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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
(玉) 원석

(玉)은 비취를 다르게 일컫는 말로, 경옥 및 연옥을 보석으로 사용한 것을 일컫는다.. 각섬석의 하나로 반투명한 암녹색 또는 담회색의 보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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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옥은 연옥과 경옥의 총칭으로 백옥과 비취가 대표적이다. 동양에서 고대부터 귀하게 여겼으며, 세공하여 장식석, 옥기(玉器)로 사용했다. 연옥은 터키와 중국 등지에서, 경옥은 미얀마중국, 티베트고원에서 산출된다.

치밀하고 경질(硬質)이며, 투명하여 아름답게 빛나고, 연마하여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한다. 광물학적으로 연옥은 각섬석의 일종이며, 경옥은 알칼리휘석의 일종이다. 연옥은 유백색인 것이 많으며, 녹색 ·황색 ·홍색 등도 있고, 경옥은 녹색 ·백색이다. 색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백옥과 비취(翡翠)가 대표적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귀히 여겨 왔으며, 세공하여 장식석 ·옥기(玉器)로서 사용되어 왔다.

연옥은 튀르키예 등지에서는 결정편암이나 편마암 속에 맥상(脈狀)으로 산출되고, 중국 동북에서는 화강암의 접촉대(接觸帶)에서 산출된다. 경옥은 미얀마에서는 사문암 중에 맥상을 이루어 산출되고, 중국 윈난[雲南]이나 티베트고원에서도 산출된다. 좁은 뜻의 jade는 비취를 가리킨다.

내용[편집]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대지의 정물(精物)로 여겨왔다. 또한, 옥을 품에 지니고 장식하면 약효가 나타나고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옥을 광물의 아름다운 결정체로 보고 있다.

옥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몸, 또는 의복을 장식하는데 기본이 되는 재료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유물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이 옥이다. 경주의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보아도 총 유물의 68%가 옥 종류의 구슬이었다. 이 옥구슬에는 암석질의 옥이 대부분이었다. 암석질이라는 것은 광물질이라는 말이다.

옛 선인들은 광물질의 옥을 가장 아끼고 애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옥의 원석을 갈고 다듬어 작은 원형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으면 비로소 구슬[玉]을 이룬다. 이 구슬을 수없이 꿰어 달아 길이가 목에 두르는 데 알맞으면 목걸이가 되고, 가슴에까지 걸치면 경흉식(頸胸飾)이 된다. 손가락에 끼우면 지환(指環)이 되고, 팔목에 끼우면 팔찌가 된다.

더욱이 팔에 끼웠으면 완천(腕釧)이 되었다. 암석질, 즉 광물질 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출토한 옥류를 통해서 알아보는 것이 정확한데, 경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상감유리옥부목걸이가 그 예이다. 이 목걸이는 청색 유리제 환옥과 홍색 마노제 환옥 16개, 청색 관옥, 홍색 곡옥, 수정제 조옥 등으로 이루어졌다.

유리·마노·수정 등의 광물질도 다듬어지는 형에 따라서 옥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옥으로 사용된 물질은 다음과 같다.

(1) 유리(瑠璃) 청색의 유리환옥이 신라 고분에서 뿐만 아니라 백제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또한 녹색·감색(紺色 : 검은빛을 띤 푸른빛)·담황색 등의 유리 구옥(球玉)도 함께 출토되었다. 감색 유리구옥은 코발트를 구워서 산화코발트를 만들고 그것을 유리에 혼합하였을 때 얻어진다.

이러한 과정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서 감색 유리를 얻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팥알만한 크기의 유리구슬을 연결한 남색 유리옥 목걸이는 희귀한 것이다.

(2) 마노(瑪瑙) 마노환옥 또는 다면옥·관옥 등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서 신라·백제의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 매우 적다. 마노는 석영·단백석·옥수(玉髓) 등의 혼합물이며, 간혹 다른 광물질이 스며들어 적갈색과 백색의 무늬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마노로 곡옥을 만들었던 것은 적갈색이기 때문에 이색적인 목걸이를 얻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수정(水晶) 석영의 하나로 원래 광택이 없고 투명하다. 갈고 다듬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수정옥이 이루어지는데, 불순물이 섞이면 자수정·연수정·흑수정이 된다. 우리 나라의 수정옥 산지로서 이름이 높은 곳은 경주의 금오산이다(속칭 남산이라 한다.). 그래서 ‘남산옥돌’이라는 말이 조선 말부터 알려졌으며 ≪동경지 東京誌≫에도 기록되어 있다.

남산옥돌은 바로 수정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라시대의 고분 출토품 중에는 주판알 모양으로 다듬은 수정옥 38개를 연결하고 가운데에 수정옥으로 만든 곡옥을 늘인 목걸이가 있다.

가운데의 수정곡옥에 가까워질수록 수정이 크고 길도록 비례를 감안하였는데, 이에는 화려한 다른 목걸이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 미적 감각이 있다. 이 목걸이는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되었다.

(4) 호박(琥珀) 갈고 다듬어서 옥으로 사용하였다. 백제시대의 유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녹청색의 호박으로 된 사각형 관옥·조옥 등이 왕비의 목 부분과 가슴 부분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경흉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있었다고 믿어지나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호박은 송백과 식물의 화석인만큼 광물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식물성에 가깝다. 색은 황색을 나타내고, 그 안에 적색·갈색·백색을 띨 때도 있다. 또 투명한 것이 있는 반면에 불투명한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칠보(七寶) 가운데 하나로 중시되었다.

태고 때부터 존재하였던 이 호박덩어리 속에는 개미·거미·파리·갑충 등 곤충류 또는 조류의 털이 끼여 있는 것이 있어 매우 진귀하게 취급되었다.

(5) 석웅황(石雄黃) 천연적으로 산출되는 황화비소(黃化砒素)로서 계관석(鷄冠石)과 더불어 나온다. 누런 덩어리이며 염료로 쓰이기도 한다. 석황(石黃)·웅황(雄黃)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장신구에 많이 쓰였다. 화관·족두리 등의 관식(冠飾)으로 사용되고, 풍차 등 두식옥(頭飾玉)으로 사용되었다.

(6) 비취(翡翠) 경옥(硬玉)과 연옥(軟玉) 두 종류가 있다. 경옥과 연옥은 외관상 색채나 옥질이 너무 비슷하여 식별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광물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종류이다. 경옥의 성분을 분석하면 규산 58.28%, 번토 23.11%, 제2산화철 0.64%, 석회 1.62%, 고토 0.91%이다. 결정은 매우 적고 거의 없다.

경도는 6.5∼7이나 되고, 색은 백색·녹색, 또는 백색 속에 녹색 선조가 있는 것도 있다. 암녹색 및 청벽색을 띤 반투명의 것은 낭간(琅玕)이라고 부른다. 경옥은 많은 철분을 함유하여 암녹색 및 흑색에 가까운 것이 있다. 이것은 농녹옥이라고 부른다. 신라시대의 고분에서는 이 농녹옥으로 만든 곡옥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비취는 청자색 정도의 색채에서 진한 것까지 여러 가지 색조가 있는데, 녹색이 진하면 진할수록 귀하고 값이 더 나간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비취곡옥은 백색 속에 녹색 선조가 있는, 휘석(輝石)의 섬유상 결정이 집합하여 이루어진 비취로 중국제 비취와는 다른 계통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 비취가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산출지인 유적지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신라사람들은 의식관(儀式冠)인 금관에 작은 곡옥을 많이 매달아 놓는 것을 하나의 정석처럼 생각하였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입식에 달려 있는 곡옥,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입식과 대륜에 달려 있는 비취옥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경주 황남동 98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어느 금관보다도 많은 비취곡옥이 달려 있었는데, 이 곡옥들은 푸른빛을 내는 양질의 경옥이었다.

(7) 천하석옥(天河石玉) 녹청색을 띠고 있는 미사장석(微斜長石)이다. 매우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므로 비취와 혼동하기 쉽다. 주색조는 녹색이고 담녹색·농녹색 등이므로 신라 때부터 사용되어왔으나 그다지 귀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산지가 경주이고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8) 황옥(黃玉) 황색 또는 대황의 장미도색(薔薇桃色)을 지닌 옥이다. 때로는 무색도 있고 담녹색·담청색·홍등색·도색 등도 있다. 조선시대에 부녀들이 두식옥으로 사용하였다. 광택이 나는 것도 있으나 투명한 것, 불투명한 것이 있다. 황석류석(黃石榴石)이라는 별칭도 있다.

역사[편집]

기원전 6,200년 전 서요하 유역에 위치한 흥륭와 유적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제품인 옥결(玉玦-귀걸이)와 옥비(玉比)가 출토된 바 있다. 흥륭와 사람들은 이미 옥을 가는 탁마(琢磨) 기술과 구멍을 뚫는 천공(穿孔) 기술을 이용해 정교한 옥기 예술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이때에 이미 농업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옥을 다듬는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옥은 고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이미 계급이 분화되고, 경제활동에 있어서 분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청동기 보급 이전에 이미 보석의 소유 여부로 계급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흥륭와 문화를 포함한 요서지역 신석기 유적에서는 다량의 옥이 출토되었다. 일례로 우하량 2지점 21호 묘에는 다른 부장품 없이 20여 점의 옥기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그런데 요서지역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옥의 생산지는 요동반도에 위치한 수암 지역이다. 옥을 구하기 위해 요서지역 신석기인들은 요동지역까지 왕래해야 했다. 기원전 5,000년 전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흥륭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옥결을 사용했다. 옥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옥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은 단연코 중국인이라고 하겠다. 기원전 283년 춘추 전국시대에 진나라 소왕은 조나라 혜문왕이 얻은 ‘화씨벽(和氏璧)’이란 옥을 갖고 싶어서 그에게 성읍 15개를 주겠다고 제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빼어나게 좋은 옥은 값으로 따질 수도 없었다. 옥은 오직 갖고 싶은 자의 욕망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옥은 찬란한 빛깔과 은은한 광채를 내는 특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받았다. 중국인들은 옥을 중요한 의례에 예기(禮器)로서 사용했고, 작위의 상징으로 옥기를 상징했음을 『주례(周禮)』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주나라 시대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원형의 옥으로 제천의식에 사용된 벽(壁), 도끼를 상징하는 것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상서로운 구슬인 규(圭) 등이 예기로써 의식 때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춘추시대 이후로는 귀족들이 몸에 걸치거나 매다는 장신구인 패옥(佩玉)이 발달하게 되었다. 옥은 군자(君子)의 상징으로, 허리에 옥을 차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반인은 감히 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옥은 남과 달라 보이고 싶어 하는 왕과 귀족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옥과 장례 풍습[편집]

옥은 장례 풍습에서 특별히 사랑받았다. 1968년 하북성 만성(滿城)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113년에 죽은 한나라의 중산정왕묘(中山靖王墓)에서 출토된 중산정왕의 유골은 2천4백98개의 옥 조각들이 금으로 만든 실로 연결해 만든 옥갑(玉匣)으로 감싸여 있었다. 옥갑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장례 때 수의로 입힌 것이다.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인 갈홍(葛洪: 283〜343)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옥을 시신의 아홉 개 구멍에 넣어 두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옥은 왕과 귀족들의 장례에 널리 쓰였다. 비싼 옥으로 시신을 감싸는 옥갑은 대단한 사치품이었는데, 이것이 부여(夫餘)에도 전해졌다. 후한은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부여에게 옥갑을 선물하여 장례 때 사용하도록 했다.

신석기 시대 이후로 죽은 이의 무덤에는 많은 옥기(玉器)가 함께 묻혔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부여 송국리의 석관묘에서는 한쪽 끝에 구멍이 뚫린, 굽어진 모양의 장신구인 곡옥이 출토된 바 있다. 곡옥은 이후 5〜6세기 신라 무덤인 경주 천마총, 월성로 고분, 금관총, 황남대총 등에서 대거 출토되었다. 천마총에서는 전체 출토 유물 가운데 68%가 옥 제품이었다. 곡옥은 귀걸이, 목걸이 등에 다수 사용되었고, 금관에도 많은 곡옥이 달렸다. 황남대총 금관에는 곡옥이 77개 이상 달렸고, 천마총 금관에도 58개 달렸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옥에다 금으로 된 모자를 쓰인 곡옥을 포함해 100여 점의 옥기가 무덤 속에 부장되어 있었다. 황남대총에는 옥, 황금, 은, 유리 등으로 만든 엄청난 보물 7만점이 부장품으로 넣어졌다.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엄청난 사치를 부린 것이다.

값비싼 사치품인 만큼, 무덤에 넣어둔 옥기 등은 도굴꾼, 외적에게 노략질의 대상이 되었다.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두는 풍습과 함께 도굴하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무덤을 가졌던 고구려의 경우, 현재 남아있는 옥기는 집안시(지안)에서 출토된 옥배(玉杯) 정도에 불과하다.

옥은 나라의 보물[편집]

옥은 왕실귀족들이 사랑하는 보물이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 옥규(玉圭), 옥찬(玉瓚-옥으로 만든 술그릇)등 옥으로 만든 것들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했다.

옥으로 만든 제품은 신성한 영험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3대 보물이 등장하는데, 황룡사 장륙존상과 황룡사 구층탑, 그리고 579년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으로 장식된 허리띠다. 진평왕의 옥대 외에도,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서 받았다는 흑옥대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진평왕의 옥대는 신라가 망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쳐졌는데, 길이가 10척(3미터)이며 62개의 옥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옥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일 뿐 아니라, 적병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벽사(辟邪: 사악을 물리침) 기능을 가진 신기(神器)로 여겨졌다.

사치품은 소수만이 어렵게 구할 수 있을 때 가치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치품인 옥을 사용하는 왕실에서는 누구나 옥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탐탁스럽게 여길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44년 신라 일성이사금이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가 있었다. 또한 834년 신라 흥덕왕 때에는 각 신분별로 옷, 수레, 집 등의 사용 규정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진골 신분은 잘 다듬은 무늬장식이 있는 백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임금과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5두품부터는 사실상 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규정에는 금, 은, 각종 실크, 모직물, 대모(玳瑁) 등 다양한 사치품의 사용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다. 이런 조항이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사치품의 수요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치품은 국가간의 선물이나 교역품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후한이 부여에게 옥갑을 준 것처럼, 고구려도 북위에게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 옥(珂)을 주었는데, 섭라가 백제에게 합병되는 탓에 북위에 수출을 못하는 경우가 생겨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고려시대의 옥[편집]

고려는 조선에 비해 사치를 많이 부린 나라였다. 1140년 인종 때 제정된 제사복장 제도에 따르면, 고위 귀족들이 입는 일품복(一品服) 가운데 칠면류(七冕旒)는 술 장식 한 줄에 옥 12개를 쓰고, 옥은 적색, 백색, 푸른색 3색을 섞어 쓸 것을 규정하는 등, 공(公), 후(侯), 백(伯) 등의 고위관리들은 옥이 장식된 허리띠를 착용했다. 1123년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신하들은 모두(悉) 자주색 무늬가 들어간 비단옷을 입고 옥대는 금으로 만든 물고기가 장식된 것을 찼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의 관리들이 옥대를 착용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이었던 듯하다.

고려 때에는 왕비와 세자 책봉에 관련된 문서나, 송덕문(頌德: 공덕을 기리어 지은 글) 등 귀한 문서는 옥으로 된 문서인 옥책에 글자를 새겨 썼다. 이 밖에도 물고기, 새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옥제 장신구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옥은 왕과 신하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찰에서도 사용했다. 강화도 전등사, 선원사에는 고려시대 옥등(玉燈) 유물이 전한다. 옥으로 된 그릇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켜면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가평군 현등사 창건 연기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옥으로 만든 것은 이외에도 옥술잔(玉斝), 옥향로, 옥향합, 옥피리, 옥등롱(玉燈籠)이 있었다.

고려시대 환구단(圜丘壇)에서 사방신(四方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린 폐물은 청규(靑圭), 적황(赤瑝), 황종(黃琮), 백호(白琥)등 옥제품이었다. 옥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기도 했다. 이때 임금은 면류관의 좌우에 옥을 꾀어 9줄의 술을 단 규류(九旒)를 머리에 쓰고, 면복(冕服)이란 옷을 입었다. 임금은 옥반지를 비롯한 옥을 몸에 한껏 착용하고 제사에 참석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승려들의 사치에 옥이 널리 사용되었다.

1 물고기와 새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고려시대의 옥 공예품. 2 강화도 전등사의 옥등잔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의 옥[편집]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황금을 보물로 여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는 황금이 보물로 알려진 듯하다.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 최고의 보석이었던 옥은 차츰 귀금속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지만, 여전히 보석으로서 사랑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옥은 귀한 것으로 여겨져,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왕의 앉는 의자를 옥좌(玉座)라고 부르는 등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였다. 또한 왕과 왕비가 착용하는 장신구에는 옥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 때는 예외 없이 옥이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죽은 임금의 입에 옥을 물게 했다.

[동의보감]에서는 옥을 갈아서 복용하면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고, 장수하게 되며, 폐장 기능을 윤활하게 해주면서도 소화계통에 효과가 있고, 특히 가슴이 답답할 때 좋다는 등 옥을 대단한 약재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옥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임신한 왕비들은 늘 옥을 가까이 했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서울의 수공업장인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옥을 다루는 기술자(玉匠)의 정원을 10명, 구슬장인(珠匠) 2명이라고 규정했다. 옥규, 옥책, 옥보(玉寶), 석경(石磬), 옥반지, 옥관자(玉貫子) 등 옥의 수요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도 남양, 함경도 단천 등 주요 옥산지 30여 곳이 등장한다.

하지만 조선은 옥을 활발하게 생산하지는 못했다. 조선은 사치를 배척하여, 옥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철물, 소와 말, 금, 은, 구슬, 옥, 보석, 염초, 군사물품 등 금지한 물건을 몰래 매매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경국대전]에서 정하고 있음을 보아 옥의 거래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은 평민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어도, 신분이 낮으면 함부로 사치를 할 수 없었다.

옥 생산이 활발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금, 은과 더불어 옥이 명나라가 조선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공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금은의 경우 국내 소비보다 명나라에 유출이 많아지자, 이것이 민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은 금광, 은광을 폐광시키고 생산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옥도 마찬가지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1597)시기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조선에서의 옥 채굴에 관심을 기울여, 전쟁 중에도 옥을 캐내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러 이유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옥을 캐어 얻은 경제적 이익보다, 나라와 백성의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 옥의 최대 소비처는 중국이었지만, 조선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로 이익을 얻어낼 능력이 없었다. 옥 생산량이 늘면 조공품의 양만 늘어나게 되므로, 금광 등과 마찬가지로 개발을 억제해 저들의 요구를 줄이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옥의 채굴을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극히 제한적으로만 생산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처럼 다양한 옥기 공예품들이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참고자료[편집]

  • 옥 (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두산백과》
  • 〉, 《한국의 생활사》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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