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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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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27일 (금) 21:28 판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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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청동기시대(Bronze Age,靑銅器時代)는 주요한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하는 고고학상의 3시기법(三時期法:석기·청동기·철기)에 따른 시대의 제2단계이다. 청동의 야금술(冶金術)이 알려지고, 그에 따라 이기 등의 기구(器具)가 제작·사용되면서도 아직 철의 야금술이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를 말한다. 구대륙의 선진문화권에서는 동기(銅器)시대에 뒤따르고 철기시대에 선행한다.

청동기시대의 설정에 대하여 여러가지 반대 주장이 있다.

  • 문화의 정도가 높으면서도 원료, 특히 주석(朱錫)이 없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에는 들지 못했던 사회가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은 제4왕조 이래 청동을 알고는 있었으나 주석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12왕조 무렵까지 청동기를 만들지 못했다. 제4왕조에서 제12왕조에 걸친 이집트 문화는 북유럽 기타 여러 지역의 청동기문화나 철기문화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 또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제18왕조의 이집트문화는, 이 또한 여러 지역의 철기문화보다 정도가 높았다. 요컨대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라 함은 지극히 기술사적(技術史的)인 시대구분이어서, 정치 ·경제 ·사회 ·정신문화의 전반을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일반사적인 시대구분으로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 원료인 동(銅)이나 주석 산지와 그 산출량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청동기 제품은 상층계급의 무기와 장신구를 볼 수 있을 뿐, 사회 전반에 보급되지 않았고, 생산용구로도 채용되지 않았으므로 청동이 가지는 사회경제사적 의의가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
  • 원광석에 포함되어 있던 주석이 제련법의 미숙으로 그대로 남아 있어 의도와는 다른 청동기가 만들어져, 그것과 합금술로써 제작된 참된 청동기와의 구별이 곤란한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발전

청동야금술의 발명

청동은 동 90%, 주석 10%를 기준으로 하는 합금이다. 주석의 양이 10%를 넘으면, 합금은 흰빛을 띠는 백동(白銅)이 되므로 거울의 재료로 쓰였다. 인간이 지표상 도처에 널리 존재하는 철이 아니고, 합금인 청동의 야금술을 개발한 이유는 분명하지가 않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바로는 청동 야금술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나, 시리아 방면에서 BC 31세기경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우르 제1왕조의 분묘에서는 일찍이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오리엔트에서는 BC 31세기부터 거의 동시에 청동기시대로 들어갔는데, 이 새로운 기술은 잡다한 경로를 통하여 오리엔트에서 사방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을 청동기시대에로 유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신대륙에서의 동의 야금술은 남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에콰도르에서 성행하였는데, 청동의 야금술은 콜럼버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발명되지 않았다.

오리엔트

청동기시대는 BC 3000∼BC 1200년경에 해당한다.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의 선진 지역에서는 왕국의 흥성과 쟁패, 민족국가(대왕국)의 성립이 이루어졌고, 성문(成文)의 법전도 시행되어 국가생활은 고도의 수준에 달하였다. 문자와 물품화폐도 성행하였고 상호통상도 활발하였다. 우르 제3왕조는 훌륭한 금속공예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바빌론 제1왕조에서는 국가체제의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 또 주변에서는 히타이트 왕국, 미타니 왕국, 우라르투 왕국과 같은 강력한 민족국가가 생멸(生滅)하였다. 이란고원 서부에는 독자적인 금속공예로서 널리 알려진 루리스탄 문화가 성행하여 북방 초원지대 제민족의 공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키프로스 문화(키프로스섬의 청동문화)가 비상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풍부한 동(銅) 생산과, 통상상에 점하는 그 입지에 힘입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청동기시대는 제12왕조(BC 2000 ?)에서 시작되나 주석의 입수난으로 그 후로도 청동기에 비하여 동기(銅器)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같은 비율은 제18왕조의 투탕카멘 왕릉의 금속제품에서도 지적된다. 더욱이 제18왕조 말경부터 이집트는 철기시대로 들어가는데, 그와 함께 청동기의 제작이 활발해진다. 이집트의 청동기시대는 짧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청동 야금술이 이룩한 성과는 적었다. 이집트의 제12∼18왕조 기간을 청동기시대로 설정하고, 이 시대개념으로써 이 기간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에게해 지방

에게해 지방의 청동기문화는 미노스 문화, 키클라데스 문화, 헬라스 문화, 트로이 문화의 4문화권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앞의 3자는 각각 전 ·중 ·후기로 대별되고, 각 기(期)는 다시 3아기(三亞期)로 세분된다. 헬라스 후기는 다시 미케네 시대로 불린다. 트로이 문화 중에서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것은 제2기(BC 2500∼BC 2200)부터 제7b기(BC 1260∼BC 1100)까지이다.

이들 제문화에서는 일찍이 왕국이 형성되었고, 정치생활의 부단한 발전이 엿보였다. 가장 선진적이던 크레타섬에서는, 미노스 후기에 이르러 크노소스를 수도로 하는 대왕국, 즉 미노스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그리스 본토에도 헬라스 후기에 미케네 왕국을 맹주로 하는 아카이아인 연맹이 형성되어 트로이전쟁을 통해 이름을 남겼다. 에게 제문화권에서는 건축 ·회화 ·금속공예 ·도예(陶藝) 등에서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청동기는 수량적으로 너무 적었으므로 그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도예가 발달하였는데, 미노스 문화의 난각식(卵殼式) 도기는 도예의 정수라고 할 만하며, 그것은 오리엔트 지방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유럽

유럽의 청동기문화는 주로 지중해 방면을 경유한 오리엔트 문화의 파급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다만 캅카스의 그것은 루리스탄 방면으로부터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럽은, 중부 ·북부 ·동부 ·서부의 4문화권으로 대별되는데, 북부를 제외하고는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하다.

서부 및 중부 유럽에서는 청동기시대가 BC 1800년경에 시작되어 BC 7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북부유럽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개막이 늦어졌는데, 그 종말 또한 오래 끌었던 것 같다. 모름지기 유럽의 청동기문화는 지극히 후진적인 것이었다. 즉, 계급적 분화(分化)의 진행에 따라 부족의 수장(首長)의 권력이 강화되고 부족국가는 소왕국(小王國)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국이나 민족국가의 성립은 볼 수 없고, 소왕국의 연합이 나타난 정도였다. 주목되는 것은 동이나 주석의 구득을 위해 발단된 교역로가 북부 유럽과 지중해 방면을 연결시켜, 문화 전파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이에 게르만 ·켈트 ·슬라브 등의 제민족이 민족적 형성을 이룬 것, 부족의 집단적 이주가 활발히 행해진 것 등이 지적되기도 한다.

중부 유럽에서는 화장(火葬)을 수반하는 화장묘(墓) 문화가 주목을 끌고, 유럽 북부에서는 게르만인의 소산으로 보이는 청동기문화가 성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스웨덴의 고고학자 O.몬텔리우스 이래 6기(期)로 구분되는데, 청동공예의 발달에는 놀랄 만한 점이 있다.

초원재대

유라시아 북방의 초원지대에서도 각 지역마다 그 나름의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행해졌는데, 그 성립에는 이란이나 캅카스 방면에서의 문화적인 자극이 힘이 되었다. 이들 청동기문화의 특색은 생업이 목주농부(牧主農副)인 점, 정치적으로는 부족국가의 단계에 있었던 점 등인데, 그것은 바로 유목기마민족화(遊牧騎馬民族化)의 전야에 해당하였다. 우랄 남부에서 남시베리아에 걸쳐 성행한 안드로노보문화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동아시아

중국에서의 청동기시대는 은(殷), 주(周) 시대에 해당한다. 이 고도의 문화는 말기에 이르러 동방으로 파급되어 한반도, 일본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제(日帝)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석기시대 말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철기문명의 영향 아래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석기와 금속기(金屬器)를 혼용하다가(금석병용기) 한(漢)나라의 침입으로 중국 철기문명권에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이 석기시대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발달한 외부세계의 침입으로 타문명권에 포함되었다는 식민사관의 논리를 드러낸 것이다.

500~700년간 존속한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확인된 것은 1950년대에 와서였으며,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 ·유적인 민무늬토기 ·간석기 ·고인돌 등을 통해서 볼 때, 세부적으로는 다양성을 지니면서 전체적으로는 동질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던 시대였음이 밝혀졌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주말(周末)문화의 전파에 따라 독특한 베트남 동손문화가 성행하여 이채를 띠었다. 인도의 동기시대에는 청동 제품도 다소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주석의 부족으로 참된 청동기문화는 형성되지 못한 것 같다.

성격과 종말

구대륙 각지에 조성된 청동기문화는 정치·경제·사회구성·정신문화 등의 면에서는 갖가지 단계이어서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이 청동 야금술의 채용, 특히 청동을 사용한 실용적 이기의 제작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된 기술사적(技術史的) 시대구분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경우에는 이 용어의 효용과 한계를 미리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철의 야금술은 BC 14세기경에 오리엔트에서 발명되었고, 이란 서부의 미타니인(人)을 통해 각 방면으로 전달되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BC 1200년경에 청동기시대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주변지대, 예를 들어 상부 오스트리아에서는 BC 750년경까지, 유럽 북부에서는 BC 500년경까지 청동기문화가 존속되고 있었다. 중국의 청동기시대는 BC 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철은 지구상의 도처에서 구할 수 있었으며, 가격 또한 저렴하였으므로, 그것은 농기구 제작에도 사용되었고, 또한 병사의 철제 무기 무장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그것이 이룩한 역사적 영향력은 청동의 경우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 문화 단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말경, 각 지역에서 동란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철의 야금술 보급에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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