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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아시아 영화계에서 유독 근현대사를 소재로 다루는 사례가 많은 편이고, 또한 근현대사라는 소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하면 근현대의 사회 정치적 사건을 영화화해서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제약이 느슨한 편이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문제나 논란거리에 대해 다루는 영화도 주변국들에 비해서 좀 더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제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보장되지만, 물론 이렇게 근현대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군사정부 시절인 경우가 다수이며, 이를 무조건적인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의 여러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풍자의 문제점 중 하나인 선택적 풍자의 한계 역시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국내 영화는 1998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전대미문의 흥행을 보이자 영화계 내에서 '2음절 제목 영화는 흥행한다'는 속설이 퍼져있어 2음절 제목을 선호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유행처럼 번진 것이지만, 마케팅적으로는 짧은 제목이 관객의 뇌리에 쉽게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국내에 존재하는 3대 [[멀티플렉스]] 업체인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영화관 시장의 96.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씨네Q]]와 기타 독립영화관을 다 합쳐도 고작 3.1%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 멀티플렉스 개념이 들어온 것은 CGV가 1998년 강변점을 오픈하면서다. 멀티플렉스 태동기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따로 영화를 운영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영화관 체인을 독점하는 문제점은 없었다. 그러나 CGV 강변점 오픈 이후,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영화관을 잇달아 오픈했다. 이로 인해 기존 단관 극장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편입되거나 폐업하는 식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나마 2000년대까지는 멀티플렉스 3사의 점유율이 50%에 못 미쳤다. 그러나 대침체로 단관극장들은 줄줄이 파산하게 된다. 이후 멀티플렉스 3사는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한 단관극장들을 흡수하며, 점점 더 커지는 멀티플렉스 3사에 완전히 경쟁력을 상실한 2010년대 이후의 단관극장들은 경영을 포기하고 멀티플렉스에 매각시켜버렸다. 그래서 2012년 이후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점유율이 90%를 넘게 된 것이다. 3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영화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거부하는 영화들은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관 상영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2011년도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분쟁을 일으켜 일부 디즈니 영화들이 [[서울특별시]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도에 제작된 '옥자' 때부터는 3대 영화관 회사 모두가[[ 넷플릭스]] 영화의 영화관 개봉을 전면 거부하여 넷플릭스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ref>〈[https://namu.wiki/w/%ED%95%9C%EA%B5%AD%20%EC%98%81%ED%99%94/%ED%8A%B9%EC%A7%95%20%EB%B0%8F%20%EB%AC%B8%EC%A0%9C%EC%A0%90 한국 영화/특징 및 문제점]〉, 《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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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아시아 영화계에서 유독 근현대사를 소재로 다루는 사례가 많은 편이고, 또한 근현대사라는 소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하면 근현대의 사회 정치적 사건을 영화화해서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제약이 느슨한 편이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문제나 논란거리에 대해 다루는 영화도 주변국들에 비해서 좀 더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제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보장되지만, 물론 이렇게 근현대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군사정부 시절인 경우가 다수이며, 이를 무조건적인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의 여러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풍자의 문제점 중 하나인 선택적 풍자의 한계 역시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국내 영화는 1998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전대미문의 흥행을 보이자 영화계 내에서 '2음절 제목 영화는 흥행한다'는 속설이 퍼져있어 2음절 제목을 선호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유행처럼 번진 것이지만, 마케팅적으로는 짧은 제목이 관객의 뇌리에 쉽게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국내에 존재하는 3대 [[멀티플렉스]] 업체인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영화관 시장의 96.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씨네Q]]와 기타 독립영화관을 다 합쳐도 고작 3.1%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 멀티플렉스 개념이 들어온 것은 CGV가 1998년 강변점을 오픈하면서다. 멀티플렉스 태동기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따로 영화를 운영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영화관 체인을 독점하는 문제점은 없었다. 그러나 CGV 강변점 오픈 이후,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영화관을 잇달아 오픈했다. 이로 인해 기존 단관 극장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편입되거나 폐업하는 식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나마 2000년대까지는 멀티플렉스 3사의 점유율이 50%에 못 미쳤다. 그러나 대침체로 단관극장들은 줄줄이 파산하게 된다. 이후 멀티플렉스 3사는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한 단관극장들을 흡수하며, 점점 더 커지는 멀티플렉스 3사에 완전히 경쟁력을 상실한 2010년대 이후의 단관극장들은 경영을 포기하고 멀티플렉스에 매각시켜버렸다. 그래서 2012년 이후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점유율이 90%를 넘게 된 것이다. 3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영화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거부하는 영화들은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관 상영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2011년도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분쟁을 일으켜 일부 디즈니 영화들이 [[서울특별시]]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도에 제작된 '옥자' 때부터는 3대 영화관 회사 모두가 [[넷플릭스]] 영화의 영화관 개봉을 전면 거부하여 넷플릭스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ref>〈[https://namu.wiki/w/%ED%95%9C%EA%B5%AD%20%EC%98%81%ED%99%94/%ED%8A%B9%EC%A7%95%20%EB%B0%8F%20%EB%AC%B8%EC%A0%9C%EC%A0%90 한국 영화/특징 및 문제점]〉, 《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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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0일 (금) 10:31 판

영화(movie)는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촬영하여 영사기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이다.[1]

개요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 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스튜디오·카메라·녹음·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작품을 감독하며 시나리오작가·배우·촬영기사·미술가·음악가·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관객이 볼 수 있게 되려면 배급업자 또는 흥행업자와 영화관이 있어야 하며, 광고가 따라야 하고 영화평론가들의 평가도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됨으로써 대중전달의 기능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상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되며, 관객에게 심리적 영향을 줌으로써 예술적 또는 오락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영화는 오늘날 예술의 한 갈래이면서,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넓은 사회 문화적인 복잡한 현상이다. 영화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카메라·필름·영사기이다. 이것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과학과 공업이 만들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취급되고 하나의 테크놀로지로 논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으로서, 그리고 흥행으로서 그 양상은 대중을 상대로 한 매스미디어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등장과 더불어 시각 정보의 전달 매체,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호체계로서 연구, 인식되어가고 있다.[2]

역사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고안되어 있었다. 즉, 1889년에는 미국의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원래 이것은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된, 들여다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이것을 스크린에 비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여기저기서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아매트프랜시스 젠킨스가 바이타스코프(Vitascope)와 판타스코프(Phantascope)를 발명하였고, 독일에선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Bioskop)를, 오스카 메스커의 비오폰(Bio­phon)을 발명하였고,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애니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이탈리아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더구나 이 장치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고안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 다른 발명과 다른 점일 것이다.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짜 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세기의 한밤중에서 20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 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뤼미에르 형제는 속성 카메라맨을 양성하여 세계 각국에 파견, 진기한 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그 필름을 시네마토그래프의 기계와 함께 팔았다. 그는 영화를 이처럼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프랑스의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첫 공개된 시네마토그래프에 감동한 한 사람이었는데, 특허권을 사려고 협의했으나 뤼미에르에게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영국의 기계를 사서 제작에 착수했다. 그의 작품은 뤼미에르의 것과는 달라, 트릭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인물이나 무대의 모양 바꿈을 하는 빠른 변화를 비롯하여 많은 트릭을 시도했다. 원래 마술사이며 자동인형의 고안자이고 연출가이기도 했던 멜리에스는 전용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중에서도 '월세계 여행'(1902)은 대표적인 대작이다. 줄 베르느(Jules Verne)와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은 이 영화는 다분히 공상적인 장면을 전개했다. 별의 관찰, 탐험대의 동굴 탐험 등으로 엮어진 이런 식의 영화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극 장면을 짧은 여러 토막으로 나눈 것 같은 것으로, 전체의 이야기도 공상적이고, 각각의 장면들도 자못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멜리에스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제재를 즐겨 다루었으며, 이것을 솜씨 있는 장치나 트릭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즉 뤼미에르는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 데 반하여, 멜리에스는 도리어 꿈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영화의 표현력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얼핏 보기에 정반대로 보이는 이 두 개의 방향을 향하여 영화의 표현은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멜리에스마저도 영화를 무대란 생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비록 장면을 짧게 세분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장면을 같은 위치에서 단숨에 촬영하는 것인데,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촬영법이다. 흔히 1장면에 1커트란 말이 있는데, 초기의 영화는 이러한 촬영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 보급은 의외로 빨라서 20세기에 접어 들자 세계 각국에서 영화를 상연하고 또한 제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대극과 같은 촬영방법은 어디서나 공통적이었고, 영화의 내용도 상당히 무대적이었다. 1910년경까지의 영화는 많아야 1에서 2롤짜리가 대다수였다. 무대극과 다른 것은 30분 미만의 짤막한 영화라는 점이며, 그 범위 안에서 무대극이나 유명한 실화를 영화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순식간에 영화관이 급속히 늘었다. 이 시대의 특색은 희한한 구경거리로 등장한 영화가 흥행이라는 형식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제작계가 이에 자극을 받고, 차차 기업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용은 빈약했지만 일반의 호기심을 끌었다.

초기의 영화가 활동사진(moving picture)이라 불리고, 과학적 완구라고 불리면서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여러 발명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시아 지역에 영화가 건너온 것만도 일본이 1896년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는 1903년, 만주에서는 1901년 등이었으니 그 전파의 속도를 알 수가 있다. 영화에 대한 전세계의 호기심은 재빨리 각국에 수많은 촬영소와 극장을 속출하게 했다. 미국에는 장차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영화의 메카가 건설되어 가고 있었으며, 프랑스에는 파테나 고몽이 창설되었고, 독일에는 비오그래프를 효시로 우파 등이 창설을 보았고, 영국에서도 파카를 필두로 수많은 제작회사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발명과 함께 전세계에 엄청난 관객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발맞추어 세계 각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영화제작회사와 배급회사가 출현해 활동사진의 정착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활동사진은 단순한 과학적인 완구로서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활동사진이라면 대개 단척물의 짤막한 필름이었다. 500피트에서 1,000피트 또는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대표적 작품인 '월세계 여행'이나 '잔 다르크', 미국에선 에드윈 S.포터(Edwin Stanton Porter)가 만든 '대열차강도' 같은 것도 고작해서 15분에서 20분 내외의 필름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체이스 픽처'라든가 '헤일의 전망차'라고 불리었던 것이 유행한 것도 모두 활동사진의 초기였던 1910년 내외까지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필름 다르(film d'art)에는 당대의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1909년에 만들어진 '기즈공의 암살사건'을 필두로 해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등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으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마담 레잔느(Rejane)·막스 디어리(Max Dearly) 등 무대인이 출연했고, 레지나 파테, 트레하노바 라벨 오텔로(Trehanova Label Otelo) 같은 무용가들이 발레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대체로 로마네스크식의 멜로드라마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 필름 다른 운동은 영화에 풍부한 스토리를 도입했고, 본격적인 연기자를 출연하게 하는 등 공로도 많았으나 한편으론 영화를 무대의 종속물처럼 만들었다는 비판도 듣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중기라는 1910년대~1920년대 초에 걸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각자의 입장에서 영화 표현의 수법을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에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사극영화가 가장 번성하여,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 '카비리아' 등에서 스펙터클이라는 영화 분야를 확립하고, 북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생련사련', '영혼 불멸' 등과 같은 신비주의적 드라마에 의한 수작을 낳았으며, 독일에서는 '이기주의자'(1919)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는 아벨 강스의 '철로의 백장미'(1923)와 같이 영상인 아름다움을 구사한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이러한 영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어 뛰어난 개성을 가진 작가가 계속 등장하며, 화려한 영화예술의 개화를 보게 되는 것은 사일런트 후기이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수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루이 델뤼크(Louis Delluc), 제르메느 뒬라크(Germaine Dulac), 장 르누아르(Jean Renoir), 장 에프스탕(Jean Epstein), 자크 페데(Jacques Feyder), 르네 클레르(Rene Clair) 같은 작가들 모두 빛나는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카를 테오도르드레위에르(Carl Theodor Dreyer)의 '심판받는 잔'(1927)은 클로즈업의 연속으로써 드라마틱하게 인간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했고, 클레르는 '이탈리아제 맥고 모자'(1927)로 지적인 우화 영화를 시도했으며, 페데(Jacques Feyder)는 '눈사태'(1925)와 '님의 모습'(1926)으로 비극적인 인간세계를 풍부한 정서로 그렸고, 에프스탕은 '아서 가의 후예'(1928)로 신비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빚어냈다. 독일에서는 G.W.팝스트(Georg Wilhelm Pabst)의 '마음의 신비', '판도라의 상자'(1929)와 프리츠 랭(Fritz Lang)의 '니벨룽겐 이야기'(1924), '메트로폴리스'(1927), 헤리크 갈렌(Henrik Galeen)의 '프라하의 대학생'(1926), F.W.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최후의 사람'(1925), 요에 마이(Joe May)의 '귀향'(1928) 등에서 주로 사극이나 사회극을 취재하여 역작을 내놓았다.

미국에는 또 다른 커다란 업적이 영화예술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는 작품 '국민의 창생'(1915)과 '인톨러런스'(1916)를 만들어 미국 영화 사상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장척의 필름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습관을 깨뜨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국민의 창생'은 영화사상 처음 보는 박진감이 넘치는 스펙터클한 것이었으며 '인톨러런스'는 파르타자르 왕조의 바빌론, 그리스도의 생애, 산 바르톨로메 학살, 현대의 계급적인 갈등 등 네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20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다. 한편 그리피스의 영화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구경거리의 활동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기법이 생생하게 발견되었다. 클로즈업이라든가 몽타주 수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사용되면서 영화표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세실 데밀(Cecil B. DeMille)이 '어리석은 자의 낙원', '십계', '왕중왕' 등 대작 주의로 나아갔으나, 유럽에서 건너온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과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가 날카로운 표현법을 들여와 할리우드 영화에 감각적인 풍요함을 가져왔다. 그중에서도 슈트로하임의 '어리석은 아내'(1922) '그리이드'(1924)의 진지한 주구와 루비치(Ernst Lubitsch)의 '결혼 철학', '금단의 낙원'(1924), '명랑한 파리장'(1926)의 경묘한 풍속 묘사는 뛰어났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미국 영화에서 또 한 사람의 주목할 만한 작가는 찰리 채플린(Sir Charlie Chaplin)이다. 사일런트영화 시대의 희극을 대표하는 채플린은, 영국 무대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희극 단편의 주연자였으나, 실크 햇과 소리가 나는 헐렁한 구두를 신은 독특한 차림으로 성공을 거두어 한 사람의 배우에서 감독으로까지 진출했고 '개의 생활', '키드', '거리의 등불', '황금광시대', '독재자' 등의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겸했다. 그의 희극에는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이 깔려 있고 폭력·불의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으며 인간의 편에서 기계문명과 비뚤어진 사회제도에 대한 가차 없는 고발이 숨어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채플린의 희극에서 영화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채플린은 메리 빅포드(Mary Pickford), D.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등과 함께 미국 영화의 진원지인 할리우드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사일런트 말기의 미국영화는 기업과 작품의 양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확립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대전으로 유럽의 영화계가 지친 틈을 타서 단숨에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주의가 번성해져서 스타 시스템을 내세워 오락 영화로 기울어 갔다.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릴리언 기시(Lillian Diana Gish),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 등 많은 스타들을 낳았고 '포장마차', '철마' 같은 서부극에서 독자적인 장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부터도 배우·감독을 널리 모아들여 국제적인 영화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말한 슈트로하임, 루비치를 비롯하여, 조지프 폰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 모리츠 스틸러(Mauritz Stiller), 로타르 멘데스(Lothar Mendes), 윌리엄 디털레(William Dieterle), 프리드리히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 등 감독만도 유럽에서 모은 인재는 많고 다채롭다. 그 무렵 유럽 영화가 더욱 개성이 두드러지게 강화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미국 영화가 세계의 예술가를 모으고도 그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취미, 독일의 사회파 등과 같은 특성 중에서 각 작가들에 의하여 더욱 분화된 스타일을 보였다.

1917년의 혁명 이래 영화는 국영이 되어, 체제가 갖추어지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했으며, 1925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의 '스트라이크'에 의해 비로소 러시아 영화는 개화기를 맞이했다. 이듬해의 '전함 포템킨', 푸도프킨(V. I. Pudovkin)의 '어머니', 그리고 1927년에는 에이젠슈테인의 '10월', 푸도프킨의 '성 페테르부르크의 최후' 등이 대표하는 것처럼 이 두 작가는 혁명과 대중을 제재로 하여 이 나라의 역사적인 의의를 테마로 빼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의 성과는 자기 나라의 역사에서 주제를 택했고, 외국 영화에서 표현 기법을 본받아 이것을 발전시켰다. 몽타주가 영화의 창조적인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 영화들로 실험하면서, 이론적으로도 추구하여 이른바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을 이루었다. 몽타주 이론이란 영화예술의 특수성이 영화의 편집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란 단순한 필름에 절단과 연결의 작업으로서의 편집(editing)이 아니라 메트릭 몽타주, 리드믹 몽타주, 토널 몽타주, 오버 톤 몽타주, 지적 몽타주 등을 요약해 영화 속에 몽타주 적인 변증법적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동양의 문자가 갖춘 상형 성에서 몽타주의 원리를 찾기도 했다. 몽타주 이론은 그리피스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에게 와서 독특한 영화 이론을 이루었으며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미학을 이루기도 했다. 사일런트 말기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영화가 몽타주 표현에 의해 어디까지 그 재래식 영화의 테두리를 타파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같은 자유롭고 용감한 실험적 작품이 생겨, 아방가르드 영화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점이다. 물론 영화의 표현에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는 것은 일찍부터 실시되었으나, 그것이 질과 양이 함께 크게 발전하여 화려한 시기를 이룬것은 사일런트 말기의 수년 간에 불과하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중점적으로 말하면 영상적 표현의 본질을 찾아낸 전위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너무나도 많은 대중의 열광 때문에 전세계의 영화계는 영화의 상업성에 눈이 멀어버린 감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화 본류의 미학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순수영화·절대영화·인상주의·입체주의·초현실주의 등을 내걸면서 영상이 인간의 내부세계, 즉 의식의 세계를 그려내는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시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영상의 가능성은 다 실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1913년 이탈리아의 한 다락방에서 리치오니 카뉴도(Ricciotto Canudo), 다눈치오(Gabriele d'Annunzio), 상드랄, 아폴리네르, 피카소, 페르낭 레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16년에 '미래파 영화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운동은 2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작품 발표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독일의 발터루트만('대도회교향악') 등이 기계적인 몽타주에 의해 화면의 의미를 거부하고 시각음악적인 표현을 노린 데 반하여, 프랑스의 많은 작가가 주로 조형감각에서 사상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과 같은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연히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프랑스에서도 처음에는 도형이나 추상적인 영상에 의한 작품이 시도되었지만, 뒤에는 의미를 가진 구상적인 영상을 통하여 날카롭고 깊은 의도를 내포시키는 작품이 주류를 차지했다. 그 중에도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제르메느 뒬라크의 '조개껍데기와 수도사', 장 비고의 '품행영점', 장 콕토의 '시인의 피', 만 레이의 '인산인해'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논의를 일으켰다. 그 외에도 루이 델뤼크, 제르메느 뒤락, 장 에프스탕, 르네 클레르, 한스 리히터, 비킹 에겔링, 아벨 강스 등이 속출하여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운동의 과도기였다는 점과 함께 문학·음악·미술·연극 부문의 전위예술가들이 참가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영화예술은 영혼과 포에지와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는 20년대에서 30년대로 넘어가면서 전세계를 휩쓰는 대중적인 매체로서 또 한편으로는 영상 예술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화의 예술성과 기업성이라는 양면의 칼날은 기능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해하는 모순도 지녔다. 전위영화는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이거나 관념적·형식주의적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떠나, 토키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그 유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토키 시대는 1926년의 비타폰(Vitaphone)의 발명으로, 영화는 사일런트 시대의 무성에서 토키(talkie) 시대의 발성영화 시대로 넘어가 시청각의 종합매체로 발전했다. 1927년에 뉴욕에서 공개됐던 '재즈 싱어'는 토키의 제1작으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레코드를 동시에 돌리는 그때까지의 불완전한 방식과는 달리, 필름에 녹음된 소리는 화면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 후부터 급속히 보급되어, 수년 동안에 영화는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토키 시대에 들어갔다. 그것은 영화에 있어서 단순한 기술혁명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으로나 기업적으로 새로운 체제를 필요로 했다. 마이크로폰은 카메라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몽타주 방법도 화면만의 사일런트 영화가 일단 확립된 데다 수정을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은 저절로 대규모화하여 영화 산업은 더욱더 대자본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변화는 음악이나 자연음은 물론 대사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화 내용이 갑자기 연극과 문학의 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르네 클레르, 자크 페데, 장 르누아르, 줄리앙 뒤비비에 등 우수한 감독의 활약에 의해 또다시 예술의 난숙기를 맞이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싸구려 오페라', '회의는 춤춘다', '제복을 입은 처녀', 'M' 등으로 '미완성교향악', '황온의 빈'을 만들어 낸 오스트리아와 함께 충실한 제작 활동을 보였고, 영국에서는 히치콕 등의 극영화와 '유망어선', '야간우편열차', '아란' 등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에 빛나는 발전을 기록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스턴버그가 '모로코'를 발표했고, 마일스턴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루비치는 '러비 퍼레이드'를 만들어서 토키의 화려한 상업주의적 스타트를 장식했다. 연애 영화·전쟁 영화·뮤지컬은 서부극과 함께 그로부터 당분간 할리우드 영화의 주요 장르가 되었다. 게다가 사회악을 파헤친 '굶주린 아메리카', '암흑가의 탄흔' 등과 풍속희극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등이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특징지었다. 또 컬러 영화의 실용화와 함께 디즈니의 만화영화가 널리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1939년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대작 주의의 승리를 보다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의 영화예술은 가장 커다란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1940년대에 이미 출연을 예고했던 텔레비전이 실용 단계에 이르러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세계의 영화는 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생생한 현실을 직시하는 네오리얼리즘이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나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등을 앞세우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등은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기조로 한 이 경향은 뒤에 가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상징성의 표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현대적인 추상, 그리고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새로운 사회적 감각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대담무쌍한 상징의 세계로 변모해 왔다. 프랑스 영화에서도 줄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크리스찬 자크(Christian Jacq), 크롤드 오탕 라라(Claude Autant-Lara), 르네 클레르를 비롯한 거장의 시대가 가고 '누벨 바그(새물결)'라 불리는 전후의 세대가 등장했다. 로마네스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일상적인 사실성에서 인간의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 1960년대의 영화미학은 시네마 베리테라고도 불리었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 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루이 말(Louis Malle) 등 여기에 집결한 사람은 많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같은 사람도 뉘앙스는 약간 다르지만, 전후 프랑스 영화를 대표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저항'에서,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은 '종형제'에서, 알랭 레네는 '히로시마, 나의 사랑' 등과 같은 걸작을 내놓고 있다. 장 콕토(Jean Maurice Eugene Clement Cocteau), 장 들라노아(Jean Delannoy), 르네 클레망(Rene Clement) 등 개성적인 작가가 르누아르·뒤비비에 등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탐구의 드라마를 재연시켰다. 미국 영화도 전후에 들어와 할리우드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네 도큐망 소시얼'이라고 불리는 TV 출신의 신인들이 괄목할 만한 활약을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유럽 아방가르드에 이어 그 전위적 정신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엑스퍼리멘탈 영화에 계승되었고, 그중에서도 극영화로 표출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했었다. 그것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영화예술의 첨단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과 본능, 그리고 모순을 이들만큼 정직하고 대담하게 그리는 영화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근래의 작품으로는 아더 펜(Arthur Penn)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의 '졸업', 랄프 넬슨(Ralph Nelson)의 '솔저 블루',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의 '프렌치 커넥션' 등등이 이러한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다. 이 밖에도 영국에서는 여러 역작 감독들이 활약했고, 한때 '프리 시네마' 운동이 일어나 활력을 보이는가 했으나 리처드 크레이톤(Richard Clayton)이나 토니 리처드슨(Tony Richardson) 등이 몇 개의 작품을 냈고, 카렐 라이스(Karel Reisz)와 존 실레딩거(John Schlesinger) 등이 활약하고 있다. 또 유럽에서는 앞서 열거한 나라들 외에 폴란드, 스웨덴 등에서도 유망한 작품을 낳아, 각기 국민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각국의 영화조류나 경향을 따라서 본 것 이외에 세계적인 거장들이 활약한 점이다. 이러한 전후의 세계영화를 개관할 때 역시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에 본격화한 TV 시대에 마주 선 영화는 고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련에 대항해서 영화는 컬러와 대형화면을 수없이 만들었다. 52년에 만든 시네마스코프 '성의'를 비롯해 '비스타비전 토드-AO', 70밀리 화면의 스크린, 이 밖에 입체영화도 시도했다. 그러나 일단 시련의 바람을 안은 영화는 앞에서 본 전후 각국의 전위적 움직임과 함께 격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즉 영화의 예술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시 구축해야 할 계제에 놓인 것이다. 안이한 기업성에 입각한 영화산업은 변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금 360도 화면의 영화, 확대 영화, 멀티 화면, 환경 영화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3]

장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 공상 과학, 멜로 드라마 및 기타와 같이 다양하며 각각 고유한 시청자가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며, 각 영화의 걸작에는 드라마, 스릴러, 코미디 등의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장르는 서로를 관통하는 몇 가지 독특한 하위 그룹으로 나눌 수도 있다. 영화 장르의 정의는 할리우드의 영화적 다양성의 형성과 함께 형성되었다. 장르별 분류는 시청자가 특정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를 간단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드라마

드라마는 영웅의 사생활, 사회적 관계, 모순, 정신적 고통에 대한 깊은 이야기이다. 현실과 많은 시청자에게 매일, 일상 상황에 가깝다. 이것이 영화의 장르를 구별하는 것으로 복잡한 갈등, 전기, 군사 사진 및 멜로 드라마에 관한 가족 영화는 드라마 장르에 기인 할 수 있다.[4] 다른 뜻으로는 정서적인 주제를 다루는 현실적인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장르라고 한다. 가장 범위가 넓은 영화 장르로 로맨스, 스포츠, 시대극, 범죄와 같은 하위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특별한 장르적 요소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면서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서술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드라마라는 장르에 분류하는 것으로 '특정한 장르에 속하지 않는 이야기'가 드라마에 속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5]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라는 말은 원래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로 관객의 값싼 감상에 호소하는 통속 영화 정도의 뜻으로 저널리즘에서 썼던 단어였다. 하지만 영화 비평에서 멜로드라마는 다양한 형태의 영화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쓰이는데, 범죄 멜로드라마, 심리 멜로드라마, 가족 멜로드라마 등의 구분이 있는가 하면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애정 관계를 다룬 영화를 모두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포함시켜 언급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최초의 뿌리는 중세의 교훈극과 구전 민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통은 18-9세기 프랑스 로맨틱 드라마와, 같은 시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감성 소설 등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계승된다. 도덕과 양심에 바탕을 둔 이런 유형의 드라마와 소설들은 가족 관계, 좌절된 사랑, 강제 결혼을 다루었다. 19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당시 소비문화의 주축이던 여성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멜로드라마는 영화의 주된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화려한 세트와 분장, 미남과 미녀들, 성과 육체 그리고 자본주의와 외면적인 화장을 다 한 이 멜로드라마 영화들은 감상주의와 합하여 대중들의 동경과 갈채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가열한 시대 상황의 처절함을 경험한 사람들의 황폐한 마음을 달래주는 현실 도피적인 감상에서 관객들을 탐닉하게 했다. 전후에 나타난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머빈 르로이(Mervyn LeRoy)의 '애수'는 2차 대전 당시 처절한 전쟁 상황에서 군인과 영국의 발레리나와의 비련을 엮은 스토리인데, 자주 멜로드라마의 정석 같은 것을 설명하는데 본보기로 설명하는 영화이다.[6]

국가

미국

미국 영화는 블록버스터, 영웅주의, 상업주의, 권선징악 총 4가지의 특징이 존재한다.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는 할리우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여름방학 등의 특정한 시즌을 겨냥하여 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한 영화를 뜻하며,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쓰인 폭탄의 이름이다. 영국 공군이 사용한 4, 5톤짜리 폭탄으로, 한 구역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위력을 지녔다고 해서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고 하였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SF 영화나 특수효과가 뛰어난 액션 영화 등으로 장르가 한정되고, 여름방학 등의 흥행 시즌에 개봉하며, 성공작일 경우 속편이 뒤따르는 공통점을 지닌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걸친 급속한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궁지에 몰린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대규모 자본 투자와 신속한 회수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도입한다. 이것은 소수의 영화에 집중 투자하여 세계 주요 도시에 동시 배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의상·장난감·책등을 통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수반되었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린 영화는 1975년 제작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조스'이다. 이 작품은 미국 영화 사상 최초로 흥행 수입 1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뒤를 이어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워즈'가 1억 8천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흥행 수입을 올리며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제작비만 많이 들인 영화라고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작비의 액수와 상관없이 매표 수입이 큰 영화를 블록버스터라고 한다. 매표소에서 팔린 매표 매출이 미국에서는 2억 불 이상 정도가 되면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제작비를 적게 들이는 것보다는 많이 들이면 매출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가 더욱 용이할 수도 있겠지만 제작비를 많이 들였다고 해서 모두 블록버스터인 것은 아니다. 수입을 많이 올려야 블록버스터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우리 미국은 참전합니다.' 혹은 '우리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갑니다.' 등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은 미국인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미국의 우월성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미국 영화의 특징 중 두 번째인 영웅주의로 지구의 존폐가 걸려있는 일들은 모두 미국인들이 해결하려 하고 영화 내에서 다른 인종이나 나라가 개입되는 재난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있다. 스파이더맨,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인디펜던스데이 같은 영화들이 주로 영웅주의의 특징이 부각된다. 영화는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고, 영화의 발달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에 의해 커다란 지배를 받아왔다. 즉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에 투표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제작자들은 고객을 의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목표로 한 이윤의 극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영화의 상업 전략은 언제나 최상의 흥행을 보장하는 방편으로 고안된다. 시대에 따라서는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스튜디오 시스템, 스타 시스템, 장르 시스템, 기술적 발전, 블록버스터, 복합기업 등이 이러한 전략 아니 상업주의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상업 영화는 철저하게 오락을 위한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들이 뭔가 덜떨어졌다거나 완성도가 없지는 않다. 이처럼 학교에도 여러 모임과 그룹이 있듯 영화라는 큰 몸체에서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업 영화는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상업 영화의 큰 장점은 그때그때 사회의 분위기와 흐름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예컨대 국내 영화 중에서 '극한직업'과 '범죄도시' 같은 예가 그렇다. 마약 범죄, 중국 등 주변 국가와의 대치 상황에 관한 현실적인 사례가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 상업 영화는 무엇보다, 관객을 위한 영화이며 서비스하는 영화다. 미국 영화를 보면 사회적 비판이나 풍자의 의미보다는 권선징악의 결론들이 많다. 아동물에서 권선징악의 구도는 더욱 견고하다.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는 쉬운 내용 전개와 권선징악 구도를 마법이라는 판타지에 옮겨 심어 성공한 대표적 작품이다. 동화책은 항상 착한 주인공이 시련을 겪지만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고,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던 악당은 어김없이 초라한 결말을 맞는다.

영화의 발명도 유럽에서였고, 초기 영화의 성장도 유럽에서 두드러졌지만, 영화라는 예술이 돈이 되는 것인지는 할리우드(미국)에서 먼저 인식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부터 영화를 거대 산업으로 키우기 시작한 할리우드는 1920년대부터 메이저급 거대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고, 장르 영화를 대량 생산 하면서 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영화 제작에 대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래픽 기술의 발달로 기존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실사화하는 경지까지 이르고 있어 비할리우드 영화권과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1920년대부터 유럽에서 인정받은 감독들을 데려와 할리우드에서 직접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유럽에서 활동한 많은 감독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작사가 제작비를 많이 투자하는 만큼 영화감독은 제작사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찍게 되는 한계도 있게 된다. 그래서 초기에는 제작사와 감독과의 불화도 많고 실패한 영화도 많았다. 하지만 서로서로 양보하면서 예술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져 있으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해외파 감독으로 유명한 연출가는 너무나도 많게 되었다.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Russell DePalma), 스티븐 스필버그, 오우삼(John Woo) 등. 또한 중요한 사실은 연출가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배우, 촬영 감독 등 많은 스텝과 관련 인물들이 함께 할리우드로 와서 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만의 특성 및 법칙을 갖고 있다. 서부 영화와 갱스터 영화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19년도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성공으로 슈퍼히어로물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할리우드가 장르 영화 생산에 주력하면서 사람들이 장르 영화에 익숙해지도록 만듦으로써,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보기보다는 익숙한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즐긴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제작만큼 중요한 것이 배급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워너브라더스, 21세기폭스 등 탄탄한 배급망을 갖추고 있다. 국내의 경우도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려면 그 배급사의 영화를 일정 정도는 상영을 해줘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처럼 월등한 시장과 망을 갖고 배급을 할 경우 기본적으로 거둬들이는 수입이 있을 수밖에 없고, 국내와 같이 작은 나라의 영화들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산업 내부의 또 다른 문제는 아이디어 고갈로 인한 영화의 질이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졸렬한 시나리오의 속편들,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저예산과 비스타를 내세운 B급 영화가 성공하면 A급 제작 규모로 둔갑해 어설픈 시나리오를 얼기설기 엮어 특수 효과로만 승부를 보려는 뻔뻔한 작태, 상큼한 아이디어의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가 성공하면 즉시 아이디어값을 치르고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하는 전략들을 보고 있으면 아이디어 부재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은 할리우드의 신기한 볼거리에만 초점을 맞춘 전략이, 허구로서의 이야기 창조성 측면에서 빈틈을 보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것이야말로 물량과 시장 테크놀로지 면에서 할리우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세에 몰린 비할리우드권 영화산업이 세계 영화 시장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핵심이다.[7]

일본

일본은 오랜 전체주의 정신이 내재되었던 민족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발생한 전체주의는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는 개인을 철저히 묵살하고 '공동체'의 이름을 내세웠다. 그러한 정신은 비교적 약해졌으나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일본만의 특유의 왕따 문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일본은 젊은 층을 비롯한 노인자살률이 굉장히 높으며, 사회적 우울도도 강한 나라이다. 그래서 일본 영화 중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따스함을 표현하거나, 사회에서 '정상'으로 취급되지 못하는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에 스며들고 치유하는 내용이 꽤 있다. 반대로 끝까지 우리라는 공동체에 흡수되지 못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며 희생하고 배제당하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 일본 영화의 특징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의문을 던지고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개인의 희생만으로 미화하고 끝내거나, 사회에서의 특정 역할에 인물을 단순히 부착시킴으로써 상쇄시키고자 한다. 개인의 의사와 개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억압받는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상실의 나라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일본 문학에서도 상실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하는 위대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실, 전쟁으로 인한 영토와 민족의 상실 등에서 비롯된다. 전쟁과 관련하여 전범국으로서의 반성보다 '피해국'으로서 호소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들도 꽤 있다.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지만 일반 대중이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전체주의적 사상에 젖어있던 일반 대중들이 일본의 민낯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로 인해 비롯되는 불안은 일상적 가치에도 포함되어, 일본 영화의 큰 특징이 되었다. 앞서 말한 상실감과 일상적 불안을 일본 영화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허무주의의 풍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상실의 맥락과 접하기도 하고, 사무라이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도망칠 수도 없는 섬 지형에서 삶은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닌 덧없는 것이었다. 또한, 잃어버린 30년을 비롯한 장기 불황을 겪으며 일본인의 관심은 주택 구입, 취업, 결혼 등의 크지만 성취가 불확실한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가 아닌 작지만 성취하기 쉬운 일상적 가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 영화는 특유의 아름다운 향수적 분위기와 풍경을 잘 담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유난히 아날로그 정신을 강조하는 편이다.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항하여 기존의 소중한 전통을 지켜내는 것과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주로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현대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아날로그 시대가 인간적 정을 훨씬 잘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종종 일본 영화에서 현대사회에서 문제로 삼을만한 사제 관계의 로맨스, 미성년자와 성인의 로맨스를 공공연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성년과 미성년의 역할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성년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8]

한국

한국 영화는 아시아 영화계에서 유독 근현대사를 소재로 다루는 사례가 많은 편이고, 또한 근현대사라는 소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하면 근현대의 사회 정치적 사건을 영화화해서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제약이 느슨한 편이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문제나 논란거리에 대해 다루는 영화도 주변국들에 비해서 좀 더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제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보장되지만, 물론 이렇게 근현대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군사정부 시절인 경우가 다수이며, 이를 무조건적인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의 여러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풍자의 문제점 중 하나인 선택적 풍자의 한계 역시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국내 영화는 1998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전대미문의 흥행을 보이자 영화계 내에서 '2음절 제목 영화는 흥행한다'는 속설이 퍼져있어 2음절 제목을 선호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유행처럼 번진 것이지만, 마케팅적으로는 짧은 제목이 관객의 뇌리에 쉽게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국내에 존재하는 3대 멀티플렉스 업체인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영화관 시장의 96.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씨네Q와 기타 독립영화관을 다 합쳐도 고작 3.1%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 멀티플렉스 개념이 들어온 것은 CGV가 1998년 강변점을 오픈하면서다. 멀티플렉스 태동기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따로 영화를 운영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영화관 체인을 독점하는 문제점은 없었다. 그러나 CGV 강변점 오픈 이후,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영화관을 잇달아 오픈했다. 이로 인해 기존 단관 극장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편입되거나 폐업하는 식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나마 2000년대까지는 멀티플렉스 3사의 점유율이 50%에 못 미쳤다. 그러나 대침체로 단관극장들은 줄줄이 파산하게 된다. 이후 멀티플렉스 3사는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한 단관극장들을 흡수하며, 점점 더 커지는 멀티플렉스 3사에 완전히 경쟁력을 상실한 2010년대 이후의 단관극장들은 경영을 포기하고 멀티플렉스에 매각시켜버렸다. 그래서 2012년 이후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점유율이 90%를 넘게 된 것이다. 3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영화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거부하는 영화들은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관 상영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2011년도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분쟁을 일으켜 일부 디즈니 영화들이 서울특별시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도에 제작된 '옥자' 때부터는 3대 영화관 회사 모두가 넷플릭스 영화의 영화관 개봉을 전면 거부하여 넷플릭스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9]

각주

  1. 영화〉, 《네이버 사전》
  2.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3. 영화의 역사〉, 《팬덤 위키》
  4. 영화 장르와 그 특징〉, 《컬트렐》
  5. 망고맛 치약, 〈영화 장르의 ‘드라마’는 무슨 뜻일까?〉, 《티스토리》, 2020-02-20
  6. 김홍식, 〈멜로영화〉, 《블로그스팟》,2009-12-21
  7. 수빈, 〈할리우드 영화의 발전과 특징〉, 《네이버 블로그》, 2019-11-13
  8. 예지, 〈내가 본 일본 영화 특징〉, 《네이버 블로그》, 2021-07-06
  9. 한국 영화/특징 및 문제점〉,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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