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청동기(靑銅器)는 청동으로 만든 그릇이나 기구를 말한다.
개요[편집]
청동기는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모두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이 10% 이상 섞인 합금으로, 인류 역사상 처음 본격적인 도구재료로 이용했던 금속이다. 주석 외에 아연도 많이 섞인다. 청동에서 주석의 비율은 대체로 청동기의 종류와 용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25% 이상으로 높아지면 백동(白銅)이라 하여 거울과 의기 등을 제작할 때 많이 활용된다. 아연이 많이 섞이는 경우 황동(黃銅)이라고도 불리며 금빛을 띠게 되어 장식품 제작에 많이 이용된다.
무기나 생산도구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전에 청동으로 처음 만든 제품이 장신구나 소형 제품인 것은 세계 여러 지역의 공통적인 양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동야금술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칼이나 창 등의 무기류를 만들기 전에 이러한 소형 제품이 만들어졌던 일정한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한국 청동기는 무기(武器)가 대부분이고, 공구(工具), 의기(儀器), 꾸미개〔裝身具〕, 차마구(車馬具) 등의 기종이 있는데, 무늬로서는 기하학무늬〔幾何學文〕가 주로 장식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편집]
본격적으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무기를 만들기 전의 것으로 주장되는 유물은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3지점 2문화층출토 청동손칼과 청동단추, 평양시 금탄리 3문화층의 청동끌, 함경북도 나진시 초도(草島)유적에서 출토된 청동단추와 방울 등이 있다. 청동단추의 거푸집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리유적의 예가 있다.
소형 청동기의 제작시기에 대해서 최근에 북한에서는 이른바 전자스핀공명 연대추정법에 의해 서기전 3,000년대까지 올려보고 있다. 그러나 비파형동검과 동반해 출토되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의 중국 청동기로 보아 서기전 2,000년기 후반을 상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요령지방에서 쌍날개형 동촉과 단추, 낚시바늘 등이 나오는 우가촌(宇家村) 상층을 비롯해 요령지방 청동기문화층과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 자료를 고려하면, 아직까지는 그 상한연대를 올려 잡아도 서기전 1,000년을 200∼300년 거슬러 올라가는 정도이다.
청동유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접한 중국은(殷)나라나 남부 시베리아-북방 오르도스지방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서기전 13세기경 남부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Minussinsk)지방에 출현한 카라스크(Karasuk)문화(서기전 1,200∼서기전 700) 담당자가 동쪽으로 이동해 한국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 문화의 담당자는 돌널무덤을 묘제로 사용하고 있다. 돌널무덤에서 시베리아계통의 청동단추가 부장된 예로는 평안북도 강계시 풍룡동유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를 주로 사용한 시대는 이처럼 서기전 2,000년기 말경에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와 서기전 4∼3세기경을 전후해 철기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는 초기철기시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우리나라 청동기는 단검을 비롯한 창, 도끼, 화살촉 등의 무기가 대부분이고 각종 생산·생활도구, 장신구, 마구(馬具)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가 제작, 사용되었다. 무늬는 기하학무늬가 주로 장식되어 있다.
내용[편집]
무기류를 대표하는 비파형동검은 칼몸〔劍身〕한 가운데에 등대가 있는 점이 중국식 동검이나 북방 오르도스식 동검과 다르고, 다음 시기의 세형동검(細形銅劍)과 같다. 비파형동검이라는 이름은 날 중간에 돌기가 있고, 하부로 갈수록 팽창되면서 곡선을 그려, 중국 고대 악기인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편, 출토 중심지 지명을 따서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루를 별도로 제작해 맞춘 슴베가 달렸고, 검의 전체 길이는 대부분 30∼40㎝이다. 돌기 위치와 칼몸 하부의 만곡도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한 형식은 요령성 여대시(旅大市) 강상(崗上)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동검처럼 돌기가 뚜렷하면서, 칼몸 아랫부분의 곡선을 그리는 정도가 심한 형식이다.
북한 학자들은 돌기가 위쪽으로 크게 치우친 요령성 쌍방(雙方) 등지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을 별개의 형식으로 다루어 가장 이른 것이라 주장한다. 또 다른 형식은 돌기가 분명하지 않고, 검신 아랫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형식이다. 대표적인 예는 요령성 심양(沈陽) 정가와자(鄭家窪子)유적의 출토품이 있다.
이 비파형동검의 중심 분포지는 만주 요령지방이나 한반도에도 널리 퍼져 있다. 최근에는 한반도 남부의 경상북도 청도군 예전동 등지에서 전기 형식의 비파형동검이 여러 점 나와 요령지방에서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동일문화권을 이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남부지방에는 슴베에 홈이 있는 비파형동검이 널리 분포한다.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유적의 예를 비롯해 전라남도 여천 적량동, 전 경상북도 상주의 예가 있다.
동모(銅鉾) 또는 창끌은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동검처럼 창 몸이 비파형을 이룬 것이 다음 초기철기시대의 동모와 구분된다. 길림·장춘지방과 함께, 한반도에서는 전라남도 여천 고인돌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함경남도 금야읍 금야리유적에서는 거푸집이 발견된 바 있다.
동촉(銅鏃)은 살촉몸〔鏃身〕의 날개모양에 따라 양익촉(兩翼鏃)과 삼익촉(三翼鏃)으로 구분된다. 한반도 출토품으로는 양익촉이 주종을 이룬다. 요령 심양 정가와자에서 두 형식이 다량으로 발견된 바 있다. 한반도에서는 황해도 상매리 등지의 출토 예가 있다.
투겁창은 창날이 비파형처럼 생긴 형식과 곧은날 형식이 있는데 전자는 비파형동검과 공반하며 후자는 세형동검과 공반한다.
거울은 뒷면 꼭지가 1개인 중국 것과는 달리, 2∼3개 달려 있고, 뒷면에 기하학무늬가 장식된 다뉴기하학문경(多鈕幾何學文鏡)이다. 그 무늬의 선이 거칠어 다음 초기철기시대의 잔무늬거울〔細文鏡〕과 비교해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라 한다. 실물자료로는 지그재그무늬가 장식된 것으로 요령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정가와자 출토품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평양과 대전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생산·생활도구로서는 손칼〔刀子〕이 있다. 손칼은 주조방법에 따라 자루까지 한꺼번에 주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오르도스 청동기에 보이는 동물무늬 자루를 가진 것도 있다. 또한 자루에 톱니모양〔鋸齒狀〕돌기가 있는 형식이 있는가 하면, 중국은(殷)·서주(西周) 청동기에 보이는 고리자루손칼〔環頭刀子〕도 발견된다.
도끼는 날부분이 부채모양을 이루고, 도끼머리부분에 횡단면 네모꼴의 소켓을 갖추고 있어 자루를 맞추게 되어 있다. 이 부분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함경남도 영흥과 충청남도 부여의 송국리에서 그 거푸집이 발견되었다. 영흥 출토 거푸집의 도끼머리에는 삼각무늬 띠가 있다. 이러한 도끼는 다른 청동기보다도 카라스크-오르도스지방의 북방식 도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요령지방의 여러 무덤에서는 말재갈·재갈멈추개 등의 청동 마구 부속과 나팔모양 청동기, 단추모양 말장식, 말방울 등 말장식용 청동제품이 많이 만들어져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장신구로서 많은 단추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심양 정가와자 무덤 유적에서는 묻힌 사람의 발부분에서 많이 발견되어 장화의 장식으로 부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최근에는 평양 고인돌에서 두 사람이 한쪽 다리씩을 서로 묶고 달리면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의 청동장식품이 발견된 바 있다.
청동기의 제작·보급은 우리나라에서의 청동기시대는 물론이고 철기가 제작되면서도 상당한 기간동안 지속되어 더욱 발전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비파형동검시기 후기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대체로 서기전 300년경부터 서기 전후의 시기까지 지속되는 세형동검시기이다. 이 시기는 초기철기시대로 불리고 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가 요령지방에서 한반도로 바뀐다. 이 시기의 각종 청동기제품이 제작된 것을 보여주는 실물자료로는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각종 청동기 거푸집 일괄유물이 유명하다.
무기류는 칼몸의 폭이 전 단계의 비파형동검에 비해 좁아진 세형동검으로 변한다. 요하∼송화강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지역마다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 동북지방에는 주로 칼몸이 칼끝에서 하단까지 곧바른 고산리식(高山里式), 하단의 폭이 상단보다 넓은 대청산식(大靑山式)이 분포하는데 비해, 한반도에서는 칼몸허리가 패인 것과 등대의 가로마디가 뚜렷한 한국식동검이 분포한다.
한국식동검은 등대의 날이 나 있는 범위에 의해 칼몸의 등대의 모가 허리팸 위치에서 끝난 것과 슴베 바로 위까지 더 내려간 것의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대체로 이른 시기에는 전자 형식이 많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후자 형식이 더욱 많아진다. 세형동검은 남해안지방에서 등대가 퇴화된 편평한 변형동검으로 변한다. 이것은 김해 양동리 등지에서 발견되어 김해식동검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모는 비파형동모 대신 중국 전국식(戰國式) 동모의 영향을 받아, 초기철기시대부터는 곧은 날에다 길이가 30㎝ 미만인 단봉(短鋒)형식으로 만들어진다. 단봉의 동모는 처음에는 슴베 끝의 자루도 남부지방의 늦은 시기로 가면 40㎝ 이상으로 길어지고 너비도 넓어질 뿐만 아니라 고리가 달리는 형식으로 바뀐다.
또한 검과 창 외에도 이 시대에는 중국식 꺾창〔戈〕을 모방해 한국식꺽창이 만들어진다. 중국의 꺾창은 단검처럼 앞으로 돌출한 부분을 원(援), 아래로 내려온 부분을 호(胡), 원의 반대쪽으로 칼끝처럼 뻗은 부분을 내(內)라고 부른다. 한국의 꺾창은 호가 없고 내도 단검의 슴베처럼 되어 있다. 꺾창 역시 처음에는 길이가 짧고 너비가 좁았다가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너비가 넓어지고 크고 길어진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 시기 한반도 청동기로서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뒷면에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된 거울이다. 앞 시기의 거친무늬거울과 다른 점은 단면 반원형의 두터운 테가 둘려 있는 것이다. 보다 이른 것은 무늬가 다소 거칠어 거친잔무늬거울〔粗細文鏡〕으로 부를 수 있다. 이들은 활석제 거푸집 실물을 통해 제작방법이 확인된다. 보다 정교한 잔무늬거울〔精文鏡〕은 실물이 전하지 않지만, 가는 선에 복잡한 무늬로 보아 밀랍형 거푸집으로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이지 않고 남한지역에서 만들어진 이 시기의 청동제품으로는 무구(巫具)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각종 청동방울이 있다. 방울의 종류는 8가지에 방울이 달린 팔주령(八珠鈴), 나무자루 끝에 부착된 포탄형 방울의 간두령(竿頭鈴), 가지 양끝에 방울달린 막대모양과 손 안에 쥐고 흔들게 된 이두령(二頭鈴) 등이 있다.
방울 끝에는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실물자료로는 충청남도의 논산, 덕산, 전라남도의 화순 대곡리와 함평 초포리, 경상북도의 상주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생산도구로는 전 단계부터 만들어진 도끼와 끌 외에도 중국 전국시대 청동기의 영향으로 찌르개〔尖頭器〕또는 동새기개〔銅鉇〕가 만들어진다.
그 밖에 의기류로서 각종 무늬가 장식된 방패형동기, 대마디모양의 청동기와 함께, 충청남도 예산 동서리에서는 말장식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나팔형동기 등의 특이한 모양의 청동기가 출토된다. 이러한 청동기는 요령지방의 비파형동검 출토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요령과 충청남도지방의 청동기문화가 서해의 해상루트를 통해 서로 접촉했음을 시사해준다. 한국식동검문화는 일본 큐슈〔九州〕지방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금속기시대인 야요이시대〔彌生時代〕를 열게 된다.
구주지방의 사가현〔佐賀縣〕우키군덴〔宇木汲田〕독무덤 유적이나 후쿠오카현〔福岡縣〕요시다케다카기〔吉武高木〕유적 3호 널무덤에 부장된 청동유물을 보면, 한국식동검·꺾창·동모·잔무늬거울 등으로, 그 종류와 형식은 남한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 전성기에 만들어진 청동유물과 일치한다.
다음 1∼2세기경에는 한국계 청동무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더욱 장대화(長大化), 의기화(儀器化)해 다량으로 제작된다. 역으로 김해, 고성을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역에 들어오기도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소형이던 청동방울〔銅鐸〕도 일본에서는 대형화, 의기화된다. 이처럼 장대화, 의기화된 청동무기와 청동방울은 일본에서 무덤에 부장되기보다는 제사 유적에 대량으로 매납되는 제기로 변화된다. 대표적인 제사 매납유적은 동검 358점, 동모 16점, 대형 청동방울 6점이 매납된 시마네현의 고진다니〔荒神谷〕유적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청동제품은 일부는 집자리에서 출토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덤에 부장되었던 유물들이다. 같은 시기의 집자리에서는 청동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고, 여러 종류의 간석기〔磨製石器〕가 출토된다. 이러한 양상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거의 전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으로 볼 때, 청동제품은 당시에 실제 생산과 생활용구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대부분이 일부 계층의 무기류나 의기류 또는 권위의 상징물〔威勢品〕로서 소유,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유물이 부장된 무덤은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시기에는 요령지방에 강상, 누상묘와 같은 집단 돌덧널무덤이 있다. 또한 쌍방 등과 같은 대석개묘(大石蓋墓) 또는 개석식 고인돌, 평양과 같은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 남한지역에서는 송국리유적과 같은 돌널무덤과 여천 적량동유적과 같은 남방식 고인돌에서도 발견된다.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시기에는 널무덤〔土壙積石木棺墓〕에서 다량 출토된다.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등지와 전라남도 함평 초포리, 화순 대곡리 등이 있다.
유물의 출토량은 특히 충청남도·전라남도 지방의 널무덤에서 보듯이, 한 무덤에서 많으면 10점 이상의 동검을 비롯한 수십점의 청동기가 부장된다. 이러한 무덤에 묻힌 사람은 당시 우월한 지위에 있었던 ‘국(國)’을 다스리던 군장(君長)이나 신지(臣智)에 견줄 만한 신분의 소지자로 인정된다.
이들의 무덤에는 기본적으로 다뉴경이 많으면 3∼5매까지 부장된다. 청동방울은 의례를 주관할 때 사용되는 무구임이 분명하므로, 이것이 거울, 무기 등과 같이 부장된 무덤의 경우는 제사장(祭司長)의 성격을 지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편집]
한반도와 그 인접한 중국 동북지방은 청동기를 비롯한 주요 문화요소가 주변 지역과 구별되어 독특한 하나의 청동기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양 지역의 각종 문화요소를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어떻게 분포하고 어떠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에 따른 청동기의 전반적 양상과 변화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의 변천과정은 크게 비파형동검 이전 시기, 비파형동검 시기, 세형동검 시기로 나뉜다. 비파형동검 이전 시기는 서기전 12∼9세기로 동검 등의 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치레걸이와 소형손칼이 주로 만들어졌다. 비파형동검 시기는 서기전 9∼5세기로 비파형동검과 여러꼭지거친무늬거울〔多鈕粗文鏡〕을 비롯한 비파형동모 등 한국계 청동기의 기본이 되는 청동기가 만들어졌다. 세형동검 시기는 서기전 4∼3세기경의 전기와 서기전 2∼1세기경의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투겁창, 꺾창, 여러꼭지거친잔무늬거울〔多鈕粗細文鏡〕이 공반된다. 후기에는 세형동검과 함께 정교한 무늬의 잔무늬거울이 보급되고 남한지방에서는 각종 청동방울이 만들어진다. 아울러 이 시기 남한지방에서 유행했던 잔무늬거울과 세형동검, 세형청동투겁창 등이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