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문명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은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한 이집트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문명, 황허강[黃河] 유역의 황허문명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지리적으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하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문명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셈족에 속하는 아카드인(人)·아무르인·아시리아인·칼데아인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인·카사이트인·메디아인·페르시아인 및 수메르인·엘람인 등이 활약하였으며, 공통의 문자로서 설형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18세기 후반에 탐험가와 여행가들이 이 지방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각품의 일부 또는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벽돌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또, 구약성서에 실린 유명한 ‘바벨탑’이나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 등 고전시대의 작품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해명은 아시리아학(學)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설형문자의 해독과 유적(遺蹟)의 고고학적 발굴을 병행해서 진행하였는데, 독일의 G.F.그로테펜트(G. F. Grotefend, 1775∼1853)와 영국의 H.C.롤린슨(Henry C. Rawlinson, 1810∼1895) 등의 노력으로 페르시아어(語)가 먼저 해독되었다. 그중 롤린슨에 의한 베히스툰(Behistun) 부조에 3개국어로 씌어진 다리우스 대왕의 전승기념비문(戰勝記念碑文)에 대한 해독(1847)은 특히 유명하다.
한편, 1842년부터 주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사로 파견된 프랑스인 P.E.보타(Paul Emile Botta, 1802~1870)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Nineveh)와 코르사바드(Khorsabad)를 발굴하여 약 2만의 책자로 된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의 탄생을 보게 하였다.
설형문자는 그후 엘람어·바빌로니아어·수메르어 등이 연이어 해독되고, 한편 고고학적 발굴도 A.H.레야드(A.H. Layard), V.플라스(Victor Place, 1818~1875), H.러섬 등에 의하여 니네베·코르사바드·아슈르·바빌론·님루드 등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어, 출토품은 각각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으로 옮겨졌다.
19세기 말부터는 독일과 프랑스의 조사대가 참가하게 되었고 조사의 대상지도 바빌로니아로 옮겨져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바빌론(Babylon)·우루크(Uruk)·라가시(Ragash)·니푸르(Nippur) 등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1920∼1930년대에는 우르(Ur)·알우바이드(al-Ubaid)·키슈(kish)·우루크와 디얄라(Diyala)강 유역의 카파제(Khafajah)·텔아스마르(Tel-Asmar) 및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마리(Mari)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수메르 이전의 문화 해명을 위하여 아시리아 지방에 대한 관심을 재차 가지게 되어, 텔할라프(Tel-Halaf)·테베(Tebe)·니네베 등이 발굴되었다. 이라크 본국에서도 1940년대 이후 에리두(Eridu)·하수나(Hassuna)·텔우카이르(Tel-Ukhair) 등을 발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우루크·니무르(Nimur)·님루드(Nimrud) 등의 계속적인 발굴조사와 더불어 하틀러 등의 새로운 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발전
신석기 문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은 BC 7000∼BC 6000년경, 북(北)이라크의 자그로스(Zagros) 산록지대에 정주한 가장 오래 된 농경민은 동시에 목축도 행하여 자르모(Jarmo)·하수나(Hassuna), 사마라(Samarra)의 후기 신석기 문화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후 발달한 촌락문화, 즉 하라프 문화를 아시리아 각지에 전파시켰다. 아름다운 채문토기(彩文土器)가 만들어졌고, 금속인 구리의 사용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남부의 수메르 지방에서도 최초의 정주생활이 시작되어 에리두 문화를 이룩하였다. 다음의 금석(金石) 병용 시기의 문화는 우바이드 문화(5900 BC~4000 BC)와, 우루크 문화(4000 BC~3100 BC)로 보인다. 우바이드 문화기에 인류의 정착지는 점차 팽창하고 발전하였다. 또한 구리의 야금술이 발달하여, 분포 범위도 수메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확대되었다. 우루크 문화는 수메르(Sumer) 문명의 성립기로서 파악된다. BC 3200년경에는 그림문자가 사용되었으며, 도시국가가 탄생하였다.
청동기 문화
금석 병용기를 지나 청동기로 접어들며 가장 처음 발생한 문화는 젬데트 나스르(3100 BC~2900 BC) 문화이다. 이후 다양한 도시국가들이 병립하는 초기 왕조 시대가 약 500년간 (2900 BC~2350 BC) 지속되었다. 당시 도시의 중심은 신전(神殿)이었으며, 이 관리를 담당한 신관(神官)의 지위는 높아 정치·경제·군사·제례 등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중심 도시는 아수르(Assur)였으며, 그외에도 우르·라가슈·우루크·키슈·니푸르 등의 도시국가들이 유력하였으며, 우르의 왕묘(王墓)나 각 도시의 발굴 결과에서 그 문화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건축 ·미술·공예 등의 분야 외에도 설형문자의 발명이 이루어졌으며, 60진법·태음력의 채용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교역을 통하여 수메르의 제품이 동방(東方)의 각지에 전해졌으며, 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원류가 되었다. 중시 도시 국가는 말기가 되면서 라가시·움마·우루크 등이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항쟁을 하다가 아수르 시를 중심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BC 2350년경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대로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여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아카드제국을(Akkadian Empire, 2350 BC~2193 BC) 수립하였다. 아카드인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제국 내에 보급시키는 등 수메르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180년 동안 계속된 아카드 시대에 수메르인과 아카드인 두 종족이 융합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점차 셈화(化)하여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카드 시대 말기에는 혼란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이어 구티인(Gutian)의 왕조가 100여 년 계속하게 된다. 수메르인은 우르 제3왕조(Third dynasty of Ur, 2119 BC~2004 BC) 때에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엘람인의 침입에 의해 5대 109년 만에 멸망하였다.
청동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 초기 아시리아왕국(BC 20 세기~15세기)과 바빌론왕국이 등장한다. 아시리아는 본래 셈족 계통이 아닌 수바르, 혹은 수바르투인이었으나 아카드, 수메르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점차 셈화(化)하였다. 수메르가 멸망기에 접어든 BC 2000년대 초 무렵의 출토품에 쓰인 아시리아어가 아카드어 혹은 수메르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시리아가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시리아를 처음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북방의 강국을 건설한 사람은 BC 19세기말에 나타난 아무르인 출신의 샴시 아다드 1세(Shamshi-Adad I, BC 1813~1781 재위)이다. 그는 아수르 시를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정복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의 분쟁으로 속국이었던 마리 왕국이 분열되어 바빌론의 함무라비와 동맹하여 왕국을 정복했다. 이후 아시리아는 약 1세기간 바빌론의 속국으로 남아 있다가, 바빌론에 침입한 후리르인(Hurrians)에게 정복되었다.
한편 아무르인에 의해 세워진 바빌론은 제1왕조 제6대 왕인 함무라비의 아시리아 점령을 시작으로, 이신·라르사·마리 등을 정복하고,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셈계 종족에 의한 바빌로니아 세계가 성립하였고,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함무라비왕의 사적(事蹟) 중 법전(함무라비법전)의 제정과 달력·도량형의 통일, 아카드어의 보급 등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이때부터 아카드어는 오리엔트 세계의 공통어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철기 문화
이어서 후기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 인도-유럽 어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이동이 오리엔트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 속의 민족이라 불리던 히타이트(Hittite), 카사이트(Kassite) 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그중 BC 1530년경에 히타이트인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1왕조는 멸망하였으며 그후 약 10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민족이 꼬리를 물고 침입하여 분립·항쟁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특히 아수르시(市)를 중심으로 왕조의 재건에 성공한 중기 아시리아(BC 16~BC12 세기)는 철제 무기를 가진 군사 강국으로 발전하여, BC 15∼BC 14세기에는 이집트와의 접경까지 정복하고, BC 12세기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지중해안에서 소아시아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BC 10세기 이후 사르곤 2세(재위 BC 722∼BC 705)·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BC 668∼BC 628) 등 과감하고 용맹한 왕들에 의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아시리아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강력한 군대와 관료집단, 정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했다. 문화면에서도 부조(浮彫)와 도시계획에 뛰어났고, 또한 미술은 사실적(寫實的) 경향을 띠었다. 아슈르바니팔 왕의 니네베 왕궁 부속의 도서관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를 자랑하는 점토서판(粘土書板)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 바빌론 등 고도의 문화적 발전을 이룬 점령지에 대한 억압적 통치와, 무거운 세금은 국민의 반발을 샀다. 결국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칼데아의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나보폴라사르(재위 BC 625∼BC 605)는 아시리아 공격 이후 바빌론을 수도로 칼데아 제국, 즉 신(新)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다음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BC 605∼BC 562)는 이집트군을 아시아로부터 추방하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까지도 지배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수(捕囚)’는 이때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빌론을 정비하여 지구라트를 재건하였는데, ‘바벨탑’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칼데아의 번영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BC 538년 신흥세력인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The Achaemenid Dynasty, 559 BC~330 BC)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로써 250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남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번영이 끝나고, 문화의 중심은 이란고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지리적 환경으로 보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에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에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참고자료
- 〈메소포타미아문명〉,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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