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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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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만든 '골드스타' 금성사 전축

전축(電蓄)은 전기축음기의 준말로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바늘이 돌면서 받는 진동을 전류로 바꾸고, 이것을 증폭하여 확성기로 확대하여 소리를 재생하는 장치. 모터, 픽업, 턴테이블 따위로 구성된다.

개요

전축은 음파를 기록한 물체의 진동을 진동전류로 바꾸어 확성기를 통하여 소리를 재생하는 기구이다.

미국의 에디슨이 1877년 구리원통에 석박을 붙이고 회전시켜 음구(音溝)를 파서 녹음하고 바늘진동판으로 음을 재생하였다. 한국에는 1899년 3월 13일자 ≪황성신문≫에 유성기(留聲機) 판매에 관한 기사가 나온 것이 최초 기록이다.

이 해 동짓달 조정에서는 일본에서 온 기술관을 초청하여 명창 박춘재(朴春載)의 <적벽가 赤壁歌> 한 가락을 취입하고 재생하니 고종은 "춘재 네 명이 10년은 감히○구나."하여 당시의 유성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이 보다 앞선 1880년(고종 17) 대동강으로 들어온 프랑스신부가 평양감사에게 이를 보였으나 귀신의 소리라고 일축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1886년충청남도 아산의 해미현감이 유태인 오페르트(Oppert,E.J.)가 타고 온 선상에서 연통식 유성기의 소리를 들었다고도 전한다.

한쪽 면에만 녹음한 것으로는 1908년 미국 빅터회사의 원반식 레코드가 최초로 나왔는데, '한국 서울 성도채옥창(聖桃彩玉唱)·부병창(夫竝唱)'으로 창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양면 녹음은 1914년≪매일신보≫의 광고란에 처음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창이 주였으나 차츰 대중화되기 시작하여, 1926년윤심덕(尹心悳)의 <사(死)의 찬미(讚美)>가 레코드음악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다.

1927년에는 JODK경성방송국이 개국함에 따라서 마이크로폰을 이용한 레코드가 나오게 되어 당시의 동요 <반달>, 국악(민요·경기잡가), 대중가요·만담·찬송가·영화해설 등이 나오게 되었다.

영화해설은 인기변사 성동호가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을 석장의 레코드로 취입한 것이 인기가 높았으며, 가요로는 <황성 옛터>가 포리돌레코드사에서 나왔다. 그 뒤 1929년 오케이레코드사가 설립되어 신민요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를 유행시켰다.

당시에는 유음기(留音機)·사음기(寫音機) 또는 유성기로 부르다가 축음기로 통칭된 것은 1930년 후반부터였다. 휴대형 축음기는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의 판매광고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대중가요·영화해설·국악 등의 인기에 힘입어 축음기도 널리 보급되었는데, 1935년 말 ≪월간음악≫에 축음기의 보급대수가 30만 대 이상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중류 이상의 가정에 상당히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최초로 나온 레코드판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노래한 <4대문을 열어라>라는 남녀혼성합창곡으로 왁스판에 녹음한 것이었다. LP판의 국내 소개는 미군정시대에 주한미군 고문관들이 방송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6·25전쟁을 통하여 미군의 휴대품으로 들어온 전축(전기축음기의 약칭)이 많이 보급되었다.

1951년 중반 자기 테이프를 사용하여 원반에 녹음하는 방식을 써서 직접녹음의 반복 때 음질 저하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축의 보급은 산업구조의 취약, 낮은 국민소득으로 수요가 한정된 까닭에 외국산 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1963년에 주식회사 금성사에서 전축을 개발하여 시판하였으나 수요가 적고, 물품세가 65%로 시중의 외제 탈세품과 성능과 가격면에서 경쟁이 되지 못하여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

국산 전축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972년 3,000대 정도가 생산된 이후 녹음기능 등이 추가되고 AM방송과 FM방송도 청취하는 스테레오형인 종합뮤직센터로 보급이 확산되었다.

국내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축의 보급도 증가하여 수요패턴이 다양해졌다. 초기의 단순한 음의 재생에서 하이파이로, 하이파이에서 스테레오로, 다시 앰프·튜너·테이프덱·플레이어 등이 분리된 컴포넌트형으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음질의 충실도를 기하기 위하여 잡음제거회로 특허 도입, 자동선곡장치 등이 추가되었으며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한 원격조정으로 다양한 조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품질이 고급화되면서 1980년에는 주식회사 금성사의 스테레오전축이 미국의 소비자연맹의 잡지에 최우수제품으로 선정되는 등 수출상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이 발전하였다.

선진국의 기술동향에 따라 국내의 음향기기도 최신 디지털오디오디스크(DAD)시스템, AM스테레오, PCM오디오화하고 있다. 디지털오디오디스크는 음향신호를 2진 부호인 0, 1에 대응시킨 디지털신호로 변환시켜 기록재생하는 방식이다.

디지털오디오디스크는 콤팩트디스크(CD)·미니디스크(MD)·오디오하이덴시티디스크(AHD) 등으로 편면연주시간은 60분이다.

기록재생방식은 콤팩트디스크가 광학식, 미니디스크가 압전방식, 오디오하이덴시티디스크는 정전용량방식으로, 국내 가전업체에서는 콤팩트디스크방식 기술을 도입하여 1984년부터 생산을 하고 있다.

또한, 텔레비전이 음성다중방식으로 됨에 따라 텔레비전과 스테레오전축을 결합한 오디오비디오(NV)시스템이 보급되기 시작하여 영상을 보면서 입체음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를 통해서 디지털 기술을 축적한 결과 1990년대에는 최첨단 음향기기들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일반 애호가들도 가정에서 고품질의 음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CD의 양산에 이어 LDP(Laser Disk Player)의 개발과 영상을 곁들인 반주기기의 개발이 잇따랐다. 다시 말해서 음향기기의 급속한 디지털화에 따른 최첨단 음향기기들이 선을 보이면서 다음과 같은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첫째, 음악 소스의 변화에 따른 턴테이블의 급속한 감소와 CDP(Compact Disk Player)의 급성장 및 LDP의 시장 형성, 둘째 데크 부분에서는 기계식 데크에서 전자식 데크로의 변화 및 DAT(Digital Audio Tape Recorder)와 DCC(Digital Compact Cassette)의 출현, 셋째 앰프 부분에서도 CDP, DAT 등에서 재생된 신호를 디지털로 전송해 주는 디지털 앰프의 출현, 그리고 디지털화·전자화의 영향으로 오디오의 영역을 오락 및 정보 등에도 용도가 확대되면서 컴퓨터와 연계되어 멀티 미디어시대의 개막을 재촉하였다.

시대별 전축

  • 60년대 일반적인 전축의 모습으로 전축의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가 하나의 제품으로 한 세트가 아주 부피가 컸다. 앰프 아래의 박스에는 당시 검은 디스크 판들 넣던 부분이었다. 이 전축 하나 집에 있으면 엄청 부자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격도 비쌌고 물건이 주는 위압감도 대단했었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중년 분들의 기억 속에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이 전축을 보면 기가 질렸던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만지지도 못하게 했던 물건이다. 보통 이 전축은 가동을 하면 불빛이 들어오는데 그 불빛이 엄청 신기롭게 느껴졌었다는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60년대 전축을 백화점에서 팔던 시절의 모습으로 독수리표로 유명했던 쉐이코사의 전축 모습이다. 한눈에 봐도 크기도 크고 나무로 만든 제품이기에 무게도 엄청 나가는 고급 제품이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당시 60년대 기술로 봐서는 이런 제품은 세계 첨단 제품에 속한 물건이었다.
당시 60년대 전축을 백화점에서 팔던 시절의 모습. 독수리표로 유명했던 쉐이코사의 전축
  • 69년도 주간경향에 광고로 이 시절부터 전축 모델의 혁신이 나기 시작했나 본다. 전축과 스피커가 붙어 있던 전축에서 스피커와 앰프가 분리되는 모델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는 경제상황이 좋지 못해서 전자제품을 일시불로 구입하는 사람보다 월부, 할부로 많이 판매했었다. 즉 계약금을 내고 할부기간을 정해서 매일 불입해서 완불 후 물건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었다.
69년도 주간경향에 전축 광고
  • 70년대 중반 경의 금성 오디오 세트 광고. 턴테이블과 앰프. 그리고 스피커가 분리되어 따로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카세트 데크가 일치되지 않아서 카세트는 따로 구입하는 다른 물건이었다. 광고 속에는 당시 70년대 최고의 히트작인 상자형 카세트 녹음기 모습도 보이는데 당시 이 카세트는 어학 학습용으로도 많이 팔렸고 참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물건으로 일반인들은 좀 구입하기 힘든 비싼 물건이었고 보급률이 높지 않았다. ​
70년대 중반 경의 금성 오디오 세트 광고
  • 80년대 들어 소위 컴포넌트 시대가 열립니다. 그것은 전축, 라디오, 카세트가 한데 모아진 그야말로 음악센터 같은 역할을 했던 오디오 세트로 한 세트의 무게도 대단했고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방보다는 거실 같은 큰 규모의 장소에 어울리던 전축이었다. 사진은 80년대 초반에 나온 인켈 CS-8000 모델이다. 당시에는 헤트셋을 이용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유행이었고 그 시절 광고를 봐도 헤드셋을 한 모델이 많이 등장했다.
80년대 들어 소위 컴포넌트 시대가 열렸다.
  • 80년대가 지나면서 오디오의 크기가 작은 크기로 변하는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물론 스피커가 작아지니 출력도 작아져서 80년대 오디오보다는 소리가 작지만 장소나 크기를 많이 차지하지 않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그래서 탁자나 침대 옆에 놓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오디오 세트가 유행하는 시대가 바로 90년대의 모습이다.
90년대의 모습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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