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스 캐리어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 또는 윌리스 해빌랜드 캐리어(영어: Willis Haviland Carrier, 1876년 11월 26일~1950년 10월 7일)는 미국의 공학자이다. 공기조화기술(에어컨)의 발명자로 익히 알려져 있다. 1902년 최초의 전자식 공기조화기를 발명하였고, 1915년에는 히터기, 통풍기, 에어컨 전문 생산 유통기업인 캐리어 기업을 설립하였다.
개요[편집]
윌리스 캐리어는 최초의 에어컨 발명자아더. 캐리어에 의해 1902년 7월 세상에 처음 등장한 에어컨은 온도·습도 제어는 물론 공기 순환·환기·정화 등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공로로 캐리어는 1998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876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코넬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버팔로 포지 컴패니'라는 제철소에서 주급 10달러를 받고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당시 그는 낡은 난방시스템을 현대식으로 교체하던 일을 담당했다. 그러다 회사의 고객이던 뉴욕의 한 인쇄소가 여름철이면 고온과 습기로 인쇄용지가 변질돼 고민하는 것을 보게 되고, 기존에 뜨거운 증기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통과시키는 온방시스템 원리를 뒤집어 냉매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보내 온도를 낮추는 방식을 고안해 내게 된다. 그는 이러한 냉방시스템을 적용해, 1902년 7월 13일 불과 25세의 나이로 온도와 습도 제어는 물론 공기순환 등을 모두 통제하는 최초의 에어컨시스템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캐리어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구와 개량을 거듭하면서 이듬해인 1906년 에어컨의 핵심 원리와 공기 조절 설비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에어컨 대중화를 위해 1915년 동료 엔지니어들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캐리어 엔지니어링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에 따라 1920년대 들어서면서 민간으로도 에어컨이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 리볼리 극장에 이어 1928년 미 의회와 1929년 백악관에까지 에어컨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가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0년 다른 난방 관련 기업들과 합병해 '캐리어 코퍼레이션'이 설립됐고, 그는 최고경영자에서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에어컨을 발명한 공로로 미국 르하이 대학과 알프레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한편, 에어컨은 그가 타계한 1950년대 전후로 급격히 성장하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에 에어컨을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되게 되었다. 캐리어는 에어컨을 발명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1985년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8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가운데 1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생애[편집]
젊은 시절과 에어컨의 발명[편집]
1876년 11월 26일 미국 뉴욕주 앵골라에서 아버지 듀언 윌리엄스 캐리어(1836~1908), 어머니 엘리자베스 R. 하빌랜드(1845~1888)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에 코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1년 기계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버팔로로 가서 히터기와 송풍기 등을 제조하는 '버팔로 포지 컴퍼니'에 입사하였고, 목재와 커피콩을 건조시키는 난방 장치 개발에 투입되었다.
1902년 버팔로 포지 컴퍼니의 고객이었던 브루클린의 새킷-빌헬름 석판출판사(Sackett-Wilhelms Lithographing & Publishing Company)에서 의뢰를 받았다. 여름에는 고온과 습기 때문에 용지가 변질되어 출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캐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기의 설계도를 제작해 7월 17일에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공기조화 시스템, 즉 에어컨이다. 이 당시 윌리스 캐리어가 제안한 공기조화 시스템이 오늘날 에어컨의 탄생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습도조절 장치가 추가되면서 다음 네 가지의 기본기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온도 조절
- 습도 조절
- 공기 순환과 환기
- 공기 정화
캐리어는 이후로도 수년간에 걸친 개량과 현장실험을 통해 1906년 1월 2일 '공기 취급 장비'(Apparatus for Treating Air)란 이름으로 미국 특허를 등록하였다.[2] 이는 세계 최초의 분무형 공기조화 장치로서, 처음에는 물을 데우고 한순간 냉각하여 공기중의 습기를 내고 없애도록 하는 장비였다. 공기 취급 장비는 1906년 말 라크로스 내셔널 은행을 시작으로 각 회사에 납품됐다.
1906년 캐리어는 이슬점과의 온도격차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면 습도도 그에 일정한 비례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일명 '일정 이슬점 강하 법칙' (law of constant dew-point depression)이라 불리는 이 법칙을 기반으로 캐리어는 자동 이슬점 조절 시스템을 설계하여 1907년 5월 17일에 특허를 출원하였고, 1914년 2월 3일에 최종승인을 받았다.
1911년 12월 3일 캐리어는 미국기계공학협회 연례 모임에서 공기조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합리적 건습 공식〉(Rational Psychrometric Formulae)이란 제목이었다. 이 논문은 상대 습도, 절대 습도, 이슬점 온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 업계에서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공기조화 시스템을 직접 설계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캐리어의 논문은 공기조화 시스템 설계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건습계의 대헌장'이라는 별명도 붙게 되었다.
캐리어 회사[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버팔로 포지 컴퍼니는 에어컨 같은 공기조화 시스템 대신 군사물자를 생산하는데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근무 12년차의 캐리어 역시 생산부문에만 집중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캐리어는 에어컨 전문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동료 기술자 7명과 함께 자본금 32,600달러를 모아 1915년 6월 26일 '캐리어 엔지니어링 회사'(Carrier Engineering Corporation)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뉴욕에 위치했던 이 회사는 이후 본사를 옮겨 뉴저지주 뉴어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20년대 들어서 캐리어 회사는 원심형 냉장기를 개발해 판매하였고, 에어컨도 계속해서 출시해 나갔다. 처음에는 산업현장에서만 쓰이던 에어컨도 민간부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의 리볼리 극장에 이어 1928년에는 미국 의회에 캐리어 사의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1928년에는 미 의회, 1929년에는 백악관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으로 인한 대공황의 여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1930년 캐리어 엔지니어링 사는 번스윅-크로셸 컴퍼니, 요크 난방환기 회사와 합병하여 캐리어 코퍼레이션 (Carrier Corporation)이 설립되었고, 윌리스 캐리어는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공황의 여파는 에어컨의 판매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부문과 상업부문 모두 실적이 지지부진해지자, 캐리어 사는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4개 도시에 분산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1937년에 뉴욕주 시라큐스로 본사를 옮기고, 뉴욕주 중앙지역에서 가장 많은 근로자를 거느린 기업으로 등극하였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는 이글루관을 제작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미래의 에어컨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캐리어는 르하이 대학과 알프레드 대학에서 에어컨을 발명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950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캐리어가 사망한 뒤에는 1950년대 경제 부흥기에 접어들면서 에어컨도 비로소 엄청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는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 기본사양 중 하나로 에어컨을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같은해 캐리어 사의 매출은 51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업적과 밈[편집]
에어컨의 발명가로 "진정한 인류의 구원자", "인류의 대성인", "현대문명의 숨은 건설자", "신은 존재하며 그는 미국인이다"라는 찬사를 듣고 여름만 되면 각종 커뮤니티에 그를 찬양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반대로 에어컨이 필요 없어지는 겨울이 되면 이를 역으로 비틀어서 "오존층 파괴범", "환경 테러리스트"같은 소리를 하다 다시 더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 싹 닦고 찬양을 재개하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현대 기술력으로 이보다 뛰어난 공조기술 자체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폄하받을 이유가 없다. 아예 캐리어는 인류를 살린 동시에 위험에 빠트린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도 'He invented the air conditioner'같은 캐리어 찬양 밈이 있다.
캐리어의 업적은 에어컨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공기 조화 장치, 즉 공조 시스템을 발명한 것인데 이 시스템은 인간의 생활과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꿔 버린 발명품이다. '공조 장치'가 가져온 인류 사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 공기 조화 장치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공간에서도 실내 온도와 대기의 질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대형 건물과 시설들이 생겨났다. 마천루, 쇼핑몰, 멀티플렉스, 백화점 등 각종 대형 복합 시설이 건설될 수 있었다. 위 생애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캐리어가 발명한 공조 장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곳이 바로 극장이었다.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와 많은 사람들로 인해 발생한 실내 열기를 견디고 앉아서 영화를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더운 날이 아니어도 공조 장치가 없으면 '환기'를 시켜야 하므로 개폐가 가능한 창문과 대형 팬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결정적으로 습기 제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조 장치에 비해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조 장치는 대형 건축물을 설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도 2006년에 통과된 건축물 설비 기준등에 관한 규칙 제11조에 의거하여 100세대 이상의 공동 주택이나 다중 이용 시설엔 의무적으로 공조 시스템이 들어가야 한다.
- 쾌적한 지하철, 여객기, 철도 환경을 조성하면서 인류의 교통과 물류 인프라에 큰 기여를 했다. 항공 여객이 시작될 수 있었던 핵심 기술 중 하나가 바로 공조 장치의 탄생이었다. 공조 장치가 없었다면 지하 수십 미터를 뚫고 나가는 지하철은 산소 공급 및 매연 배출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혔을 것이고 다수의 승객을 태우고 대기가 희박한 수십 킬로미터 상공을 비행하는 여객기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공조 장치가 개발되기 전의 초창기 비행기는 고도가 높으면 고산병과 추위, 저고도에서는 미칠 듯한 진동 때문에 기내식은커녕 뱃멀미처럼 토악질을 하는 등 승객들이 생고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조 장치가 발명되면서 '항공 여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될 수 있었다.
- 더위에 취약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각종 전자기기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서버들이 모여 있는 데이터 센터는 에어컨의 냉각 시스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현대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 IT기업들이 성장할 수 없었다. 지금도 구글의 데이터 센터에는 초당 수십 메가의 유튜브 동영상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고, 전 세계의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수억 개가 넘는 서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 막대한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 돌아가는 전자장치가 내뿜는 열을 '실내'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공조 장치다. 다시 말하지만 공조 장치가 없었다면 IT혁명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나더라도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만 누리는 혜택이었을 것이다. 실내에 설치할 수 있는 서버의 숫자가 크게 제약되므로 비용이 크게 올랐을 것이기 때문. 한마디로 에어컨 없으면 당신이 위키질도 맘대로 못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스크탑의 수랭 또한 에어컨의 원리를 그대로 데스크탑에 이식한 것이니, 초전도체가 개발될때까지 CPU와 GPU의 코어갯수를 늘리는것과 클럭을 높이는것은 상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공랭 또한 펌프가 없는 것을 빼면 유사한 만큼 어쩌면 극지에서나 히트파이프 같은거 없이 CPU코어나 히트스프레드에 팬 공기를 직접 닿게 하여 제한적으로 구동하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 공조 장치의 등장은 냉장, 냉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식품을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면서 냉장/냉동 컨테이너에 실려 전 세계로 식품이 신선한 상태로 운송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전 세계 식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내어 언제 어디서나 지구 반대편에서 온 육류와 과일, 채소, 어패류, 곡물 등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공조 장치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음식을 부패하지 않게 최대한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염장, 훈제, 초밥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이를 적용할 수 있는 식재료는 각 방식마다 다르다는 단점이 있었고 이러한 방식으로도 부패를 완벽히 막을수 없어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으로 쓰러져 죽는 사람이 너무나도 흔한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공조 장치의 등장으로 바다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서 생선 요리를 먹거나 한 겨울에도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것, 한 여름에도 얼음을 씹어 먹을수 있는 것, 대도시에서 고기를 사 먹는 것, 방 안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 특산품을 먹는 것 등은 단순히 농업기술의 발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공조 장치다. 채소와 육류, 과일 등을 운반하는 대형 선박이나 철도, 트럭 등에 냉장/냉동 보관 장치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 의학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냉장과 냉동 기술은 '백신 및 치료제, 기증 장기 저장 기술'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공조 장치가 없었다면 바이러스나 암을 비롯한 질병과의 싸움,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의 전쟁도 불가능하거나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일례로 화이자의 백신인 코미나티주는 보관을 위해 '영하 70도'의 온도가 필요하다. 공조 장치로 인한 냉동기술의 발달이 없었으면 우리는 백신 연구소를 남극에 세우고 백신 접종을 위해 남극까지 와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다못해 페니실린만 해도 냉장시설을 갖추고도 유통기한이 1-2주였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수술실의 멸균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공조설비가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 입원 환자의 스트레스를 대폭 낮춰준건 덤이다.
- 한술 더 떠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에어컨이 없었다면 싱가포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싱가포르는 상당히 덥고 습하고 비가 주야장천 내리는 열대 우림 기후라 아무리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한들 사람이 장기 주거가능한 환경이 아니라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불리한 기후 조건임에도 대형 빌딩에 공조 장치를 빵빵하게 때려넣은 덕분에 더위를 극복하고 손꼽히는 대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다. 북위 33도 이하에 속하는 아열대, 열대 지방에 대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가 에어컨 덕분이라고 하니 인류의 활동반경을 넓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셈. 비슷한 예로, 에어컨이 없었다면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미국의 피닉스, 휴스턴, 라스베이거스 같은 서남부 메트로시티, 리야드나 두바이 등 사막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가 대도시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며, 여름이 덥고 습한 나라인 대한민국 또한 에어컨이 없었다면 3개월은 아무 것도 할수 없어 선진국으로 올라서는데 엄청난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캐리어는 인류의 건축 기술, 교통 물류, IT 인프라, 농업, 축산업, 수산업, 의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음은 물론이고 적도 반경까지 인류 문명의 활동반경을 넓히고 대도시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위인이며, 그의 발명은 인류의 판도를 바꾸고 확장시켜버린 어마어마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윌리스 캐리어〉, 《나무위키》
- 〈윌리스 캐리어〉, 《위키백과》
-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시사상식사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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