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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 + |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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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일 (월) 14:33 판
영화(movie)는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이다.[1]
개요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 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와 스튜디오·카메라·녹음·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작품을 감독하며 시나리오작가·배우·촬영기사·미술가·음악가·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관객이 볼 수 있게 되려면 배급업자 또는 흥행업자와 영화관이 있어야 하며, 광고가 따라야 하고 영화평론가들의 평가도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됨으로써 대중전달의 기능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상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되며, 관객에게 심리적 영향을 줌으로써 예술적 또는 오락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영화는 오늘날 예술의 한 갈래이면서,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넓은 사회 문화적인 복잡한 현상이다. 영화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카메라·필름·영사기이다. 이것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과학과 공업이 만들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취급되고 하나의 테크놀로지로 논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으로서, 그리고 흥행으로서 그 양상은 대중을 상대로 한 매스미디어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등장과 더불어 시각 정보의 전달 매체,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호체계로서 연구, 인식되어가고 있다.[2]
역사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분류
국가
미국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