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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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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

석탈해신라의 제4대 왕(재위 57∼ 80)이다.

개요

  • 석탈해는 성은 석(昔)이고 이름(諱)은 탈해(脫解)이며,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질금(尼叱今)이나 치질금(齒叱今)이라는 표기도 등장한다. 왕비는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4~24)의 맏딸인 아효부인[阿孝夫人, 아로(阿老)나 아니(阿尼)라고도 한다. 각간(角干) 구추(仇鄒) 등의 자녀가 있었으며, 김알지(金閼智)를 양자처럼 거두어 키우기도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탈해이사금은 본래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다. 그 나라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왕이 알을 버리라고 하자 그녀는 알을 보물과 함께 상자에 넣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알을 실은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해변에 도달했으나 그곳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그것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9년(혁거세 39)에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 어귀에 도달했고,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건져내 상자에서 아기가 나오자 데려다 키웠다. 아이는 장성하자 키가 9척이나 되었고, 기풍과 지식이 뛰어났다.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며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를 봉양했으나 그녀의 권유로 학문과 지리를 익혔다. 그리고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이 길지(吉地)임을 알고 꾀를 부려 그 터를 얻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 자리가 뒷날 월성(月城)이 되었다.[1]
  • 석탈해는 경주 석씨의 시조 중의 한 명이자 신라 석씨 왕조의 첫 번째 임금이다. 칭호는 이사금이다. 석탈해(昔脫解) 또는 이름을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성의 유래는 그가 처음 신라에 올 때 실려있던 선박 위에 까치(鵲)가 많이 있어 이에 까치라는 글자에서 '새 조'(鳥) 자 부분을 빼고 '석'(昔)만 남은 것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름의 이표기가 많은 것은 당대에는 한자어 이름이 쓰인 게 아니라 음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죽은 뒤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동경 동악대왕, 경주 동악대왕이라 한다. 그가 신으로 숭배된 이유는 알 수 없다.[2]
  • 석탈해는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 혹은 기원전 5년?~80년 8월, 재위: 57년 11월~80년 8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3]
  • 석탈해는 신라의 제4대(재위: 57년~80년) 왕. 성은 석씨(昔氏)이며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또는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이처럼 탈해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그에 따라 탈해의 출자(出自)와 이동경로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대체로 북아시아의 기마민족 계통으로 보는 북방설, 해양세력으로 중국이나 일본 열도를 거쳐 왔다고 보는 남방설, 낙랑계(樂浪系) 유이민으로 보는 낙랑설(樂浪說)이 있고, 이밖에 목지국설(目支國說), 고조선설(古朝鮮說), 사로국(斯盧國) 본토설 등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왕(南解王: 南解次次雄)의 딸 아효(阿孝 · 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4]

석탈해신화

  • 석탈해신화(昔脫解神話)는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재위 57~80)의 탄생신화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삼국유사》 권1의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紀)〉 등에 실려 있는 신라 제4대 왕이자 석씨(昔氏) 왕조의 시조인 탈해왕의 탄생신화를 말한다. 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지만 알에서 태어난 비정상적 출생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숱한 시련을 극복한 뒤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르는 영웅신화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의 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이를 상서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게 하였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비단에 보물과 함께 알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해변에서 한 노파가 궤를 건져 열어 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고, 노파가 기른 아이는 장성하여 키가 9척에 풍모와 지식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은 궤가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담긴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 석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으며, 나중에 양산의 호공(瓠公) 집을 길지(吉地)로 여겨 계책을 써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훗날의 월성(月城)이다. 남해왕이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은 뒤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임종할 때 나이 많고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왕이 되었다며, 자신도 왕위를 석탈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탈해왕"조에는 출생지가 용성국(龍城國)이며, 함달파(含達婆)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낳았다고 한다. 용성국은 다파나국과 마찬가지로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정명국(正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알로 태어난 탈해는 칠보(七寶)·노비와 함께 커다란 궤에 넣어져 배에 실려 바다를 떠다니다가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에게 발견되었다. 탈해는 키가 9척 7촌, 머리둘레가 3척 2촌에 달하는 거구로 묘사되어 있고, 사후에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소천구에 장사지낸 자신의 뼈를 들어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였으며 이후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석탈해의 생애

  • 석탈해의 설화에서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석씨 부족이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했지만 이미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탈해가 처음 신라 사회에 정착했을 당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일화는 이주민인 탈해집단과 선주민인 박씨족(朴氏族)과의 대립을 알려준다. 그러나 탈해가 박씨족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또 탈해가 왕으로 즉위한 후 갈등관계에 있었던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는 등의 일은 박씨족과 연합한 양상을 알려준다.
  • 석탈해는 8년(남해차차웅 5)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즉위 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와 이빨 수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석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왕의 사위이므로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한 철을 이용한 군사력 확보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함으로써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보기도 한다.
  • 석탈해는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 · 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해 이후 4∼5회 공격해왔다. 65년(『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 · 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 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왕탄강유허

  • 석탈해왕탄강유허(昔脫解王誕降遺墟)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이 탄강한 곳이다.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탈해왕의 탄강지가 계림동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인 1845년(헌종 11)에 나라에서 탄강지에 하마비(下馬碑)와 땅을 하사하였다. 석씨문중에서 이곳에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 석탈해왕탄강유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AD 57∼80)이 탄생한 곳이다. 석탈해는 A·D 8년 신라 제2대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AD 57년 유리왕의 뒤를 이어 제4대 임금이 되었다. 태어난 곳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 되어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그곳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여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동영상

각주

  1.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80)〉, 《두산백과》
  2. 탈해 이사금〉, 《나무위키》
  3. 탈해 이사금〉, 《위키백과》
  4.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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