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타이
무에타이(Muay Thai)는 태국의 전통 격투기이자 현대적인 격투 스포츠로, 흔히 "팔 가지 무술"이라고 불린다. 이는 무에타이가 양손, 양발, 팔꿈치, 무릎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상대와 겨루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유래되었다. 무에타이는 강력한 타격과 클린치 기술, 치밀한 전략적 움직임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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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무에타이는 타이의 전통 격투 스포츠로 1000년 가량 이어진 전통있는 무술이다. 그러므로 타이 복싱으로 불리기도 하며 타이의 고대무술 무어이보란이 현대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에타이는 크게 람무아이와 크라비크라봉으로 나뉜다. 람무아이는 맨손 격투술이며, 크라비크라봉은 '크라비' 등의 무기를 사용한 기술이다. 그 중 우리에게 보편적인 것은 람무아이로, 단단한 신체 부위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때려 부수는 격투 방식이다.
무에타이는 타이가 5천년 이상 외세의 지배를 단 한번도 받지 않게 끔 도와준 애국무술로 현지에서 여겨지고 있다. 무에타이의 효시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무예가 흘러들어간 것이라 주장하며 타이쪽에서는 중국 무술의 원조가 자기들 것이라 서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타이에 인접한 나라들도 각기 자신들이 원조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뚜렷한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어느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단지 근대 무에타이의 기원은 타이의 오래된 군사무술 지도서인 '유타삿'이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책에는 창과 칼, 전쟁용 도끼, 방패, '마이속'이라 불리우는 "ㅓ"모양의 몽둥이 등을 이용한 전투 방법이 나와 있으며 전장에서 무기를 잃었을 경우 백병전으로 싸울 수 있는 맨손 격투술이 수록되어있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이기 전부터 타이는 주변의 나라로부터 수없이 많은 침략을 받았으며 무에타이를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1]
역사[편집]
태국 무술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태국과 오랫동안 라이벌이던 미얀마(렛웨이)나 캄보디아(보카토), 라오스(무에 라오)에서는 무에타이를 본래 자신들 전통 무술이지, 태국 무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태국에게 전쟁에서 지면서 포로가 된 자국 무에타이 고수들이 태국에 전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무에타이의 존재감을 알린 영화 옹박을 봐도 미얀마인 무에타이 고수가 마지막에 나와 주인공과 격돌하는 게 나온다.
이런 주장이 나올 만한 것이 이 무술들이 모두 인도의 "무스띠 유다(मुष्टियुद्ध)"에서 파생된 무술들이며, 서로 교류하면서 비슷한 포맷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각 무술마다 역사가 매우 깊기에 국가마다 명칭도 다르고 스타일에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라오스에서는 무에 라오(ມວຍລາວ), 캄보디아에서는 보카토(ល្បុក្កតោ), 미얀마에서는 렛웨이(လက်ဝှေ့), 말레이시아에서는 토모이(Tomoi)라고 불리며 행해진다. 이 격투기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강한 선수들이 활동하는 게 무에타이인지라 다른 형제 무술들은 무에타이의 아류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으며 1900년대 이후 특유의 무규칙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링 경기라는 성격과 경기에 깊숙이 파고든 도박으로 인해 전통을 중시하는 분위기보다 일단 한 판 승리에 요긴한 기술들을 가리지 않고 집어넣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특히 복싱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무에타이의 펀치 테크닉의 상당수는 복싱에서 따왔을 정도이다. 2-30년대 복싱의 전파로 큰 변환점을 맞고[9] 근대 복싱의 특징들을 수용하며 스포츠화를 꾀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중국 남부 지역에서 태국은 그리 멀지 않은 이유로 중국권법가들의 도전을 많이 받았다. 1970년대 홍콩 무술영화에서 무에타이 고수들이 하나같이 허접하고 얻어터지는 묘사가 자주 나오자 이를 본 태국의 무에타이 고수들이 분개하여 중국 무술 도장을 찾아가 아주 박살을 낸 일화들도 있다.
여담으로 중국 전통 무술의 경우 MMA 선수 겸 관장인 쉬샤오둥이 일종의 도장깨기로 실전성 여부에 종지부를 낸 만큼 실전성에 있어 호평받는 무에타이와 붙었다면 실력차가 압도적인 게 아닌 이상(그나마도 도장 깨기하는데 뜨내기 초보자를 보냈을 가능성은 적다), 대부분의 쿵후고수들은 일방적으로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쿵후의 초식은 체계화되기 전 다른 무술들이 많이들 그러했듯 지나치게 전근대적이라 실전성이 많이 부족하고 쿵후 중 그나마 실전성이 뛰어난 편이라는 영춘권도 빠른 속도가 장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실전성이 뛰어날 뿐 싸움법 자체가 무에타이에 불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MMA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MMA 필수 무술들과 단일 종목으로 붙어도 상대가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에 반해 무에타이의 경우 오히려 너무 강한 살상력을 억누르기 위해 K-1이나 MMA에서 룰을 개정해 무에타이 기술을 다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약없이 무에타이 고수와 쿵후고수가 붙는다면 강한 위력과 수많은 스파링으로 다져진 낙무아이들이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도 해외에서 격투가들이 많이들 도전해 오지만 패배하고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태국인들이 과격한 경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태국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기의 투기 종목들은 하나같이 매우 과격하고 유혈이 낭자했다. 1950년대에 복싱 경기에서 영향을 받고 스포츠화 되어 경기 방식이 굳어지기 전까지는 기본이 맨주먹에 마 밧줄로 매듭을 지어 래핑을 한 것이었고, 뒷거리 경기에서는 유리가루를 묻혀 커팅을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요컨대 다른 나라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던 뒷거리 경기와도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근대적인 무에타이의 경기방식이 현대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에타이 경기에 도박이 깊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으로, 오직 승리만이 중요한 판에 룰을 부여하고 제약을 걸어놓으면 제대로 된 승부가 안 나게 될 확률이 생기기 때문이다. 많은 기술 교류가 있었던 극진 가라테와 비교하면 극진의 창시자인 최영의는 지극히 실전을 추구했지만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안면 타격을 금지시켜 극진 가라테의 실전성을 깎아먹는 결과를 낳았고 무에타이는 실전보다도 강력하게 보이고 흥행적인 룰을 부여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발전했음에도 선수들의 몸을 생각하지 않아서 아이러니하게도 실전성과 살상력이 수위급인 무술로 발전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 선수를 보호하는 룰 개정과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무에타이의 살인적인 위력으로부터 선수들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무술이 복싱의 체계적인 수련법과 링, 라운드 제도가 도입되면서 현대의 무에타이로 발전했다. 현대 무에타이의 주먹 기술은 복싱의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복싱 선수가 무에타이로 이적하거나 무에타이 선수가 복서로 이적하는 일이 잦다. 다만 복싱과 무에타이 펀치 스킬은 약간 다르다. 기본이 높고 퍼진 하이 가드인지라 펀치를 내는 메커니즘도 조금 다르고, 골반 포지션도 중립에 가까워 양손의 파워가 고루고루 강하다. 본토 무에타이 시합에서 펀치를 유달리 쓰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예를 들어 외국 출신으로 태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라몬 데커가 유명하다.
다만 최근에는 K-1의 룰 개정으로 인해 쁘아까오처럼 펀치 기술을 향상 시킨 경우도 있고 ONE Championship이나 Glory(킥복싱)처럼 킥복싱 룰 혹은 킥복싱에 가까운 무에타이 룰을 가진 태국 밖에서의 시합에 참여하는 낙무아이들이 늘며 타완차이처럼 점차 펀치 기술을 주력으로 연습하는 선수들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2]
분류[편집]
무에타이는 약 천년 정도 계승되어 내려온 무아이보란(=고대 무술)이라는 태국 전통 무술이 근대로 들어오며 크게 발전-개량되어 완성된 형태로, 람무 아이와 크라비크라봉이라는 두 가지 체계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에타이는 이 중 람무 아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펀치, 킥, 팔꿈치, 무릎 등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맨손 격투술, 끄라비끄라봉은 장봉, 단봉, 검, 방패를 이용하는 무기 격투술이다.
람무 아이를 익힌 사람을 낙무아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낙무아이라 한다면 람무 아이의 수준이 일정 이상으로 성숙한, 국내의 무술로 빗대자면 무에타이 1단 이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다른 무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금 깔짝대다가 '나 xx유단자요, xx 해 봤소.'하고 나서다가는 이뭐병 취급 받기 딱 좋은 것과 마찬가지로 1단이 반드시 낙무아이의 조건은 아니다. 대개 시합 경험이 있는 선수부터 낙무아이라 지칭한다. '낙'이라는 말은 태국에서는 '프로' 혹은 '직업적인'이란 뜻을 가지며, 낙무아이라는 말은 무에타이의 수련 기간과는 별개로써 아예 직업이 무에타이 선수인 자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학생 때 복싱부 생활을 했거나 사회체육으로 복싱을 했다고 프로 복서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무에타이를 경험했다 해서 낙무아이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무에타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을 낙무아이라 부른다. 복서의 뜻이 복싱 선수인 것과 유사하다.
람무 아이 이전, 즉 1950년대 이전에는 촉무 아이라 하여 룰을 비롯해 조금 다른 격투기가 있었는데 가장 큰 차이는 촉무 아이는 글러브가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점, 그리고 판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 마디로 한쪽이 실신하거나, 항복할 때까지 데스매치를 벌였다. 현대는 글러브를 끼고 하는 람무 아이, 람무 에로 바뀐 지 오래됐다. 람무 에의 람은 글러브를 의미한다. 이렇게 바뀐 이유는 태국이 서방과 문물 교류를 시작하면서 복싱이 태국에도 도입되고, 복싱 식의 트레이닝과 링을 도입시켜 무에타이 경기를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촉무 에의 촉은 맨주먹을 말하며, 사실 지금의 람무 에 역시 거의 촉무 에에서 사용하던 룰이나 개정을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에 파이팅 스타트 역시 촉, 혹은 욥을 쓴다.
기본적인 경기는 3분 5라운드에 휴식 2분이다. 한국내는 3분 3라운드에 휴식 1분, 또는 3분 2라운드에 휴식 2분을 기본으로 하며 박치기 / 물어뜯기 / 낭심 가격 / 들어서 던지기 / 발등 및 척추 공격의 제한 이외에는 룰이 없다. 현대에 들어서 룰의 개정이 아주 약간 이루어져, 머리에 대한 일부 공격 금지와 다운 공격 금지 / 그리고 상대를 조롱하거나 침을 뱉는 행위를 금지하는 룰이 추가되긴 했다.
이 룰의 문제가 킥복싱과 무에타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특히 킥복싱은 팔꿈치를 금지하고 클린치에서의 니 역시 허용하지 않거나 제한적인 허용만 하기 때문에 경기 양상이 아주 다르다.[2]
특징[편집]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최대한 강한 타격과 공격을 하기 위해 근거리에서 최대한 파워를 살린 일격을 날리며, 팔꿈치와 무릎 등을 다양하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시합이나 패드 워크 동영상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권투의 패드웍이 "Sweet Science"로 대표되는 유연하고 흐름을 타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깔끔한 리듬 등을 강조한다면 무에타이의 패드웍은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살벌한 난타와 큰 동작 위주의 뚝뚝 끊기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한 방 한 방에 상대를 죽여버리겠다는 살의를 듬뿍 담아 치는 느낌이다.
K-1등의 킥복싱 스타일처럼 펀치와 킥의 콤비네이션을 중시하는 기술적인 공방보다, 훨씬 더 격렬한 수위의 공방을 보여준다. 나 한 대 맞고 너 한 대 더 세게 치는 게 기본 리듬으로, 턴제 베어너클을 보는 것마냥 힘껏 후리다가 빈틈을 포착하면 냅다 갖다박고 던져버리는 무언가 근성대결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하이레벨로 올라갈수록 훨씬 기술적인 양상을 띈다.[2]
시설과 용구[편집]
경기는 링에서 이루어진다. 링이란 네 곳의 기둥안 즉, 정사각형의 모양을 가진 지역 전체를 의미한다. 링은 지면에서 90cm 이상, 1.22m 이하로 설치되어야 한다. 링은 두 개의 Size(크기)로 구분한다. 즉 6.40×6.40m의 작은 사이즈, 7.00×7.00m의 큰 사이즈이다. 경기링의 바닥은 장애물이 없이 안전하게 설치하여야 하며 각 로프의 외곽쪽으로 90cm의 여분을 두어야 한다.
복장은 경기에서 쓰는 트렁크 바지를 기본으로 하고, 남자는 기본적으로 웃통을 벗은 채로 한다. 장갑은 과거엔 손가락에 대마로 붕대를 감아 유리가루를 묻혀 사용했으나, 위험하다 하여 현대에 와서는 보다 완화된 경기용 글러브를 사용한다. 선수는 낭심 보호대인 '까잡'을 착용해야 한다.[1]
경기 방법[편집]
무에타이 선수는 시합 전에 전통 음악에 맞춰 경기장 주위를 돌며 복을 비는 뜻으로 '와이크루'라는 춤을 추며 시합을 준비한다. 그 동안에는 신성한 머리띠(몽콘)를 착용한다. 양 팔중 한쪽 팔 이상에 신성한 헝겊(파프랏찌앗)을 묶는다. 허리에도 신성한 헝겊(빡까마) 등을 묶을 수 있으나 시합 도중 이로 인하여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 한다. 경기는 기본적으로 3분 5라운드로 진행하며 2분의 휴식을 준다. 기본적으로 모든 기술들을 허용하나, 박치기, 물어뜯기, 던지기, 걸어 넘어뜨리기, 급소 공격은 경기에선 금지이다.
무에타이는 가능한 모든 부위를 사용하는 무술이므로, 복싱보다는 펀치와 스텝의 빈도가 낮으며 신체의 균형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득점 가능한 신체부위는 주먹, 발차기, 팔굽, 무릎, 잡기기술이며, 전통적인 무에타이 기술로 공격하여 타격하였을 때, 펀치, 킥, 팔꿈치 치기 그리고 비슷한 유형에서 포인트가 되는 방법으로 공격했을 때, 무에타이 스타일을 사용하여 방어하면서 상대선수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때 득점을 하게 된다.
또, 클린치 상태에서도 두 선수 중 우수한 기량을 보인 선수, 상대방을 다운시킨 선수에게 점수가 주어진다. 주심이 한 선수에게 경고하였을 경우 부심은 그 선수에게 마이너스 점수를 주고 주심이 알지 못한 명백한 반칙이 있을 경우에는 부심이 공격자에게 벌점을 주며 주심과 관계없이 마이너스 점수를 준다. 상대의 공격, 또는 잡기기술에서 충격을 받지 않고 넘어진(다운)된 경우는 점수에 해당되지 않는다.[1]
기술[편집]
스탠스(가드) & 풋워크 / 스텝[편집]
무에타이의 스탠스는 상당히 높고 골반이 중립적인 상태인데, 이는 킥을 차기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다. 또한 무게 중심이 뒤쪽으로 쏠리는 경우도 많은데, 이렇게 될 경우에는 욕카방, 혹은 킥 체크라 불리는 킥 방어 기술과 앞발 킥을 사용하기가 편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안면으로 들어오는 엘보와 펀치 킥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하이 가드를 주로 사용하지만, 일부 선수들은 앞손을 길게 뻗어 상대를 견제하고 킥거리를 유지하는 롱 가드(Long Guard)를 사용하기도 한다. 롱 가드와 하이 가드는 종합격투기로 수출되어 매우 높은 빈도로 쓰이는 편이다.
풋워크는 매우 투박한 편이다. 이러한 투박한 풋워크는 무에타이의 특색으로 남았는데, K-1에서 킥복서들이 무에타이 선수들의 느린 풋워크를 약점으로 공략해서 선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특색이 아니라 약점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투박한 풋워크 때문에 무에타이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피하고 쫓기 위한 움직임이 약하다는 것인데, 특히 MMA로 전향하는 경우 빠른 스텝이 매우 중요한 MMA에는 큰 약점이 되기에 무에타이 베이스 파이터들이 MMA로 넘어오면 타격에서는 빠른 스텝을 많이 연습한다. MMA에 맞게 변형된 뱅무에타이도 화려한 스텝을 가진 스타일이다.
다만 스텝이 빠른 킥복서들과 교류를 많이 하고 복싱을 같이 많이 배운 무에타이 선수들중에서 센차이같이 일류선수들중 복싱처럼 점점 빠른 뛰는 스텝을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앞뒤로 무게 중심을 살짝씩 옮겨 가면서 거리와 타이밍을 잡는 것이 기본이고 대치 국면에서는 앞발을 땅에 튕기며 킥을 잰다. 펀치 때는 앞발을 내딛으며, 킥 때는 차는 발을 먼저 땅에 박차고 그 다음 중심 발을 내딛는 것으로 따닥 하는 타이밍을 만들어 풋워크보다 반 박자 빠른 속도로 공격을 발출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체의 좌우 회전을 통한 유연한 연계를 중시하는 복싱과 킥을 접어가며 반동을 줄이고 무게중심의 이동을 통한 콤비네이션을 중시하는 킥복싱과 큰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이다. 본래 펀치 때 숙이고 킥 때 박차는 움직임은 연격이 매우 어려운 동작인데 이를 숙련도로 땜빵치고 5연격 6연격을 욱여넣는 낙무아이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2]
주먹 기술(맛)[편집]
무에타이 펀치의 기반은 복싱에서 도입되었다. 하지만 복싱과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2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스탠스고, 두번째는 중심이동이다. 이 차이는 무에타이의 킥 때문에 발생했다. 복싱 스탠스가 더 비스듬하고 길고 낮은 반면 무에타이의 스탠스는 높고 골반이 앞을 보며 양 다리의 간격이 좁다. 킥의 방어와 발출을 위해선 이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심 이동 또한 복싱은 끊김 없는 움직임을 중시하는 반면, 무에타이는 지근지근 발을 밟으며 위아래로, 앞뒤로 리듬을 탄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무에타이의 손기술은 복싱에 비해 훨씬 더 투박하고 힘이 들어가는데, 골반이 중립적인 위치를 가지기 때문에 양 손의 파워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잽도 스티프 잽마냥 뻣뻣하고 세게 넣으며, 때로는 뻗은 손을 회수하지 않고 상대의 얼굴이나 어깨 등에 문대며 방어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끊어치는것이 아닌 밀어친 상태로 비비듯이 견제하는 경우가 흔하며, 결정타를 셋업하기 위해 나머지 공격에 힘을 덜 주는 복싱과 달리, 한방 한방을 매우 강하게 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펀치의 비중이 낮은 편이었으나 요즘에는 펀치의 비중이 꽤 높아지는 추세다. 최근 낙무아이들도 복싱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갔으며 급기야 펀치로만 거의 복서 수준에 달하기도 한다.
- 옙싸이: 잽
- 또이꽈: 스트레이트
- 맛트롱: 원투
- 맛쾅: 훅
- 맛써이: 어퍼컷
- 맛그랍: 백피스트(손등치기)
- 람뚜와: 옙싸이,또이꽈, 맛뜨롱을 복부에 치는 기술
- 슬리핑 맛써이: 45도로 옆구리에 훅을 날리는 기술
발차기 기술(때)[편집]
- 때카 : 로우킥
- 때람뚜와 : 미들킥
- 때칸커 : 상단 돌려차기,하이킥
- 밀어차기 / 앞차기(딥) : 앞으로 찌르듯이 빠르게 복부 / 턱을 찬다.푸시 킥(Push Kick), 팁 킥(Teep Kick)이라고도 한다.
- 요오랑: 다리를 꼬아 관성으로 한바퀴 돌며 빠르게 복부를 찬다.
- 쪼라켓팟항: 뒤돌려차기. 앞 자세는 위의 요오랑과 비슷하지만 이건 그대로 돌며 발을 높이 들어 뒤꿈치로 턱을 찬다. 얼핏 태권도 기술을 연상케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이 무에타이는 모든 아시아 무술의 뿌리인 인도의 "무스띠 유다(मुष्टियुद्ध)"에서 나온 격투술이며 따라서 당연히 태권도보다 더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고대 무에타이인 무아이보란에 이미 '악어꼬리 휘두르기(쪼라켓팟항 Jorakae Fad Hang / Crocodile tail whip)'이란 이름을 가진 기술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Spinning Back Kick의 경우 비교적 최근 태권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맞다. 원래도 존재 자체는 하였으나 나중에 태권도식으로 변형되었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전에는 상체가 돌지 않는 이합퇴와 같은 기술이었다는 설도 있다.
무에타이의 때는 땅을 박차는 앞발 축과 깊이 넣는 골반, 타점 앞에서 뒤트는 정강이, 그리고 강하게 뒤트는 상반신이 특징이다. 대체로 무릎의 탄력을 사용하거나 무게 중심을 고려하기 보다는 빠르고 강하게 차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렇듯 강하게 차는 것을 제일로 치기에 무에타이의 발차기는 보기에는 상당히 엉성해 보인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커다란 예비동작과 어정쩡한 골반돌리기, 구부정한 다리 등 동작이 절도 있고 화려한 가라데나 태권도와 비교하면 모양 빠지는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이다. 무에타이의 킥이 널리 퍼진 이유는 그 위력 때문이다. 무에타이의 때는 킥의 제어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위력을 희생하는 다른 킥과는 다르게 힘이 고스란히 속도와 위력에 실린다. 즉 무게이동으로 보면 차는 수준이 아니라 다리를 갖다 박는 것에 가깝다. 쉽게 비교하자면 태권도의 킥이 빠르고 날카로운 회초리라면, 무에타이의 킥은 야구방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잡거나 막을 수는 있지만 결국 잡는 팔을 못쓰게 만들 수 있는 거다. 때문에 움직임의 볼륨에 비례하여 차원이 다른 속도와 위력을 자랑하며, 숙련된 낙무아이의 미들킥은 그야말로 야구방망이나 쇠사슬 채찍 수준의 위력을 가진다. 팔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고, 맞으면 갈비뼈가 박살이 난다. 몸통에 차도 이 정도인데, 상대적으로 약한 머리나 막기 어려운 다리에 이런 킥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게다가 이러한 킥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은 선수들은 큰 동작에서 오는 리스크를 극복하고 온갖 기괴한 변칙기를 사용하며 상대를 압박하는데, 찬 발로 또 차는 더블 킥은 물론이고, 딮인 척 다리를 들어 헤드킥을 까는 물음표 킥에 얼굴에 딮을 넣는다던지 두발당성 딥이라던지 백덤블링 킥이나 점핑 로우킥이라던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싸움이 여기에서 벌어진다. 이 방면의 본좌는 센차이이다. 현역 시절의 센차이는 카트휠 킥 같은 곡예를 경기에서 구사한 기인 중 기인이었다.
무에타이 발차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로우킥이나 실제 시합에서는 미들킥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로우킥이 더 유명한 이유는 우선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극진가라데에서 일찌감치 도입을 한 것과 더불어 종합격투기 시합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인데, 사실 무에타이 시합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미들킥의 비율이 높다. 본토 기준 미들-하이 궤적으로 차는 때람뚜와를 가장 많이 연습하기 때문에 경기에서도 몸에 익은 미들이 나가곤 한다. 이 킥을 정강이 살이 벗겨져 나갈 정도로 갈기는 본토의 낙무아이들은 외국 선수들과 숙련도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
이외에 일반인 기준에서는 별게 아니라 생각되지만 실제 무에타이 시합에서 사용빈도가 높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건 앞밀어차기인 딥이다.
딥은 무에타이의 가장 긴 발차기이며, 가장 빠른 발차기이다. 앞발 딥은 예비동작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복싱의 잽만큼이나 많이 쓰인다. 위력은 다른 킥에 비해 약하게 들어가는 편이지만 악의를 담아 찌르는 경우에는 다른 킥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위력적이다. 갑작스럽고 돌발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리 알아차리기 힘들다.[2]
무릎치기(카오)[편집]
- 카오 로이: 플라잉 니킥
- 카오 트롱(탱카오): 스트레이트 니킥
- 카오치엥: 45도로 날리는 니킥
- 디카오: 다리를 직각으로 만들어 복숭아뼈부터 종아리, 무릎으로 세로로 타격하는 기술
- 카오램: 제자리에서 플라잉니킥
무에타이의 얼굴마담이다. 무에타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무릎으로 상대의 복부나 머리를 박살내는데, 곧은 니, 커브 니, 스터프 니, 코크스크루 니(코크스크루 펀치와는 달리 실제로 있는 기술이다. 일반적인 니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 등 종류도 무수히 많다. 절륜한 위력을 자랑하며, 빰을 잡은 상태에서 들어가는 니 세례는 공포스럽기 그지없다.[2]
팔굽치기(쏙)[편집]
무에타이의 얼굴마담 2. 흔히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것처럼 서술되지만 실제로는 녹아웃을 노리기보단 커팅을 내 TKO를 받아내는 것이 주 목적이다. 닥터 스톱이 들어오지 않아도 커팅이 나면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자극하고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지만 잔인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다. 일본의 입식/종합격투기 단체에서 엘보를 금지하는 이유가 이거다. 닥터스톱은 시합의 재미를 떨구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도 있다.[2]
넥 클린치(칼라 타이, 맞잡기 / 빰)[편집]
무에타이의 꽃이다.
현대에 들어 그레코로만 레슬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타격기 무술에서는 클린치 상태가 되면 제대로 된 공방이 벌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심판이 선수들을 떨어지게 한다. 하지만 무에타이는 심각한 교착상태가 지속되지 않는 한 일시적인 중지를 하지 않는데, 이는 무에타이의 빰 싸움에 대한 방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우선 클린치 상태가 되었을 때 목잡기를 하는 기술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아마추어 레슬링의 타이(tie) 또는 맞잡기와 유사하다. 기본은 발뒤꿈치는 항상 들고, 다리를 세우고, 허리도 세우고, 목도 세운 상태에서 양손으로 상대의 목을 잡는데 상대보다 자신의 양손이 안쪽을 차지하는게 핵심이다. 상대 목을 잡은 양손이 안쪽에 있을 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목잡기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했을 때 빠져나오는 기술, 넘어뜨리는 스윕(sweep), 밀어 던지는 덤프(dump), 무릎차기(카오), 팔굽치기(쏙) 등으로 연결되는 기술들도 있는데, 그 기술의 숫자가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컴비네이션의 수도 더 엄청나다. 한마디로 스탠딩 레슬링이라고 보면 된다. 본토의 선수들은 대부분 빰의 장인이기 때문에 외국의 클린치 이해도가 떨어지는 선수들은 맞잡자마자 종잇장 날리듯 날아간다. 물론 레슬링을 배웠다면 수월하게 공격할 수 있다. 태국 경기에서 스윕이 잘 안나오는 이후는 모든 선수들이 빰의 장인이라서 그렇고 애매한 선수들과 붙으면 그야말로 양민학살이다.
무에타이의 클린치가 얼마나 막강한지에 대한 건 K1에서 빰클린치를 금지시킨 걸 보면 알 수 있다. K1 초기, 태국 선수들을 데려다가 자기네 (정도관 출신) 선수들이 승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려 했으나 빰클린치에 잡혀 다들 발려버리고 말자 이 기술 자체를 금지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태국선수들이 훨씬 강했다.
무에타이식 빰클린치에 잡히면 대략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다. 우선 상대에게 당신이 목을 잡히게 되면 빠져나오려 하나 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지는데 그 순간 안면에 니킥이 들어온다. 거기서 상체를 세우면 몸에 완전 밀착한 상태에서 양 옆구리에 무릎치기가 들어온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통증이 오고, 허리를 조금 빼면 바로 복부 정면으로 니킥이 날아오고, 거기서 벗어나려 손으로 밀치며 떨어지는 순간 팔꿈치가 안면을 강타한다. (펀치는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지만 무에타이의 팔굽(쏙)은 정말 약간의 공간만 있으면 냅다 박을 수 있다.) 이런 메타가 너무 위험해서 취미 선에서 즐기는 경기에서는 금지되기도 한다. 니킥은 말할 것도 없고 쏙은 충격량 자체는 맏보다도 낮지만 단단한 뼈라는 점과 좁은 면적에 집중된 위력이라는 점 때문에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질 가능성이 급격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 펫분추의 무에타이 클린치와 팔굽치기, 스윕 기술 소개
스탠딩 레슬링이란 말처럼 일부 레슬링 / 유도 선수들처럼 만두귀나 납짝귀를 가지게도 된다.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고 유사한 기술도 많지만 두 가지 큰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타격을 위한 거리 만들기와 악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거리 만들기의 경우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은 최대한 하복부를 붙이는 식으로 클린치를 만들지만 무에타이는 밀착하면서도 허리를 앞뒤로 밀당하면서 니킥각과 떨어질 때의 쏙을 넣을 각도를 계속 계산한다. 쉽게 말해 클린치 상태에서도 영거리 타격에 대한 회피와 방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밀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악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은 레슬링과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상대를 클린치에 둘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무에타이의 클린치는 잡히면 너도나도 못 벗어나는 레슬링에 비해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벗어나는 즉시 엘보 어택과 니킥을 어디에 어떻게 맞을지 모르게 되기 때문에 경기 중 빰이 잡히면 선수들끼리 딱히 벗어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무에타이가 실전에서 무시무시한 이유이기도 한데, 숙련자의 빰은 글러브를 끼고 있어도 벗어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실전에서 악력까지 더해서 잡은 채 작정하고 패면 벗어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2]
체급[편집]
- (룸피니 스타디움 기준)
- 미니 플라이급 105 lbs.(47.619 kg.) 이하
- 라이트 플라이급 108 lbs. (48.979 kg.) 이하
- 플라이급 112 lbs. (50.793 kg.) 이하
- 슈퍼 플라이급 115 lbs. (52.154 kg.) 이하
- 밴텀급 118 lbs. (53.514 kg.) 이하
- 슈퍼 밴텀급 122 lbs. (55.328 kg.) 이하
- 페더급 126 lbs. (57.142 kg.) 이하
- 슈퍼 페더급 130 lbs. (58.956 kg.) 이하
- 라이트급 135 lbs. (61.224 kg.) 이하
- 슈퍼 라이트급 140 lbs. (63.492 kg.) 이하
- 웰터급 147 lbs. (66.666 kg.) 이하
- 슈 웰터급 154 lbs. (69.841 kg.) 이하
- 미들급 160 lbs. (72.562 kg.) 이하
- 슈퍼 미들급 168 lbs. (76.190kg) 이하
- 라이트 헤비급 175 lbs. (79.365 kg.) 이하
- 크루저급 190 lbs. (86.167kg) 이하
- 헤비급 190 lbs. (86.167 kg.) 이상[2]
파이팅 스타일[편집]
무에타이 선수들의 파이팅 스타일은 주무기와 운영 양상에 따라 크게 무아이 때, 무아이 카오, 무아이 맛, 무아이 쏙, 무아이 피무로 나뉜다. 이 다섯가지 스타일에 선수들이 꼭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며, 한 선수가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가지는 경우도 흔하며, 무아이 북 같은 마이너한 경기 스타일도 존재한다.
- 무어이 때(Muay Tae): 미들킥을 위시한 강한 킥을 주무기로 하는 스타일이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스타일이며 미들킥에 점수를 많이 주는 무에타이 룰에서 판정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이 스타일로 잘 알려진 선수는 쌈코, 쁘아까오, 욧센카이 등.
- 무어이 카오(Muay Kao): 접근전에서의 무릎을 주무기로 하는 스타일이다. 클린치 상대는 물론 떨어져 있을 때에도 무릎으로 끊임없이 상대에게 압박을 걸어오며, 특히 무어이 피무에 대한 하드카운터로 알려져 있다. 이 스타일로 잘 알려진 선수는 디젤노이, 펫분추, 사겟다오, 요드위차 등.
- 무어이 맛(Muay Mat): 근거리 펀치로 승부를 거는 하드펀처이다. 상대의 스텝을 봉쇄하기 위한 로우킥도 부무장으로 사용한다. 펀치 점수가 짠 편인 무에타이 룰의 특성상 판정으로 가면 불리해지는 타입. 최근 원 챔피언십 무에타이 룰에서 오픈 핑거 글러브를 사용하면서 떡상하기 시작했다. 이 스타일로 잘 알려진 선수는 아누왓, 사가트, 코반, 롯탕 등.
- 무어이 쏙(Muay Sok): 근거리의 팔꿈치 공격이 주무기인 타입이다. 강한 맷집과 클린치 상황에서 상대의 시선을 속이고 팔꿈치를 박아넣는 센스가 필요하다. 무에타이 룰 밖에서는 봉인되다 보니 다른 입식무대 월장이 곤란한데다, 똑같이 접근전을 선호하면서 상대적으로 장신인 무어이 카오 타입에게 약한 편이다. 이 스타일로 유명한 선수는 요드쿤폰, 무앙타이 등.
- 무어이 피무(Muay Femur): 경기 양상에 따라 공방을 적절히 섞어가며 상대의 약점을 야금야금 공략하는 타입. 복싱으로 치면 아웃복서와 비슷하다. 높은 격투 센스를 필요로 하며, 같은 피무 스타일이 아니면 후학을 양성할 수 없기에 만들어 내기 힘들지만, 무에타이의 꽃으로 불리며 가장 동경받는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로 잘 알려진 선수는 남삭노이, 사마트, 센차이, 신비태웅 등.
- 무어이 북(Muay Bouk): 마이너한 스타일로, 이 스타일의 선수들은 끊임없는 전진압박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펀치 위주인 무어이 맛과는 다르게 전진압박을 위해서는 무기를 가리지 않으며, 당연하겠지만 강인한 맷집과 스태미너,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이 스타일로 잘 알려진 선수는 섹산, 리암 해리슨 등. 쁘아까오도 무어이 때 스타일에 무어이 북 요소를 도입했다.
- 무어이 파랑(Muay Farang): 파랑은 외국인(특히 서양인, 백인)을 의미하는데, 직역하면 외국인 파이터가 된다. 광의적 개념으로는 수련과 경기를 위해 태국에 온 모든 외국인을 뜻하지만, 협의적으로는 브라질리언 킥, 초승달차기 등 타 유파의 기술을 자주 섞어 사용하는 외국인들을 뜻한다.[2]
인프라[편집]
무에타이의 진정한 힘은 단지 기술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태국이 무에타이 최강국을 넘어서 복싱, 가라데, 킥복싱 등의 여러 격투기를 망라한 명실상부 입식 격투 분야의 최강국 중 하나로 군림하는 진짜 이유는 무에타이의 정말 위력적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프라와 경기 수준 때문이다. 태국에선 많은 선수들이 돈을 벌기 위해 10대 초반에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심지어는 8살, 9살 소년들이 시합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부터 20대가 될 때까지만 시합한다 하더라도 10년 가까이의 경력을 갖는 것이다. 거기다가, 비슷비슷하게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실력과 기술이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가 된다. 대다수 선수들이 하루 8시간 이상의 트레이닝을 하는 데다 기술적으로도 강력해지고 신체적으로 최고의 시기에 한계까지 몸을 몰아넣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태국에는 20대의 나이에 이미 200전, 300전의 공식 시합을 가진 선수들도 쌓이고 쌓였다. 태국 무에타이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룸피니와 라차담넌 스타디움의 챔피언들의 경우 대개 나이는 21살, 23살 정도이지만 전적이 300전 290승이라는 인간의 레벨이 아닌 전적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은 지나친 혹사로 인하여 선수 생활은 굉장히 짧은 편이다. 또 훈련 방법이 뒤떨어져 선수의 건강에 치명적인 경우가 많아 평생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옹박 개봉 당시 토니 자가 방한하여 쇼프로에 나와 무에타이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정강이 단련법으로 가장 비과학적인 수련법으로 손꼽히는 맥주병 정강이 밀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흔히 말하는 '골병'이 들어 나이가 들면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과거에는 바나나 나무를 하루에 천 번 차거나 병으로 정강이를 단련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현재에는 부상 가능성과 함께 복합적인 이유가 몇 가지 겹쳐서 태국 본토에서도 그냥 샌드백과 미트 차는 게 전부라고 한다. 첫째로, 사람 뼈라는 게 저런 식으로 '너무 단단한 물체'에다 계속해서 갖다 박으면 어느 순간부터 재생이 안 될 정도로 다치기 시작한다. 그게 누적되면 단련은 둘째치고 일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쯤 되면 선수생활이 쫑나는 것 이상을 걱정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시합도 아닌 단련하는 와중에 정강이라도 깨지면, 멀쩡한 선수를 하나 버리는 셈이 된다. 둘째로, 태국 무에타이 선수들은 며칠 단위로 시합을 계속해서 한다는 점이다. 저런 종류의 단련은 둘째 치고 시합 후 몸을 복구하고 트레이닝을 할 시간도 빠듯하다. 셋째로, 샌드백과 미트를 차는 것도 매일 거의 수백~천 번 정도는 치고 차다 보면, 당연하지만 단련 효과가 충분하다. 단, 이런 단련법 자체는 적당히 단계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효과적이다. 실제로 미트나 샌드백 그딴 거 없었던 중국 무술이나 공수도 등에서도 두꺼운 나무 봉으로 정강이나 팔뚝을 문질러가며 뼈와 근육을 단련하는 수련법이 존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황주환이나 장태식 등이 행한 피켄 단련이란 게 어떤 것인지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이 경우는 단련법 자체보다, 수련자가 처해있던 환경에서 문제를 찾는 것이 옳다.
실제로 한국에도 정강이를 자주 사용하는 무에타이 선수들은 비슷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단련 법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 명문 도장들의 경우 나름 과학적인 수련을 하고 있다. 하지만 1 ~ 2주에 한 번 경기 나가는 살인적 일정을 치르면서 선수 수명이 길 수가 없다.
참고로 일반 격투기 선수들의 경우 많아야 한 달씩 들기도 하고, 난타전 같은 경우 대미지를 빼는데만 반년씩 걸린다.
아무튼 이로 인해, 태국 본토에서 본토 선수들과 시합을 해서 우승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룸피니나 라차담넌을 비롯한 상위 스타디움의 수준은 초일류이다. 해외의 많은 무에타이 선수, 지도자들도 시간 날 때마다 태국 현지로 가서 운동을 하고 있다. K-1 시합의 경우 무에타이 선수들의 독주를 막기 위해 룰적으로 매우 고심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클린치의 제한, 팔꿈치 사용 금지, 근거리에서의 무릎차기도 붙잡고는 할 수 없는 등 거의 발차기가 추가된 복싱 경기에 가깝게 발전해 놓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룸피니 랭킹 2위까지 올랐던(룸피니에선 그냥 상위 랭커였지 챔피언은 엄누워이라는 비교적 마이너 한 단체에서 했음) 쁘아까오가 K-1 월드 맥스에서 다수의 승리를 거두는가 하면, 태국에선 유명하지 않았던 카오클라이 역시 좋은 실적을 냈었다. 이들의 독주를 막기 위해 룰도 많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강세를 보인다. 2000년대 초반 한국대회에서 개최된 '코마'를 보면 태국 낙무아이의 후덜덜한 수준을 알 수 있다.
다만, 태국 현지에서는 무에타이 선수들의 사회적 입지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진짜 최상위급 선수 몇몇을 제외하곤 현지의 무에타이 경기는 도박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경마나 투견 같은 느낌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20세 중반만 돼도 퇴물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 태국의 선수들이 일본 등에 건너와서 "스타급"의 대우를 받으면 상당히 감명 받는다고 한다. 일본 만화에서 괜히 태국인 고수들이 일본에서 활약하는 것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러다보니 태국을 여행할 때 경기를 보면 생계를 위해 나온 앳된 소년들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대개 대전료도 푼돈이고 환경도 안 좋아서 인권단체에서도 지적하곤 한다. 실제 13세의 무에타이 선수가 경기 후 뇌출혈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사망한 소년은 8세부터 시합에 나가기 시작해서 5년 동안 무려 170전의 경기를 치렀다. 1년에 약 34회의 경기를 치른 것이고 한 달에 최소 2-3회 이상의 경기를 한 것이다.
한국에서 태국 무에타이 경기를 접하긴 어렵기 때문에 환상이 많지만 실제 경기에선 생각 외로 로우킥은 별로 안 나오고 빰 클린치와 견제용 미들킥 위주이다. 물론 무명 선수들끼리의 경기는 나름 타격전이지만 상위권 선수들의 경기는 외국인 입장에선 좀 지루하다. 여느 타격계 무술이 다 그렇듯이 수준차가 크지 않으면 대부분 견제와 거리 조절 위주긴 하다. 특히 빰 클린치를 반복하는 모습은 화끈한 타격전을 기대했던 일부 외국 팬들에겐 어필하지 못하는 편이라는 의견도 있다. 태국에서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해외 진출을 못하는 이유가 해외 관객들이 태국 팬들과는 달리 클린치 싸움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별 흥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도 많다. 타 단체에서 경기할 때 그렇게 화끈하게 두들겨 패는 건 그만큼 실력차가 크단 이야기다.
무에타이 관련 단체로 태국 내에는 전술한 룸피니, 라차담넌 등의 스타디움들이 있고, 세계적으로는 WMC, WPMF, WBC 무에타이, WKN 무에타이 등의 기구가 있다. 경량급은 어차피 태국 낙무아이들이 절대 강세라 룸피니, 라차담넌 최강이 곧 세계 최강으로 등치 되지만, 태국 선수가 거의 없는 중량급에서는 세계기구의 권위도 높은 편이다. 물론 중량급에서 또한 태국 내부 리그의 권위는 매우 높다. 중량급의 대표적인 강자로는 네이선 코벳, 사이먼 마커스 등이 있다. 사실 해외 선수들이 주로 뛰는 중량급과 태국 본토 낙무아이들이 주로 뛰는 경량급 간의 실력차도 어마어마한 편이다. 당장 과거 K-1이나 코마에서 낙무아이들이 일본, 네덜란드 등 킥복싱 강국들의 킥복서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상기시켜보도록 하자. 현 입식격투계에서 태국 무에타이 리그 다음으로 명망 높은 싱가포르의 ONE Championship와 Glory(킥복싱), 중국의 쿤룬파이트에서마저 낙무아이들의 영향력은 엄청난데, 본토에서 그다지 이름 날리지 못한 선수들이 종종 날라가서 낙무아이에게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은 킥복싱 룰임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을 먹거나 양학을 한다.[2]
실전성[편집]
각 격투기들의 실전성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입식무술중 무에타이만큼 확실히 실전성을 보장하는 무술은 없다. 현재 스포츠계에서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관람용 폭력의 상한선으로서 주먹질로 머리뼈를 통해 뇌에 충격을 주어 기절시키는 복싱이나 옛 대갑주전투술의 연장선인 레슬링과 유술이 실전성이 높다고 평가되고는 있으나, 무에타이는 태생부터 가혹한 열대 우림의 전장에서 모든 신체부위로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해 사용된 전쟁 무술이며 오히려 현대 스포츠화를 통해 잔인함이 감소했을지언정 아직 그 패도적 성향에 있어서는 동서고금의 다른 어떤 무술도 따르지 못한다.
특히, 스탠딩 타격에 한해서는 무에타이가 '토탈 패키지' 라는 것은 많은 격투기 매니아들이 인정하고 있다. 중국권법은 쉬샤오둥 사례처럼 실전성에선 한계가 드러나고 있고, 복싱이나 킥복싱 등마저 각자 무술만으로는 낙무아이들을 이기기 어려워 입식무대에선 무에타이 기술인 넥클린치나 니킥 등을 도입해 배우는게 필수이다. 사실상 스탠딩 타격의 완성형에 가까운 셈인데 애초에 타 무술들이 발과 손만 사용하는게 대부분인 것과는 달리 무에타이는 엘보 어택, 니킥, 플라잉 니킥, 펀치, 발차기, 클린치 컨트롤, 킥 캐치 등 박치기, 물기, 짓밟기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기술들이나 파운딩과 같은 그라운드 기술을 제외한 타격의 대부분의 공격 기술들을 다 허용하고 인프라도 크니 기술도 그에 맞춰 궁극적으로 진화할 수 밖에 없다.
손기술은 펀치도 꽤나 쓰이지만 클린치 공방으로 가져가기 위한 비중 역시 높은 편인데, 펀치보다는 킥과 니가 훨씬 위력이 강한데다가 킥과 펀치를 효율적으로 방어하면서 니를 박아넣기 좋은 상태가 클린치 공방이기 때문. 숙련된 무에타이 수련자의 빰은 난공불락에 가깝다. 한 번 싸잡히면 벗어나기가 몹시 어려운데 무릎차기가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온다. 약간만 주의력을 잃어도 갈비뼈가 박살나고 장기가 곤죽이 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장기 파열과 내출혈 쇼크로 죽을 수도있다.
클린치 상태에서 상대방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넘어뜨리는 스윕 기술도 상당히 테크니컬한 편인데, 경기에서 점수도 있는데다 특성상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툭 걸거나 밀어넘기기 때문에 생각 없이 떨어지면 의외로 충격이 크다. 특히 빰에서의 덤프는 제대로 당하면 호흡이 깨져서 흐름을 타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이 던지기는 던진 쪽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후상황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경기 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무엇보다 일방적인 공격이 힘든 클린치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술이다. 실제 무에타이 경기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빰 클린치에서의 주도권 싸움이 경기 전반에 영향을 준다.
무에타이식 클린치의 용이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타 타격기에는 없는 유술마저 어느정도 허용하는데 넥 클린치 비중이 높은 태국 본토 경기에선 해당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넥클린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입식으로서는 택견, 카포에라, 가라테, 우슈 산타, 대도숙 공도와 더불어 스윕이나 넘어뜨리는 기술(메치기)이 존재하여 그래플링 종목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타격계 무술이다. 위 영상의 1분 44초 경 부터 나오는 로드 FC 관계자 정문홍 멘토의 증언에 의하면, 무에타이식 빰 클린치는 상대적으로 타격가에게 유리함을 지니는 그래플러에게도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특히 유도나 그레코-로만 레슬링의 경우 하단 태클 공방이 없기 때문에 낙무아이를 붙잡아도 클린치 상태에서 타격으로 역공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타 타격가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신중함을 더 요하기 마련이다. 물론 위 영상에서도 하단 태클이 있는 자유형 레슬링 상대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위 영상을 같이 진행한 김대환이 본인의 채널에서 한국 낙무아이 중에는 빰 클린치 공방을 수준급으로 잘하는 선수가 썩 흔한 편은 아니라는 점 또한 밝혔기 때문에 그 한계 또한 명확한 편이다.
하지만 하단태클을 시도하는 그래플러를 제압한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다.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빰 클린치에는 허리를 맞잡는 공방도 존재하기 때문에 테이크다운 디펜스에 응용하면 위와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상의 낙무아이는 슈트박세 출신의 주제 펠레로 마찬가지로 무에타이 기반 파이터인 반달레이 실바와 앤더슨 실바와 동문 출신이다.
상대의 신체부위를 자신의 정강이 아랫부분으로 차는 킥은 무에타이의 기본 중의 기본이며 복싱에서 원투를 연습하듯 공을 들여 연습한다. 이는 입식 타격기인 무에타이의 특성상 가장 길고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는 킥이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극진공수도에서도 로우킥을 매우 효율 높은 기술로 보고 도입해 가기도 했다. 다만 다리를 공격하는 점을 도입했다는 것이지, 킥을 내는 방법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현재의 무에타이 로우킥은 극진에서 역수출한 형태라는 독특성이 있다. 원래 로우킥이 있었지만 주무기는 아니었는데, 50 ~ 60년대 극진과의 교류를 통해 다시 다듬어 진 것이다. 현재 극진의 로우킥이 오히려 무에타이 로우킥의 원형에 가깝고, 지금 무에타이식 로우킥은 그 이후에 발전, 변형된 형태이다.
현존하는 합법적인 선에서 이뤄지는 스포츠 중에선 입식타격기는 물론이고 모든 무술 통틀어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종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에타이의 폭력성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여기저기서 언급되곤 하는데, 파이트 퀘스트에선 주인공인 지미의 입을 빌어 무에타이 경기를 하고 링에서 걸어내려온 것만으로도 난 이미 승리한거다라고 폭력성을 강조했으며 미국의 뇌 과학자인 샘 해리스도 종교란 명칭은 스포츠란 말처럼 매우 다양한 개념을 아우르는 개념이기에 사용할 때 주의를 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를 스포츠에 비유해 예로 든 폭력적인 스포츠가 바로 무에타이였다. 덜 폭력적인 스포츠의 예시로 든 것은 배드민턴이다.
위와 관련하여 추가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낙무아이들의 경험치이다. 요즘 들어서야 무에타이의 명성이 워낙 높아지고 태국도 현대화가 되면서 각종 법적규제 및 관리를 통해 선수들의 안전에 점점 신경을 쓰고 있는 추세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낙무아이들의 평균 프로 데뷔 연령이 10 - 12세 전후였다. 영재교육, 유소년교육을 철저하게 받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된 나라가 강한 것처럼 (예: 브라질의 축구) 태국의 낙무아이들은 이미 유년기에 수련을 시작하여 10대 초반부터 프로 링에 데뷔하여 돈을 벌기 위해 싸운다. 게다가, 불법격투, 도박이 성행하는 잔혹한 장에서 어린 나이부터 링에 올라서 계속 싸워나가며 대성하거나, 아니면 중도에 몸이 망가져서 도태되거나 하는 잔혹한 경쟁을 경험하는 것이 낙무아이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태국 내의 환경에서 성장하여 해외 입식격투 무대로 진출한 시점에서 평균적인 낙무아이의 시합경험은 경쟁자인 타국의 선수들의 10배 정도는 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유소년부 데뷔라고 해서 오늘날 태권도장에서 청소년들이 대련하는 정도를 상상하면 안된다. 초등학생이나 갓 중학생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더럽고 땀내나는 경기장에서 어른들이 돈을 뿌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응원하는 가운데 링에 올라 서로 피튀기게 싸우고 한 쪽이 실신 넉아웃을 당하는 식의 옛날 무에타이 시합 영상들을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 시합을 이미 어린 나이에서부터 해 오면서 해외의 프로무대로 이적한 낙무아이들은 자기보다 빠른 상대, 자기보다 킥을 더 잘하거나 펀치를 잘 날리거나 맷집이 세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등등, 격투에서 경험하게 될 수 있는 모든 경험은 이미 차고 넘치게 겪어오고, 그 와중에 대처방법을 몸으로 익히며 살아남은 선수들이었다. 특히, 이미 웬만한 신체적 고통에는 다 익숙해져있고, 넘어가기 직전까지 얻어 터진 후에도 이 악물고 버티며 살아남아서 계속 이겨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실전을 겪어왔으니, 신체적 절정기에 들어갈 20대까지 낙무아이로 살아남은 선수라면 이제 갓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는 타국의 20대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당연히 실전경험의 차이가 엄청났던 것이다.
사상 최고의 낙무아이로 자주 거론되는 쁘아까오만 해도, 1982년 생 2023년 기준 41세의 나이의 전적이 275전 239승 24패 12무다. 쁘아까오의 첫 프로시합은 8세였다. 8세에서 41세 사이에 275전을 치렀다는 것은 33년 커리어 동안 1년에 평균 8.3회, 한달 반 정도마다 한 번 씩 프로 링에 올랐다는 미친 소리가 된다. 더구나, 최전성기에서부터 내려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해외의 프로무대로 이적한 후에는 해당 단체의 규정에 맞춰 다른 파이터들처럼 일정기간 동안 회복, 휴식, 훈련 시간을 둬야 했기 때문에 태국 국내무대의 유소년~청년 시절에 링에 오르는 빈도는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계속 싸워 온 낙무아이라면 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2]
한국에서의 무에타이[편집]
한국에 무에타이가 도입된 과정은 다양하나 개중에서도 영동삼산체육관(서울 논현역 인근 위치)과 삼산체육관의 초대 관장이며 설립자인 윤익암 관장을 통해 유입된 비화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격투기라고 하면 2000년대에 이종격투기, 2010년대에 종합격투기를 지칭했던 것과 달리 킥복싱을 의미했다. 이런 초창기 한국 킥복싱 대회에서 챔피언을 했던 경력을 가진 윤익암 관장의 영향으로 당시 경찰청 태권도 선수였던 박기정 관장은 킥복싱으로 전향해 윤익암 관장의 트레이닝과 압도적인 피지컬을 앞세워 일본에서 만들고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킥복싱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제패한 둘은 '국제 격투기 연맹'이라는 킥복싱 단체를 만들어 1991년 초, 첫 시합을 개최하고 지도자 양성에 나선다.
여담으로 일본의 킥복싱이 1964년 한국에 도입되었고,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오도관 전남 본관장인 구판홍이 태권도식 발차기, 복싱 펀치, 유도 / 레슬링식 테이크다운 등이 결합된 한국 버전을 만들었는데, 이 킥복싱의 명칭이 바로 격투기 내지는 킹투기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구판홍 관장의 "격투기" 창조설에 대한 부분은 당시 격투기 수련자들이 증언에 따르면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주장이라 검증이 필요하다. 킥복싱이라는 명칭은 일본의 복싱 프로모터 노구치 오사무(野口修)가 1960년대 "무에타이 vs 가라테", "무에타이 vs 복싱" 등의 시합을 추진하면서 무에타이에 자극받아 1966년에 고안했고, 일본의 복싱, 가라테 선수를 모아 만든 "일본 킥복싱 협회"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에도 60년대에 잠시 도입되어 프로레슬링, 복싱처럼 엔터테인먼트로 육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킥복싱"이란 명칭과 규칙을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점이 국민정서에 반하였으며 또한 60 ~ 70년대 한국에서는 당수도, 정도술, 합기도의 인기가 이미 높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1964년 구판홍 관장의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무술을 만들고자 태권도, 복싱, 유도, 레슬링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절충하여 치고, 차고, 던지고, 꺾고, 조르는 종합 무술로 체계화하여 독창적으로 창안한 '킹투기'"라는 창조설이 힘을 잃는데, 당시 한국에는 이미 정도술과 합기도라는 "치고 차고 던지고 꺾고 조르는" 종합무술이 존재했고 인기도 높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격투기"라는 명칭이 아직 없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킹투기"라는 정체불명의 아류 같은 이름을 지었다는 것 역시 64년 창조설에 힘을 잃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물론 1968년 노구치 오사무를 통한 킥복싱의 정식 한국내 도입을 구판홍 관장이 주도했다는 설에는 반론이 없는 상황이다. 초창기 격투기 수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60년대 말에 일본의 영향으로 구판홍 관장에 의해 킥복싱이란 명칭으로 도입이 되었으나 흥행은 둘째치고 제대로 된 협회도 없어 보급에 실패하고 70년대 ~ 80년대초에 이르러서야 태권도, 정도술, 합기도, 복싱, 킥복싱 등의 수련자들이 어떤 무술이 가장 강한가를 두고 겨룰 수 있는 대회/협회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때 유도식 던지기/테이크다운이 추가된 룰을 이용한 전국단체가 만들어지며 생긴 명칭이 격투기라고 한다. 왜 유도식 던지기 / 테이크다운만 추가되었냐 하면 이 시기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 이종격투기처럼 서로 다른 무술 수련자들, 도장들, 협회들의 출신들이 나오다보니 대부분 도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이 던지기 룰 때문에 합기도와 정도술 수련자 출신들이 초창기에 우위를 점하자 태권도, 복싱, 킥복싱 출신들도 유도식 던지기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던지기 방어기술에는 익숙하지 않아 도복을 벗고 링에 올랐고 이때 이후로 복싱처럼 트렁크만 입거나, 도복을 바지만 입는 형태의 선수들이 출현하였다고 한다. 80년대에 접어들며 이처럼 대부분의 선수들이 상체에 도복을 입지 않고 출전해 유도식 던지기 기술은 점점 통하지 않게 되자 윤익암 관장은 이미 태권도와 합기도의 고단자여서 크고 화려한 발차기와 유도식 던지기에 익숙했지만 다른 던지기와 발차기가 필요함을 깨닫고 유도대(현 용인대학교)에서 레슬링을 전공한 친구에게서 그레코로만 레슬링의 던지기 기술과 윤익암 관장 본인이 극진가라데 대회에 출전하며 배운 로우킥을 시합에서 사용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대부분 선수들이 태권도와 합기도 스타일의 크고 화려하고 상단발차기와 유도식 던지기만 익히고 있었기에 극진가라데식 로우킥과 레슬링식 던지기 기술을 추가로 탑재한 삼산체육관 출신 윤익암 관장의 제자들에게 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한다.
이 때문에 90년대 초반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격투기라는 무술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방송에도 나오자 부산과 대전,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 있던 킥복싱 관련 도장들이 이를 흉내낸 유사 단체들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격투기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어 "권투기", "권격도", "킥투기", "프로태권도", "킹복싱", "킥권도" 같은 명칭을 지었는데 "킹투기"라는 명칭 역시 이 시기에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이 당시 격투기 수련자들의 중론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대 종합격투기와 UFC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종합형 격투기를 한 개인이 창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종격투기의 형태로 시작된 대회이지만 선수 / 체육관 / 지도자들이 타 무술의 기술 도입을 통한 약점 보완을 하며 결국은 종합격투기라는 형태로 진화하였고, 이 종합격투기 또한 하나의 형태를 가지지 않고 체육관 / 지도자에 따라 수십, 수백가지 스타일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권격도", "킹투기" 등은 초대 관장이 스스로를 창시자라고 칭하는데, 90년대 초반까지 격투기 시합을 보게 되면 선수들이 속한 협회, 도장들이 전부 다르다 보니 지도자(관장)의 베이스 무술에 따라 태권도 기반의 격투기, 합기도 기반의 격투기, 가라데 기반의 격투기 등 전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발차기, 테이크다운 기술 없이 오직 복싱 기술만으로 링에 오르는 복서 출신까지 있을 정도로 당시의 격투기 시합은 초기 UFC처럼 이종격투기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내가 격투기의 창시자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격투기, 킥복싱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어도 체육관마다 전부 다른 형태의 격투기를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그러다 90년대 초중반을 기해 이렇게 중구난방이었던 선수 / 단체들이 시합을 통해 자기들이 약점을 깨닫게 되고 보완에 나서며 지방을 중심으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 단체들이 성립됐는데 올림픽 룰 때문에 주먹에 약점을 가졌던 태권도는 글러브를 끼고 시합하는 프로태권도, 킥권도로, 발차기가 없는 게 약점이던 복서 출신들은 발차기를 도입해 권투기, 킹복싱을, 태권도 / 합기도 발차기에 복싱의 펀치만 익히던 킥복싱류는 로우킥과 테이크다운을 보강해 권격도, 킥투기 같은 이름으로 진화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에타이가 들어오며 이 모든 킥복싱 아류 격투기들은 도태되거나 흡수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킥복싱, 주짓수를 내세우는 종합격투기 체육관에서 가르치는 타격 커리큘럼 역시 실질적으로는 무에타이에 가깝다.
일본을 제패한 윤익암 관장과 박기정 관장은 다음 스텝으로 본고장인 태국에 도전장을 내밀지만 이들이 처음 경험하게 된 무에타이는 그동안 해왔던 킥복싱과는 차원이 다른 격투기였다. 윤익암 관장과 박기정 관장은 아예 무에타이를 정식으로 한국에 도입하기로 마음 먹고, 1993년 8월 15일 국제격투기연맹 소속 관장들과 사범들, 그리고 몇몇 관원들을 데리고 태국 사시프라파(ศศิประภายิม) 체육관에서 연수를 받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물론 타 단체들도 무에타이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었다고 해서 무에타이의 제대로 된 도입이 안 이루어졌을 것은 아니지만(이에 대해선 후술), 윤익암 관장은 연수를 끝내고 귀국할 때 태국 선수인 '반펫'과 트레이너인 '남(선출이나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돼 트레이너가 됨)'을 데리고 왔고, 이들이 한국에 머무는 3개월 동안 많은 삼산체육관 소속 관원들이 태국 본고장의 무에타이를 경험하며 무에타이 도입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반년이 조금 넘은 1994년 3월, MBC 체육관에서 열린 격투기 신인왕전에서 처음으로 킥복싱 스타일이 아닌 무에타이 스타일의 시합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그해 10월 윤익암 관장에 의해 한국이 세계 아마추어 무에타이 연맹의 정회원으로 가입 승인 된다(방콕 팔레스 호텔에서 승인식이 있었으며 태국 방송에서까지 취재를 하였다). 이때 윤익암 관장은 또 한 번 태국인 트레이너를 한국으로 데려오는데, 이번에는 전처럼 젊은 선수가 아닌 '쿠싯'이라고 하는 연륜있는 트레이너를 초빙해 와 (그전까지는 무에타이의 맛을 본 정도라면) 제대로 된 무에타이 기술을 한국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시기에 '쿠싯'에게 직접 사사한 지도자들은 윤익암 관장, 박기정 관장을 비롯해 윤익암 관장의 초기 직계 제자들인 윤한채 관장, 윤광암 사범, 허지훈 사범, 이동영 사범, 김광열 사범, 이병학 사범, 이상훈 사범, 박의순 사범, 신상필 사범 등이 있으며 이들이 '쿠싯' 트레이너로부터 어느 정도 기술 습득을 한 이후에는 협회 소속의 다른 체육관 관장 / 사범들과 새로 협회에 가입한 지방(부산, 대전, 광주 등) 체육관 관장 / 사범들도 주말마다 영동삼산체육관에 초빙해 무에타이 기술을 전수하는 식으로 본격적인 무에타이 보급을 시작하며 협회명칭도 대한 무에타이 협회(대한 체육회 인정 단체)로 바꾼다.
이후 윤익암 관장은 무에타이 도입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한국에 도입을 했던 아이키도 쪽으로 완전히 가게 되고, 대한 무에타이 협회는 그의 제자들이 맡게 되며 한국 무에타이의 기반이 만들어지게 된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방송에 707특임대가 나올 때면 특공무술수련 장면 외에 샌드백 앞에서 로우킥을 차거나 원투좌우훅좌우어퍼컷 펀치에 로우킥을 하는 듯한 형(품새)을 가진 무술을 하는 장면이 짧게 등장하곤 했는데 90년대 초중반 경, 길거리에 붙은 '격투기, 치고 차고 던지고, 챔피언 직접 지도'라고 적힌 홍보포스터를 본 특전사 부사관 한 명이 영동삼산체육관을 방문하고 '도대체 격투기란 게 뭡니까?' 라며 배움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윤익암 관장이 '백 번 말보다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좋다'라고 하며 해당 특전 부사관과 1:1 대련을 했는데, 시합 개시 단 1초만에 윤익암 관장의 로우킥 한방에 체육관 구석까지 밀려나 전투불능상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걸 인연으로 특전사와 707특임대에 영동삼산체육관 스타일의 킥복싱(위에서 언급한 격투기)이 도입되었었다 한다.
한편, 윤익암 관장과는 무관하게 무에타이를 경험한 한국의 다른 킥복싱 / 격투기 단체도 있었다. 대한킥복싱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공선택 같은 무술인이 대표적으로, 이 경우 본인이 태국에 직접 무사수행을 가지는 않았으나 인맥을 동원해 본토 무에타이 경기 영상 VHS를 입수하는 형식으로 1분 1초를 분석해 기술을 습득했고 전술한 단체들과의 교류가 얽힌 결과 지금의 한국식 무에타이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경위로 무에타이 도입을 추진한 이들은 윤익암 관장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대한무에타이협회는 국기원, 대한검도회같은 결속력 있는 단체라기보다는 국내 도장들을 연결해 놓는 일종의 느슨한 도장 네트워크다. 지도자 경력을 확인하는 등 편의를 위해 단증 제도가 있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