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비단(緋緞, silk, silk fabric)은 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만든 섬유이다.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또는 금(錦)이라고 하며 견직물이다. 양모와 함께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사용된 동물성 천연섬유의 대표 격이고, 효율적인 합성섬유가 많아진 오늘날에도 고급소재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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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비단은 여러 가지 색상의 견사로 짠 무늬있는 고귀하고 화려한 견직물(絹織物)이다.
비단 직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왕실에서 짠 비단을 어의(御衣)로 사용하였으며, 개선장군에게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한대(漢代)에는 양읍(蘘邑)이 주산지가되어 이때부터 한금(漢錦)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西域)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비단은 금(金)값에 맞먹는다고 해서 글자도 금(錦)으로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금은 지금으로 말하면 평직(平織)의 변화조직인 경묘직(經畝織)의 일종인데, 여러 가지 색상으로 염색된 섬세하고 치밀한 경사(經絲)의 매올마다 굵은 위사(緯絲)의 여러 올을 한꺼번에 교차시킴으로써 경사만이 천의 표면에 두둑처럼 나타나는 다채로운 무늬 효과를 내는 경금(經錦)이다. 경금은 경사의 조작이 까다롭고 작은 무늬의 제직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당대(唐代) 초에 들어와서는 위사만이 무늬효과를 내는 위묘직, 즉 위금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경금 대신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정교한 무늬의 위금은 그 후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비단의 생산과 제직기술을 관장하는 직금방(織錦房)·별금방(別錦房) 등의 관청이 있어 금직은 매우 번성하였다.
소지왕 때 방인(邦人)도 금수를 입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금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금직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비싼 값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의 조직은 점차 간단해져서 능직(綾織)이나 수자직(繻子織) 바탕에 금사(金絲) 또는 색사(色絲)의 위사가 회화적인 무늬를 이룬 것이 증가되었다. 고급 옷감의 용도 이외에 주머니·법복·무대의상·장식품 등 특수 용도로도 쓰인다.
특징[편집]
광택이 나며 부드럽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면서도 보온성이 뛰어나고, 수분도 일정량 함유하여 정전기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알칼리에 약해서 함부로 물세탁을 하면 섬유가 손상되므로 반드시 유기용매를 이용한 드라이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자외선에도 약해서, 직사광선 하에서는 누렇게 변하거나 섬유가 손상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실크는 천연섬유 중에선 거의 유일한 필라멘트 섬유이다. 필라멘트 섬유란 1올의 긴 섬유를 그대로 실로 짜내는 것으로, 양털이나 목화, 모시와 같은 다른 천연섬유는 여러 개의 짧은 섬유를 연결해서 실로 짜내는 스테이플 섬유이다.
누에가 성충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원인.
종류[편집]
비단의 종류는 금, 능, 단, 라, 겸, 사, 견, 주의 8가지로 나눈다.
표장용으로는 능, 라, 견 등이 쓰이며, 명대(明代) 屠隆(도륭)이 저술한 『노반여사(老槃餘事)』에 표장용으로 사용되어 보존되는 비단의 명칭들이 있으나, 거의가 문양 위주의 명칭들이었고, 이미 당대(唐代)에서도 표장용 비단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듯 우리나라가 2세기부터 비단 짜는 기술이 성행된 것을 보면 상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표장용으로 사용된 것은 기록에 없다.
금(錦)[편집]
염색된 색사(色絲)로 문양을 넣어 짠 두꺼운 직물로 품질을 상품으로 치는 비단을 말한다. 금사(金絲), 은사(銀絲) 등을 넣어 오래 전부터 궁중에서 주로 사용된 것으로, 현재까지도 제일 많이 사용되고 있는 비단이다. 불교 의식에서 최고 큰스님들의 가사장삼(袈裟長衫)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종교적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 비단이다. 예로부터 고급 표장용으로 가사장삼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예가 지금도 전해져 일본의 경우 지사(紙絲)라는 종이실을 개발하여, 족자용 비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사나 은사를 종이 실에 꽈서 만든 금란(金蘭)이나 은란(銀蘭) 등이 있고, 문양 등은 옛 것을 모방한 경우가 많다. 작품의 성격에 맞추어 문양도 다양하게 사용하며, 현재도 직접 손으로 짜는 것으로 최고의 값을 유지하고 있다.
능(綾)[편집]
여러 종류의 문양(文樣)을 다양하게 섞어, 지문(地紋)을 짠 견직물로, 얼음의 결과 같은 무늬가 있는 비단이다. 이 능은 주로 궁중 서화용(書畵用)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 직물을 표장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중록(閑中錄)』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용꿈을 꾸고서 '백능일폭(白綾一幅)'에 흑룡(黑龍)을 그려서 벽상에 붙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금(錦)보다는 얇고 부드러워 궁중의상 중 가볍고 부드러운 속옷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단(緞)[편집]
비단(緋緞)의 준말로 두텁고 광택이 나는 견직물이다. 가내 보료나 이불요, 겨울용 의상 등에 많이 사용되고, 화려한 색상과 문양을 넣는 이중직 견직물이다. 사대부 이상 궁중에서 많이 사용된 것으로 금(錦)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치는 견직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박단이라고도 부르며, 병풍의 치마감에 사용된 예가 많다.
라(羅)[편집]
문양의 유무관계와 상관없이 성글고 부드러운 비단이다. 무늬가 없는 것은 서화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초상화와 불화 등에도 사용되었다. 너무 성글어서 배접을 한 후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일명 풀바닥 비단이라고도 한다.
겸[편집]
가는 실을 몇 겹 꼬아서 짠 견직물로 겸포라고도 하며, 일명 수직비단이라고 한다. 자수(刺繡)를 놓을 때 많이 사용되는 견직물이다.
사(紗)[편집]
紗는 沙와 같은 뜻으로 라(羅)의 일종이다. 발이 성글고 얇아서, 여름 내복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머플러 등에도 사용된다.
견(絹)[편집]
비교적 성글고 얇으며, 무늬가 없고 명주 그 자체로 짜기 때문에 서화용에 많이 사용되는 비단으로 화견(畵絹)이라 할 수 있다. 춘추용 의상과 짜는 요령에 따라 머플러 등에 주로 사용된다.
주(紬)[편집]
실을 굵게 꼬아서 만들어 질긴 편이라 외출복, 겉옷 등에 많이 사용되는 비단이다.
용도와 평가[편집]
고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천을 찾을 수가 없었고 현재도 세계 최고까지는 아니지만 최고급 천으로 평가받는다. 가볍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흡습성도 좋고, 상당히 질긴 편이며, 방한 성능도 뛰어나다. 세탁이 어렵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단점으로, 물세탁 시 강도가 매우 약해져 비단의 아름다움과 질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비단용 세제로 석유를 썼다. 현대에도 견직물은 기름을 사용하는 드라이클리닝이 기본이니 사실상 그 때로부터 달라진 게 없다. 이 때문에 현대에도 변함없이 고급의류 용 섬유로 통한다. 원단이라 그런지, 비단으로 만드는 옷은 고급스러운 드레스 따위가 많다.
과거에는 금에 필적하는 사치품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이 비단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야생 누에인 산누에나방이 짜낸 실로 만든 비단은 천잠사라고 해서 일반 비단보다 훨씬 귀한 취급을 받았다.
로마 제국으로 들어간 비단은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던 적이 있었다. 금과 비단의 상대가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일정치는 않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에는 금값이 곧 비단값이었다. 1파운드의 비단이 1파운드의 금과 동가였고, 이 당시 1파운드의 금은 곧 12,000데나리에 해당했다.
비단은 단순히 사치품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다. 우선 중국과 몽골에서는 갑옷 안에 입어서 갑옷의 방어력을 높이는 일종의 전투복으로 입었고, 그래서 장수들은 갑옷 아래에 비단옷을 받쳐 입었다. 관우의 상징인 풀빛 비단옷이 대표적이다. 반면 일반 병사들은 풀솜이라 해서 비단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을 이용한 옷을 입었다. 몽골의 비단 전투복은 질긴 재질 특성 상 화살이 박히더라도 옷이 찢어지지 않아서 그냥 잡아당기면 화살째로 뺄 수 있었다. 18세기 서구에 와서도 권총을 이용한 결투를 할 때는 아예 상의를 다 벗어 맨몸으로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고 싸웠는데, 당연히 당시의 권총 성능상 총탄이 몸에 틀어가 쑤셔박혀도 셔츠째 잡아당겨 뺄 수 있어 큰 부상을 막아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탄복의 소재로도 사용되었고,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방탄효과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도태됐다. 제대로 된 소총탄 등은 유효사거리에서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료용으로도 사용했는데, 수술용 봉합사이다. 쉽게 말해서 수술 부위를 꿰메는 용도. 비단은 섬유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신체의 부작용도 크지 않아서 봉합사에 적합했다. 현대에는 더 튼튼하면서도 유연하고 몸에 흡수가 되는 특수 섬유로 만든 봉합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적다.
또한 낙하산으로도 쓰였는데, 미 육군에선 일부 참전용사들은 사용 후 회수한 낙하산을 집에 보내 결혼할 여성에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장교 한 명이 본토의 아내에게 드레스 원단으로 선물하기 위해 보조낙하산을 낙하 후에도 영국으로 철수하기 전 까지 계속 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나일론이 개발되고 나서 누에를 군수용품으로 팔던 곳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낙하산은 미적인 면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비단을 쓴 것인데, 더 싸면서 기능도 좋은 나일론이 나오면서 비단을 낙하산에 쓰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에 비단을 가장 많이 수출하던 나라가 일본이었는데, 2차대전 당시 비단 수출을 막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 상기한 대로 나일론이 개발되면서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중국에서[편집]
비단은 중국의 특산물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해외에 팔면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서양으로 가는 교역로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중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쓰촨성의 비단이 유명했으며 이 지방 비단은 촉금이라고 하여 높은 품질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촉한의 유비가 조조의 조문에 비단을 보냈다든지 제갈량의 재산 목록 상당수가 뽕나무밭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지방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지금도 중국 전체에서 2위라고 한다. 이는 쓰촨성 사람들의 자부심으로도 이어져서, 고우영의 말에 따르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에서는 앞서 언급한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장안이 아닌 청두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단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이 다른 나라로 퍼지는 것을 엄격히 막으려 했지만 몰래몰래 새어나가 결국 여러 나라에서 제작하게 되었다. 서양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이미 비단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552년에 페르시아인 사제가 중국에서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고치를 숨겨 가지고 왔다고 한다. 또한 웬만한 나라마다 누가 누에나방의 알과 뽕나무 씨앗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 당나라에서 화번공주로써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에게 시집갔던 문성공주 역시 티베트에 누에 농자를 가지고 가서 티베트에 비단 직조를 전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익점의 목화 밀반입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인데, 이 일화가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급 옷감이었다.
삼국지나 역사책을 보면 금, 보석, 쌀 등과 마찬가지로 상대 국가에 대한 귀중한 진상품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한국에서[편집]
- 삼국시대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까지 당연히 옷감 및 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부터 누에치기를 권장했다고 나오며,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에 한 번씩 뽕나무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관리할 정도로 비단 생산과 관리에 국가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민정문서에 따르면 가령 사해점촌 마을의 뽕나무는 1004그루였는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기록된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다. 만약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성지는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이었으며,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에 잠원동(蠶院洞)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를 볼 것.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다.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 있다.
한편 서울 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순종 2년(1908)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 현대
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서 먹여다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의 사용과 가격도 품질도 월등한 중국산 비단으로 인해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된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을 재료로 한 옷의 실용적 이점도 덜하고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긴 했어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소수 양잠업체들이 국산이라는 것을 메리트로 버티고 있긴 하다.
경상북도 상주시가 명주로 유명하며 상주시 함창읍에는 명주박물관이 존재한다. 2006년부터는 상주 명주 패션 디자인 패스티벌도 매년 개최하고 있을 정도.
경상남도 진주시가 실크로 유명하며 우리나라의 70~80%를 생산하고 있다. 70~8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진주에 찾아와 사갈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