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중세시대(中世, Medium aevum)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하고 게르만민족의 대이동(4세기-6세기)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더불어 근대(1500년-1800년)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이나 이 개념은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렵고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있었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상충하지만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없었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주의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로망스어군의 역사학자들은 중세를 전기(High)와 후기(Low)로 양분한다. 독일어권과 영어권의 학자들은 일반으로 중세를 초기 · 성기 · 후기의 세 시대로 나눈다. 벨기에의 역사가인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1935)과 네덜란드의 역사가인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20세기 초에 다음의 세 시대 구분을 대중화하였다.
- 중세(Medium aevum): 476-1453 (약 천년): (476년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때이고, 1453년은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때이다.)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약 5백년)
-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약 3백년)
-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약 150년)
목차
역사[편집]
고대 후기[편집]
한때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로마도 3세기 말에 이르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필사적인 재건 개혁도 헛되이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인구는 감소되고 경제는 굳어 실물(實物) 경제화했으며,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독점되어 자유 농민과 중간층은 몰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년에 막강함을 자랑하던 로마군이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無力化)하고, 마침내는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의 국경을 침입하자 사상 유례가 드문 일대 민족 이동을 유발하고 말았다. 제일 먼저 국경을 침입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고 서진하여 서로마군을 격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다. 이리하여 410년 ‘영원의 도시’ 로마가 함락되고 잇따라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로마의 다른 영토를 유린하였다.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 서유럽에는 서고트 왕국(에스파냐), 동고트·롬바르드 왕국(이탈리아), 반달 왕국(아프리카 북안), 부르군트 왕국(남프랑스), 앵글로색슨 왕국(영국) 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동유럽에는 게르만보다 조금 늦게 슬라브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동로마 제국 영토를 위협하였으나, 6세기 초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대제가 이를 막았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어 한때 이탈리아는 물론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등 옛 로마의 영토를 탈환하였고, 안으로는 로마법을 집대성,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법제사상 큰 영향을 끼쳤다.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다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줄어들지만 14세기까지 계속된 제국은 줄곧 서유럽과 중동아시아를 잇는 사이에 자리하여 문화적으로 중개역을 담당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적 전통을 융화, 계승하여 화려한 비잔틴 문화를 이룩하였다.
중세 초기[편집]
10세기 이래 각지에 이동한 게르만족은 앵글로색슨족이나 서고트족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크왕국이나 동로마제국의 치하에 흡수되었다. 프랑크왕국에서는 카를 마르텔의 사라센제국의 격퇴로 궁재(宮宰)의 힘이 강대해졌으나, 8세기에는 피핀에 의해서 카롤링거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 프랑크왕국은 로마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나, 교황 또한 그리스교회와 대항하기 위해 세속 군주와의 유대를 바라고 있었다. 여기서 프랑크왕국에서는 봉건제의 기반이 성립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중세에 있어서의 교황과 군주와의 제휴, 상호 이용이 전개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의 번영의 뒤를 이어, 6세기 말부터 슬라브족의 발칸에의 이주와 국내의 반란에 동시에 시달렸다. 그러나 7세기 초부터 이 제국은 둔전병(屯田兵)과 군관구 제도 등을 채용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해서, 7세기 말 사라센군의 침입을 방위했다. 또한 8세기 초에는 우상숭배 문제를 계기로 하여, 로마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하고, 제국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스적 국가로서의 특색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되자, 종래의 여러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이들의 문명권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인 이슬람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슬람의 교조인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의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드디어 아라비아 전부족을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무함마드의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했기 때문에, 불과 1세기 동안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사라센제국이다. 정복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제3대 칼리프 시대 무렵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000년에 카를대제가 교황 레오3세로부터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됨으로써 그 막이 열렸다. 이에 카를대제는 교황에 의한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제국 이래의 통일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비잔틴세계나 이슬람세계와 구별되는 이른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 문화적 공동체였다. 카를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 게르만·로마·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시켜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래로 교역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 온 지중해가 사라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환경제 사회가 자연경제 사회로 후퇴하게 되었던 까닭에, 대제의 사후에는 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도 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
중세 성기[편집]
10~18세기의 유럽 세계에서 특기할 사건은 노르만의 영국 정복을 비롯하여 세속적 왕권 대 교황권의 대립과 회교도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 등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던 게르만계의 노르만인은 그들의 발달된 항해술과 약탈 행위로 유럽 여러 나라를 괴롭히더니, 1366년에는 영국을 점령하고 이어 대륙에서의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빈번히 대립하였다. 한편 중국사에서 흉노로 알려진 훈족 계통의 마자르족이 헝가리왕국을, 서슬라브족이 폴란드왕국을 건국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법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 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으며,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296년에서 13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이 십자군 원정은 후세의 정치·경제·교통 등 여러 면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여러 영향은 중세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이 끼친 여러 방면의 영향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 후기[편집]
13~14세기에는 당나라에 밀린 셀주크 투르크족의 서방 진출이 십자군 운동을 유발해 4차 십자군이 마침내 동맹국인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제국을 건설하여 정치, 경제적 욕망을 드러내면서 봉건제의 해체를 알린 것이나, 터키족의 서천 후에 나타난 중앙아시아에서의 세력권 공백과 요나라, 금나라의 교체로 인한 몽골고원의 지배권 공백을 이용한 칭기즈칸의 유목제국이나 그 발전인 세계제국이 출현하는 등 세계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 이후 그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가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한자 도시 동맹과 더불어 원거리 무역과 도시발달을 추진하였다. 화폐 경제의 농촌 침투는 지대의 금납화, 직영지의 해방을 비롯한 장원제의 해체를 촉진하는 한편 도시에서는 귀족화한 상인의 지배를 타파하는 길드 혁명이 진행되어 공장제 수공업화가 진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실추된 교황권이나 황제권을 대신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고 사치를 하기 위해 과세 증가가 기도되었으나 이를 견제하려는 도시인의 정치적 발언권과 충돌한 끝에 마침내 성직귀족, 세속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영국의 자문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왕권강화가 추진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교황은 프랑스왕에 의하여 아비뇽에 유폐되는가 하면,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교권의 쇠퇴와 왕권의 강화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그 성격도 달랐다. 귀족 세력이 강했던 독일은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고,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데스포트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실현되었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에의 대결의 필요성으로 그리스도교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으며 서유럽의 방패가 되었던 동로마제국은 재흥된 뒤에도 계속적인 위협하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학문[편집]
철학[편집]
중세 유럽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연구 활동의 부흥은 카롤루스대제가 피사의 피에트로나 알퀸의 조언을 받아 당시 고대의 철학을 보존하고 있었던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의 학자를 초빙하고, 787년의 칙령에 의해서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병설시켰을 무렵에 시작한다. 이러한 학교(scola)는 스콜라 철학의 이름의 유래가 되어 중세의 연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철학적 활동 중에서는 고대의 저작을 필사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중세 성기의 스콜라 철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철학자, 신학자, 주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년 ~ 1109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의 존재론적인 증명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13세기 초기는 그리스 철학 부흥이 절정에 이르러, 버스의 아데 라드는 시칠리아나 아랍 세계를 여행해, 천문학이나 수학 문헌을 번역하였으며 그 중에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의 첫 완역도 포함된다. 13세기 중반의 모에르베케의 비렘에 의한 그리스 철학의 문헌의 번역, 편집은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명확히 묘사히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과학[편집]
아라비아과학이 그리스과학의 번역사업에서 비롯하였듯이, 서유럽 그리스도교국의 문화활동은 아라비아과학 ― 실질적으로는 아라비아어역의 그리스과학 ― 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 아랍어를 번역할 수 있는 학자는 극소수였는데 11세기의 아프리카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최초의 적격자였다. 그는 카시노산의 수도원에서 많은 아라비아 서적을 라틴어로 옮겨 놓았다. 그러한 번역서에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이 채워져 있었다.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가 받은 자극은 통렬하였다.
15세기부터 17세기 중엽에 걸친 그리스도교도 학자의 제일 첫째의 학문 활동은 아라비아어를 배워서 아라비아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뛰어난 번역가가 뒤를 이어 나타났다. 에스파냐는 그 지리적 관계에서 회교도와 그리스교도와의 접촉점이며, 특히 톨레도는 회교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교국이라는 지위에 있었는데, 톨레도의 대사교(大司敎)는 자기 교회 내에 번역소를 두고, 많은 학자를 모아서 번역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가장 뛰어난 번역자로서 유명한 크레모나의 제럴드(바르게는 헤럴드, 15세기 후반에 활동)는 처음에 이 번역소의 조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역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92권의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7세기의 중엽까지는 아라비아어의 과학문헌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라틴어로 옮겨졌다.
원래 그리스원전(原典)의 아라비아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중간에 시리아인이나 유태인에 의한 시리아역이라든가 헤브라이역이 개재한 일이 많다. 따라서 아라비아어의 라틴역은 실은 '그리스원전의 시리아역의 헤브라이역의 아라비아역의 라틴역'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한 라틴역으로 그리스과학에 접하여 지식의 욕망을 자극받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가 직접 그리스 원전에 접하고 그 원전으로부터 라틴어로의 직접 번역을 갈망하기에 이른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이리하여 18세기의 그리스도교도는 그리스 원전으로부터의 직접 번역의 사업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당시 십자군의 원정,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등에 의하여 그리스 원전을 접촉할 기회가 증가하였다. 독일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영국의 로저 베이컨, 이탈리아의 토마스 아퀴나스 등 당시의 선구적 학자는 예외 없이 번역에 종사하였다.
교육[편집]
중세는 고대의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에 의해 시대적 통일성이 형성된 시기로, 모든 분야에서 단결된 요소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중세의 종교적 통일성은 교육이념과 내용의 통일성을 가져왔으며, 단일한 교육제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전반에는 기독교 교화를 목적으로 한 기독교 학교제도가 발달하였다.
중세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세속적 교육이 성장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교화책으로서 카롤루스대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사업이 전개되었고 봉건제도와 함께 기사교육이 정비되었다. 농민 계급을 위한 특별한 학교가 설립되지는 않았다. 농민 계급의 자녀들은 가정 안에서 생활과업을 배웠기 때문이다. 중세 후반에 이르러 봉건 제도가 붕괴되어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시민사회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세속 교육기관으로서 시민학교와 대학이 출현하였다.
경제[편집]
상업적인 측면에선 서로마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 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
더구나 서유럽의 경우 별로 좋을 게 없었다. 단적으로, 지방 영주들은 지방 간 무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무역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경쟁자를 자신의 영토의 특산으로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방 간 이동할 통로에 관문을 빽빽히 설치해서 세금을 많이 부과 시켰다. 이로써 지방 간 무역이 수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로마시대 때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데나리(denarii)의 은 함유량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다가 14세기 즈음 가면 구리 화폐가 되어버렸다. 화폐의 은함유량은 해당 화폐의 신뢰성을 뜻하는 것인데 로마시대만 하더라도 신뢰할 만했던 것이 중세에는 은화라고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결국 상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문에 이 화폐도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교역이나 급료 지불 등 제한적이게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 초기에는는 지중해 지역 내의 무역망은 소멸하지는 않았다. 주교구를 중심으로 대도시 자치 공동체가 생성된 이탈리아 지역은 도시로써 기능을 유지한 곳이 많았고, 이들은 이슬람과의 지중해 무역을 지속하여 미약하게나마 수출로 유럽으로 금을 유입시키거나 반대로 이슬람의 사치품을 수입해왔다. 카롤루 대제의 궁정이 있던 아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파피루스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재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이르면 자치 공동체인 코뮌들이 들어선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이 부활하였다. 특히 저지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목류는 북유럽,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북유럽의 원자재, 이슬람의 금과 사치품을 서유럽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신성로마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 과정에서 알프스를 넘나드는 도로가 개척되어서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 지역의 무역로인 소금길과 상파뉴 무역로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상공 엘리트가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이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 소금길, 길드의 탄생, 원격지 무역의 발달이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이후 유럽의 경제발전을 '상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북이탈리아, 보르도, 플랑드르 등 상업이 극히 발달한 지역은 이미 지역 내 자체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도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해서 국제 교역망의 식량 수입에 의존해야했다. 보르도의 경우 포도주 제조를 위한 포도 플렌테이션이 생겨 자체 식량 생산은 거의 없었다.
14세기 초 흑사병 대유행을 지나 중세 말기가 되자, 유럽의 상업은 더욱 발전한다. 농업용 토지의 개발과 경영도 소유자와 경영자가 분리되는 기업형 영농이 출현했고, 광업과 제조업 분야 역시 기업형 조직에 의해 관리된다.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 경제가 살아나자 세금도 부활했다. 봉건주의의 관습 아래에서 세금은 토지세보다는 간접세 위주로 발전했는데, 그 덕분에 창문, 화로, 문짝, 신발, 술, 꿀, 우물, 결혼 등 세금을 때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대개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으로 걷혔다.
귀족들은 평상시에 세금을 안 냈는데, 여기엔 봉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정작 중세 동안에는 북유럽을 제외하고는 귀족에 대한 면세 특권 자체는 없었다. 게르만의 관습 상 토지를 보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세금이란 토지세가 아니라 병역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만이 아니라 자유민들도 토지 보유에 대한 직접적인 세금은 없고, 병역과 노동력을 통한 부역이 직접적인 의무였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유력자들에게 의탁한 농노들이나 현물이나 공조를 통한 세금이 존재했다. 따라서 귀족이 세금을 안냈다고 말하기보다는, 애초에 유럽에서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 개념이 희박했으며, 귀족이 담당한 의무는 참전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봉건제가 철저히 유지된 시절 동안에는 왕이나 황제조차도 다른 유력 영주 제후보다 특별히 경제적 우위를 가지긴 어려웠고, 직할령의 농노들에서 걷은 세금이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교회에서 걷은 십일조를 자신의 금고에 넣어서 돈을 확보했다.
교회의 경우는 영주나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위에 서술했다시피 오히려 자신들이 따로 거뒀는데, 빈민 구제를 비롯한 요즘의 사회 복지 부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되어 정부가 세금을 거두고 분배까지 담당하는 현대국가와 달리 이 시기는 정부의 기능이 궁정과 영주, 교회 사이에 분권되어있던 시대였다. 이 역할은 일부 지방에선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저것도 화폐 유통이 극히 부족했던 11세기까지 일이고, 중세 성기를 거치며 화폐 유통이 늘고 상업이 발전하자 군주들은 금전의 필요성이 커졌고, 그에 따라 점점 여러 목적의 특수세나 간접세가 신설되었다가 그것이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생겨난 직접세 중에 제일 대표적인 예시는 타유(taille) 라는 세금이었는데, 이것은 원래 '공조, 부조, 헌납' 정도의 의미로 주군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할 때 봉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하는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주로 왕이 사로잡혀 몸값을 낼 때, 주군의 자식이 결혼을 할 때 등에 메겨지는 것이었으나 어느새 그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또 상기한 창문세, 화로세, 우물세 등은 도시에게 자치 특권 계약을 할 때 도시 공동체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한 계약이었으며, 귀족들에게서는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의 세금인 방패세가 매겨진다.
중세 중기부터 경제가 발전, 화폐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금융업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1156년부터 제노바 공화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외환 조약이 채결되었다. 이때 금융업을 주도하는 주체가 둘로 나눠졌다는 전자는 이탈리아 상인들로 이들은 10세기서부터 합자회사 형식의 상회을 설립해 지중해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이후 유럽 각지에 지점들을 설치하면서 해당 지점들이 위치한 국가들에 외환을 꿔줬다. 후자는 유대인으로 이들은 중세시대 들어서 서유럽 내에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시 그리스도교 내에서 죄악시하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해야 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에 사라졌던 요식업과 숙박업 또한 중세 중기가 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요식업과 숙박업은 조선 후기에 활성화 된 주막처럼 한 곳이 겸업하는 것이 보통으로 inn과 tavern이 대표적인 중세 유럽의 레스토랑겸, 선술집이자 숙박업소였다.
중세 중기말에서 중세 말기(13-15세기) 사이에 유럽인들의 소득은 급격한 증가를 보았다. 화폐경제 발달로 농민의 부역이 줄어들고 소작농이 해방되어 대거 자작농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소득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의 소득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윤을 올린 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15세기 피렌체 시민들이 결혼할 때 가져오는 평균 지참금은 100 플로린, 현 가치로 8000만~1억 원에 해당할 정도다.
농업[편집]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제국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6세기경부터 서서히 농경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기술 항목에 카루카라는 신식 쟁기가 북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것과 마구가 개량된 것이 바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였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이 실시하고 있던 개방경지제가 보편화되고 있었으며,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 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아예 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페스트가 지난 후의 후유증은 농업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인구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죽은 자들의 재산들이 전부 산자들의 몫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1인당 농경지의 비율도 증가하게 되는데, 추수기가 되면 더 넓어진 농경지의 곡식을 빨리 추수해야 했기에 기존의 남성 인력들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여성들도 추수 작업에 동참했다. 남성들이 큰 낫을 휘둘러 추수 작업을 시작하면 여성들이 미처 추수되지 못한 곡식들을 작은 낫으로 마저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 서유럽과 북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목축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가 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수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애당초 기후 자체가 지중해성 기후였던 남유럽 지역과는 달리 나머지 지역들은 서안 해양성 기후와 냉대 습윤 기후이기에 목축업에 유리한 면이 있었고, 특히 서유럽의 경우 근대를 거치면서 낙농업이 발달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14세기가 되면서 발트해 연안에서 대량으로 곡식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곡식의 공급이 과잉이 되면서 목축업의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
정치[편집]
중기인 11세기가 되면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등 기독교화 되가고 있었고,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가는 바이킹들의 위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로 본거지인 유클란트 반도 및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해 각지의 바이킹 정착지가 현지인들과 동화 및 기독교화되어 갔으며, 유럽 내의 정치 상황 또한 서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와 이탈리아 반도 한정으로 점차 봉건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이시기는 점차 세속 정치와 교회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던 시기로 이시엔 이미 교황 자체가 세습만 하지 않을 뿐이지 세속 군주화 되가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던 시기이도 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동방과의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다시 정체되었던 도시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시민 스스로가 왕과 영주, 그리고 교회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립해나가려는 시기이기도 했다.
11세기를 전후로 가톨릭 영향하의 서유럽의 왕정국가들의 왕권은 상당히 취약했고, 반대로 지방 영주들의 권력은 상당히 강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군주를 선출하면서 성립된 왕조였기에 제후들의 변덕에 언제 다른 왕을 세우는 것이 위협이었고, 이에 로마 황제들이 정제와 부제를 둔 예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공동왕으로 선출하게끔 해 왕위를 교체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시켰다. 그리고 여러 방면에 거쳐 왕권 강화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의 레온왕국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왕국과 아일랜드에서 의회가 생기기 시작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 또한 제국자유시들이 생기면서 이들 도시에서 파견된 대표들을 의한 의석들이 생기는 등 변화를 겪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문학[편집]
중세는 기독교와 프랑스·독일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성배(聖杯) 이야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로만스 영향 밑에 있었기 때문에 북구로서의 특색이 희박하므로 극히 간단히 서술한다.
노르웨이에서는 호콘 호콘손왕(王) 시대에 쓰여진 계몽서 <왕의 거울>, 덴마크에서는 코펜하겐을 세운 승려 아브사롱의 비서였던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라틴어로 쓴 <게스타 다노룸>(덴마크인의 사적), 스웨덴에서는 북구수도회의 기초를 만들어낸 성 비르이타(1303-1373)의 수기 <계시(啓示)>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삭소의 작품은 덴마크의 신화시대로부터 쓰기 시작하여 유명한 햄릿 왕자의 전설도 포함된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스칼드 시(詩)가 전향하여 종교시가 되었고, <마리아의 노래> <백합> <꿈의 리듬> 등의 역작들이 나왔다. ‘사가’는 당초의 힘찬 리얼리즘 정신을 잃고 공상적·동화적인 경향으로 흘러 그것이 민화(民話)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로만스의 영향으로 많은 민요가 탄생되었다.
966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수세기간은 로마 카톨릭 문화의 영향으로 라틴어에 의한 문학이 발달했다. 라틴어로 쓰여진 폴란드 문학 초기의 뛰어난 작품에는 12-13세기에 속하는 연대기·성인전이 있다. 폴란드어에 의한 문헌은 겨우 13세기경부터 출현했고 가장 오랜 폴란드어 텍스트는 <보구로지차(신을 낳은 자=Bogurodzica)>라 불리는 성모 마리아에의 짧은 찬가이다. 15세기에 들어 폴란드 문화의 최초의 개화기가 찾아든다. 이때 폴란드는 야계워(Jagiellon)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유럽 강대국의 하나로서 중·동구세계에 군림했다. 1364년에 창립된 크라코바 대학은 1400년에 중세적 종합대학으로 확대되어 각 분야에서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크라코바 대학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강의한 그주고슈(1400-1477?)나 이탈리아인 필립 부오나코르시(1437-1496?)에 의해 인문주의가 재빨리 폴란드로 침투를 하기 시작했다. 얀 도우고쉬(1415-1480)의 12권으로 된 <폴란드사(史)>는 이 시대의 민족의식의 성장을 말해준다. 얀 오스트로로그(1436-1501?)는 최초의 걸출한 인문주의자로서 라틴어 논문 <국가건설에 관한 각서>(1475)에서 교회와 귀족사회에 대해 비판했다. 라틴어에 의한 저술은 여전히 우세했으나 1473년에는 브로츠워프에서 활판 인쇄가 시작되어, 1475년에는 폴란드어로 된 최초의 간행본이 인쇄되었다.
미술[편집]
중세시대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리스도교 사상과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이다.
중세미술은 로마제국의 쇠퇴 이후부터 르네상스 초기까지의 약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미술과 건축을 말한다. 지역적으로는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나타났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에 이르는 다양한 그리스도교 미술의 흐름을 아우른다. 주로 신(神)의 영광을 찬미하고, 문맹률이 높았던 시기 도상을 통해 종교적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파·교육하고, 미술을 통해 교회를 찾은 신도의 종교적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회화와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교회 건축 등을 포함한다. 카타콤의 벽화와 콘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성당이나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과 같은 교회 건축, 라벤나 산비탈레성당의 모자이크, 여러 사본장식과 금속공예품 등 강한 신앙을 바탕으로 창조된 여러 걸작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편집]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던 약 300년 간의 기간을 말하며, 교회 건축은 부재한 상황에서 점차 신도들 사이에 사적인 종교도상이 나타나 카타콤의 벽화 등에서 발견된다. 4세기 초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후 교회 건축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모자이크나 프레스코가 그 안을 장식하였다. 평면적, 도상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비잔틴 미술[편집]
6세기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제국에서 전개된 미술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4세기 경부터의 미술까지 의미하기도 한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대 제국의 전성기를 맞아 문화적으로 부흥하였으나, 8~9세기를 거쳐 성화상논쟁과 사라센제국의 침입으로 쇠퇴하였고, 10~12세기 재흥기를 거쳤으나 13세기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며 비잔틴 미술도 종식되었다.
고대 그리스 미술, 로마 미술과 헬레니즘, 이슬람 미술 등 동방의 요소의 조화를 보여주었으며, 자연주의적요소보다는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교회 건축과 그 내부를 장식한 이콘화와 모자이크가 대표적이며, 그 외에 태피스트리, 부조, 미니아튀르도 나타났다.
중세 초기[편집]
중세 초기의 미술 양식은 6세기 이후 서유럽 지역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비잔틴 미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사본장식과 미니아튀르가 대표적이며, 교회 건축의 부조도 장식과 교육의 목적을 수행하였으며, 후대 널리 보편화된 성모자상(聖母子像)과 십자가상 등 발전된 그리스도교 도상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미술[편집]
로마네스크 시대 서유럽 전지역에서 전개된 흐름으로, 10~12세기 클뤼니회(Cluniac), 시토회(Cistercian), 카르투지오 수도회와 같은 여러 수도회의 빠른 확장 및 성지참배의 유행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미술 양식의 보편화와 함께 지역별 특색과 전통을 살린 지방 양식이 등장하였다. 더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시기 건축 양식에 반영되었으며, 다수의 도상과 부조는 새로운 '영광의 그리스도' 시대를 표현하였으며, 주로 교회 건축을 장식하였으므로 건축의 형태에 맞추기 위해 그 형태가 도식화·양식화되었다. 하지만 강렬한 색채효과와 선묘를 통해 신비한 분위기와 깊은 종교성을 표현하였다.
고딕 미술[편집]
로마네스크 이후부터 르네상스 미술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미술 양식으로, 높은 첨탑과 넓은 창, 그 공간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대표된다. 템페라로 그려진 제단화와 프레스코화 등도 제작되었으며, 사본장식과 미니아튀르도 더욱 발전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어지며 이후 나타날 르네상스 미술로의 과도기를 보여주었다.
건축[편집]
중세 시대에 서유럽에서 건축들이 새로운 형태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세 시대의 정치, 종교, 사회적 변화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중세 건축의 주요 특징은 주로 비잔틴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으로 나타난다.
비잔틴 양식[편집]
비잔틴 건축은 그리스도교교회건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으나, 점차 둥근 돔 지붕을 가진 중앙 집중식 구조로 바뀌었다. 이러한 둥근 돔 지붕을 '펜던티브 돔(pendentive dome)'이라 불렀는데, 돔을 지지하기 위해 아치와 돔 사이에 생기는 삼각 구조인 '펜던티브(pendentive)' 또는 '스퀸치'를 도입하여 만들었다.
본래 중앙에만 돔을 두었으나, 점차 그 주변에 작은 돔을 더한 형태도 등장하였다. 9세기 이후에는 보다 작은 규모 또는 중간 규모의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이들은 네 방향의 길이가 같은 그리스 십자식 성당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스 십자 형태 평면의 중앙 정사각형 부분 천장에 돔을 올리고, 이것을 반원통형 볼트로 받치며, 작은 돔을 더한 경우에는 십자가 네 끝 부분 위에 이들을 두어 균형감을 주었다. 바실리카의 유축형(有軸形)과 중앙 집중식의 유심형(有心形)을 결합한 그리스 십자형 평면은 중앙 집중적인 방사상 평면으로, 동방 교회에서 강조하는 위계적인 우주관과 잘 들어 맞았으며, 이러한 우주관은 건축적·회화적 표현 방식을 두루 융합하여 교회의 돔·벽·천장 등에 꾸며 놓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와 같은 교회 장식의 도상(圖像) 체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존하는 대표적인 비잔틴 건축 양식의 교회는 6세기에 건설된 아야 소피아 성당(Church of Hagia Sofia)이다.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비잔틴 건축 특유의 돔 지붕과 중앙 집중식 구조에 바실리카 구조를 절충시킨 독창적 구조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비탈레성당 역시 초기 비잔틴 교회 건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로, 단순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화려한 모자이크 벽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편 10세기 건설된 그리스의 호시오스루카스수도원은 중기 비잔틴 미술의 화려한 실내 장식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교회 건축 외에, 토목공사에도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였었는데,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와 콘스탄티노플 대궁전(Great Palace)과 같은 궁전 유적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편집]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은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혼란기를 겪던 유럽은 10세기경부터 정치·경제가 안정화되었고, 점차 봉건제가 자리 잡아갔다. 한편 여러 수도회가 빠르게 확장하며 예배 방식 등 많은 부분이 제도화, 형식화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성지참배를 하는 순례자의 증가로 이어졌고, 많은 사제와 수도사, 신도, 순례자를 수용하기 위한 교회가 더 튼튼하고 큰 규모로 제작되었다. 실질적인 의미와 더불어 ‘신의 집’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교회는 불에 타지 않는 항구성을 지녀야 했는데, 이러한 요구로 기존의 목조 양식을 대신하여 석조로 제작되었다. 돌은 나무보다 튼튼하지만 무게가 많이 나갔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양한 건축적 특색이 생겨났다
이전 양식으로부터의 가장 큰 변화는 11세기 초까지 목조였던 바실리카식 평면 구조에서 큰 규모의 십자형 석조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내부는 둥근 아치와 원통형, 교차형 볼트를 사용하여 천정을 높여 제작하였다. 고대 로마 건축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반원 아치는 원통형 석조 볼트와 더불어 창문이나 입구 기둥 사이의 들보 또는 처마 밑에 도입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10세기 말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지며 1,100년을 전후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모하여 지어졌으나 큰 벽면과 작은 창문, 중량감이 있는 외관 분위기는 유사하게 건축되었다. 독일의 ‘황제의 돔’이라고 일컫는 슈파이어대성당과 보름스대성당, 밤베르크대성당 등은 내부가 좌우 기둥에 의해 3개열로 구분되는 3랑식(三廊式) 구성으로 이중내진형식(二重內陣形式)으로 지어졌고,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평활한 정면을 갖춘 3랑식·5랑식의 바실리카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외관은 토스카나파 풍(風)으로 지어진 피사대성당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며 내부는 열주나 아케이드 등의 건축적 효과가 더해져 어두운 공간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설계되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수도원의 건축 또한 활발하여 정사각형의 회랑을 중심으로 교회와 기타 부속 건축물을 갖춘 수도원이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북부, 독일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많이 지어졌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클뤼니수도원과 퐁트네의 시토회수도원 등이 있다.
고딕 양식[편집]
고딕식 건축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 첨두 아치, 리브 볼트, 플라잉 버트레스 세 가지 요소로 요약된다. 이들은 로마네스크 시기부터 발전해 온 것으로, 고딕 시기에 이 세 가지가 조합되며 특징적 양식을 이루었다. 건축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변화되었고, 외관은 첨탑들과 함께 수직적으로 높게 축조되어 상승감이 강조되었으며, 실내는 높은 천장 및 많은 창으로 개방감을 주는 공간으로 형성되었다. 신랑(nave)의 기둥과 기둥사이 벽체는 없어지고 창의 면적을 확대하였으며 이 창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 신비로운 실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으로 불리는 둥근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고딕 교회 건축의 상징적인 형태이다. 가장 신성한 공간이기도 한 제단(altar)은 언제나 동쪽을 향하도록 제작되었으며 건물 또한 한 방향으로 건축되었다. 이는 예수가 동쪽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한 것이었다.
12세기 중엽에 이미 리브 볼트를 적용하거나, 높은 비례의 복합주(複合柱)와 창이 만들어졌고, 해방된 공간감을 주는 내진회랑(內陣廻廊) 등 고딕적 건축 요소가 나타났다. 당시에는 로마네스크적인 요소가 건축물에 많이 남아 있어 과도기적 성격의 건축물이 제작되었으며, 이 시기의 건축물을 초기 고딕 건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13세기에서는 고전적 고딕 교회들이 지어졌다. 창을 높게 제작하여 채광을 풍부하게 하고, 전체적으로 상승효과를 강하게 나타내어, 세련된 건축 기술을 과시하는 레요낭양식(rayonnant style)이 유행하였다.
14∼15세기에는 창의 디자인은 물결 모양을 이어 불꽃 모양으로 나타내는 플랑부아양 양식(flamboyant style)이 유행하여 도시계획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은 전통적인 바실리카 형식이 존속하여, 볼트는 낮고 창은 적어 고딕 특유의 경쾌한 상승감이 적었지만 벽면을 넓게 제작하여 내벽을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하였다. 예외적인 외관구성을 보이는 밀라노대성당은 주로 북유럽 건축가에 의해 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딕 건축은 이탈리아·독일·영국 등 유럽 각지에 전파되어 각각의 지방 스타일이 가미되어 발전하였다. 초기 독일은 북프랑스의 건축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으나, 14세기 이후에는 독일의 독특한 형식인 할렌키르헤(Hallenkirche)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신랑과 측랑의 궁륭 높이를 균일하게 하고, 교회 내부를 높은 창에 둘러싸인 단일 공간으로 통일하여 제작하는 양식이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계 양식이 섞여 무데하르양식이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영국 고유의 양식이 확보되어 13세기의 초영식(初英式: early English), 14세기의 장식식(裝飾式: decorated style), 14세기 이후의 수직식(垂直式: perpendicular style)이라 불리는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딕 후기에는 종교 건축 이외에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 북부에 발달한 시청사(市廳舍)나 저택 등의 세속적 건축에도 고딕 건축 양식이 사용되며, 점차 실용 건축으로서의 고딕 양식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고딕 건축물로는 프랑스의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샤르트르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가톨릭) 등이 있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은 둥근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인 장미창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노트르담 드 파리》(1831) 등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음악[편집]
중세 유럽의 음악사는 그리스도교의 전례(典禮)에 연결되었던 성가의 성립에서 비롯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가는 기본적으로는 고대 유대교성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거기에 여러 지방적 요소가 가해져 여러 동방교회성가 및 서방교회성가가 성립되었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가 서유럽세계에 세력을 뻗침과 더불어 로마성가가 큰 발전을 보여 그 후의 유럽음악의 기조(基調)가 되었다. 이 성가의 성립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이룩한 업적이 컸다고 전하여 그레고리오성가라고도 불리며, 오늘날에도 로마교회의 가장 정통적인 전례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세속음악 분야에서도 11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트루베르, 독일의 등의 음유시인(吟遊詩人)에 의한 속어(俗語)의 기사가곡(騎士歌曲)이 번성하였다. 이들 음악은 그레고리오성가를 포함해서 원칙적으로는 교회선법(敎會旋法)에 의한 단성부 음악이었으나, 9세기경부터 다성부의 음악도 나타나게 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다성음악의 실례는 9세기경의 음악이론서 《무시카엔킬리아디스》에 기록되어 있는 단순한 형태의 오르가눔이나, 실제로는 더욱 복잡한 형태의 것이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럽의 다성음악이 이 이론서에 의해서 창시된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 이전부터 다성음악은 민속적 ·즉흥적인 형태로 연주되었을 것이다. 초기 다성음악의 자료는 극히 적고 기보(記譜)도 해독(解讀)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면 프랑스의 성마르시알 수도원이나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루고 특히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중심으로 레오니누스 ·페로티누스 등의 2성(聲) 내지 4성의 오르가눔이 나타났다. 또한 클라우술라 ·모테트 ·콘둑투스 등의 악곡도 나타나 중세 유럽음악의 정점(頂點)이라고도 할 발전을 보였다(노트르담악파).
14세기에 들자 신생(新生)에의 시대경향을 반영해 사랑 ·자연미 등을 노래한 세속작품의 수가 증대하고 2박자가 도입되었으며 리듬도 다양해져 아르스 노바(신예술)의 음악이 이루어졌다. 특히 프랑스의 기욤 드 마쇼의 음악에서는 13세기 아르스 안티콰(고예술) 음악의 세속화와 새로운 표현에의 지향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이탈리아의 자코포 다 보로냐(14세기 중반), F.란디니(1325∼97) 등의 세속작품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고, 영국에서도 3도 ·5도 등을 중용하는 독특한 다성음악 기법에다 종래에는 없던 참신함을 보였다. 그리고 15세기 초의 J.던스터블, L.파우어 등의 영국음악은 그 후의 대륙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참고자료[편집]
- 〈중세〉, 《위키백과》
- 〈중세 문학〉, 《위키백과》
- 〈중세〉, 《나무위키》
- 〈중세 미술〉, 《두피디아》
- 〈비잔틴 건축〉, 《두피디아》
- 〈로마네스크 건축〉, 《두피디아》
- 〈고딕 건축〉, 《두피디아》
- 〈중세 음악〉, 《두피디아》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