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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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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 말기의 장군 겸 재상이다.

개요

  • 연개소문은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죽은 해는 《삼국사기》에 보장왕 25년(666)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의 묘지명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의하면 보장왕 24년(665)에 죽었다고 한다. 고구려 동부(東部) 출신이라고도 하며 서부(西部)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름이 개소문(蓋蘇文), 개금(蓋金), 이리가수미(伊梨枷須彌) 등 기록마다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며, 성씨도 연(淵), 천(泉), 전(錢) 등으로 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래 연씨이지만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하여 뜻이 같은 천(泉)자로 바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문(蘇文)을 직명(職名)으로 보는 설, 연개(淵蓋)를 성으로 보는 설 등이 있지만 최근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성씨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대중을 현혹시켰다"는 대목이 있으며, 아들인 남생의 묘지명에도 그의 집안이 연못(泉)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어 물과 관련된 동북아시아 지방의 고대 설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아들인 남산(男産)의 묘지명에서는 조상을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연결시키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1]
  •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인이다. 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자치통감》 등의 사서와, 이를 토대로 재편집한 《삼국사기》 열전에는 중국 당나라 고조의 이름 '연(淵)'자를 피휘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하였다.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이리카스미)라고도 표기되어 있어, 한국의 고대 인명의 유추에 단서가 된다. 642년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대막리지(大莫離支)를 신설하고 연개소문, 연남생, 연남건으로 세습되는 연씨정권(淵氏政權, 642년 ~ 668년) 26년간 무인정권을 세워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외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사략이라는 중국 역사책에는 키가 10척이었다고 한다.[2]
  • 연개소문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권신이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다. 이후에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집권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 사이에는 수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연개소문 생전에는 계속해서 승전했지만 사후 권력을 물려준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은 면이 있다. 다만 혼란스럽던 고구려의 정계를 평정하고, 죽기 직전까지 강력하게 통치했을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또한 당대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하여 계속해서 승리했다. 천하의 당 태종 이세민과 으뜸 무장이었던 소정방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유독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외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 연개소문은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서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 ·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연개소문의 이름

  •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실제로 '얼가솜/얼가소미'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얼' + '가소' + 받침 미음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가소' + 접사 '이'가 결합하여 '가쇠/개쇠'로 불린 것을 蓋金(개금)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淵을 '얼'로 불렀으리라는 것은 일본어 표기 伊梨柯須彌(이리카스미)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文(글월 문)은 받침 미음으로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연개소문의 기록인 《삼국사기》 천개소문(연개소문) 열전은 모두 《당서》의 내용을 편집한 것으로, 중국 측에 의해 변조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연개소문의 성씨는 원래 연(淵)이지만 《구당서》와 《신당서》가 당 고조의 휘를 피해서 천(泉)으로 그의 성을 표기한 이후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후손이 천(泉)씨로 표기된 바 있다. 18세기 조선의 사학자 안정복은 저서 《동사강목》 고이편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고구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내항(來降)하였다."고 한 기록과 《통고(通攷)》에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고 한 점을 들어 「천개소문」이 아닌 「연개소문」이며, 중국인들이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천(泉)자로 썼음을 밝혔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며 사람들을 현혹시켰다(自云生水中以惑衆)"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남생묘지명』에서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신께 의지해 복을 받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遠系出於泉, 旣托神以隤祉, 遂因生以命族)"고 찬미조로 적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연개소문의 생애

  •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또,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남생의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은 자유(子遊), 아버지 이름은 대조(大祚)이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아버지에 대해 남산의 묘지명은 대로(對盧)라고 하였고, 《신당서》는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아버지가 죽자 개소문이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 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어렵게 뒤를 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중에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人)들이 왕과 상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미리 알고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열병(閱兵)을 한다는 구실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 대신 왕의 동생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른 뒤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다. 이때 그가 대장군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에 취임했다는 설도 있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연개소문은 이후 어느 시기에 다시 대대로에 취임하였다. 고구려 후기에 대대로는 3년이 기한이며 연임이 가능한 직책이었다. 또한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회의에서 합의로 선출하는 직책이었는데, 귀족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고구려 후기를 대대로와 대로가 중심이 되는 귀족연립정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대대로 취임은 귀족연립정권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셈이 된다. 반면, 삼국시대 말기의 정치 상황을 왕권 중심의 신귀족과 기성귀족세력간의 갈등이 표면화된 시기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집권은 신·구 귀족세력이 대립하던 와중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기존의 귀족연립체제와 달리 왕위계승권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한다. 여하튼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도교(道敎)를 진흥시키고자 당나라에 요청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초빙하였다. 연개소문이 도교 진흥책을 편 것은 당시 유행하던 도참설을 배격하고 도교적 전제정치를 실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불교와 친밀한 기존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해석한다. 한편, 연개소문은 외교 면에서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을 전개하였다. 고구려는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영양왕 때에는 수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오히려 먼저 공격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건국한 뒤로는 온건책을 펴오다가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강경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신·구 귀족 사이의 갈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흔히 구귀족은 대외 온건파, 신귀족은 대외 강경파로 보는데, 이들 중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대외 정책이 변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신귀족 세력으로 분류된다. 고구려의 내분과 멸망 원인을 연개소문의 독재정치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천리장성

  • 천리장성(千里長城)은 고구려 말기 중국으로부터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서부 변경(요동지방)에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쌓은 장성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곧 당에 의하여 망하였다(618). 그 후 626년 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후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은 국내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세계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동돌궐을 침략하는 등 주변 국가에 위협적이 되었다. 영류왕 13년(631)에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는 고구려에 와서,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이란 기념물을 헐어버렸다. 당이 주변국을 침략한다는 정보가 알려지고 있던 터라 이에 고구려는 당에 대하여 매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서쪽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만주 중부지역인 부여성(지금의 눙안農安)에서 시작하여 남쪽 끝은 발해만에 있는 비사성(지금의 다롄 大連)에 이르는 천리가 되는 장성이었다.
  • 장성은 곳곳에 있는 토성들을 연결하면서 쌓은 토축성이다. 너비가 약 6m이며 높이는 2~3미터의 고르지 않은 성벽이다. 석축성에 있는 성문이나 누각, 돈대 등이 없는 단조로운 성으로 영구성보다는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을 축조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645년부터 648년까지 3차에 걸려 침입하였다. 장성은 얼마 정도의 적군 저지력은 있었으나 당나라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성의 축조는 영류왕의 명령으로 축조되었다는 설과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쨌든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구축된 것은 사실이다. 연개소문은 성을 축조하는 동안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침공하여 영류왕과 자신을 반대하는 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동영상

각주

  1. 연개소문(淵蓋蘇文,?~665?)〉, 《두산백과》
  2. 연개소문〉, 《위키백과》
  3. 연개소문〉,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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