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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Famicom, FC)은 패밀리 컴퓨터의 줄임말로 닌텐도의 첫 번째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이다. | '''패미컴'''(Famicom, FC)은 패밀리 컴퓨터의 줄임말로 닌텐도의 첫 번째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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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Famicom, FC)은 패밀리 컴퓨터의 줄임말로 닌텐도의 첫 번째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이다.
목차
개요[편집]
닌텐도는 각종 아케이드 게임과 게임 앤드 워치의 성공으로 사업의 발판을 마련한 상태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진출을 준비했다. 이미 가정용 게임기 사업은 미국의 아타리 2600을 비롯하여 일본의 반다이, 토미, 에폭, 브라질, 등이 진출하여 이미 가정용 게임기가 널리 보급된 상태이다. 2003년 9월 25일, 발매한지 20년 이상 흘렀던 시기에 닌텐도에서 슈퍼 패미컴과 함께 공식 단종을 선언했다. 닌텐도가 발표한 패밀리 컴퓨터/NES의 전세계 누계 판매 대수는 6,191만 대이며,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4,024만 장의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이다. [1]
역사[편집]
패밀리 컴퓨터의 개발은 1981년 11월 무렵부터이다. 개발진들은 당시의 경쟁기와 차별화된 요소로 게임에 필요없는 요소를 줄이고 저렴한 가격에 고성능을 내기위한 방안을 모색하였고, CPU는 애플 II에서도 사용했던 8비트의 6502계열을 선택(리코 2A03), 그래픽은 리코사의 RP2CO2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저렴한 가격의 하드웨어와 대비하여 비싸지만 질 좋은 타이틀을 공급하여 게임 소프트웨어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1983년 7월 15일, 일본에서 패밀리 컴퓨터로써 처음 발매되었다. 8비트 CPU 리코 2A03(1.77MHz)를 채용한 가정용 게임기로 일본에서의 발매당시 가격은 14,800엔이다.또한 샤프에서 패미컴이 내장된 텔레비전 '패미컴 테레비C1'을 발매하였다. 북미에서는 1985년 10월 18일에 "닌텐도 엔터테이먼트 시스템(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패밀리 컴퓨터 사상 최대 판매량을 가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발매하였다. 유럽에서는 1986년 9월 1일에 북미판과 같은 이름으로 발매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에 현대전자에서 북미판인 NES를 "현대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었다. 2003년 9월경 제조 부품의 수급이 어려운 것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생산을 중단했으며, 2007년 10월에 패밀리 컴퓨터에 대한 사후지원을 공식적으로 종료했다. [1]
특징[편집]
자사의 히트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을 뛰어난 품질로 이식하여 초반에 인기를 끌어모았고, 이후에도 허드슨이나 남코 등의 서드파티들이 참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로 사회현상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또한 젤다의 전설,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록맨, 메트로이드 등 패미컴만의 뛰어난 오리지널 게임들이 나오면서 역사상으로 매우 성공한 게임기들 중의 하나가 됬다. 특히나 서드파티 비즈니스의 기준을 확립하여 현재 게임기 산업 구조의 표준을 구축해 놓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봐도 부족하지 않다. 전 세계에 6,191만 대를 판매했으며, 일본에 1,935만 대, 북미/남미에 3,400만 대, 기타 지역에 856만 대를 판매했다. 한동안은 세이브 시스템이 없어서 패스워드를 제공해 입력하는 방식의 간이 세이브를 해야했다. 마스크 롬에 추가로 SRAM을 붙이기 쉽지 않은 구조이다. 1986년에 나온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덕분에 편리하게 세이브할 수 있게 되었지만, 디스크 시스템은 일본에만 출시된 데다가 1987년에는 배터리 백업 시스템이 등장하게 되었다. [1]
패미컴 출시[편집]
발매 초반엔 그렇게 순조롭지는 못했다. 발매 1년만에 100만 대, 그리고 1984년까지 250만 대가 팔렸지만, 기기 불량으로 인한 클레임 처리, 쏟아지는 반품으로 상당히 고생했다. 컨트롤러의 버튼은 100만 회나 테스트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버튼이 패드에 박혀 빠지지 않는 일이 생겼고 소비자들이 RF 단자에 연결할 줄 모른다거나, 게임 화면이 옆집 텔레비전에 나온다거나 본체와 연결된 컨트롤러를 끊어먹는다거나 등등 당시 닌텐도로서는 스스로의 역량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기에 문제가 많았다. 특히 PPU 열처리 문제로 게임에 버그를 일으켰고 닌텐도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소매점 주인들에게 직접 수리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타 메이커와 협의 끝에 타사의 게임도 버그를 체크했다. 이걸 두고 닌텐도의 전략이 아니었냐며 음모론을 제기하는걸 두고 우에무라는 턱도 없는 소리라며 부인했다. 1983년 연말 연시 시즌이 되기 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패미컴 전량 회수를 지시하면서 그 해 시즌을 놓치고 말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패미컴 초기엔 서드파티가 없었다. 닌텐도 역시 아타리처럼 서드파티라는 걸 만들 생각도 못했고, 애시당초 게임을 못 만들게 하려고 CPU의 정체도 감췄기 때문이다. 허드슨은 닌텐도와 친한 샤프의 소개로 패미컴 발매 전 부터 인연을 맺게 되어 패밀리 베이직을 만들 수 있었지만 게임이나 개발툴은 제멋대로 만든 다음 들고가서 교섭하고 계약하여 최초의 서드파티가 된 것이었다. 남코의 경우도 어느 날 한 사원이 요즘 잘 나가는 거라며 패미컴을 사서 사무실에 가지고 왔다가 해킹한 결과 CPU 명령어 세트가 6502라는 걸 알아내고 그 자리에서 패미컴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닌텐도의 도움 없이도 제멋대로 게임을 만들어서 닌텐도에 가져가서 서드파티에 참여시켜 달라고 반 협박으로 서드파티가 된 것이었다. 야마우치 사장의 반응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 그 자체였고 당시 남코는 굳이 참여시켜주지 않아도 잦은 송사로 다져진 남코 법무팀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완성품을 가져간 덕인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코의 게임들은 엄청나게 팔렸고 패미컴도 84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업계의 큰 손들이었던 허드슨, 남코, 타이토, 아이렘, 코나미, 자레코 6개 회사에는 연간 게임 제작 개수의 제한을 없애주었으며 허드슨을 제외한 5사와 선 전자, 반다이는 카트리지를 직접 제조할 수 있도록 우대해주었다. 사실 닌텐도에서 할 수 있던 것이라고는 '패밀리 컴퓨터는 닌텐도의 상표'라는걸 주장하고 그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뿐이었고 이후 부랴부랴 라이선스 규칙을 만들어서 1986년에 완성했다. 대충 알려진 라이센스 규칙들은 '서드파티 참여시 라이센스 비용 납부와 1대 500만엔의 개발기재를 빌리거나 구입' '1년에 발매할 수 있는 게임 수의 제한' '게임의 제조는 닌텐도에게 위탁하고 비용은 선납' '게임의 내용을 닌텐도가 체크' 같은 것들이 있다. 남코는 닌텐도의 뒷통수를 치다가 밉보이고 첫 계약이 만료된 89년 라이센스 우대 계약을 철회당한다. 당초 우에무라는 장난감 세계에서는 100만대라면 그럭저럭, 300만 대쯤 팔면 대단할 것이라며 판매대수가 꺾이겠거니 생각했지만 1984년 11월 제비우스가 나오며 히트를 이어갔고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가 발매되고 그때까지 400만대가 팔린 패미컴은 그 인기가 식기는 커녕 사회 현상이 되기에 이른다. [1]
NES 해외 진출[편집]
닌텐도는 패미컴 출시 초기부터 북미 시장 진출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당시에는 세계 최대 게임기 기업이었던 아타리와 협상을 시작했다. 아타리에게 패미컴을 독점 공급하기로 하고, 이에 대한 내용을 1983년 여름 미국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에서 아타리가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소비자 가전 박람회에서 콜레코가 가정용 컴퓨터 콜레코 아담을 발표하면서 동키콩을 시연한게 문제가 됐다. 콜레코가 시연한 동키콩은 콜레코 아담의 콜레코비전 하위 호환 기능을 이용해 시연된 것이었으나, 아타리는 계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해 출시를 연기시켰다. 이후 북미 게임 시장은 아타리 쇼크로 큰 타격을 입었고, 레이몬드 카사르 아타리 CEO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타리를 떠났다. 이후 아타리를 사들인 잭 트라미엘은 아타리를 코모도어와 경쟁할 회사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패미컴의 유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이 거래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닌텐도 역시 그래픽 칩 불량으로 인한 리콜 문제로 잠시 북미 시장 진출을 접었다. 1985년이 되자 닌텐도는 다시 북미 시장 진출을 추진했는데 이번엔 독자적인 진출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아타리 쇼크가 진행중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소매상들은 비디오 게임을 지나간 유행이라고 생각해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를 취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를 피하려고 닌텐도는 패미컴을 가정용 컴퓨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Nintendo Advanced Video System이라는 제품으로 출시하려 했다. 패미컴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컴퓨터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고, BASIC 인터프리터 카트리지와 키보드, 카세트테이프 데이터 레코더와 동봉해 판매하기로 했다. 그리고 1985년 1월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에 출품했다. 그러나 컴퓨터 기능은 열악했을 뿐더러 아무리 봐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 시스템을 주문하지 않았다. Electronic Games라는 미국 게임 잡지에서는 이에 대해 1985년 3월호에 "미국의 비디오 게임 시장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는 닌텐도의 오판일 수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닌텐도는 패미컴을 가정용 컴퓨터 제품으로서의 접근을 포기하고 장난감 제품으로서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자로 소비자 가전 박람회에 다시 출품했다. "닌텐도 어드벤스 비디오 시스템(Nintendo Advanced Video System)"에서 "닌텐도 엔터테이먼트 시스템(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카트리지'라는 이름 대신 '팩'으로, '콘솔' 대신 '컨트롤 덱'으로 개명했다. 또한 "재퍼"라는 광센서 총과 "R.O.B."라는 로봇 액세서리를 강조해 어디까지나 장난감임을 강조했다. 또한 디자인도 다시 변경했는데, 가전 제품처럼 보이려고 투박하게, 그리고 게임 카트리지를 넣는 곳이 보이지 않도록 디자인됐다. 그러나 그런 전략에도 결국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임을 다들 알아챘다. 유일하게 토이저러스에서 5만 대를 주문했다. 결국 닌텐도는 1985년 10월 18일 자로 뉴욕에 한정해 토이저러스를 통해 출시하기로 결정했고, 슈퍼 마리오브라더스가 번들된 $130 모델과 재퍼와 덕헌트 게임이 번들된 $150 모델, 그리고 재퍼, R.O.B.가 모두 포함된 $250 디럭스 세트 모델로 출시 가격을 책정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매상들은 여전히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라면서 제품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는 닌텐도 본사의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직접 보증을 선 뒤, 소매점에서 90일 이내에 상품이 판매되면, 그 때 소매점이 닌텐도에 들여온 제품 값을 지급하고, 90일 동안 팔리지 않은 상품은 전부 무상으로 반납 받기로 합의하면서 소매점에 상품을 진열할 수 있게 되었다. 1985년 10월 18일 토이저러스에서 5만 대를 출시했으나, 처음에는 30% 정도는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서서히 인기에 불이 붙기 시작해 이후에 9주 만에 9만 대 가까이 팔려 나갔다. 이 기세로 1986년 2월부터는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포함한 12곳의 미국 대도시에 출시됐고, 9월에는 미국 전역에 출시될 수 있었다. 닌텐도는 NES를 1986년 한 해에만 110만 대를 팔아치웠으며, 1987년에는 누적 판매량 500만대를 돌파했다. 미국에서의 NES의 성공 덕에 아타리 쇼크 이후 1985년에 1억 달러 규모밖에 되지 않았던 비디오 게임 시장은 1986년에 무려 4.3억 달러로 4배 넘게 팽창했다. 닌텐도는 1986년에 무려 3.1억 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NES는 북미 지방에서 3,400만 대 가량 판매했는데, 이는 아타리 2600의 판매량을 경신한 수치이다. 미국 진출 이듬해인 1986년에는 서유럽 일부 지역에도 출시되었으며, 1987년에는 서유럽 전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지역에도 출시됐다. [1]
패미컴 게임소프트 용량비교[편집]
초창기 패미컴 게임소프트의 용량은 50킬로바이트 후에는 512킬로바이트의 용량수준이었다. 전세계 약4천만장이 판매된 슈퍼마리오는 40킬로바이트, 드래곤퀘스트는 3256킬로바이트이다. 롤플레잉 게임을 생각해 볼때 적은 용량에 책 몇권의 대사와 내용, 그래픽, 게임밸런스 ,음향등 모든 요소들을 담아 게임을 제작하였고, 최근게임들에 비해 전혀 뒤쳐지지 않는 수준에 그래픽을 제외하면 게임몰입도,밸런스, 종합게임성이 높은 게임들도 많다. 패미컴의 게임소프트는 카세트 탈착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고, '게임카트리지'로 불리었다. 패미컴 라이센스 발매 게임카트리지중 최대 용량은 '별의커비-6메가'이며, 패미컴의 특징으로 봤을때 최적화 능력은 최고였다. [2]
Will[편집]
1983년 발매된 패미컴, 닌텐도를 일약 세계 제1의 가정용 게임기 제조회사로 만들어준 전세계 히트상품으로 1990년 발매된 슈퍼패미컴은 그 뒤를 이어 화려한 전성기를 이어 갔다. n64,게임튜브의 잇단 시장 장악 불안과 어려움은 2006년 파격적인 컨트롤러, 게임다운로드 기능을 탑재한 Will을 출시함으로 극복했다. 패미컴과 Will은 본체의 크기가 동일하게 제작되어 있다. 패미컴 본체의 크기는 가로 x 세로(전면 캡에서 후면 돌출단자까지의 길이) x 높이(바닥에서부터 삽입된 패드끝까지 높이)가 Will의 사각형 본체 사이즈와 동일하게 일치한다. 디자인적인 밸런스가 굉장히 높고 조화롭다. [3]
경쟁[편집]
경쟁업체[편집]
발매 당시 일본에서는 에폭사에서 만든 카세트비전이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패미컴은 이 구조를 깨부수고 단숨에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경쟁사에서 스펙이 뛰어난 기기(세가 마스터 시스템)가 나오거나, 16비트 기종(메가드라이브)이 먼저 나오긴 했으나, 세가의 멍청한 실수가 있었고, 닌텐도의 서드파티들 덕분에 항상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교활할 정도의 언론플레이(곧 있으면 슈퍼 패미컴 나온대!)로 경쟁사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참고로, 패미컴은 1983년 7월 15일에 나왔고, 같은 날에 경쟁 기종인 세가의 SG-1000이 나왔으며, 세가 마크 3는 1985년 10월에 나왔다. 실제로 패미컴은 메인 CPU 외부에 그래픽 프로세서를 따로 채용했고, 탑재된 램도 같은 시대의 다른 기종들보다 고용량이기 때문에 한 화면에 표현 가능한 화소 수도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15,000엔에 발매된 SG-1000 보다도 200엔 낮은 14,800엔이었기에, 가격대 성능비에서도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아타리 2600의 일본판인 아타리 2800이 24,800엔에 발매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패미컴의 가격은 당시로써는 성능에 비하면 말도 안될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당시에 일본에서 판매된 8비트 게임기 사이에서는 가장 낮은 가격이었으며, 발매 당시에 이보다도 낮은 가격을 보인 기기는 13,500엔의 카세트 비전 정도뿐이었으나 그쪽은 8비트급이 아니다 보니 아타리 2600보다도 훨씬 낮은 성능이며, 그나마 CPU를 본체가 아닌 게임 카트리지에 넣어서 저 가격이 나왔다. MSX 및 비슷한 사양의 SG-1000은 '부드러운 화면 스크롤' 조차 구현하기 어렵고, 아무튼 당시를 기억하는 제작자들에게는 아타리 5200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파워풀한 차세대기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컴의 영역에 가격도 엄청나게 차이가 났으니 애시당초 경쟁의 분야조차 달랐기 때문이고, 고성능 차세대기인 메가드라이브는 발매일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를 내보내 압살했다. 단 닌텐도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고, 디스크 시스템으로 가격을 낮춘다거나, 우수한 게임을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1]
불법 복제판[편집]
복제 패미컴은 보통 패미클론으로 지칭된다. 한국의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만졌던 패미컴이나 게임은 복제품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최초의 패미클론의 등장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대만에서 정품을 그대로 본따서 만든 기기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색깔은 빨간색 대신 회색을 사용했다. 이러한 패미클론은 점차 발전하여 외부 케이스의 모양을 당대의 차세대 게임기 디자인으로 바꾸는 것은 예사였고, 게임패드도 단순한 2버튼에서 연사가 달린 6버튼 이상의 패드가 달려 나오는 식으로 발달했다. 옛날에는 게임기는 물론이고 게임팩의 복제도 워낙 흔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패미클론을 생산 판매하는 업체가 제법 있었다. 한때 게임 시장에서 패미컴은 거의 대부분이 복제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1990년대 전후로 발매된 한국산 개발 패미컴 게임들도 대부분 무단으로 게임을 내놓았고 그 가운데에 몇몇은 롬 덤프가 아직 되지 않아서 원 롬팩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되고 있다. 주옥 같은 여러 게임들이 있지만 <둘리 부라보 랜드>와 <도술동자 구구>는 2017년 2월에 롬 파일로 덤프되었다. 패미클론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시대가 흐르며 원칩 간소화되어 다른 게임기들과 퓨전되어 나오거나, 액정을 달고 휴대용으로 나오고 있으며 아예 새로운 패미컴용 게임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현재는 일본에서도 복제 패미컴이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는 패미컴 호환기를 DIY할 수 있는 키트까지 팔고 있다. 이런 호환기 중에는 일부 호환이 되지 않는 게임도 더러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패미컴 게임을 만들던 회사를 게임월드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최소 3000개는 팔아야 이윤을 볼 수 있었는데 몇 만개씩 팔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1]
하드웨어[편집]
컨트롤러와 마이크,광선총[편집]
방향 조절 버튼과 A·B 버튼, 시작(START), 선택(SELECT) 버튼을 갖추었으며, 본체에 직접 연결이 되어 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컨트롤러를 교체하기는 어렵지만, 일부 매장에서 컨트롤러 교체를 지원해주기도 하며, 또는 직접 본체 내부를 열음으로서 교체 할 수도 있다. 방향 조절 버튼은 통칭 '십자키'라고 불리는 버튼으로 본래는 게임 앤드 워치-멀티 스크린-동키콩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 패밀리 컴퓨터에 도입했다. 조작기를 양손에 쥐고 엄지 손가락만으로 조작을 하는 시스템은 그 뒤의 가정용 게임조작기의 표준적인 형태가 된다. A와 B 두 개의 버튼은 초기에는 사각형 형태의 고무로 만들어졌으나 버튼이 쉽게 박히거나 오래 사용할수록 버튼이 닳아 고장의 원인이 되어 후에 원형의 플라스틱으로 된 버튼으로 교체한 제품이 출시했다. [4]
음원[편집]
패밀리 컴퓨터는 별도의 사운드 칩이 없이 CPU인 리코 2A03에서 직접 출력한다. 이를 pAPU(pseudo Audio Processing Unit), PSG(Programmable Sound Generator)라고 한다. 내장 음원은 펄스파 2계통, 삼각파, 노이즈, DPCM의 5 채널이지만 롬 카트리지의 핀 하나가 아날로그 신호용으로 사용되어 음성 출력에 혼합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카트리지 측에 음원을 탑재하는 것으로 음원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용한 대표적인 게임은 디스크 시스템의 FM 음원이며 일부 코나미와 남코 게임의 추가 음원 등이 있다. [4]
기억공간 확장[편집]
부족한 메모리(64킬로바이트)의 확장을 위해 사용된 MMC는, 프로그램 롬과 캐릭터 롬의 영역을 분할하여 필요에 따라서 바꾸기 위한 게이트 어레이다. 실용화 된 MMC만 6종류로 스클롤 방향의 제어, PPU를 보충하는 기능 외에도 백업 메모리를 탑재한 것도 있다. 이 방식은 게임보이에서도 MBC로 사용되게 된다.[4]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패밀리 컴퓨터〉, 《나무위키》
- MIHA,〈[패미컴 아무도 모르는'패미컴'과'Will' 그 20년을 넘어선 조화]〉, 《티 스토리》, 2015-09-14
- MIHA, 〈패미컴의 성능과 게임용량을 지금과 비교한다면?〉, 《티 스토리》, 2015-09-09
- 〈패밀리 컴퓨터〉,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