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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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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1일 (목) 17:2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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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의 모습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은 1811년~1817년에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이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한 방직기가 노동자의 일거리를 줄인다는 생각이 배경이 되었다.

흔히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를 파괴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민중들의 우매한 감정적 폭동으로만 잘못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인 노동운동이었다.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은 자본가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는데, 일하는 노동에 비해 이윤의 분배가 적은 착취로 고통받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받는 임금은 빵 한 개만 살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국 정부가 자본가와 결탁하여 단결금지법을 제정했기 때문에,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 단체교섭, 파업 등으로 단결하여 싸우는 노동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자본가에게 빌려 사용하던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계급투쟁을 하였는데 이를 러다이트 또는 기계파괴운동이라고 부른다.

상세

네드 러드(Ned Ludd)라는 인물이 이 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 러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적이 없어서 현재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네드 러드라는 어린 소년이 단지 손놀림이 서툰 바람에 실수로 두 대의 공장 직조 기계를 망가뜨렸는데 그때부터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공장 기기들이 고장날 때마다 의심을 받은 사람들이 "네드 러드가 그랬단 말입니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1812년 방직기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 직조공들은 비밀 결사를 만들어 도시에서 게릴라 부대를 형성한 후 공장주들을 위협하고 이것저것 요구했으며 공장주들은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직조공들은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물론 네드 러드 장군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 직조공 비밀 결사는 점차 러다이트라고 알려지게 됐다.

18세기 초까지 영국의 산업은 숙련공들이 공장에 모여서 협업을 통해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제 수공업이었다. 그런데 증기기관이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기계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되자 수공업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수공업과는 다르게 비싼 돈 들여서 숙련직을 고용하지 않고 소수의 비숙련공만 고용해도 충분히 돌릴 수 있는 게 기계였고 그러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저임금에 손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과 미성년자 고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심지어 5~6살짜리 어린이들도 일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반대로 숙련공의 가치가 급속하게 낮아지면서 일부 장인을 제외한 나머지 수공업자들은 대거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로 전락하며 몰락해 버렸고 보호 역할을 해 줄 길드도 시대의 변화에 뒤쳐져 약화되어 가면서 결국 사라졌다. 상인과 숙련공이 주도하던 공장제 수공업은 몰락하고 소수의 자본가가 대규모의 노동자를 고용해서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기계제공업의 시대가 도래했다.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매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나가 일하게 되었는데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잉여노동력이 넘쳐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 도시빈민들의 절박함을 이용해서 쥐꼬리만한 임금에 하루 12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시켰다. 이 결과 자본가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아서 부르주아 귀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데 반해 노동자들은 하루 15-16시간씩 일해도 푼돈밖에 벌지 못 했고 다쳐도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기 일쑤였으며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실업자의 수도 나폴레옹 전쟁기의 불황을 타고 급속히 늘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은 매년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부유층 남성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사실상 귀족민주정에 가까운 체제였다. 따라서 투표권이 없는 노동자, 소작농, 도시빈민 계층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으며 영국 정부와 의회는 이런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선 무관심했고 철저하게 자본가들의 이해만 대변하였다. 영국 의회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집단교섭, 파업 등 일체의 집단행동을 금지해 놓았다. 사회보장제도 또한 전무했으며 빈민구제는 일부 종교단체의 소규모 자선활동이 전부였다. 당시는 야경국가론의 시대였다.

반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생산성은 급격하게 올랐지만 부의 재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벌어졌다. 투표권도 없고 합법적인 집단행동도 금지된 상황속에서 이들의 불만은 결국 비합법적인 폭력으로 터져나왔다. "기계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다."는 주장이 비정규직 섬유 노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공장이 가동되지 않는 밤이 되면 몰래 망치로 기계를 고장내거나 공장을 불태웠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불황에 시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은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게 되었고 시인 바이런 같은 지식인들조차 노동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면서 지지를 표했으며 자발적인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실질적인 피해와 함께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기계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시 스펜서 퍼시벌 총리 내각에서 군대를 풀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주동자들을 모두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러다이트 운동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안감과 불만은 수면 아래로 내려간 것일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부분적이나마 노조 설립이 허용되었고 단체교섭을 인정받는 등 영국 정치권과 자본가들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리 잡아가던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요구하면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운동이었지만 동시에 산업화기계화라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을 거부하는 근시안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다.

영국 켄싱턴 공원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1848)

러다이트 운동의 실패 이후 노동자들은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말 이 차티스트 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맞물려서 정치세력이 되어 영국 노동당이 출현했다.

한편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 중 하나였던 빈부격차와 실업 문제는 전체적인 생산성의 향상 보통선거 제도의 도입에 따른 노동권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확대가 맞물리면서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허나 전면적인 복지제도 도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도입되었지만 복지국가 수준은 아니었고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보통 선거에 의한 대중 민주주의와 산업시장에서의 효율성, 노동자의 권리확대를 절충하면서 발전해 기존의 소극적 야경국가의 정책에서 벗어나는 데는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간될 때까지 오랜 기간의 투쟁이 필요했다.

의미

기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기구 아래 도입된 것으로, 인간을 노고(勞苦)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에게 있어서 기계는 그들의 노고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계를 때려부수는 행위는 기계를 소유하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하나의 변형이었다.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년과 1812년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적인 기계부수기 운동이었고,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수많은 역직기(力織機) 편기가 파괴되었다.

네오러다이트 운동

네오러다이트 운동(neo-Luddite Movement)은 첨단 과학기술 문명에 반대해 반기술과 인간성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펼치는 기계파괴운동을 말한다.

뉴러다이트운동이라고도 한다. 러다이트 운동에서 유래하였다. 기계반대운동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는데, 전면적인 기계거부운동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컴퓨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첨단 과학기술시대가 도래하자, 첨단 기계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컴퓨터·텔레비전·전자제품 등 현대생활에 필수적인 생활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첨단문명을 거부한 채 외진 곳으로 은둔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출퇴근 때 버스나 지하철도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산업화의 산물인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고 슬로푸드를 먹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처럼 첨단 기계문명에는 반대하면서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극적 네오러다이트족(族)이라고 한다.

반면에 19세기 초의 러다이트운동처럼 첨단 과학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믿음 아래 폭력 등 과도한 방법을 사용해 공항이나 연구소 등에 폭탄 테러 등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78년부터 18년 동안 유나보머(Una Bomber)라는 가명으로 "모든 공장은 파괴되어야 하고, 모든 기술서적은 불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편물 폭탄 테러를 자행하다 체포된 미국의 카진스키(T.J. Kaczynski)를 들 수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 문명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사람들을 적극적 네오러다이트족이라고 한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언저리에서 네오 러다이트의 정당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 존재한다. 6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2만개의 일자리가 생긴다는 전문가 견해도 있는데 그래도 4만개가 마이너스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시발점으로 사회 전반에 퍼진듯 보이는 4차산업혁명은 이미 이전부터 인공지능이란 형태로 과학자들에 의해 개발이 진행되어 왔지만 알파고의 활약에 의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기술적, 물리적인 문제로 인해 구현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지면서 인공지능의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알파고 사건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계기로 전세계는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여 나오고 있다. 아마존 고(Amazon Go)라고 불리는 무인스토어에서는 고객이 가게에 그냥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 모든 과정은 센서와 인공지능이 처리한다. 제조업의 자동화인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도 지능적 공장경영을 통해 직원수를 줄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아마존고와 스마트팩토리의 예에서 보듯이 일자리 감축에 대한 우려감이 생기는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러다이트 운동의 예나 2차세계대전 후 발명된 컴퓨터의 도입에 의한 사무자동화의 예로 볼 때 네오 러다이트 운동의 정당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기계화에서도 전산화에서도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자리가 감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일자리가 다양화되고 고급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0년 전 공대생들이 연산자를 가지고 고생하면서 계산하던 시대에서 이제 스마트 폰을 간단히 계산하면 좀더 응용분야 연구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다이트 운동의 4차산업의 적용인 네오러다이트 운동의 정당성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는 다가오는 아니 이미 도착한 4차산업혁명을 환영하는 것이 맞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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