교섭을 단호히 거부했었다. 2년 후인 1882년 5월 22일 슈펠트는 마침내 인천항에서 조선정부 대표 신헌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조선의 태극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더불어 국가의 상징으로서 처음으로 게양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영국 및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 11월 26일, 영국과는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독일과는 '조독수호통상조약'을 각각 체결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 서양 열강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제적 세력균형 속에서 조선의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정부 당국자들의 주관적 인식에 불과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명기된 "별국이 일방 정부에 대하여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 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하여야 한다"는 구절을 조선정부는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던 것이다.
개방정책[편집]
소련의 개혁과 개방 정책[편집]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구소련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주창하면서 1987년 기업령과 1988년 자영업령 등이 제정되어 자율, 자유 원칙의 도입으로 경제 영역이 확대되었고, 1991년 옐친의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후에는 적극적으로 가격의 자유화와 국영 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다.
중국의 개방 정책[편집]
1984년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를 유지 하면서도 시장 가격에 입각한 시장 지향적 경제 운영을 용인하는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를 채택하였다. 이는 생산 단위가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은 없지만 생산 수단의 사용, 생산물의 처분, 이에 따른 이윤과 소득의 분배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농업, 서비스업, 유통업 등의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93년 말부터 현재까지 중국 제조업 생산의 56.3%를 여전히 국영 기업이 생산하고 있는데, 10만 여개의 국영 기업은 책임 있는 경영 주체의 부재와 과다한 정부 간섭으로 극히 비능률적이어서 약 70%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북한의 개방 정책[편집]
모든 생산 수단을 국가와 사회 협동 단체가 소유하며, 소비 목적을 위한 재화의 개인 소유만 인정하고 있다. 국가가 경제 발전 계획의 세부 사항까지 수립하며, 민간 경제 활동의 세부적 사항까지 직접 담당하고 있다. 즉 중앙에 모든 의사 결정권이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집단 영농 방식으로 인한 생산성이 매우 낮게 나타나고 있다. 개인 텃밭이나 부업 밭에서의 생산성이 협동 농장보다 세 배나 높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