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철기(鐵器)는 주철이나 강철을 소재로 주조, 단금한 철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도구이다. 냄비, 솥, 쇠주전자 등과 같은 조리 도구가 대표적인 철기이다. 그 외의 철기로는 누름돌, 장식물, 꽃병, 풍경 등이 있다.
이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를 철기 시대라고 한다. 불의 사용법과 더불어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요소 중 하나이며, 이전의 금속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구하기 쉽고 더 단단한 이 도구의 발명으로 인간은 동물들과의 생존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문명의 발전을 꽃피울 수 있는 토대을 마련하였다.
철기의 발견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부족간의 정복 전쟁의 활성화였다.
목차
개요
철기는 철기시대 이후로 사용되었던 철로 만들어진 도구의 총칭으로, 철은 적철광, 황철광과 같은 형태로 세계 각지에 분포해 있는데, 이것을 인류가 도구로 만들어 이용한 것은 석기와 청동기 다음이다. 철을 도구로 사용하는데 필요한 제련기술을 습득하기까지 많은 세월을 보냈는데 이는 철의 제련에 기본적으로 1000℃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기는 제조기술상으로 보면 주조품(鑄造品)과 단조품(鍛造品) 등이 있다.
철기의 제조법에는 해면철제조법(海綿鐵製造法)과 선철제조법(銑鐵製造法)이 있다. 해면철제조법(海綿鐵製造法)은 철광석과 숯을 섞어 야외 화덕에 넣은 뒤 불을 지펴 800~900℃ 정도의 온도에서 제련하는 것인데, 이렇게 제련된 철은 탄소함유량이 극히 적고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반복해서 단조하여 철을 얇게 펴서 이를 겹쳐 철기를 만든다. 반면, 선철제조법(銑鐵製造法)은 위의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철광석을 완전히 녹여 쇳물을 만든 뒤 이것을 거푸집에 부어 주조하는 방법이다. 선철은 탄소함유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단조가 불가능한데 이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재차 가열하여 연성주철을 얻는다.
철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B.C. 2000년대 초반경이나 본격적으로 철기를 만든 것은 B.C. 1400년경의 히타이트(Hittite)왕국 때이다. 그리고 유럽지역에서는 B.C. 10세기경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은대(殷代)에 일부 철기가 사용되었다고 하나 주조의 철제 농기구가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春秋時代) 후반부터이고, 단조의 무기가 만들어진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온 이후였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철기가 북부지역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 전역으로의 파급은 이보다 늦은 B.C. 2세기 말경이다. 한국도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주조품도 있지만, 단조품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점차 주조품이 많아진다.
철기의 종류는 그 용도에 따라 농공구, 무기, 차마구 등으로 분류된다. 농공구(農工具)에는 칼(刀), 도끼(斧), 끌(鑿), 낚시(釣), 송곳, 가래(鋤), 괭이(초), 반달칼(半月形刀), 낫(鎌) 등이 있다. 농공구 중 도끼는 제조법에 따라 단조의 도끼와 주조의 도끼로 나눈다. 단조의 도끼는 임의로 두드려 제작한 것으로 도끼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주조의 도끼는 처음부터 주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철기시대 초기에 일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의창 다호리 유적에서 자루와 함께 출토된 판상쇠도끼가 있는데, 도끼나 자귀(手斧)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는 철의 소재인 덩이쇠(鐵鋌)의 구실을 한 것이 많다.
무기(武器)에는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가 있다. 공격용 무기에는 검(劍), 창(矛), 꺽창(戈), 민고리자루칼(素環頭刀), 화살(鏃) 등이 있으며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발달된 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극(戟), 화살대(弩機) 등이 있다. 검에는 유경식과 무경식이 있고, 유경식은 단경식과 장경식으로 나누어진다. 대체로 장경식은 단경식보다 늦게 나타난다.
방어용 무기에는 갑옷과 투구가 있다. 갑옷은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옷으로, 따로따로 주조된 철판을 결합하여 만든 판갑옷(短甲)과 작은 비늘을 가죽이나 천에 덧대어 만든 비늘갑옷(札甲)이 있다. 투구는 머리에 쓰는 것으로 차양이 있는 것과 차양이 없는 것이 있으며, 차양이 없으나 반구형의 장식이 얹혀 있는 형식 등이 있다. 이외에도 방어용으로는 정강이가리개, 목가리개, 말얼굴가리개 등이 있다. 그밖에 차축두(車軸頭), 재갈 등의 차마구(車馬具)와 용기인 동복(銅鍑)이 있다..
철기가 보급되면서 삼림의 개간이나 농경이 대규모화하는 등 농업의 발전을 가져왔고, 철을 다루는 전문집단이 등장하였다. 또한 철로 만든 무기는 대규모의 전쟁을 가능하게 하였고, 고대국가의 형성과 성장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기의 유래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도구는 나무, 돌이나 동물의 뼈, 뿔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발견하게 된 금속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원래 땅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발견한 금속이라는 소재는 그동안의 자연에서 얻는 소재와는 다른 것이었다.
인류가 금속의 성질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청동에서 철로 재질을 달리하며 도구는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철을 발견한 이후 날을 가진 도구의 재료는 오랫동안 철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가 처음 만난 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철, 운철(隕鐵)이다. 우주를 떠도는 작은 암석 중 일부는 지구의 인력에 끌려 대기권으로 떨어지는데, 대부분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불타 없어지지만 땅까지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을 운석이라고 하며, 그중 철을 많이 포함한 것이 운철이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서기전 2500년경 니켈(Ni) 5∼10%가 함유된 운철을 사용하여 만든 철기가 출현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등 문명이 성장한 지역의 권력자들은 하늘의 금속인 운철로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를 만들었다.
이후 서기전 2000년경의 아나톨리아 히타이트제국에서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철광석에서 철을 얻는 인공철(人工鐵) 생산 기술을 선점하였다. 이로써 인류는 본격적으로 철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철기 문화의 확산
서기전 1200년경 히타이트가 멸망하면서 철기 생산 기술은 빠르게 확산된다. 서기전 1200~1000년경 이집트로, 서기전 900년경 아시리아로 확장되는데, 서기전 1000~500년경 사이에 유럽 대륙의 각 지역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행된다. 아프리카의 경우 이집트를 거쳐 서기전 400년경 나이지리아까지 철기 문화가 영향을 준다.
한편 히타이트의 제철 기술은 동쪽으로도 확산되는데, 동아시아로 전해지는 확산은 두 개의 경로로 추정된다.
첫 번째로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카프타스 지역과 몽골을 경유한 초원의 길이 있다. 청동기 문화의 확산과 같은 맥락으로 이 길을 따라 칼자루는 금이나 동, 옥으로 만들고 칼날 부분만 철로 만든 복합 철기[바이메탈]가 확인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아시아 대륙의 남쪽을 따라 인도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전해진 길이었다. 중국에서 인공의 철이 등장한 것은 서기전 1000~800년 주(周)대로 알려져 있지만, 본격적인 철기시대의 시작은 그 이후인 춘추(春秋)시대부터이다. 서기전 600년경 전국(戰國)시대 초기부터 중원(中原) 내 철기 문화의 성행 이후 전국시대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확산된다.
중국 대륙 철기 문화의 등장과 전개
상대(商代: 서기전 16∼11세기)에 운철을 가공한 철로 된 날을 포함한 청동제 또는 옥제 이기(利器)의 사례가 확인된다. 허베이성(河北省)성 고성태서촌(藁城台西村)과 북경 평곡현(北京 平谷縣)에서는 날이 철로 된 청동도끼인 철인동월(鐵刃銅鉞)이 출토되고, 허난성(河南省) 준현(浚縣)에서는 철인동월과 날이 철로 된 청동꺽창인 철원동과(鐵援銅戈)가 출토된다.
이것들은 니켈의 함량이 높아 운철을 두드려서 제작한 것으로 본다. 그중 니켈의 함량이 낮은 고성태서촌의 철인동월은 운철이 아닌 인공철을 가공한 단조 철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주조 철기가 먼저 제작되기 시작하고 전국시대 후기에 단조 철기의 생산이 본격화된다고 본다.
산서성(山西省) 후마진북장(候馬鎭北莊)의 호미 날[鋤先]은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주물로 만든 쇠도끼인 주조철부(鑄造鐵斧)는 전국시대 주조제 농공구의 성행을 알려준다. 반면, 전국시대에도 무기는 대부분 청동제로서 전국시대 후기에 철제 무기류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한나라를 거쳐 서기전 1세기경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된다.
한반도 북부 지역 철기 문화의 등장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철기 문화는 중국 대륙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전개된다. 한반도 철기 문화는 전국시대 연나라를 비롯한 황해안과 인접한 지역권 간의 인적, 물적 교류 관계 속에 등장한다.
그중에서 연나라 철기 문화의 확산과 관련하여 주로 인용되는 한나라의 문헌인 『염철론(鹽鐵論)』에는 “연(燕)은 동호(東胡)를 엄습하여 퇴각시키고 천 리의 땅을 개척하였으며, 요동(遼東)을 지나 조선(朝鮮)을 공격하였다.” 라는 진개(秦開)의 동쪽 진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철기 문화의 확산은 전국시대 연나라 철기 문화와의 관련성이 깊다는 점을 추정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초기 철기는 중국 동북 지역, 구체적으로는 연(燕)나라의 철기에 계통으로 보고 '연계 철기', 혹은 '전국계 철기'라고 불린다.
전국시대 철기 문화는 서기전 3세기경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확인된다. 평북 위원 용연동 유적은 한반도 철기 문화의 등장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이다. 여기서 출토된 철기는 연나라의 도성인 연하도(燕下都)에서 출토된 그것들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한반도 남부 지역 철기 문화의 전개
한반도 남부 지역 내 철기의 등장은 역사적 사건과 귀결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바로 위만조선의 성립과 그에 따른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천(南遷)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 내 새롭게 철기가 유입되는 곳은 이른바 마한 권역, 특히 금강 · 만경강 유역이 두드러진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서 "준왕(準王)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라는 기사의 한지(韓地)가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위만조선이 세워진 서기전 194년 이후에 철기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고고학 자료로 보아 당시의 철기는 전량 수입품이었으며, 아직까지 철 생산[제련(製鍊)]의 증거와 정황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철기의 기종 구성과 형태는 전국계 철기에 속하는 것이며, 한반도 북부 지역에 확산된 전국계 철기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약간의 시기적 차이는 있을 것이다.
금강 · 만경강 유역 내 철기는 연나라에서 생산한 철제 농공구가 존재하며, 산둥반도와 요동반도, 압록강을 경유하여 건너왔을 여러 종류의 철기가 완주 갈동 · 신풍 유적, 장수 남양리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특히 완주 갈동 유적의 주조제 쇠낫[鐵鎌]은 연나라와 관계 속에서 철기의 유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철기이다.
또한 완주 상림리 유적에서 보이는 동주(東周)식 동검의 매납, 연나라의 귀족묘로 알려진 연하도 신장두(辛藏頭) 30호묘 내 부장된 세형동과(細形銅戈주2)는 환황 해안을 따라 이어진 장거리 교역의 거점 속에 금강 · 만경강 유역이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해로를 활용한 북에서 남으로의 점진적인 확산이라는 철기 문화의 경로를 상정할 수 있다.
금강 · 만경강 유역은 중국 대륙의 철기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유역에서 보이는 철기 문화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다. 신라 · 가야에서 보이는 철제 갑옷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 철기 문화의 완성은 이른바 진한 · 변한 철기 문화의 독창적인 발전에 의한 것이다.
특히 금호강 유역은 진한(辰韓) 철기 문화의 등장을 잘 보여준다. 금호강 유역에 등장하는 철기류는 철단검(鐵短劍), 철모(鐵矛), 철촉(鐵鏃)과 같은 단조법의 단조제 무기와 주조법의 주조제 농공구가 함께 출토된다. 이러한 단조제 무기는 한(漢)나라의 전형적인 특징도 아니며, 연나라의 주조제 농공구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안테나식 손잡이장식의 철검[触角式鐵劍]은 요동 지역을 포함한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금호강 유역을 중심으로 철기 문화는 이후 낙동강 전역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확산된다. 이처럼 낙동강 유역 내 요동 및 서북 한계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는 독자적인 철기 문화는 철기 생산 기술의 보유와 관련성이 깊은 것이다.
낙동강 유역 내 독자적인 철기 생산기술의 보유는 이후 신라, 가야로 이어지는 철기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함께 출토되어 이 철기들이 연나라에서 제작된 것이거나 연나라와 관계 속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여러 연구자들은 용연동 철기를 연나라의 철기로 한정하지 않는다.
반월형철도(半月形鐵刀)와 철사(鐵鉇)는 청동기시대의 도구인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청동사(靑銅鉇)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은 유물로 평가된다. 주조철부 역시 전형적인 연나라의 그것과 달리 가장자리에 융기된 선이 보인다. 주조철겸도 구멍을 뚫어 자루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연나라의 주조철겸에서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이로 인해 용연동 철기는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요동 지역의 독자적인 철기' , '고조선의 철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천강 유역 영변 세죽리 유적 등의 철기류 역시 용연동 유적의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대 한반도 철기 생산 공정의 특징과 주요 유적
제철은 대체로 철광석과 같은 원료에서 철을 추출하는 제련(製鍊)으로부터 정련(精練), 용해(溶解), 단야(鍛冶) 등 철기 생산과 관련된 모든 공정을 아우르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철광석을 채굴하는 채광(採鑛) 공정을 포함하여 한반도의 철기 생산 공정의 특징과 관련 유적을 정리한다.
한반도 내 철산(鐵山)은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신라 권역인 경북 울진 철산은 노천채굴(露天採掘)의 자철광(磁鐵鑛)으로 약간의 적철광(赤鐵鑛)이 섞여 있고, 철분 57%의 양질을 갖는다. 백제 권역인 충남 서산 철산은 자철광으로 철분 30∼50%이다. 충주 창동과 금곡 · 연수동 등의 지역에도 철산이 있다.
삼국시대 철기문화의 특징
3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의 문물이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 지역과 중국의 요동 지역에 이르는 범위에 자리하였고,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자리 잡았다. 고구려는 지정학적 위치상 고대 중국의 선진 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철기 생산 기술 역시 크게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 자료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 철기 문화의 특징은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백제는 낙랑군의 철기 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한 발달된 철기 문화가 존재하였다. 백제의 철기 문화를 알려주는 단편적인 예로 일본 이시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칠지도는 백제에 발달된 금상감(金象嵌)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철기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질 만큼 우수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백제의 여러 고분에서 보이는 철기는 신라 · 가야의 그것과 비교하여 양질에서 빈약한 편이다.
전반적으로 백제 고분 내 부장되는 철기류는 한두 점에 그치며 그 크기도 작다. 그러나 고분 내 부장된 철기류의 수량에 대한 비교가 아닌 철기를 만드는 생산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백제의 발달된 철기 문화를 알 수 있다.
백제 권역 내에서 조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제철 유적은 2세기 후엽~4세기 전엽으로 편년되는 평택 가곡동, 화성 기안리 유적, 청원 연제리 유적이 있다. 제련로의 직경은 100㎝ 이내로 비교적 소형이며, 진천 석장리나 구산리 유적의 제련로와 비교했을 때 유구의 형태가 정형성을 띠지 않는 점으로 보아 초기 제련로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안리와 연제리 유적은 대규모 취락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한 개소의 제련로만이 배치된 것도 특징이다.
반면 4세기 중엽 이후인 석장리와 구산리의 제련로는 규모가 커지고 노의 구조도 반지하식으로 정형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제련로 역시 취락 내 단독으로 위치하기보다는 일정 구역 내 밀집되어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구경 송풍관도 구경과 두께가 넓어지는 양상을 보이며, 일자형 송풍관에서 L자형 송풍관으로 정형화된다. 동 시기 충주 탄금대토성에서 출토된 다량의 철정(鐵鋌)은 당시 백제 철기 생산의 규모를 추정케 한다.
신라 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금제품들을 보면, 신라가 삼국의 그 어느 나라보다 화려한 황금 문화를 보유했으며, 신라인들은 금으로 치장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신라의 철기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신라가 황금 못지않게 철을 적극적으로 다루며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전 1세기대 단야(鍛冶) 공방에서 시작된 경주 황성동 제철 유적은 4세기대 용해 기술이 절정을 이루며 당시 최대의 주조 공방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학계에서는 주물의 철을 강철화시키는 초강로(炒鋼爐)가 존재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신라는 일찍부터 강철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황남대총 등 신라 왕릉에서 출토되는 방대한 양의 철기는 당시 신라에서 얼마나 많은 철을 생산했는지 알려준다. 더불어 가야를 병합한 이후인 밀양 사촌, 금곡 유적 등의 대규모 철 생산 공방은 신라 철기 문화의 확립에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철제품은 신라 철기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규모 목조 건축물인 황룡사의 창건 역시 발전된 철기 생산 기술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황금 문화에 가려서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신라의 철기 문화는 신라의 특징 중 하나로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무덤에서 보이는 철기류의 부장은 무기류가 주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철제 도검(刀劍), 창 등의 무기류로서, 장식이 있는 정도에 따라 매장자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가야는 도검은 물론이고 철제 갑옷과 투구, 말 장식 등이 대량으로 부장되는 특징을 보인다.
가야의 철기 문화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주요한 특징은 철정(鐵鋌)을 다양하게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철정은 철기를 제작하는 소재로 파악되나, 지역 간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통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철정은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는 무덤의 바닥에 깔거나 관에 덮는 소재로 널리 사용하기도 했으며, 유자이기(有刺利器)와 같이 깃대 등에 장식적인 요소로 표현되기도 한다. 당시 화폐처럼 귀하게 유통되던 철이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는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가야가 다른 지역보다 철기의 생산이 두드러지게 많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최근 김해와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가야 제철 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김해 하계리와 창원 봉림동 유적은 철광석에서 철을 추출하는 제련 공정까지 확인되었다. 김해 여래리 유적에서 발견된 단야와 관련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가야의 철기 생산과 유통 과정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는 양질의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국가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국 연맹체에 그치며, 결국에는 신라에 의해 통합된다. 6~7세기 대 신라의 영토인 밀양 사촌, 금곡 유적 등에서도 다수의 제철 유적이 확인된다. 이는 가야를 통합한 신라에서 보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6~7세기 대에 보이는 신라의 제철 유적은 가야의 철 생산 기술이 포함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가야 권역 김해 상동면 철산도 고대부터 개발된 곳으로 자철광과 적철광의 광석이 녹니암계(綠泥岩系)로 잘 부서져서 원시적 제련로에서도 활용도가 높아 고대(古代)에 많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양산 물금 철산, 마산 해동 · 양리 · 삼우리 지역의 철산도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김제 일대, 고창 옥산리, 제주 서귀포 · 남원 일대, 삼척 삼화리, 울진 온정리 등의 지역에서 양질의 사철(砂鐵)이 많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철광석을 채굴하는 철산 중에서 발굴 조사를 통해 고대에 활용되었음이 알려진 유적은 울산 달천광산이 유일하다.
한반도 남부 지역 철기 생산 공정은 주거지 내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진 단야의 기술이 점차 발전하여 3세기가 되면 자체적으로 생산 기능을 갖춘 취락이 등장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나아가 4세기가 되면 소규모 철기 생산에서 철 생산에 이르는 모든 철기 생산 공정이 각지에서 확인된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단야 공정의 개시는 요동 지역의 파편 재가공이라는 원시적 철기 생산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후 요령~서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제련 소재를 공급받으면서 기술적인 변화와 발전 과정을 거쳐 단야 작업이 좀 더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
단야 공정의 개시와 발전 과정을 알려주는 유적은 부산 내성 유적, 사천 늑도 유적, 경주 황성동 유적이 대표적이며, 마산 성산 유적 등 남해안 패총 유적 내 야철지도 같은 맥락의 유적으로 이해된다. 또한, 경주 황성동 유적은 서기전 1세기경부터 단야 공정이 시작되어 지속적인 철기 생산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3세기 이후 황성동 유적에서는 주조철부의 거푸집, 송풍관과 함께 정련, 용해로, 덩이쇠가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제련 공정은 삼국시대에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진천 석장리 유적과 밀양 사촌 유적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련로는 기본적으로 평면 형태가 원형이며, 대구경 송풍관을 이용해 고온 조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노벽의 침식이 약하고 노바닥에 점토가 고착된 점이나 유출재(流出滓)의 형상이 소위 조족형(鳥足形)인 점을 근거로 송풍 구조가 복원되기도 한다. 반면 진천 석장리 유적과 밀양 사촌 유적이 각각 4~5세기, 6~7세기라는 시기 차가 있어 노의 구조가 반지하식에서 지하식으로 변화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제련로는 유적에 따라 그 규모를 달리하는데 창원 봉림동, 김해 하계리, 평택 가곡동, 청원 연제리, 화성 기안동 제철 유적의 경우 대규모 취락 내 1~2기와 폐기장으로 구성되고, 제련로의 직경도 110㎝ 이하로 비교적 소형에 속한다.
반면 진천 석장리 유적, 진천 구산리, 충주 칠금동 유적의 백제 권역과 밀양 사촌 · 임천리 유적, 양산 물금 유적의 신라 · 가야권 모두 일정한 범위 내 밀집된 양상으로 제련로가 확인된다. 또한, 진천 석장리 유적과 밀양 임천리 유적은 다수의 제련로군과 관련된 철기 생산 유구가 공간을 달리하며 밀집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북한 지역 내 보고된 제련로는 시중 로남리 유적에서 보고된 바 있다. 녹은 쇳물을 받는 'ㄷ'자형 시설이 딸린 제련로로 규모는 길이 1.5m, 너비 1.2m이며, 시기는 서기전 2세기경으로 추측된다.
고대 한반도 철기 생산 공정은 단야에서 제련 공정에 이르는 각각의 철기 생산 기술의 등장과 함께 복합적으로 발전한다. 고대의 철기 생산은 크게 '단야 작업의 개시와 기술의 개량', '취락 내 철기 생산과 제련 공정의 등장', '생산 공정의 전문화와 국가 단위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라는 전환점을 거치며 지역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제련 공정이 정착하는 4세기대 이후가 되면 각각의 철기 생산 공정은 유기적으로 연동되며 생산되고 유통된다.
철기와 고대국가
철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로 이어져 선사 사회에 경제적 여유를 주었다. 이 경제적 여유는 고대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늘어난 생산물을 적절히 분배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생기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해졌다. 공동체 생활을 위한 규칙이 정해지고 이를 관장하는 주체인 관리자가 생기게 된다.
선사시대 관리자는 여러 사람의 추대에 의해 결정되었겠지만, 이후 스스로 관리자를 자청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는 관리자의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공동체 안에서의 규칙은 더욱 더 선명해지고 구성원 안에서의 상하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범금팔조(犯禁八條)' 중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 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로 알려진 3조의 내용을 통해 규칙이 완성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명확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철기의 보편화로 인해 이루어지는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규칙의 등장, 계급사회로의 진입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밑바탕이었다. 그러나 '생산력의 증가'와 '규칙의 등장'을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무덤의 규모, 형태, 부장품의 구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당시 사회의 계층차를 확인하고 시대 변화에 따른 계급 발생 과정을 읽어내고 있을 뿐이다. 특히 무덤에 매장된 부장품의 특징에 기초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고대사회 속에 이데올로기의 도입을 추정할 수 있다. 부장품으로서 양질의 철기는 당시 사회의 정치적 상징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물질 자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에 접어들어도 실제 생산의 주체였을 취락 내에서 철기가 출토되는 사례는 드물다. 전국시대 계통의 철기가 등장하는 완주 갈동 · 신풍 유적, 장수 남양리 유적에서도, 진한과 변한의 철기 문화의 대표적인 철기 문화를 알려주는 대구 팔달동 유적, 창원 다호리 고분군, 성주 예산리 유적 등에서도, 가야와 신라의 대부분의 철기도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앞서 철기의 등장과 함께 생산 경제가 발달하게 되면서 고대국가가 형성하게 되는 여러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하였다. 이에 더하여 철기는 당시 위신재(威信材)처럼 다루어졌으며, 무덤에서 보이는 철기의 부장은 당시 사회의 계층화를 드러내는 요소의 하나이다. 고대 철의 소유는 곧 권력자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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