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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부터 장거리에 걸친 교역 혹은 교환경제행위와 관계된 증거가 본격적으로 나오며,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벽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위시한 본격적인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이들 예술품은 상징과 주술 행위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회적 정보의 전달 및 갈등 해소의 기능적 역할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시기부터 장거리에 걸친 교역 혹은 교환경제행위와 관계된 증거가 본격적으로 나오며,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벽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위시한 본격적인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이들 예술품은 상징과 주술 행위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회적 정보의 전달 및 갈등 해소의 기능적 역할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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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1933년 함북 동관진(현 온성군 강안리)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1960년대의 [[공주]] [[석장리]]와 [[웅기]] [[굴포리]]유적 발견에 이어, 지금까지 유적 약 50곳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연구는 연구 인력의 제한과 제4기 지질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의 미발달로 아직 걸음마 단계로서, 유적 ·유물의 정확한 나이의 판단도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한국]]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1933년 함북 동관진(현 온성군 강안리)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1960년대의 [[공주]] [[석장리]]와 [[웅기]] [[굴포리]]유적 발견에 이어, 지금까지 유적 약 50곳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연구는 연구 인력의 제한과 제4기 지질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의 미발달로 아직 걸음마 단계로서, 유적 ·유물의 정확한 나이의 판단도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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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84%9D%EA%B8%B0_%EC%8B%9C%EB%8C%80 구석기 시대]〉,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84%9D%EA%B8%B0_%EC%8B%9C%EB%8C%80 구석기 시대]〉, 《위키백과》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47279 구석기시대]〉, 《두피디아》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47279 구석기시대]〉, 《두피디아》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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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4일 (화) 11:10 기준 최신판

정의[편집]

19세기 초반 덴마크의 C.J.톰센이 인류의 과거를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나눈 3시대법을 창안한 뒤, 영국의 J.러벅이 석기시대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로 세분하여 구석기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인류가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때부터 토기 등장과 농경 시작으로 특징지워진 신석기시대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 말이며, 지질학적 시대로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와 충적세의 경계, 즉 약 1만 년 전을 그 종료시점으로 설정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전통이 홍적세가 끝난 뒤 충적세의 초창기까지 지속된 시기를 중석기시대(Mesolithic Age)로 표현하기도 하나, 모든 지역에서 중석기시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그 문화 내용 역시 구석기시대와 구분하기 어려운 곳이 많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구석기시대에 포함시키거나 후(後)구석기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은 뗀석기[打製石器]인데, 석기제작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각 시기의 경계에 대한 정의는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은데, 세 시기의 구분중 가장 알려진 기준은 유럽 서남부에서 정의된 것으로서, 여기에서도 이를 따르도록 한다.

환경[편집]

구석기 시대의 날씨는 플리오세플라이스토세 두 지질학적 시기로 구분된다. 이 두 시대 모두 인류 사회에 중요한 지리적, 날씨 변화를 겪게 했다. 플리오세기에는 현재 위치에서 70km에서 250km에 이르는 대륙의 이동이 있었다. 남아메리카는 파나마지협을 통해 북아메리카와 연결되어 있었다. 플라이스토세 기의 날씨도 차고, 건조했으며, 현대의 날씨와 같이 계절을 가지고 있었다. 빙상이 남극까지 뻗어있었다.

빙기의 영향은 전 지구적이었다. 남극 대륙은 플라이스토세와 앞선 플리오세에 걸쳐 얼음으로 덮여있다. 안데스는 파타고니아 빙상에 의해 남쪽이 덮여있었다. 뉴질랜드와 타스마니아도 빙하가 많이 있었다. 지금은 녹고 있는 케냐와 킬리만자로와 동쪽 로웬조리산맥 그리고 중앙아프리카의 빙하는 더 커졌다. 에티오피아의 산맥 그리고 서쪽으로 아틀라스산맥에도 빙하가 있었다. 북반구에는 많은 빙하가 하나로 뭉쳐 있었다. 코딜레란 빙상은 북아메리카를 북서쪽으로 덮고 있었고, 로렌타이드는 동쪽을 덮고 있었다. 페노-스칸디안 빙상은 영국을 포함한 북유럽을 덮고 있었고, 알프스 빙상은 알프스를 덮고 있었다. 흩어진 반구가 시베리아와 북반구를 관통하여 뻗어 있었고, 북극해는 얼어 있었다. 18,000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플라이스토세 후기) 동안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베링 섬 다리는 클로비스 문화와 같은 초기 고대 인디언들을 베링가를 건너 아메리카 바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얼음으로 막혀 있었다.

마크 리나스(Mark Lynas)의 자료에 의하면, 플라이스토세 전체의 날씨는 남태평양의 무역풍을 동반한 지속적인 엘니뇨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있다. 이러한 엘니뇨는 약해지거나, 동쪽으로 향하는 남태평양의 무역풍과 페루 근처에서 발생하는 따듯한 기류 상승과 서태평양에서 확산된 따듯한 수온 그리고 인도양에서 동태평양으로 그리고 다른 엘니뇨와 섞이는 등의 무역풍을 동반했다.

이러한 빙하 시대는 플라이스토세 기 말기에 구석기 시대와 함께 끝났고, 지구의 날씨는 따뜻해졌다. 비록 플라이스토세 말기의 멸종이 질병이나 인류에 의한 과도한 사냥과 같은 부분적으로 다른 요인에 의해 일어나기는 했지만, 기후 변화는 플라이스토세의 거대 식생에 멸종을 가져왔다. 털이 많은 매머드의 멸종은 기후의 변화와 인류에 의한 사냥 때문이었음을 새로운 연구 조사가 암시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플라이스토세 말기의 기후 변화가 매머드의 거주지를 줄였고, 개체수의 급락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적은 개체수가 되자 구석기 시대의 인류들에 의해 사냥을 당하게 되었다. 플라이스토세 말기에 일어난 전반적인 온난화와 홀로세의 시작은 이전에는 얼어붙어 접근을 하지 못했던 매머드의 주거지에 쉽게 인류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전기[편집]

올두바이공작[편집]

아주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그것이 자연적 타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제작된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의 것으로, 이를 비롯하여 인류가 처음 사용한 석기군을 일반적으로 ‘올두바이공작(Oldowan Industry)’이라고 한다.

이에 속하는 석기는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지며, 형태적 정형성을 찾기 어렵다. 올두바이공작은 보다 정제된 석기로 구성된 ‘발달한 올두바이공작(Developed Oldowan Industry)’으로 이어지며, 이것은 다시 매우 정제된 형태의 석기로 구성된 ‘아슐리안공작’으로 계속된다.

아슐리안공작[편집]

아슐리안공작은 아프리카유럽인도에 걸쳐 분포하지만, 모든곳에서 이러한 공작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아슐리안공작의 대표적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각종 양면가공석기(biface)로서, 이러한 석기는 이후 약 150만년 가까이 호모 에렉투스와 초기 호모 사피엔스집단의 대표적인 도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슐리안공작의 석기제작에는 돌보다 강도가 약한 나무·사슴뿔을 망치로 사용하여 원석을 때리는 방법과 소위 간접타법이 응용되었는데, 이로부터 보다 정제된 형태의 석기가 만들어졌다.

중기[편집]

중기구석기시대는 보통 ‘무스테리안공작’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알려졌다.

이 공작은 르발루아기법이라 불리는 고도의 정제된 박편가공기술을 응용하여 석기를 제작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무스테리안공작은 전기 아슐리안공작과 같이 모든 곳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며, 아시아에서는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 시대의 담당자는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여러 호모 사피엔스 집단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의 석기공작이 기본적으로 전시대의 것을 계승·발전한 것이지만, 전반적으로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석기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는 사체의 매장풍습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며, 또한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와 예술 행위의 증거도 발견되었다.

후기[편집]

후기구석기시대는 해부학적 견지에서의 현대인, 즉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과 더불어 약 4만년 전부터 시작한다.

이 시대의 문화상은 고도의 지역적 다양성을 보여주지만, 세계 어느 지역에서의 석기제작에서도 소위 ‘눌러떼기(pressure flaking)’라 불리는 기법이 응용된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고도로 정제화되고 소형화된 매우 전문적인 목적의 석기가 다량 제작되는데,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자연 자원 이용의 효율을 크게 증대시켰다. 특히, 후기구석기의 중기 이후에는 세석인(細石刃:microblade) 제작이 유행하며 각종 복합도구가 만들어져, 그러한 효율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이 시기부터 장거리에 걸친 교역 혹은 교환경제행위와 관계된 증거가 본격적으로 나오며,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벽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위시한 본격적인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이들 예술품은 상징과 주술 행위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회적 정보의 전달 및 갈등 해소의 기능적 역할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편집]

한국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1933년 함북 동관진(현 온성군 강안리)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1960년대의 공주 석장리웅기 굴포리유적 발견에 이어, 지금까지 유적 약 50곳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연구는 연구 인력의 제한과 제4기 지질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의 미발달로 아직 걸음마 단계로서, 유적 ·유물의 정확한 나이의 판단도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다.

  • 남한의 대표적 유적인 공주 석장리유적은 전기에서 후기에 걸친 11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 유적은 후기구석기시대 말기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 연천 전곡리유적을 비롯해 임진강과 한탄강 연안의 많은 유적에서는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국제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이들의 나이에 대해서는 2,30만 년 전이라는 주장과 4,5만 년 전이라는 주장이 대립한다.

또 남북한에서는 각각 70만 년 전의 유적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등장하나,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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