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화
공업화(工業化, industrialization)는 산업 구성의 중점이 농업 광업 등의 원시산업에서 공업으로 바뀌고 전통적인 사회가 근대화되는 현상을 말한다.[1]
개요[편집]
채취 산업에서의 생산력이 커져 사회 성원이 소재 형태로 소비하고도 남는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또 잉여노동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가공 변형시킴으로써 다른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활동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공업화의 시초이다. 공업화를 통하여 개발도상국에게 미래에 대한 개괄적인 전망을 할 수 있게 해주며 경제발전은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나 단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후진국의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하거나 발전단계나 과정을 축소시키는데 유용한 지표가 될 수 있다.
후진국들의 경제발전의 기본적인 애로요인은 낮은 자본축적에 기인하게 된다. 저생산, 저소득의 기본 원인이 바로 낮은 자본축적에 기인하게 된다. 따라서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경제발전의 관건은 자본축적에 있다. 자본을 축적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자발적인 저축증대, 농촌의 과잉 잠재실업 구의 생산인구화, 그리고 외자도입이 있다. 축의 증대와 공업화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을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로 흡수하게 될 때 후진국의 경제는 성장하게 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제도적 구조가 변화될 때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공업화 단계[편집]
농림 수산업을 1차 산업(Ⅰ), 광공업을 2차 산업(Ⅱ), 나머지를 서비스산업(S)으로 구분하는데, 경제가 발전될수록 노동력은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을 거쳐 서비스산업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처음 지적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페티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에 와서 공업의 비중이 국민 총생산의 20%를 넘고 1인당 국민총생산이 1,100달러를 넘어선 나라를 신흥공업국이라고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공업화 초기에는 산업별 부가가치 구성비가 Ⅱ「Ⅰ「S의 형태를 갖지만, 공업화가 진전되면 Ⅰ「Ⅱ「S라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한편, 공업이 있기 전의 자본재 부가가치와 소비재 부가가치의 비율은 0:100이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1:99, ……, 50:50, 51:49'로 소비재 부가가치의 비중이 점점 작아진다. 이와 같은 변화를 '호프만의 법칙'이라고 하며, 그 비율을 '호프만의 비율'이라 한다. 호프만은 그 비율이 5±1.5:1인 상태를 공업화의 제1단계, 2.5±1:1인 상태를 제2단계, 1±0.5:1인 상태를 제3단계, 그 이하의 상태를 제4단계라고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미국 등지에서 1800년을 전후하여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제1차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1860년을 전후하여 철강공업을 중심으로 제2차 산업혁명이, 1900년 전후에 자동차 공업·화학공업·전기기기공업 등을 중심으로 제3차 산업혁명이, 1940년을 전후하여 원자력 공업·항공기공업·전자공업·합성 제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과학·산업혁명이 일어났다.[3]
광복후 공업화[편집]
광복 전기[편집]
1945∼1952. 광복과 더불어 시작된 남북 분단은 공업활동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광복 직전 98만 8700㎾에 달하였던 발전능력의 91%에 해당하는 90만 9200㎾가 북한에 있었으므로, 1948년 북한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은 심각한 공업용 에너지 부족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의도적 식민지 수탈정책의 결과인 기술자 부족이 원활한 공업생산활동을 방해하였다.
1944년 당시 기술자 총 8,476명 중 한국인은 19.3%인 1,632명에 불과하였고, 부문별로는 경공업이 1,066명 중 338명으로 31.7%, 중화학공업은 5,063명 중 743명으로 14.7%, 토목건축업은 2,347명 중 551명으로 23.5%였으며, 기술자 비율이 가장 컸던 인쇄와 제 본업에서도 56명 중 24명으로 42.9%, 가장 작은 금속공업에서는 1,214명 중 133명으로 11.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에 추가하여 사회 정치적 불안정도 작용한 결과, 1946년의 공업생산은 1939년 불변시장가격으로 1억 5219만 2000원으로 1939년 수준의 28.8%로 떨어졌다.
1946년 이후 공업생산은 급속도로 회복되어, 1949년 당시 면직물은 1946년의 2.3배, 고무신은 10.3배, 시멘트는 2.5배, 강철은 3.9배 늘어, 변압기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업생산에서 광복이 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공업활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 6·25 전쟁이었다. 6·25 전쟁을 통한 공업의 파손 규모는 절대액으로는 건물·기계설비·원자재 및 제품 등을 합하여 파손 규모가 총 11억 5300만 달러에 달하였으며, 비율로는 건물의 44%, 시설의 42%가 파괴되었다.
국민소득이 공식적으로 추계된 최초의 해인 1953년의 국민 총생산이 13억 5300만 달러였으므로 1억 1530만 달러의 손실은 그 8.5%에 해당하였다. 그 결과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1년 시멘트·철강·변압기 등이 1946년 수준을 크게 밑돌고, 면직물·종이 등이 1946년 수준을 약간 웃도는 등 공업생산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1952년에 있어서도 섬유공업·고무공업·요업·전기기기공업 등이 194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제지공업·화학공업·금속공업·기계공업 등은 약간의 성장을 하였으며, 수송용 기기공업만이 2.3배의 생산 증대를 실현할 수 있었다.[3]
광복 후기[편집]
1953∼1961. 휴전이 되면서 공업은 섬유공업·식품공업 등의 소비재공업과 비료·시멘트·판유리 등의 중간재 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53∼1961년간에 총 22억 8250만 달러, 연평균 2억 5360만 달러씩 제공된 외국 원조가 공업 재건을 위한 자금 및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원조 규모는 1945∼1952년간에 제공된 총 8억 5250만 달러에 비하여 연평균액으로는 2.3배가 넘는 것이었으며, 특히 1955∼1958년간에는 연평균 3억 1690만 달러로서 총 12억 6760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가 집중적으로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원조는 공업생산액을 1953년 3253억 원에서 1961년에는 8560억 원으로 2.6배, 부가가치를 1043억 원에서 2498억 원으로 2.4배 증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1975년 불변시장가격 기준).이 기간 중에 제공된 원조의 28%가량이 계획 원조, 즉 시설재 원조였으며 그중 31%가량이 광공업 부문에 투입되었고, 63%가량이 교통·전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지출되고, 나머지 6% 정도가 1차 산업에 배정되었다. 원조의 72%가 비 계획 원조, 즉 소비재 및 원자재 원조에 집중된 것은 해마다의 방대한 국방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산업별로 보면 중화학공업이 3.9배가 넘는 생산액 증가를 실현하여 경공업의 2.3배 성장을 크게 웃돌았다. 그중에서도 제1차 금속공업이 7.5배 성장하였고, 비금속광물제품공업이 4.3배 커졌으며, 목재 및 목재제품공업이 1.6배 성장으로 가장 뒤졌다. 비록, 성장률에 있어서는 경공업을 앞질렀지만 중화학공업의 비율은 경공업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낮아 1953년의 18.5%에서 1961년의 28.0%로 9.5%가 커졌다.
1961년에 있어서 가장 큰 공업은 음식료품 및 담배 공업으로 그 비중은 36.4%였고, 그다음이 섬유·의복·가죽 공업으로 26.5%를 차지하였다.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인 비금속광물제품공업은 3.0%로 가장 작았다. 이와 같은 성장은 공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1953년 8.9%이던 공업의 부가가치 구성비는 1961년 13.5%로 4.6%가 커졌다. 한편, 중화학공업의 급속한 성장에 힘입어 소비재 산업에 대한 자본재산업의 비중도 커져서 호프만 비율은 1953년의 12.61:1에서 1961년의 6.45:1로 변화하였다.
이 기간 중 공업부문의 고정자본 형성액은 4766억 3000만 원으로 총 고정자본형성액 1조 8441억 9000만 원의 25.8%에 달하였다(1975년 불변시장가격 기준). 그러나 한계고정자본계수는 평균 1.4로 극히 낮았다. 공업이 국민 총생산 성장에 미친 기여율은 1954∼1961년 사이 평균 26.9%로서 단일 산업으로서는 가장 컸지만, 국민총생산 성장률 그 자체는 연평균 3.9%로 극히 낮았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국민 총투자율은 연평균 12.4%였는데, 그 66.1%가 해외 저축, 즉 원조였고 나머지 33.9%가 국민 저축이었다. 1인당 공업생산액은 1953년의 5.9달러에서 1961년의 11.0달러로 2배가량이나 커졌지만, 1960년 미국의 1인당 공업생산액 800.9달러의 1.4%, 일본의 158.5달러의 6.9% 수준에 불과한 미미한 것이었다.[3]
계획적 개발체제하의 공업화[편집]
1954∼1959년 사이 초기의 목표 성장률 15.0%, 연평균 성장률 8.8%라는 내용으로 짜여진 '한국경제재건계획(네이산보고서)'을 거부하고, 방임적 시장경제체제 확립에 노력하였던 자유당 정부와는 달리, 공화당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연속 실천을 통한 계획적 개발체제를 지향하였다.
계획화의 기본 방침으로서 첫째로 되도록 민간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되, 기간 부문과 그 밖의 중요 부문에 대하여서는 정부가 직접 관여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유도 정책을 쓰는 지도 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침으로 하고, 둘째로 우리 경제의 궁극적인 진로는 공업화를 통한 산업의 근대화에 있다는 정책태도를 밝혔다. 이와 같은 정책태도는 우리 경제의 특징을 명령경제체제로 바꾸어 갔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하여 공업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의 민간활동의 큰 테두리를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획 목표량 할당 및 그 완수와 관련하여 크고 작은 모든 활동에 있어 규제와 명령을 강화시켜 갔다. 이 기간 중의 공업화와 이를 주축으로 한 경제활동은 노동력의 무제한 공급 상태에 있었던 1962∼1973년의 전기와 제한적·탄력적 공급으로 변화한 1974∼1981년의 후기로 구분할수 있다. 전기에 있어서 공업은 전면적 보호주의 위에서의 급속한 중화학공업화로 일관되었다.
이는 1950년대의 공업건설이 1958∼1960년 사이 소비재 산업 과잉생산 공황을 가져온 데 대한 경계와 중화학공업의 낮은 비율로 인한 낮은 공업 자립도에 대한 우려 등에도 일부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집권세력 및 경제관료가 가지고 있던 중상주의적 국가 건설 이념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집권층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철강·자동차·정유·비료 등 주요 중화학 공업 부문의 공장 건설을 위한 차관 교섭단을 미국·서독·일본 등에 파견했으며 사회경제적 악순환의 시정이라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과제와 상관없이 중화학공업화에 전념하였다.
공업화를 통한 산업의 근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1962∼1973년간의 총 투자율은 연평균 21.5%로 커졌고, 그 6 0.4%가 국민 저축을 통하여 자주적으로 조달되었다. 그런데 저축의 39.6%를 담당한 외국자본에도 변화가 생겨 이 기간 중 무상원조는 총 12억 8190만 달러, 연평균 1억 680만 달러로 1953∼1961년 평균의 42.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유상의 차관 및 외국인 직접투자가 총 43억 9320만 달러, 연평균 3억 6610만 달러로 커졌다. 이와 같이 조달된 내·외자를 합한 투자 총액(고정자본형성)은 13조 3820억 6000만 원에 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25.2%에 해당하는 3조 3741억 8000만 원이 공업 부문에 투자되었고, 공업투자의 32.8%에 해당하는 1조 1081억 원이 중화학공업에, 나머지 67.2%인 2조 2661억 원이 경공업에 배분되었다.
규모가 커진 공업 투자에 힘입어 1962∼1973년의 공업은 연 19.5%라는 높은 복리 성장률로 성장하여, 국민총생산 성장에 대하여 31.4%라는 기여율을 보였다. 그 결과로 경제성장률은 9.0%로 커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인당 공업생산액은 기간 말인 1973년 당시 95.6달러로 커져 1961년의 11.0달러에 비하여 8.7배 가까이 성장한 수치를 보여주게 되었다.
공업화 건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공업생산총액은 1962∼1973년간에 8.8배 이상 커졌는데, 이는 같은 기간 중 16.0배가량이나 증가한 중화학공업생산에 이끌린 결과였으며, 중화학공업의 비율도 50.8%로 경공업을 능가하게 되었다. 산업별로는 정유 공업이 속하여 있는 화학물·석유·석탄·플라스틱 공업이 1961년 대비 22.7배 이상 커져 전체 공업의 25.5%를 차지하는 가장 큰 공업이 되었고, 철강공업을 포함한 제1차 금속공업이 15.6배 이상 커졌으며, 경공업에 있어서도 섬유·의류·가죽 공업이 식음료품·담배 공업을 앞질러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업이 되었다.
이 시기의 공업화는 수출에 의하여 주도된, 따라서 '값싸고 품질이 좋고 풍부한 노동력'이라는 유일한 비교우위 요인을 바탕으로 하여 경공업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가능한 최대한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업화 이었다. 이것은 1962∼1981년간의 공업 투자 총액 10조 4645억 원 중 61.8%에 해당하는 6조4633억 원이 비교우위 없는, 즉 수출·산출고 비율이 낮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는 것에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공업발전은 크게 두 가지 공업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하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반도체공업 등 첨단기술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석유화학산업이었다. 1981∼1994년간에 공업생산은 3.4배 증가하였는데 중화학공업생산은 4.1배 증가한 반면 경공업 생산은 2.3배 증가한 데 불과하였다.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1980년대 공업발전을 주도하였던 제1차 금속공업생산은 1.9배 증가한 데 비하여 화학물·석유·플라스틱공업 생산은 2.6배, 조립 금속제품·기타 공업은 7.5배나 증가하였다.
1961∼1981년간에는 제1차 금속공업생산은 83.6배나 증가했는데, 화학물·석유·플라스틱공업 생산은 53.4배, 조립금속 제품·기타 공업은 45.9배 증가하였을 뿐이었다. 첨단기술산업 중 반도체공업을 보면 1994년 현재 그 생산액은 9조 8000억 원으로 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의 1.7%에서 3.3%로 커지고 전자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6.4%에서 26.9%로 커졌다.
1995년 당시 품목별 반도체 생산실적은 개별소자 3억 8000달러, IC 157억 4000달러(그중 메모리 분야가 149억 1000달러, 비 메모리 분야가 10억 3000달러로 메모리 부문에 집중되고 있다), 조립 49억 2000달러로 생산액은 총계 210억 1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생산 기반을 토대로 1995년 수출실적은 190억 1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반하여 수입은 30억 3000달러에 불과하다.
1980년대 후반에 일시 정체를 보이던 컴퓨터 산업은 1990년대 들어 국내 정보화 기반이 확충되면서 생산과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95년 당시 컴퓨터 본체 생산은 1조 1000억 원, 주변기기 생산은 4조 2000억 원으로 1991년에 비하여서는 2.0배 이상 커졌고 수출도 44억 1000달러로 1.8배가량 증가하였다. 한편, 기종별 컴퓨터 보급 상황을 보면 1995년 현재 범용컴퓨터 실제 가동 대수는 1만 8238대인데 그 중 슈퍼컴퓨터 가동대수는 10대이고 초소형 컴퓨터 가동 대수는 1만 2981대였다. 워크스테이션 가동 대수는 9만574대이고 개인용컴퓨터 보급대수는 534만 9000대에 이르고 있다.
일반 기계공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의 6.8%에서 1994년에는 6.6%로 오히려 작아지고 있다(생산액 기준). 그 밖에 1995년 당시 섬유기계 생산액은 1조 원, 농업기계 생산액은 1조 5000억 원, 건설·광산·기계 생산액은 2조 2000억 원, 운반하는 기계 생산액은 2조 8000억 원에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NC 공작 기계 생산액은 53조 4000억 원으로 1991년의 21조 3000억 원에 비하여 2.5배 이상 커지고 있다. 또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는 생산은 1991∼1995년간에 12조 1000억 원에서 12조 7000억 원으로 5%밖에 신장되지 못하였지만 수입은 2조 7000억 원에서 8조 1000억 원으로 증가하여 총공급은 14조 5000억 원에서 20조 8000억 원으로 커졌다. 이 역시 공업화가 첨단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1994년 당시 석유화학공업생산액은 10조 2000억 원으로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유화학제품 생산능력은 1990년대 들어오면서 급격히 확충되어 에틸렌 생산설비는 1989년의 연산 115만 5000t에서 1994년에는 357만 t으로 3.1배가량 커졌고 합성수지·합성원료·합성고무 등 3대 유도품 생산능력도 451만 5000t에서 848만 3000t으로 1.9배가량 커졌다.
3대 유도품 생산능력을 품목별로 보면 합성수지는 320만 3000t에서 623만 3000t으로 1.9배, 합섬원료는 107만 2000t에서 200만 5000t으로 그 역시 1.9배 늘었으나 합성고무 생산능력은 24만 t에서 24만 5000t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86∼1998년간에 기초유분 생산능력은 926만 t으로, 특히 에틸렌 생산능력은 4억 2900만 t으로, 합성수지는 843만 1000t, 합섬원료는 517만 5000t으로 증설되었으며 합성고무 생산능력도 1996년까지 42만 5000t으로 확충되었다. 조선공업이 1970년대에 이미 수출산업으로 출발, 성숙한 데 이어 자동차 산업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성숙산업이 되어 수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 57만 2000대였던 자동차 생산대수는 1996년에는 955만 3000대로 커졌고, 특히 승용차 생산은 26만 7000대에서 689만 4000대로 커졌다. 이 같은 생산 증대를 바탕으로 1985년에 12만 3000대에 불과하였던 자동차 수출도 1995년에는 108만 3000대로 늘어났다. 이 같은 첨단기술산업 등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 후반 이후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한국 공업의 생산과 수출의 핵심 역할을 하였던 섬유산업 등 전통 공업은 상대적으로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1995년 당시 면직물 생산은 2만 9408㎡로 국내 수요 7861만 1000㎡의 37.4%를 충족시켜줄 뿐이다. 모직물 공업의 경우 사정은 약간 좋으나 그 역시 생산 1억 150만㎡, 국내 수요 9107만㎡로 자급률은 111.4%에 불과하다. 첨단 기술공업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제조공업 성장은 1980∼1995년간에 연평균 10.0%라는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에 31.0%이던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는 1988년에 일단 32.5%로 정점에 도달한 다음 줄어들기 시작하여 1995년에는 26.8%로 떨어졌다.
제조업 비중이 일정한 크기에 도달한 다음에 다시 하락한다는 것은 선진 공업 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현상이다. 이 같은 탈공업화가 근자에는 이른바 정보통신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가 작아지는 것은 경제발전과정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 일어나는 제조업 부가가치 구성비 하락을 자연적 추세 현상이 아니라 돌발적 왜곡 현상으로, 또 시기에 맞는 것이 아니라 시기 상조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988년의 건축 붐을 계기로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공업건설 및 경영을 위한 채산성을 악화시켰다는 점이다. 1983∼1987년간에는 연평균 4.4% 오른 데 불과했던 건설업 임금 상승률이 1988∼1992년간에는 17.7%로 커졌다. 이로 인하여 임금 일반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전 산업 평균임금 상승률은 1983∼1987년간의 9.4%에서 1988∼1992년간은 17.6%로 커졌고, 제조업 임금 상승률도 10.2%에서 19.5%로 커졌다.
둘째는 이 같은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특히 1989년경부터는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63∼1973년간에는 실업률이 연평균 5.8%, 제조업 실질 임금 상승률은 2.3%, 경제성장률은 9.6% 이어서 노동시장은 나름대로 노동력 무제한 공급 단계적 성격을 가졌었다. 그리고 1974∼1989년 사이에도 실업률 3.8%, 제조업 실질 임금 상승률 8.2%, 경제성장률 8.6%로 한국경제는 노동력의 제한적, 탄력적 공급 양상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1990∼1995년간에는 실업률 2.4%, 제조업 실질 임금 상승률 7.7%, 경제성장률 8.3%로 노동력의 완전 비탄력적 공급단계로 이행하였다.
이 같은 과잉 고용, 즉 만성적 노동력 부족이 공업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끝으로 비싼 이자, 비싼 세금, 이른바 준소세라고 불리는 기업의 경영 외적 부담, 그리고 비싼 물류비용·토지비용 등이 고비용 생산구조를 정착시켰다. 그래서 기업은 이 같은 생산 상의 불이익을 덜기 위하여 때마침 실현된 한·중 국교정상화, 한·베트남 수교 등에 힘입어 종래의 동남아시아에 더하여 중국·베트남 등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의 해외 진출은 국내 산업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1981∼1992년간에 공업부문에 대한 투자 총액은 135조 5996억 원이었다. 이는 그 기간 중 투자 총액 520조 4874억 원의 26.1%에 약간 못 미치는 크기다. 이는 같은 기간 중 제조업의 부가가치 구성비, 즉 공업구조가 평균하여 30.2%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공업 투자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공업화〉, 《위키백과》
- 〈호프만의 공업화 단계〉, 《네이버 블로그》, 2013-11-13
- 〈공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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