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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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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뉴욕포스트(New York Post)의 창시자
뉴욕포스트(New York Post)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757년 1월 11일 ~ 1804년 7월 12일)은 뉴욕포스트(New York Post)의 창시자이며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 재정가, 정치 사상가이다. 그는 킹스 칼리지(지금의 컬럼비아대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미국독립전쟁 중 G.워싱턴의 부관으로 활약하였으며 독립 후 아나폴리스회의, 헌법제정회의에서 뉴욕대표로 참가하였다. 연방헌법 비준 성립을 위해 ‘연방주의자 (The Federalist)’를 발표하였다. 또한 이 논문집은 미국 건국 주역들의 정치사상을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밑에서 재무장관으로 상공업의 발달을 중시한 재무정책을 취하였다.[1]

연혁[편집]

알렉산더 해밀턴은 리워드 제도 네비스 섬의 수도인 찰스타운에서 태어났다. 네비스는 영국 서인도 제도 중에 하나이다. 해밀턴은 프랑스 위그노 후손인 레이첼 포셋과 스코틀랜드 출신인 제임스 해밀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1772년 가을에 해밀턴은 뉴저지 주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그래머 스쿨인 엘리자베스타운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밀턴의 어머니는 어린 해밀턴을 데리고 버진 제도에 있는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세인트크로이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해밀턴의 출생년도가 1757년인지 1755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밀턴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은 해밀턴이 1757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1930년대 덴마크에서 해밀턴의 캐리비언 제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처음 발간된 기록에서는 1755년생으로 보고 있다. 해밀턴은 13개 식민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출생년도를 1757년으로 기입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꼽히며, 1787년 미국 헌법의 제정에 공헌했다. 또한 초대 워싱턴 정부 시절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카리브해의 네비스 섬에서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위그노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머니에게 태어났다. 조지 워싱턴과 뜻을 같이 하는 연방주의자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반 연방주의자와 대립하였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많이 초기 재정 정책으로 대립했는데, 해밀턴이 독립전쟁 때의 빚을 모든 주가 공평하게 나눠 내자고 한 반면에 제퍼슨은 자신 주의 빚은 자신 주가 갚으라고 하였다. 해밀턴의 기반 지역이었던 뉴잉글랜드는 공업 위주 지역이라 빚이 많았는데, 결국 수도를 북부인 뉴욕에서 남부와 북부 경계선 즈음에 위치한 워싱턴 DC로 옮기고 모든 빚을 나눠 갚는다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제퍼슨이 이를 수용하게 된다.

제퍼슨과는 1791년 미국 제1 은행 설립 당시에도 큰 마찰을 빚었는데, 제퍼슨은 은행 설립에 반대했으나 해밀턴은 수정헌법을 근거로 설립을 주장했고, 당시 대통령 워싱턴이 해밀턴의 주장을 들어줌으로서 아메리카 합중국 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이 당시 제퍼슨은 "왕당주의"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워싱턴이 정계에서 물러난 뒤 연방주의자당은 애덤스 파와 해밀턴 파로 나뉘게 되고, 결국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대통령을 내주고 의회마저 장악 당하게 된다. 해밀턴은 노예무역에서 법률 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이후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바 있다.[2]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두려워하는 에런 버 대신 토머스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으나 1804년 당시 부통령 에런 버와 결투를 벌이다 버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더 해밀튼은 에런 버로부터 1804년 7월 11일에 결투를 신청 받았다. 결투로 아들을 잃은 적이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입장에서는 결투를 원치 않았으나 자신의 명예 때문에 억지로 결투를 승낙했다. 그 당시 뉴욕주의 법은 결투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는 강을 건너서 결투가 허가된 지역인 뉴저지 주의 위호켄 외곽의 허드슨 강변 바위절벽 아래로 이동한 뒤 그 곳에서 결투를 벌였다. 결과는 애런 버가 승리하였고 패배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다음날 사망했다. 사후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2]

주요 활동[편집]

재무 장관[편집]

1789년 9월 11일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초대 재무장관으로 해밀턴을 지명하였다.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의 선택적 통치하에 그의 동료들을 감독했으며 워싱터은 재무부의 권한 밖의 문제에 대해 해밀턴의 조언과 지원을 요청했다. 1791년 해밀턴 장관은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밀턴은 의회에 각종 재무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이 중에는 제1차 공공신용 보고서, 수입에 관한 관세 부과법 운영 보고서, 국립은행 보고서, 조폐회사 설립 보고서, 제조회사 보고서, 공공 신용의 추가 지원을 위한 계획 보고서 등이 있다. 따라서 해밀턴의 행정 공화국 프로젝트에서 대기업은 안정성의 확립이다. 1795년 1월 마지막 날 해밀턴은 사임하였다. 이는 의회의 구성과 활동을 필두로 미국 정부의 대부분이 이 5년 동안 구축된다.[2][3]

뉴욕포스트[편집]

뉴욕 포스트의 웹 사이트 첫 페이지

뉴욕포스트(New York Post)는 미국 뉴욕시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이다. 또한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이 소유하고 있으며 유명인 가십 사이트인 PageSix.com와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Decider.com을 운영하고 텔레비전 쇼인 Page Six TV를 공동 제작한다. 뉴욕 포스트는 미국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문이자 보수적이고도 선정적인 상업언론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당사는 1801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설립하였으며 뉴욕 포스트의 현재 편집장은 스데반 린치(Stephen Lynch)이며 공식 웹 사이트는 https://nypost.com 이다.

뉴욕 포스트의 신문은 타블로이드판(tabloid) 형식으로 출판되었으며 연방주의자 및 미국 헌법 제정자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19세기 ‘뉴욕 이브닝 포스트(New-York Evening Post)’라는 이름의 석간 일간신문으로 창간하였다. 미국에서 일간으로 연속하여 현재까지 발행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 된 신문이다. 초기에는 뉴욕의 정론지로 여론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후에 창간된 뉴욕 타임스와 뉴욕 데일리 뉴스에 밀려 경영이 악화되었다.

뉴욕 포스트는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며 1934년 현재의 뉴욕 포스트로 제호를 변경했으며, 1939년 도로시 시프(Dorothy Schiff)가 인수하면서 타블로이드로 판형을 변경하고 대중지로 탈바꿈하였다. 1976년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뉴스 코퍼레이션에서 3천여만 달러에 인수하였고 이후 전면에 주로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가십성 기사를 배치하여 눈길을 끄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으나, 종종 지나치게 선정적인 보도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정치적으로는 대체적으로 보수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1993년 이래 뉴욕 포스트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전에 소유한 뉴스코퍼레이션(News Corporation)과 그 후속 회사인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이 소유하고 있었다. 뉴욕 포스트의 편집 사무실은 미국의 애비뉴(Avenue) 거리 1211번지인 식스 애비뉴(Sixth Avenue)에 위치해 있으며 2018년 미국에서 4위를 차지했다.[4][5]

주요 유산[편집]

알렉산더 해밀턴 초상화 미국 화폐
알렉산더 해밀턴 초상화 미국 우표
해밀턴 그렌지 국립기념관

미군부대 혈통[편집]

해밀턴의 뉴욕 지방 포병 회사(New York Provincial Company of Artillery)의 혈통은 "해밀턴의 소유(Hamilton 's Own)"라는 별명을 가진 일련의 부대들로 미 육군에서 영속되어 왔다. 2010년부터 현재 제1 대대, 제5 야전 포연대가 수송하고 있으며 정규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부대로, 독립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은 유일한 부대다.

화폐 및 우표의 초상화[편집]

미국 내전이 시작된 이래로 해밀턴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액면가의 미국 화폐로 묘사되어 그려졌다. 그는 2달러, 5달러, 10달러, 20달러, 50달러, 1,000달러 지폐에 출연했으며 500달러 시리즈 EE 저축 채권에도 출연하였다. 해밀턴의 초상화는 1928년부터 미화 10달러 지폐 앞면에 그려져 있었으며 이 판화의 출처는 뉴욕 시청의 초상집에 있는 존 트럼블(John Trumbull)의 1805년 해밀턴 초상화다. 2015년 6월 미국 재무부는 해밀턴 판화를 여성의 판화로 대체하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 법안이 실제로 재설계되기 전, 201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의 예상치 못한 대중적인 성공으로 인해 결정이 바뀌었다.

해밀턴을 기념하기 위한 최초의 우표는 1870년 미국 우체국에 의해 발행되었다. 1870년과 1888년 이슈에 대한 묘사는 이탈리아 조각가인 쥬세뻬 세라치(Giuseppe Ceracchi)가 해밀턴의 흉상을 모델로 한 동일한 조각 다이에서 관한 것이다. 해밀턴 1870호는 재무부 장관을 기념하는 최초의 미국 우표였으며 1957년 해밀턴 탄생 200주년 기념일에 공개된 3센트짜리 붉은색 기념호에는 뉴욕시에 위치한 연방관 건물이 전시돼 있다. 1956년 3월 19일 미국 우정국은 해밀턴을 기념하는 5달러짜리 리버티 이슈(Liberty Issue) 우표를 발행했다.

더 그렌지[편집]

더 그렌지(The Grange)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소유한 유일한 집이다. 이 집은 존 매콤 주니어(John McComb Jr)가 디자인한 연방 스타일 대저택이다. 맨해튼(Manhattan) 상부의 해밀턴 하이츠에 있는 해밀턴의 32에이커의 시골 저택에 지어졌으며, 1802년에 완공되었다. 그랜지는 1889년에 처음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졌고, 2008년에 다시 세인트 니콜라스 공원의 한 장소로 옮겨졌다. 현재 해밀턴 그렌지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역사적 건축물은 2011년에 원래 1802년 모습으로 복원되어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대학교[편집]

해밀턴의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교는 뉴욕 시 캠퍼스에 해밀턴을 위한 공식적인 기념관을 보유하고 있다. 인문학을 위한 대학의 주요 교실 건물은 해밀턴 홀이며, 그 앞에는 커다란 해밀턴의 동상이 서 있다. 대학 출판부는 그의 전집을 여러권의 활판으로 완전한 작품을 출판했으며 콜럼비아 대학의 ROTC 후보생도 및 해병대 장교 후보 학생 그룹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학회라는 이름이 붙는다.

각주[편집]

  1. 해밀턴〉, 《네이버 지식백과》
  2. 2.0 2.1 2.2 알렉산더 해밀턴 - 위키백과〉, 《위키백과》
  3. "Alexander Hamilton - Wikipedia", Wikipedia
  4. "New York Post - Wikipedia", Wikipedia
  5. 뉴욕 포스트 - 위키백과〉,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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