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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원효(元曉)는 신라의 승려로 일심과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개요[편집]

  • 원효는 신라의 승려로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속성(俗姓)은 설(薛),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신당(新幢)이다. 법명(法名)은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栗谷)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赤大公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柰麻)의 지위에 있던 담날(談捺)이다.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다. 원효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經論)들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종 240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海東疏)'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三昧經疏)'라고 기록되어 있다.[1]
  • 원효는 신라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성은 설씨(薛氏), 아명은 설서당(薛誓幢) 또는 설신당(薛新幢)이다. 원효는 법명(法名)이다.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설담날(薛談捺)의 아들이다. 원효는 일생 동안 86부 180여 권의 저서(혹은 100여 부 240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를 남겼다. 신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질(質)에서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은 저작으로서 원효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2]
  • 원효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학자, 사상가, 작가, 시인, 정치가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본관은 경주(慶州),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諍)이다. 그는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라 불렸다. 원효는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었다. 고려 숙종에 의해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내려졌다. 원효 스스로 지은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한국에서는 보통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당대 가장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신라에서 살았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삼국통일에는 당나라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원효는 당시 많이들 읽는 모든 불경에 대해 각각 해설서를 편찬할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했고 통달해 당시 당나라 고승들이 원효대사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의 왕은 최고의 고승을 국사, 왕사로 두어 각종 정책결정에 권고를 받았었다. 오늘날,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수입해 한국화한 화엄사상과 더불어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평가받는다.[3]
  • 원효는 삼국시대 중기 신라의 승려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해골물을 통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3학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지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로 평가받고 있다. 난세인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신라의 탄생을 목격했다. 또한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근거는 6세기 말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로 백제 승려 혜균(慧均)의 생각과 많이 닿았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통일에는 사상적인 통합이 선행되었고, 원효가 그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속성은 경주 설씨(薛氏), 이름은 사례(思禮),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고려 숙종이 공식적으로 내린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부터 시작하여, 원효보살, 해동보살, 해동법사, 해동교주 등등 다양하다. 청구의 용이라는 의미에서 구룡(丘龍)이나 구룡대사라고도 불렸으며, 청구대사, 청구화상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화엄지(華嚴地)의 대권보살(大權菩薩)이나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로 여겨지기도 했다.[4]

원효의 생애[편집]

  • 원효는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낭지(朗智)와 혜공(惠空)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完山州)에 머무르며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650년 의상(義湘)과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 나라로 떠나려 하였으나, 배를 타러 당항성(唐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 원효는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하였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각지를 떠돌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원효는 만년에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高仙寺)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고려 명종(明宗) 때에도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宋) 나라 때에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에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元曉不羈)' 이외에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 '사복불언(蛇福不言)', '의상전교(義湘傳敎)', '이혜동진(二惠同塵)',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광덕엄장(廣德嚴莊)' 조(條) 등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원효의 일심사상과 화쟁사상[편집]

  • 원효의 사상의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대승기신론소)'며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파들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화쟁사상(和諍思想)' 또는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 한다.
  • '일심(一心)'은 원효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원효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一心)'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淨土)이다.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 '화쟁(和諍)'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여러 불교 이론들이 서로 다투어서 쟁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집착 때문이라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中觀論)과 유식론(唯識論)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를 지녔다. 원효는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眞如)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生滅)이 모두 일심(一心)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諸法性空)'는 것을 전제로 '연기(緣起)'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론과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유식론의 대립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法藏)과 징관(澄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량산 원효굴[편집]

  • 청량산 원효굴(淸凉山元曉窟)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한 청량산 자소봉에 있는 동굴로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도를 닦은 곳이라고 한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산 자소봉(840m) 중간 만월대(滿月臺) 아래에 위치한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이 굴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여 원효굴로 이름 붙여졌다. 굴속에는 우물이 있으며 사람이 생활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원효(元曉, 617~686)는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원효(元曉,617~686.3.30)〉, 《두산백과》
  2. 원효대사〉, 《향토문화전자대전》
  3. 원효〉, 《위키백과》
  4. 원효〉,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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