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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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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hsmh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3일 (월) 15: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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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도

공수도(空手道)는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일본 고유의 권법(拳法)이다. 고대 인도에서부터 중국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한다. 차기, 치기, 찌르기의 세 방법이 기본을 이룬다.[1]

개요

공수도는 일본을 대표하는 타격계 격투술로, 일반적으로 '가라테'로 불리고 세계적으로는 'Karate'로 표기한다. 다리 기술에 중점을 두는 태권도와 달리 주로 손가락 관절과 손날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수도는 고대 인도에서 중국 당나라를 거쳐 삼국 시대 때 한국에 들어와 14세기경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광복 이후 수련도장이 생기기 시작해 권격도(拳擊道) · 공수도(空手道) · 가라테 · 당수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공수도로 통일돼 부르고 있다.

공수도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는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1순위 종목으로 분류돼 있다. 한국은 그동안 공수도 종목에 출전치 않다가 2001년 대한공수도연맹이 대한체육회의 인정단체가 되면서 2002년 아시안게임부터 출전하게 되었다.

공수도는 크게 대련(쿠미테)과 형(카타) 경기로 나뉜다. 아시안게임에서는 ‘쿠미테’가 체급별로 11종목(남자 6 · 여자 5), 품세를 보는 '카타'에 남녀 각각 1종목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아시안게임에서 쿠미테 경기는 개인전만 있는 카타 경기와 달리 단체전과 개인전을 모두 치른다. 남녀 체급별로 나누어 경기를 하며 경기 시간은 남자는 3분, 여자는 2분이 주어진다.

쿠미테는 직접 가격이 금지되어 있어 유효 부위를 타격하되 상대방의 몸으로부터 5cm 안에서 공격을 멈추면 득점으로 인정한다. 상단차기 기술만 가벼운 접촉이 허용되고, 손기술의 경우 절대 상대의 몸에 닿아서는 안 된다. 상대를 실제로 가격했을 경우엔 경고(상대에게 1점 부여)가 주어질 수 있다. 허리를 경계선으로 상단차기는 3점, 중단차기는 2점, 중단치기 및 상단치기는 1점으로 기술에 따라 점수가 달리 매겨진다. 카타는 막기, 치기, 꺾기 등의 동작을 통해 가상의 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하는 자세를 표현하는 경기로 심판의 채점에 의해 승패가 가려진다.[2]

역사

기원

가라테의 기원은 정확치는 않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1300년대 중국 푸젠성에서 중국인 36인이 이민해 오키나와에 중국 무술을 전수 해줬다는 설이다. 하지만 당시 권법 발달에 대한 의문으로 신빙성이 떨어지며 정확한 이야기로 보지는 않는다.
  • 1756년 중국 사신 공상군이 오키나와에 중국 남권을 전수해줬고 현지의 무술과 합쳐졌다는 설이다. 1762년 일본 사쓰마 번으로 공물을 바치러 가던 오키나와인들이 풍랑을 만나 지금의 도사 번에 표류를 하게 됐는데 이때 이야기를 기록한 대도필기에서 7년전 오키나와에 공상군이라는 중국사신이 중국 남권을 전수해줬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가라테의 카타에는 공상군이라는 이름의 동작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기술체계에서 무척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일리있는 주장이다.
  • 자생설. 오키나와 토착 무술이라는 설과, 인도와 중국 및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을 하던 오키나와 인들이 그들에게 무술을 배웠고 그 무술이 결합하여 현재의 가라테의 원류가 되었다는 설이다.

종종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고려의 삼별초 잔당이 류큐에 정착하여 살면서 전해주었던 수박이 기원이라는 주장도 하는데, 실증적인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기껏해야 오키나와테의 주요한 분파인 토마리테가 한자로 박수라고 쓰는데, 이걸로 수박과의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작 토마리테의 박은 항구 도시 답게 머무를 박(泊)자이며 수박의 박(搏)은 두드릴 박 자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애당초 기본적인 지식과 소양이 안 되었다는 방증이다.

아무튼 사쓰마번 침공 시절 류큐에선 가까운 중국 푸젠성 쪽이나 사쓰마번쪽이랑 직접 교류하던 시기라 중국 남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당나라 및 중국 대륙 그 자체를 가리키는 '唐'자도 히라가나로는 '가라(から)'라고 쓰는데, 여기서의 '가라테(唐手)'는 '중국의 권법'이라고 풀이된다. 일본의 무술로 정착되면서 이후 일본은 '당(唐)'자가 당나라 곧 중국을 연상시킨다며 폐기되고 맨손(空)을 쓴다고 하여 '空手(공수)'로 통일되었다. 당(唐)자는 '도' 라고 읽지만 '가라' 라고 읽을 수도 있으며 공교롭게 공(空)자와 발음이 겹쳤기 때문이며 맨손 무술인 특색과도 어울렸던 것이다. 애초에 상당수의 가라테 카타(型)도 중국에서 왔다. 류큐인들이 이를 개량 및 발전시켜 현재의 가라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태권도의 품새도 공수도의 카타와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만 어원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특히 중국 남파 소림권에서 유래한 중국 남권의 권법들과 유사성을 보이며, 그 중에서도 백학권이라는 권법과 가장 유사성을 띤다. 교본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지만 기본적인 기술 체계도 그렇고 아예 특정 카타(形)와 동작 및 순서가 같은 투로도 존재한다. 가라테의 기본인 삼전(三戰)서기나 삼전카타는 남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형(步形)이다.

때문에 중국에선 가라테를 중국무술로 여기는 이들도 꽤 있고, 심지어 그 가라테에서 기반한 태권도까지 중국무술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2007년 중국에서 열린 세계 태권도 대회에서 한 중뽕 아나운서가 "태권도는 중국 것이다. 중국무술 가라테를 일본이 일본 것이라고 하는데, 태권도도 한국이 자기 것이라며 왜곡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일부 국뽕 태권도계 사람들 중에는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 낱낱이 밝혀진 현 시점에서조차, 가라테가 대몽항쟁 때 류큐로 몰려간 삼별초에서 익히던 수박의 후신이며, 그것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오키나와 고려기와의 존재조차도 몰라서 이런 주장자체가 없었는데 2009년에 역사추적에서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를 방영한 후부터 가라테가 수박의 후신이라는 주장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1세기 들어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에 시도하는 일종의 역사왜곡 물타기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류큐에 전해졌다고 하면 양반이고 아직 연관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일본 열도에도 전해졌다고 말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나가는 주장도 있는데 류큐 왕국을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인데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애초에 오키나와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더 가까운 곳이다

한편, 오키나와 전통씨름이 허리띠를 잡고 진행하기에 스모보다는 한국의 전통 씨름과 모양이 비슷하다며 이걸 갖고 오키나와테 역시 한국에서 유입되었을 것이라며 억지추론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옷의 일부를 잡고 겨루는 몸싸움 기술은 세계에서 흔하기에 연결고리에 대한 증거로 삼기엔 근거력이 많이 떨어진다.

일본에서도 17세기 일본 사쓰마번의 침공 당시 류큐 왕국 사쓰마번이 무술 금지 정책을 폈기 때문에 저항을 위해 민가에서 무술을 몰래 수행하기자 가라테가 발달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작 가라테 연맹 쪽에서는 부정되고 있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오키나와 테의 명인들은 하나같이 유카츠라고 불리는 귀족(개중에서 무관 계층)이었다. 애초에 과거 사회에서 농사를 비롯한 먹고 사는 기술 외에 무언가를 별도로 시간을 내어서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상류층으로 한정이 되어있었다. 즉 애초부터 류큐 본토에서의 군사 업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중국 무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큼 일종의 수양을 통한 철학적 담론이기도 했다. 귀족 내부에서도 최상류층 사람들마저 무술이 밥줄이 아님에도 수련을 즐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1897년에 류큐가 일본에 완전히 병합당하고 신분제가 폐지되어 중심지에 살던 왕과 귀족들이 쫓겨나 외곽지의 평민들과 한 곳에 살게 된 이래로 그럴 필요성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나라도 망했고 빼앗을만한 것들도 많은 웬수 같은 높으신 분들을 평민들이 곱게 볼 리 없으니 말이다.

이렇듯 일방적으로 항일무술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곤란하며 반일감정이 있는 한국 사람들 특유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가라테의 형태와 이미지는 일본 본토에서 정립된 것이며 역으로 오키나와테에 역수출한 부분도 많다.

하물며 오키나와에서조차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순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한정된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전승되는 비기 같은 것이라 유파라는 개념도 없었는데,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각각 따로 놀던 내용을 통일한 것이 오키나와 삼대유파 중 하나인 강유류(剛柔流 / 고쥬류)라고 한다.[3]

어원

원래 오키나와에서 명칭은 단순히 테(手)였다고 한다. 슈리 지방에서 유래한 계통을 슈리테(首里手), 나하 지방에서 유래한 계통을 나하테(那覇手)라고 부르는 식으로 지방 이름에 테(手)를 붙여서 계통을 나누고 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오키나와테(沖縄手), 혹은 도테(唐手, 당수)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당(唐)이라는 말은 당나라의 당자 이기도 하고, 중국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륙이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강해지자, 당(唐)자를 음독하면 '도'로 읽지만 훈독하면 '가라'로도 읽힌다는 점에 착안, 당(唐)자를 떼내고, 같은 '가라'로 읽히는 공(空) 자를 붙여서 가라테(空手,공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각에서는 불교의 공수래공수거에서 유래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문화적으로 끼워맞춘 것이고 실제 현실은 이러한 맥락이었다. 마침 일본어에서 '가라(から)'는 '비어 있다(空)'는 뜻이고, '테(て)'는 '손(手)'이란 뜻으로, 가라테(空手)는 곧 맨손 무술을 의미하게 되니 무술의 특성과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또한 유도에서 무도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의 정식 무도로 인정을 받았기에, 가라테도(空手道)라고도 부른다. 헌데 표기는 가라테도(空手道)라고 하지만 읽을 때는 가라테(空手)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며 해외의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경우엔 공수도의 동의어가 가라테도가 아닌 가라테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아무래도 용어병용의 잔재로 보인다

당수라는 한자를 썼던 시절의 영향으로 1970년대까진 한국에서 당수도라는 명칭을 태권도와 혼용해서 쓰고 있었으며, 북미 등지에선 이 Tang Soo Do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는 태권도가 가라테(당수도)를 시작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며, 초기 태권도 창설시 정치적 혹은 개인적 이유로 태권도와의 통합을 거부한 가라테 원로들이 자신의 도장을 유지하면서 가라테의 한자음을 그대로 당수도로 보급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가라테를 배웠던 시절엔 일본에서도 공수도와 당수도 표기를 병용하던 때이다. 특히 세력이 컸던 무덕관은 관장인 황기가 통합 반대파였으나 제자들 중 통합파가 많아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태권도가 자신들만의 역사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에 위기를 느낀 무덕관은 태권도와 유사하게 무예도보통지와 연결하여 한국화를 추구한다. 황기 관장은 이후 수박도로 이름을 바꾸어 보급을 계속 했고, 여기에서 또 당수도라는 이름을 고수하는 쪽과 나뉘게 된다. 오늘날에도 무덕관이란 이름을 가진 도장은 어떤 식으로든 수박도 또는 당수도와 연관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통합이 완료되고 태권도 브랜드가 확고해지기 이전인 1980년대 이전 많은 한인 사범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당수도라는 이름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당수도 세력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랄프 마치오, 팻 모리타, 윌리엄 자브카 등이 주연으로 나온 베스트 키드, 코브라 카이 시리즈가 그것으로 극중 빌런 세력으로 등장한 코브라 카이의 유파가 주한 미군 출신들이 한국에서 배워온 무덕관 당수도로 설정돼있는데 이는 주한미군 시절 한국에서 당수도를 배우고 미국에서 척 노리스와 당수도 협회를 세운 팻 존슨이 무술 총괄로 있기 때문이다.

종종 일부 태권도 인사들이 한반도 무술이 일본에 건너가서 당수가 됐다고 주장하기 위해 당(唐)을 가락국(가야) 혹은 삼한을 뜻하는 일본 열도 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가라테가 본개 우리의 무술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엄연히 류큐에서는 티 혹은 토티라 읽었고 일본에서도 도테라고 읽었으며 애초에 가라테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언급했듯 1905년 일본에 티가 건너가서 생긴 신조어다. 무엇보다도 해당 주장은 21세기에 들어 태권도가 공수도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급히 만들어낸 협잡스러운 물타기에 불과하다. 정말 우리에게서 원류를 찾을 수 있었다면 21세기가 되기 한참 전부터 일찌감치 부르짖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당수도(唐手道)라는 표기는 매우 마이너한데, 일본에서는 '당수(唐手)' 혹은 '당수술(唐手術)'에서 급격히 '공수도(空手道)'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전통 당수를 한다는 몇몇 단체가 당수도 표기를 쓰고 있고, 가라테와는 별 상관 없는 대만의 중국무술 단체 중에 이런 표기를 쓰는 곳이 있다.

유명인들 중엔 척 노리스와 신시아 로스록이 당수도를 수련했다.[3]

일본 지배기와 무기술의 변화

흔히 류큐 왕국 주민들이 사쓰마 번의 침공 및 무기 금지령에 맞서 수행한 것으로 17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전부터 '테'라고 불리는 무술 자체는 있었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 등지와 교류하며 형성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류큐는 이미 15세기 경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낸 상씨 왕조 시절부터 내전을 두려워해 국가 단위로 민가에서의 무기 소지를 금했다.

이후 사쓰마 번이 점령한 시기에 들어 더욱 강하게 무기 소지와 무술 수련을 금지했다고 알러져 왔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엄금했던 것은 총기류 뿐이었으며 검을 비롯한 냉병기의 경우 휴대를 금지했을 뿐 소지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다. 물론 냉병기를 소지하려면 관아에 보고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나 이것은 오늘날 도검 소지허가와도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무술을 연습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았고 사쓰마 번의 점령 이후에도 검술이나 궁술 등의 계보는 한동안은 이어져갔다

또한 사쓰마 번이 침공하기 전에도 류큐에 내려져오던 '테'는 명목상 '한 가문에서 한 명의 자식에게만 물려줄 수 있다'는 규정 등으로 인해 원래부터 집단 수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과거엔 요즘처럼 협회는 물론이고 체계적인 교습체계도 없었으며 무술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여유가 있는 귀족 계층으로 한정되었다. 이렇듯 흔히 류큐의 백성들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저항하고자 만들어낸 무술이라는 통념은 근본적으로 헛점과 오류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가라테에 무기술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후나고시 기친이 일본에 처음으로 전파했을 때도 사이(쌍차)를 비롯한 여러 무기가 있었다. 물론 맨손 타격기 위주로 발전하면서 사장된 부분이 많기는 하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것들은 배우는 편이며 일부러 오키나와테를 찾아가는 수련자들도 있다. 여담으로 지금 수련되고 있는 오키나와 고무도는 류큐의 여러 고무술을 합쳐서 만들어낸 별개의 무술이기는 하나 그 근본은 오키나와테이다.[3]

카타

다음 항목은 세계가라테연맹의 공인 카타 102개이다. 다양한 유파의 연합체 성격을 띄는 만큼 사실상 같은 동작인데, 움직임의 디테일과 명칭만 달리하는 경우도 많다. 예시는 아래와 같다.

  • 평안 Heian = Pinan
  • 철기 Tekki = 내보진 Naihanchi/Naifanchi
  • 관공 Kanku = 공상군 Kushanku/Kosokun
  • 암학 Gankaku = 진동 Chinto
  • 연비 Enpi = 완수 Wanshu
  • 송풍 Matsukaze = 왕관 Wankan
  • 반월 Hangetsu = 십삼 Seisan
  • 이십사보 Nijushiho = 이십사 Niseishi
  • 오십사보 Gojushiho = 오십사 Useishi

단순히 발음이 아닌 철자 자체가 다른 것들은 보통 송도관에서 새롭게 명명한 경우가 많다.[3]

일본 본토에서의 발전

류큐 제도가 수백년 동안 일본에 의한 군사 및 직간접 지배를 거쳐 일본의 정식 영토(내지)로 편입되기 전까지 류큐인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가라테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했다. 당시 일본은 맨손무술 중 유도를 최고로 쳤고 가라테는 싸움패 주먹질 무술이라며 천시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세기 들어 일본이 여러 전쟁을 겪으며 상무적인 사회 분위기가 되면서 검도와 유도 이외의 여러 무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가라테 역시 주목을 받아 일본 본토에 상륙하게 된다.

일본에 가라테를 전파한 사람은 용의인容宜仁(1868. 12. 23. ~ 1957. 4. 26.)이다. 그는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해 부모가 열심히 운동을 해 몸을 단련하란 의미에서 스승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스승과 용의인의 집은 거리가 20리나 되었는데, 수련이 금지되어 있어 밤에 몰래 수련하기 위해 제자는 한밤중에 10리를 달려가고, 스승도 10리를 달려와서 정확히 중간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수련했다고 한다. 만약 하루라도 빠지면 상대가 10리를 헛수고해서 달려온 게 되기에, 태풍이 오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 아파도 제자는 스승을 위해, 스승은 제자를 위해 단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는 감동스러운 스토리가 전해져 내려온다.

용의인은 일본에서 류큐의 무예가 인정받게 되고자 가라테를 일본에 전파하게 되었고, 1916년부터 본토에 진출하였다. 이때 중국 색채가 나는 '당(唐)'자를 빼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게이오기주쿠대학 공수부 기록으로 1929년 혹은 1930년에 이름을 대일본 권법 공수도로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국민 스포츠이던 유도 강도관 도장에서 수련시간 외에 연구회가 처음 인정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승급체계나 도복 등, 유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1933년 대일본무덕회에서 일본 무술로 인정 받는다. 특히 쇼토칸 가라테는 타격기로 무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존 가라테에는 없던 발차기를 아들인 후나코시 요시타카가 사바테 등에서 적극 도입하고 연구해 1936년 부터 1946년 사이 돌려차기, 뒤차기, 옆차기의 세분화, 낚아차기, 날아차기, 이단앞차기 등이 도입된다.

그 이후 가라테는 쭉 발전하여 일본에서 검도, 유도의 뒤를 이어가는 주류 무술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일본의 대표적인 타격계 무술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어느 정도 유술기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업어치기 후 안면에 정권이나 다리걸기 등.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무술의 원형은 타격기와 유술기가 혼합된 형태였다. 일본 무도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무기를 든 상태를 상정하고 종종 직선적 킥으로 원거리 공격을 보조했다. 또, 근접 상태에서는 펀치가 아닌 유술기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형태였다. 고류 유술의 움직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유술로 대표되는 유도의 경우도 현재의 유도로 정립되기 이전에는 주먹과 발 기술이 있었으며, 심지어 스모조차 과거에는 타격기와 유술기 등을 가진 종합 무술에 가까운 형태였다. 사실 대부분의 무도는 태생을 따라 올라가면 모두 무기술 + 유술 + 타격기가 혼합된 형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각각이 하나의 종목으로 자리잡고 스포츠화 되면서, 다른 무술과의 차별화를 위해, 혹은 스포츠화를 위해 타격이나 유술 한 쪽으로만 발달하게 된 것이다. 가라테에 잡기보다는 치기가 많으나 그럼에도 카타에 유술기를 상정한 동작이 제법 존재하며 시합에서도 일정 부분 허용하는 까닭은 이러한 태생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라테의 유술기를 볼 수 있는 영상으로 평안4단(平安四段)이라는 카타의 동작을 응용한 기술이다. 유파의 대표로 불리는 쇼토칸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카타이며, 유술기가 사실상 완전히 금지되었고 카타 역시 분해 교습을 등한시하는 극진의 각 분파에서도 동작 자체는 가르치고 있다.

애초에 근대 공수도의 대부인 후나고시 기친이 저술한 가라테 교범에도 유술기 항목이 대거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카타속 가라테 동작들의 모습이 현대의 종합격투기와 기타 유술기 무술들의 모습들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등장하는 모든 선수들이 가라테 기술을 시전하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되겠지만, 기존의 오키나와 테의 실전성과 유술기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하물며 스포츠화된 공수도 시합에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유술기를 활용하며 높은 점수를 준다. 료토 마치다도 저러한 특유의 리듬을 잘 활용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사실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일본 내에서 가라테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다. 유도가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신사적인 전통무도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가라테는 깡패들이나 수련하는 싸움이란 선입견이 강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가라테 영화에서도 제목을 무도로서의 가라테가 아니라 그냥 공수치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따라서 가라테 수련자들은 일본을 떠나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의 해외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가라테가 온전히 일본 무술로 받아들여지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이런 해외 수련자들 덕에 '외국에서 유명한 일본 무술'의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가라테연맹 본부부터가 스페인에 있다.

가라테에서 뻗어나온 무술이나 격투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무술이고, 룰과 커리큘럼을 수정한 극진공수도와, 이 극진공수도에 다시 룰을 수정해서 발전시킨 대도숙 공도와 무에타이의 요소와 결합시킨 킥복싱 등도 있다. 그 킥복싱에 다시 새로운 룰을 추가한 슛복싱도 따지고 보면 가라테의 증손자뻘 되는 셈이다. 물론 무술이나 격투기라는 게 룰 하나만 수정해도 완전히 다른 종목으로 바뀌며, 가라테 역시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발전을 거쳐온 만큼, 이들이 가라테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논리로 따지면 가라테도 오키나와 테라는 류큐국 무술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오키나와 테는 중국 남권에서 나왔으니 결국 계보상 뿌리는 가라테가 아니라 중국 남권이다. 다만 가라테는 뚜렷한 체계를 갖춘 근현대의 단체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널리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어쨌거나 현대 타격 무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3]

현대의 다양한 발전 양상

각각의 유파들도 자신들만의 발전 방향을 가지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 일반 공수의 경우 자신들 무술의 전통성을 강화하고 수련생들이 다치지 않는 격투기로서의 발전 방향을 갖고있다. 주로 노약자, 어린이, 여성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격투기 수련으로서의 특징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주로 슨도메 룰로 연습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보호구를 착용하고 직접 상대방을 타격하는 유파나 도장들도 제법 있다. 다만 양상은 극진과는 달리 전통 유파의 스타일을 유지한다
  • 극진을 비롯한 풀컨택트 유파들은 육체의 단련과 강함을 모토로 어떻게 실전에 적용시킬 것인가를 화두로 보고 있다. 이 안에서도 다시 수련방법이 여러개로 나뉘는데, 보호구 없이 맨몸타격을 고수하는가 하면, 보호구를 착용하고 부상을 막는 유파가 있고, 복싱글러브를 착용하고 킥복싱과 비슷하게 변화한 유파도 있다.
  •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격투기로서의 순수성에 최대한 집중하며 가라테로서의 특징마저 과감히 포기한, 도복만 입은 종합격투기에 가깝게 변화한 곳까지 있다. 정권찌르기나 카타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포기하고, 격투기 무대 등에서 실전성이 입증된 트레이닝과 기술들에 집중하는 유파들이다. 대표적으로 대도숙 쿠도가 그러하다.[3]

풀컨택트 가라테

풀컨텍트 가라테란 보호구 착용을 일절 하지않고 시합을 하는 규칙을 가진 가라테이며, 현재 가장 대표적인 풀컨텍트 가라테로는 극진공수도가 있다.

가라테의 실전성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안전상의 이유로 검도의 슨도메룰을 적용 시켜 자유대련 중에도 상대를 실제로 가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진검을 사용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검도와는 달리 주먹은 맞는다고 무조건 뭔가가 잘려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완전한 타격까지 원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나타났다.

일본에서도 슨도메 룰만으로는 시합의 공정성 등에 문제가 있다는 유파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자체적으로 수련생들끼리 실제 타격을 해보며 수련하는 도장들이 몇몇 있었다. 그런 유파(특히 강유류)들의 영향을 받은 최영의는 가라테 대회에서 우승 후 전국을 돌며 도장깨기, 소와의 싸움 등을 통여 유명해진 뒤 미국으로 격투기 여행을 떠나면서 이후 세계에 가라테의 이름 및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최영의는 '극진회관'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고, 실전성을 내새우는 가라테인 극진공수도를 창시한다.

최영의의 죽음 이후 극진회관의 새로운 관장의 대한 반발 및 여러가지 상황이 겹쳐 극진공수도는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보호구 착용을 허용한 대도숙 공도이다.

그리고 결국 이 슨도메 룰 때문에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그것도 결승전 때 슨도메를 안 했다는 이유로 기절해서 실려나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가격한 선수가 실격패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3]

해외 전파

현재에는 일본의 주류 무술이다. 그러나 정작 일본 국내에서 가라테는 다른 무술과 비교하자면 뿌리가 약한 편이다. 이는 가라테가 유난히 분파가 많은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본래 일본의 것이 아닌 가라테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원인으로 추측된다.

현실이 그렇다보니 1950 ~ 1960년대 일본 영화에선 유도 고단자는 정의롭게 나오고 가라테 고단자는 악당으로 나오는 게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라테는 유도의 도복과 승단체계를 도입하고, 이름까지 바꾸는 등 '일본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편으론 이런 이유로 인하여 역설적이게도 한국인 중 가라테에 입문한 사람도 꽤 있게 되었다. 종종 오키나와와 조선은 식민지인의 고달픔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유도나 검도와는 달리 공수도는 조선인이라고 입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 크다. 1명이라도 더 많은 관원을 모집해야하는 처지에서 찬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셈이며, 일본 내 오키나와인들이 조선인이라고 마냥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되려 사실상 2등을 넘어 3등시민이라며 더욱 얕잡아보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아무튼 일본에서 뿌리가 약하다 보니 가라테는 오히려 해외 진출에 더 적극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해외 진출 덕분에 오늘날 가라테는 해외에선 일본 무술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세계가라테연맹의 본부는 스페인에 있기까지 하다.[3]

국제 대회

스포츠화로 방향을 잡은 태권도의 성장에 주목하여 가라테를 올림픽 종목으로 하려는 시도가 있다(주로 일반 유파). 실제로 2005년 IOC 올림픽 종목 투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이미 격기종목이 몇가지 있기 때문에 가라테가 올림픽에 입성하려면 한종목을 밀어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가능성이 낮다. 게다가 많은 유파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룰과 조직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올림픽을 대표하는 하나의 룰과 조직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난항인 것이 사실이다.

가라테의 올림픽 종목화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가 유럽이 주축이 된 세계가라테연맹(WKF)으로, 2005년과 2009년 IOC 총회에서 종목 신청도 이 단체가 주도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주축인 국제가라테연맹(ITKF)과의 알력 다툼은 심각한 상태로 2005년 IOC 총회 당시 세계가라테연맹(WKF)의 올림픽 종목 신청에 반발하여 로게 IOC 위원장에게 항의서신을 보낼 정도였다. 그 결과 IOC 측에서는 올림픽 종목 신청 이전에 가라테 내부 의견부터 통합하고 오라고 권고 했을 정도이다.

WKF의 가라테는 우리가 흔히 아는 가라테와 상당히 다르다. 스텝 밟는 것이나 타격 후 소리 지르는 것까지 과거의 태권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때문에 ITKF 일부에선 WKF가 가라테를 망치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는 실정이다.

올림픽을 바라보는 가라테 유파들의 입장은 유파마다 제각각인데, 올림픽 진출을 환영하는 유파들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유파의 지명도를 올릴 수 있기에 의외로 일반 유파들이 많이 원하는 편이다. 반면에 올림픽에 전혀 관심없는 유파들도 많은데, 올림픽에 나간다는 건 IOC의 요구에 맞춰 유파의 조직구성과 수련체계가 변해야함을 뜻하는데, 남의 간섭을 받기도 싫고 굳이 그렇게 해서 유파에 돌아오는 이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는 유파들이다. 이미 젊은층을 상대로 자체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은 실전 유파들이나, MMA식 격투기 무대에 적응하려는 유파들이 대체로 이런 쪽이다.

이런저런 까닭에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가라테 선수들은 태권도로 전향해 올림픽 태권도를 배우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셰이카 마이타 알막툼 (Sheikha Maitha Bint Mohammad Bin Rashid Al Maktoum). 두바이 왕족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가라테 은메달리스트이나 올림픽 출전을 위해 태권도로 전향,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나왔다. 그래서인지 태권도와 가라테 둘 다 잘하는 나라가 많다. 실제로 감정의 골이 깊은 한일과는 달리 해외에서는 공수도와 태권도가 악연이 깊은 관계가 아니며, 유도가 주짓수를 대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또한 앞서 말했듯 둘 다 잘하는 나라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 라이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후보로 가라테가 도전했지만 최종후보조차 못 들어가고 일찍 탈락했다. 적어도 야구는 제치고 최종후보까진 들어가겠지 이러던 가라테 정식 종목 추진회는 그 야구에게도 밀려 탈락하자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 야구 선수들의 도박문제가 터지자 다시 정식종목을 노리고 있었다.

결국 2016년 8월 3일(현지 시간) 리우데자이네루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야구 / 소프트볼, 서핑, 스케이트보드, 스포츠 클라이밍과 함께 2020년 도쿄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올림픽 어젠다 2020에 따라 개최지가 정식 종목을 5개 정도 추가할 수 있게 되면서 가라테의 올림픽 추가가 성사된 것. 이 때문에 그 이후 올림픽에서는 가라테를 못 볼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 이후 올림픽에서는 선택되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일본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최근 들어 강력해진 이란이 태권도와 더불어 일본을 추격하고 있다. 아직은 일본이 압도적이지만 이란은 2000년대 와서 일본에 이어 가라테에서 금메달 통합 10개를 넘긴 나라가 되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받은 일본에 이어 이란이 금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받으며 바싹 추격했을 정도였다. 2018 아시안 게임에선 일본이 금메달 4개, 동메달 2개를 차지하고 이란이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3개로 전체 메달 6개를 받은 일본을 제치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된 뒤로 처음으로 가라테 대회 최다 메달 수로 일본을 제쳤다.(참고로 1994년 일본은 금메달 9개, 동메달 1개로 통합 10개를 받은 게 최고 기록)

참고로 역대 아시안 게임 가라테 총메달은 2018년까지 금 30개,은 10개, 동 9개를 받은 일본에 이어 금 14개, 은 11개, 동 10개인 이란이 추격 중이며 금 8개, 은 7개, 동 16개를 받은 말레이시아도 강세를 보였으나 2018 아시안 게임에서는 말레이시아는 달랑 동메달 1개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2018년 대회에선 대만이 금메달 2개, 은 1개, 동메달 2개를 기록하며 새로운 가라테 강호가 되었다. 대만은 참고로 전체 메달 수에서 일본 - 이란 - 말레이시아 다음으로 4위다.(금메달 수로는 카자흐스탄과 같이 공동 5위)

한국은 가라테에서 역대 아시안 게임 19위다.

재일교포들 중에서도 가라테를 배우는 교포들이 더러 있기 때문에 협회가 따로 있으며, 나아가 북한 국적으로 출전하기도 한다.[3]

북미

영어권에서는 일본의 관 체제나 수련 방식, 도장 문화에서 접근하기 힘든 엄격한 분위기도 많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반대급부로 동양신비주의를 극단적으로 활용해서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단체들도 존재한다. 한편, 미국 등에서는 미국 사범들이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아예 중국무술과 검술, 봉술까지 합쳐 우슈 짝퉁으로 수련하는가 하면, 익스트림 마샬 아츠 계열로 컨셉을 잡아 묘기 전용으로 수련하는 등 다양한 도장들이 있다. 때문에 미국등지에서 가라테라고 하면 꽤나 높은 확률로 일본 현지에서 수련되는 가라테와 차원이 다른 이상한 무술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 제대로 된 가라테를 수련하려면 해당 도장이 어떤 유파에 속해있는지, 그 유파가 제대로 된 곳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일명 McDojo라고 하는데 미국은 지금까지도 동양무술이라면 무조건 가라테라고 부르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1960 ~ 1970년 초반 미국에서 가라테가 태권도를 인지도로 압도하면서 미주와 유럽에선 태권도가 가라테연맹의 한 분과로 들어가는 상황이었으며 1972년 가라테협회가 미국체육회에 가입하면서 태권도는 더욱 입지가 좁아져서 일본 가라테의 아류로 인식되어 코리안 가라테로 지칭되는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이후 1974년 태권도가 미국체육회에 가입하고 80, 90년대를 거치며 보급을 많이한데다가 태권도가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입지를 굳힌 2000년대 이후로는 독자적인 이미지와 인지가 탄탄해진 상황이라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동아시아의 타격 무술은 가라테라고 지칭하는 풍조가 남아있으며 호신무도로써의 입지는 여전히 강세이기는 하다.[3]

한국

일제 시대의 가라테는 본래 그 태생이 오키나와의 무술이었기 때문인지 일본 본토에 기원을 둔 검도나 유도, 스모에 비해 비주류에 가까웠다. 덕분에 비교적 일본 내 식민지인들이 입문하고 뿌리를 잡기 쉬운 분위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조선과 류큐는 식민지 백성의 고달픔을 공유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기엔 어렵고 현실적인 접근성의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비주류이고 한 명의 관원이라도 더 모집해야하는 가라테 입장에선 조선인이라고하여 입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홍희나 최영의 같은 한국계 무술인들이 가라테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유도나 검도를 배운 조선인도 많았다. 하물며 프로레슬러 역도산조차 스모 출신이다. 물론 스모는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유독 중시하는 만큼 차별도 심했다.

일본 패망 이후 이때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운 인물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가라테 수련을 계속하지만, 유파가 갈리듯 점점 한국식으로 변형되고 한국 무술계에서도 어찌됐든 일본색이 나는 가라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태권도처럼 가라테에 기반한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 가라테 계열 도장들을 점차 통합해, 1960년대 이후부턴 가라테 도장 찾기가 꽤나 어려워진다.[3]

현황

최영의 총재 사후 2천년대 들어 풀컨택트 공수(극진공수도) 유파들이 한국으로 제법 진출해 들어왔다. 한국 국내에선 전통공수도보다 극진공수도를 비롯한 실전 공수도가 더 흔한 이유이며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이례적인 사례다. 그 밖에, 아시안 게임에서 가라테가 종목으로 채택 되었기 때문에 아시안 게임을 대비하는 일반 가라테 단체나 도장들이 아직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공수도협회'라는 단체가 있으나, 현재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인 공수도는 '대한가라테연맹'이다. 대한가라테연맹은 한자시험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극진 기반의 풀컨택 공수도 단체들도 한자시험을 강제하지 않는다.

전국체전 종목이긴 한데 정식종목이 아니라 시범종목이다. 다만 가라테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기에 기본적으로 정식종목 채택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라테 선수들은 한국에서 대회로 벌어먹긴 어렵다. 지원 정식 종목이 아니라 국대 선수들은 태릉 선수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국영 훈련장조차 없어 자비로 빌려서 훈련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까지 동메달 9개를 받으며 전체 메달 수 19위이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처음으로 동메달 1개를 받은 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 3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최고 성적인 동메달을 4개 따냈다. 인천 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은 가라테 선수들은 인지도에서 태권도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일본 무술이라고 하여 무시받고 핍박 당하는 입장에서 금메달을 받았더라면 조금은 더 지원도 받고 관심도 받았을 텐데 겨우 동메달을 받은 것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대한체육회에서 퇴출당해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가대표 파견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 게임 에도 대한가라테연맹은 국가대표를 출전시키는 등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 올림픽 국가대표 인터뷰 기사도 있어서 국가대표 선발도 정상적으로 진해되었다. 다만 국내 전국체육대회에 대한체육회 정회원이 아니라 참가하지 못한다.

결국 이런 분위기 속에 2016년 9월 4일 대한체육회에서 퇴출당했다. 손영익 공수도 국가대표 감독은 "전화 한 통으로 통보를 받았다"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반면, 대한체육회 측은 "(대한공수도연맹은)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거냐"며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체육회 측은 공수인들이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가맹절차를 밟을 경우 다시 받아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1년이 지난 2017년 12월까지도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부적 문제 해결도 안되니 한국에서 가라테 입지는 더더욱 어둡다.

이 후 2018년에 기존 대한공수도연맹과 다른 대한가라테연맹이 대한체육회에 준회원으로 가입했다. 올림픽에 관여하는 WKF쪽과 관할하니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엔 출전할 수 있을 듯 하다. 현재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국가대표를 출전시키고, 경찰시험 등에 가산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단체는 대한가라테연맹이다.

2018 아시안 게임에서는 남자부에서 동메달 1개에 그쳤다. 그래도, 한국은 여태 동메달이 전부였지만 같이 동메달 1개에 그치며 역대 최악의 결과를 맞은 말레이시아 가라테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전 대회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2개. 2010년 대회에선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이란을 제치고 가라테 메달 2위에 오르기도 하고 일본과 이란 다음으로 가라테 통합 메달 순위 3위인 말레이시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 2개,은 1개, 동메달 2개를 받았던 만큼.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은 이웃 인도네시아 대회인 만큼, 기대를 더 받았더니 사상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박희준 선수가 출전했다.[3]

종합격투기에서의 공수도

1980 ~ 90년대 미국에서의 겐포 가라테의 인기는 상당한 것이었고, 종합격투기 무대에도 많은 선수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의 수련자가 아닌 미주의 겐포 선수들이었는데, 제인 프레이저, 제라드 고르도, 키스 해크니 등이 대표적인 겐포 파이터들이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믿기 어렵겠지만 프랭크 미어는 가라테로 격투기에 입문, 척 리델의 타격 역시 겐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쨌거나 초창기에 가라테 출신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정작 성적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라운드 대처법이 부족해서 그다지 강세를 보이진 못했다. 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겐포의 참여율은 크게 감소하고 MMA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후 Rings, Pride의 출범을 계기로 종합격투기의 중심이 일본으로 이동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이 인식은 료토 마치다가 UFC에 입성할 때까지 지속됐다. 2007년 옥타곤에 모습을 드러낸 쇼토칸의 마치다는 가라테와 스모가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로 기존의 강자들을 올킬하며 -93kg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그 파이팅 스타일이 기존 MMA의 타격에 비해 상당히 독창적이고 특이해서 MMA에서의 가라테는 재조명을 받기에 이른다.

반면 일본의 선수들은 딱히 종합 무대에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극진을 비롯한 본토의 유파들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본 내에서 그 입지를 탄탄히 다져, 자체적으로도 권위있는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K-1이라는 프로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종합보다는 입식으로의 진출이 두드려졌다. 프란시스코 필리오, 앤디 훅, 사타케 마사아키, 모리 아키오(무사시), 세미 슐트, 에베르톤 테세이라 등이 이 방면에서 활약한 선수들이다. 다만 일각에서 최강으로 불리던 극진공수도 출신 선수들이 KO당하는 모습도 보여 그 환상이 깨지기는 했다.

그러나 2010년을 기점으로 FEG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일본의 유파들도 MMA 진출을 고려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극진공수도를 수련한 MMA 파이터 중 챔프에 오른 유명한 이들로는 바스 루텐과 조르주 생 피에르가 있다. 일찍이 UFC헤비급 챔프와 판크라스 챔피언을 지냈던 바스 루텐은 극진 분파 중 하나인 극진무도회에서 2단까지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스 루텐은 MMA 트레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레슨에서도 극진공수도를 인용한 설명을 보이기도 한다. 웰터급 챔프인 생 피에르는 어릴 적 불량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게 싫어서 극진공수도를 시작해 격투기에 입문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생 피에르는 맷 세라와의 1차전 이후에 완전히 레슬링 스타일로 전환했으나 타격 시에는 여전히 가라테 방식을 쓴다고 본인이 말한 바 있다.

2016년 웰터급 최고의 신성으로 떠오른 스티븐 톰슨이 겐포 가라테를 수련했다고 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쪽은 조르주 생 피에르와 달리 그라운드나 클린치 플레이 없이 순수한 가라테 스타일로 싸우는 타격가다. 다만 이쪽의 경우 다른 가라테 스탠스 선수들에 비해서도 가드가 더 낮아, 태권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웰터급의 거너 넬슨 역시 가라테가 베이스이며, 톰슨에게 "누가 가라테를 더 잘하는지 승부를 가리자"라는 도발을 날리기도 했다.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패배했지만 그외 선수들에게는 동양인으로서 극강의 강력함을 자랑했던 호리구치 쿄지 역시 쇼토칸 가라테를 베이스로 싸웠다.

패트리시오 핏불은 경기 중 많은 타격을 허용하자 파이트레디의 타격 코치이자 전 가라테 선수였던 마누 산타나에게 가라테 스탠스를 훈련받고나서 뛰어난 거리조절능력과 더 섬세해진 크로스 카운터로 벨라토르 라이트급을 지배했다. 헨리 세후도는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굴욕패를 당한 후 팀메이트인 핏불의 영향을 받아가라테 스탠스를 장착하고 나타나며 웰라운드 파이터로 변모했고, 결국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벨트를 가져오게 되었다.

UFC의 유명인 코너 맥그리거도 어렸을 때부터 가라테를 수련했고, 이 영향인지 그의 스탠스는 가라테와 복싱을 결합한 듯한 독특한 스탠스다. 미들급 전 챔피언 로버트 휘태커 역시 어릴 때부터 가라테를 배웠기 때문에 타격 스타일에 가라테의 영향이 드러난다.

가라테 스타일 선수들은 복싱 타입에 비해 유니크하다 보니 주목받기 쉽다. 가라테 스탠스는 복싱 스탠스에 비해 카운터와 콤비네이션에 유리하다. 그러나 상체 바디워크보단 풋워크의 비중이 크다 보니 체력이 빠르게 소모된다. 그래서 체급이 올라갈수록 가라테 베이스 선수들도 적어진다.

기술

다채로운 공격과 방어 기술
  • 기본 기술: 펀치, 킥, 블록
공수도는 펀치, 킥, 블록과 같은 기본 기술을 통해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고 공격을 가하는 기술을 익힌다. 공수도의 펀치는 빠르고 강력한 힘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며, 킥은 다양한 각도와 높이에서 발휘되는 기술로, 상대방을 균형을 잃게 하거나 큰 피해를 입히는 데 효과적이다. 블록은 상대방의 공격을 막는 기술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펀치를 막을 때는 팔꿈치를 이용하거나 을 이용하여 펀치를 막는 기술을 사용하며, 킥을 막을 때는 다리무릎을 이용하여 막는 기술을 사용한다.
공수도의 기본 기술은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정신적인 집중력과 균형 감각을 요구한다. 정확하고 강력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정신적인 집중이 요구된다. 또한, 균형을 유지하며 움직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수도는 이러한 기술을 통해 몸의 균형 감각을 향상시키고 움직임을 더욱 유연하고 민첩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 합기도 기술: 관절기, 꺾기, 메치기
공수도는 합기도 기술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을 익힌다. 합기도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여 공격을 방어하고, 관절을 꺾거나 메치는 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술이다. 합기도 기술을 익히는 것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균형을 잃게 만드는 전략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또한, 합기도 기술은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므로, 체력이 약한 사람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술이다.
공수도의 합기도 기술은 단순히 공격적인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공수도 수련자는 합기도 기술을 통해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실전 상황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틈을 노려 역공을 가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 체력 및 지구력 훈련
공수도는 체력 및 지구력 훈련을 통해 몸을 단련하고 기술 수행 능력을 향상시킨다. 체력 훈련은 근력 강화, 지구력 향상, 유연성 증진 등을 목표로 하며, 달리기, 팔굽혀펴기, 윗몸 일으키기, 스쿼트 등 다양한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구력 훈련은 오랜 시간 동안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향상된다.
공수도의 체력 및 지구력 훈련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체력 및 지구력 훈련을 통해 끈기와 인내심을 길러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을 키울 수 있다.[4]

예의범절, 인내심, 정신력

공수도는 단순한 무술을 넘어, 예의범절, 인내심, 정신력을 강조하는 정신 수련의 방법이다. 공수도 수련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인격을 함양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즉, 공수도는 육체적인 훈련과 함께 정신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종합적인 수련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예의범절: 존중과 겸손
공수도는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무술이다. 공수도 도장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예의범절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며, 훈련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상을 최소화하고, 안전하고 즐거운 훈련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수도 수련자는 예의범절을 통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고,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 인내심: 끊임없는 노력
공수도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무술이다. 공수도 기술은 짧은 시간 안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며,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을 통해 숙달될 수 있다. 공수도 수련은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공수도는 인내심을 통해 끈기와 극기 정신을 함양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을 배우게 한다.[4]

경기 규칙

공수도 경기는 스포츠이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 기술은 금지되어 있으며 모든 기술은 통제되어야 한다. 특히 머리, 안면, 자궁경부, 가랑이, 관절에 대한 공격은 부상하기 쉽다. 따라서 상대를 부상시킨 기술에 관해서는 고의적이지 않고 벌칙이 주어진다. 선수들에게는 항상 통제된 좋은 자세로 기술을 내는 것이 요구되고 있어 스포츠맨십에 따른 행동이 요망되고 있다.

계급별 경기 시간
  • 성인 남자: 3분
  • 여자: 2분
  • 주니어(18-20세): 2분
  • 카데트(16-17세): 2분
  • 경기의 시간계시는 주심이 개시의 신호를 했을 때부터 시작한다.
  • 주심의 '그만'의 소리가 걸릴 때마다 계시를 중단한다.
  • 시간 기록계는 '종료 30초 전'과 '종료'의 신호를 한다.
판정 득점 적응 범위
한개 3포인트 상단차기
매트에 던져 발족으로 쓰러뜨린 후의 유효기술
기술 있음 2점 중단 걷어차기
등에 찌르기
각기술이 득점할만한 복합기술
상대를 무너뜨리고 득점했을 경우
유효 1포인트 중단 찌르기
상단 찌르기
치기

전공련의 경기 규정에서는, 빨강과 파랑의 깃발을 가진 부심 4명이 기술의 유효성을 판정해, 2명 이상의 부심이 깃발을 올리면 선수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선수도 포인트가 없고 경기 시간을 종료한 경우, 5명의 심판이 다수결로 승패나 연장을 판단하는 룰이다.

대회 시작시 주심은 먼저 선수에게 제자리에 놓도록 지시한다. 그 전에 경기정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주심에 의해 몸짓으로 장외로 나가도록 지시받으면 장외에 있어야 한다. 선수들은 서로 정확하게 입례해야 한다. 선수는 주심의 위치에서 보면 오른손에 위치한 사람이 빨간색, 왼손이 파란색이라고 불린다.

선수의 입례 후, 모든 심판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되면, 주심의 "승부 시작"의 목소리와 동시에 경기가 시작된다. 주심에 의하여 '그만'의 소리를 들으면 경기자는 경기를 중단해야 한다. 원한다면 선수는 원래의 위치에 가도록 주심에게 지시받을 수 있지만 이것을 따른다.

한 선수가 상대에게 8포인트의 차이를 취득했을 경우, 혹은 경기 시간이 종료한 시점에서 주심은 '그만'의 소리를 걸어, 선수에게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므로, 선수는 이것을 따른다. 그리고 판정이 이루어져 승패가 결정되는지, 연장전이 되는지의 판단이 내려진다.

승패의 선고에 의해 경기 종료가 된다.

가라테 경기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위험한 기술은 금지되어 있고, 경기중에 금지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는 충고, 경고, 반칙 주의, 반칙 실격의 징벌이 된다.

가라테의 규칙은 오랜 역사에서 당양한 개정을 거듭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의 추가 종목에 채용된 것으로부터, 2019년에는 알기 쉬움을 중시한 대폭적인 룰 개정이 행해졌다.

혼자서 연무하는 형태는 깃발에 의한 판정에서 채점방식으로 변경되고, 여자의 조수는 경기시간이 2분에서 3분으로 길어져, 역전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5]

동영상

각주

  1. 공수도〉, 《네이버 국어사전》
  2. 공수도〉, 《시사상식사전》
  3. 3.00 3.01 3.02 3.03 3.04 3.05 3.06 3.07 3.08 3.09 3.10 3.11 가라테〉, 《나무위키》
  4. 4.0 4.1 정보박사, 〈공수도| 역사, 기술, 그리고 정신 | 무술, 자기방어, 수련〉, 《네이버 블로그》, 2024-10-23
  5. 성공한고양이, 〈가라테 규칙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okokjh, 2022-09-07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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