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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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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un9988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2일 (월) 16: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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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movie)는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이다.[1]

개요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 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스튜디오·카메라·녹음·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작품을 감독하며 시나리오작가·배우·촬영기사·미술가·음악가·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관객이 볼 수 있게 되려면 배급업자 또는 흥행업자와 영화관이 있어야 하며, 광고가 따라야 하고 영화평론가들의 평가도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됨으로써 대중전달의 기능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상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되며, 관객에게 심리적 영향을 줌으로써 예술적 또는 오락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영화는 오늘날 예술의 한 갈래이면서,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넓은 사회 문화적인 복잡한 현상이다. 영화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카메라·필름·영사기이다. 이것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과학과 공업이 만들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취급되고 하나의 테크놀로지로 논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으로서, 그리고 흥행으로서 그 양상은 대중을 상대로 한 매스미디어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등장과 더불어 시각 정보의 전달 매체,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호체계로서 연구, 인식되어가고 있다.[2]

역사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고안되어 있었다. 즉, 1889년에는 미국의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원래 이것은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된, 들여다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이것을 스크린에 비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여기저기서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아매트프랜시스 젠킨스가 바이타스코프(Vitascope)와 판타스코프(Phantascope)를 발명하였고, 독일에선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Bioskop)를, 오스카 메스커의 비오폰(Bio­phon)을 발명하였고,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애니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이탈리아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더구나 이 장치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고안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 다른 발명과 다른 점일 것이다.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짜 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세기의 한밤중에서 20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 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뤼미에르 형제는 속성 카메라맨을 양성하여 세계 각국에 파견, 진기한 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그 필름을 시네마토그래프의 기계와 함께 팔았다. 그는 영화를 이처럼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프랑스의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첫 공개된 시네마토그래프에 감동한 한 사람이었는데, 특허권을 사려고 협의했으나 뤼미에르에게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영국의 기계를 사서 제작에 착수했다. 그의 작품은 뤼미에르의 것과는 달라, 트릭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인물이나 무대의 모양 바꿈을 하는 빠른 변화를 비롯하여 많은 트릭을 시도했다. 원래 마술사이며 자동인형의 고안자이고 연출가이기도 했던 멜리에스는 전용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중에서도 '월세계 여행'(1902)은 대표적인 대작이다. 줄 베르느(Jules Verne)와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은 이 영화는 다분히 공상적인 장면을 전개했다. 별의 관찰, 탐험대의 동굴 탐험 등으로 엮어진 이런 식의 영화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극 장면을 짧은 여러 토막으로 나눈 것 같은 것으로, 전체의 이야기도 공상적이고, 각각의 장면들도 자못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멜리에스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제재를 즐겨 다루었으며, 이것을 솜씨 있는 장치나 트릭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즉 뤼미에르는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 데 반하여, 멜리에스는 도리어 꿈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영화의 표현력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얼핏 보기에 정반대로 보이는 이 두 개의 방향을 향하여 영화의 표현은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멜리에스마저도 영화를 무대란 생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비록 장면을 짧게 세분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장면을 같은 위치에서 단숨에 촬영하는 것인데,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촬영법이다. 흔히 1장면에 1커트란 말이 있는데, 초기의 영화는 이러한 촬영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 보급은 의외로 빨라서 20세기에 접어 들자 세계 각국에서 영화를 상연하고 또한 제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대극과 같은 촬영방법은 어디서나 공통적이었고, 영화의 내용도 상당히 무대적이었다. 1910년경까지의 영화는 많아야 1에서 2롤짜리가 대다수였다. 무대극과 다른 것은 30분 미만의 짤막한 영화라는 점이며, 그 범위 안에서 무대극이나 유명한 실화를 영화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순식간에 영화관이 급속히 늘었다. 이 시대의 특색은 희한한 구경거리로 등장한 영화가 흥행이라는 형식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제작계가 이에 자극을 받고, 차차 기업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용은 빈약했지만 일반의 호기심을 끌었다.

초기의 영화가 활동사진(moving picture)이라 불리고, 과학적 완구라고 불리면서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여러 발명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시아 지역에 영화가 건너온 것만도 일본이 1896년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는 1903년, 만주에서는 1901년 등이었으니 그 전파의 속도를 알 수가 있다. 영화에 대한 전세계의 호기심은 재빨리 각국에 수많은 촬영소와 극장을 속출하게 했다. 미국에는 장차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영화의 메카가 건설되어 가고 있었으며, 프랑스에는 파테나 고몽이 창설되었고, 독일에는 비오그래프를 효시로 우파 등이 창설을 보았고, 영국에서도 파카를 필두로 수많은 제작회사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발명과 함께 전세계에 엄청난 관객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발맞추어 세계 각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영화제작회사와 배급회사가 출현해 활동사진의 정착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활동사진은 단순한 과학적인 완구로서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활동사진이라면 대개 단척물의 짤막한 필름이었다. 500피트에서 1,000피트 또는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대표적 작품인 '월세계 여행'이나 '잔 다르크', 미국에선 에드윈 S.포터(Edwin Stanton Porter)가 만든 '대열차강도' 같은 것도 고작해서 15분에서 20분 내외의 필름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체이스 픽처'라든가 '헤일의 전망차'라고 불리었던 것이 유행한 것도 모두 활동사진의 초기였던 1910년 내외까지의 일이었다.


분류

국가

미국

각주

  1. 영화〉, 《네이버 사전》
  2.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영화〉, 《네이버 사전》
  •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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