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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먼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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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먼석굴(龙门石窟)
룽먼석굴(龙门石窟)
남쪽에서 바라본 룽먼석굴
주요부이자 측천무후가 조성한 것으로 유명한 봉선사동
룽먼석굴(龙门石窟)
봉선사

룽먼석굴(龙门石窟, lóng mén shí kū)은 중국 허난성 뤄양시의 남쪽 13 km 아래의 양쪽 언덕에 있는 동굴 사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중국5A급여유경구로도 지정되어있다.

중국에서는 윈강석굴, 막고굴, 맥적산 석굴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4대 석굴 사원으로 손꼽힌다.

개요[편집]

룽먼(龍門)의 석굴과 벽감은 중국 북위(北魏) 후기~당나라(316~907)까지의 가장 거대하고 가장 인상적인 예술 작품의 집합체이다. 이 모든 작품들은 불교에 헌납된 예술품으로, 중국의 석조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룽먼석굴은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룽먼산(龍門山)과 샹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의 구간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되었다. 이 중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 당대 석굴이 60% 기타 왕조의 석굴이 10% 정도이다. 다퉁(大同)의 윈강석굴(雲崗石窟)과 둔황 막고굴(敦煌 莫高窟)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이곳은 특히 예술성이 높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 내부에는 루서나대불을 비롯한 10만여존의 불상, 위나라 비석 예술의 정수'룽먼 20 품(龙门二十品)'과 중국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 저수량(褚遂良)이 쓴 '이궐(伊阙)'을 포함한 2,860여점의 비각(碑刻: 비석에 새겨진 글자나 그림)과 40여개의 탑이 있다. 주요 명소로는 루서나대불(卢舍那大佛), 구양동(古陽洞), 빈양싼동(賓陽三洞), 완포둥(萬佛洞), 야오팡동(藥房洞) 등이 있다.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굴 안에 불상이나 불탑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은 10여미터가 넘는 것부터 수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10만여점이 넘는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에 뛰어난 솜씨와 멋을 자랑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훼손된 부분이 많다.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 특히 많고, 이외에도 도굴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 흔적도 뚜렷하다.

대표적인 불상으로, 펑셴쓰[奉先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루서나대불이 있다.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은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머리 길이가 4m, 귀 길이가 1.9m나 된다.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막대한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양둥은 가장 오래된 동굴이자 예술적 가치가 높은 동굴로 유명하다. 길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석굴의 천장과 벽면에 불상이 수도 없이 새겨져 있다. 북위 때 총 8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투입해 24년에 걸쳐 건설했다는 빈양싼둥(賓陽三洞)은 남동, 중동, 북동 세 개의 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 11개의 대형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외에도 3cm의 작은 불상이 15000개나 조각되어 있는 완포둥(萬佛洞), 천장의 연꽃이 아름다운 롄화둥(蓮華洞), 당나라 때의 약 조제법이 새겨진 석탑이 있는 야오팡둥(藥房洞)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편집]

룽먼석굴의 역사는 북위의 효문제가 산서성의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태화 18년)부터 시작된다. 불교 조각 역사상 윈강석굴의 뒤를 이은 룽먼기(494년 - 520년)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윈강석굴의 엉성한 사암질과 비교하면, 룽먼석굴의 특징은 딱딱하고, 촘촘한 감람석 재료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위기에 있어서는, 운강과 같이 거대한 석굴을 깎는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위서 석로지에도, 500년(경명 2년)에 선무제가 효문제를 위해서 축조한 석굴은 규모가 너무 커서 햇빛이 보이지 않고, 계획축소를 피할 수 없게 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양식상의 특징은 갸름하고 처진 어깨, 목이 긴 조형이며, 전체적으로 가녀린 인상을 주는 점에 있다. 또 중국 고유의 조형도 눈에 띄어, 서방풍의 흔적은 희박해진다. 상괘좌가 발달하고, 장식도 섬세하여 회화적인 표현이 두드러졌다.

최초의 제작기는 5세기말 〈고양동〉 석굴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사적인 불상 축조에 시작되었다. 전대인 선무제의 계획을 수용하여 산과 들을 깎아 만든 〈빈양동〉 3굴 가운데, 실제로 북위에 완성한 것은 〈빈양중동〉뿐이었고, 〈빈양남동〉과 〈북동〉이 완성된 것은 당나라 초기였다. 그 외 북위 시기의 대표적인 석굴로는 〈연화동〉을 들 수 있다. 북위 멸망 후에도 석굴의 축조는 대를 이어 계속되는데 〈약방동〉은 북제로부터 수나라에 걸쳐 축조된 석굴이다.

〈당나라〉 때는 위나라의 왕 태가 빈양 3동을 수복해, 저수량(褚遂良)에게 명을 내려 서도사상 유명한 「이궐불감비」를 쓰게 하여 641년(정관 15년)에 비를 세웠다. 당나라 시대의 첫 대표작으로는 656년 - 669년(현경 연간~총장 연간)에 완성한 〈경선사동〉이 있다. 그 후 〈혜간동〉이나 〈만불동〉이 완성되어, 고종 시대에 룽먼석굴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절정기의 석굴이 675년(상원 2년)에 완성된 〈봉선사동〉이다. 이것은 룽먼 최대의 석굴로 고종 때 시작되어 황후 무씨(후의 측천무후)도 예산을 기부하였다. 봉선사에 있는 그 본존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당시 이미 실권을 장악 하고 있던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기부된 시기와 맞지도 않고 여러 근거에서 부정되고 있다. 측천무후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하여 존상도 맞지 않다.

측천무후의 시대에는 서산의 남방, 〈정토동〉의 부근까지 축조가 되었으므로, 측천무후 말에서 현종에 걸친 시기에는 동산에도 산과 들을 깎아 석굴을 축조하게 되게 되었다. 〈간경사동(看経寺洞)〉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조각된 불상의 곁에는 조각상의 동기나 공양문, 각자의 이름이나 조각된 년월 등이 조상기로서 조각되어 덧붙여져 있지만, 북위 대부터 조각되어 특별히 뛰어난 20점에는 《룽먼 20품》이라고 하여 육조 진서의 서적으로 남아 있다.

특징[편집]

룽먼석굴의 이 놀라운 석조물들에는 중국 당나라의 고도의 문화 수준과 복잡하고 정교한 사회상이 응집되어 있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된 예술 양식의 완전한 경지를 보여 주는, 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룽먼석굴은 북위의 황제 효문제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룽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석굴 가운데 하나인 황보공굴(석굴사라고도 함)은 서산의 남쪽에 있는데, 비문을 보면 이 석굴이 527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굴 앞에는 목재 구조물을 본떠 만든 지붕이 있으며, 가로대에는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석굴의 주벽은 실물보다 커다란 7개의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다. 당나라 고종은 서산의 남쪽 아랫부분에 봉선사동을 만들었다. 675년에 완성된 이 석굴은 룽먼에 있는 당나라 때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굴 안에는 9개의 거대한 석상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통통한 몸집에 자애로운 얼굴을 한 비로자나불상이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다른 석상들 역시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각각의 특징에 맞는 독특한 표정을 갖고 있다.

여담으로 당고종 대에 세워진 대불의 얼굴은 측천무후의 외모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분포[편집]

봉선사
만불동
빈양동 야경
연화동
약방동
혜간동
  • 재불동(齎祓洞)

제1동이다. 잠계사동(潛溪寺洞)이라고도 한다. 초당, 정관15년(641), 당태종의 넷째아들인 위왕 태(魏王 泰)의 발원으로 조영되었다. 폭 9.4m, 안길이 6.7m, 거의 타원형인 평면, 원형 천정으로 높이는 10.6m이다. 본존의 좌불상과 좌우에는 협시의 나한 ∙ 보살 ∙ 신왕이 있다.

  • 빈양동(賓陽洞)

제2, 3, 4동이다. 북위 선무제의 발원으로 정시2년(505)에 시작하여 중동(中洞)은 북위 말까지 10수년에 걸쳐서 만들었다. 입구의 폭 5.2m, 안길이 6m, 안벽의 폭 7.7m. 본존은 좌상대불이고, 좌우에 보살과 나한, 전좌우에 사자, 좌우벽에 삼존상(三尊像)이 있다. 원형천정에는 큰 연꽃을 둘러싼 주악비천, 앞벽 상단에 유마문수(維摩文殊)의 문답, 중단(中段)에 본생도(本生圖), 하단에 황제 황후의 예배, 요벽에 10신의 부조가 있고 마루에도 연꽃과 구갑이 조각되어 있다. 외벽 좌우에는 반육조(半肉彫)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남동과 북동의 본존은 좌상의 오존상. 원형 천정으로, 중동(中洞)과 닮은 장엄한 형식이며 남동(南洞)은 북제~수, 북동(北洞)은 수~초당(初唐)까지 공사를 하였다.

  •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빈양 중동 남쪽벽에 있는 마애비(磨崖碑). 염위의 왕태가 생모 문덕왕후를 위하여 빈양삼동을 보수, 재불동(齎祓洞)을 신조한 것이 기록되어 있음. 잠문본 찬(撰), 저수량 필(筆)의 예서를 닮은 해서체. 정관15년(641)에 새겼다.

  • 경선사동(敬善寺洞)

제5동. 당초 ∙ 정관18~현경3년(644~658)의 건조. 폭 ∙ 안길이 모두 약 3.2m인 방형평면. 본존좌불과 좌우에 소보살, 좌우벽에 나한 ∙ 공양자 ∙ 보살 ∙ 신왕과 연꽃 가지 위의 소보살을 배치했다.

  • 만불동(萬佛洞)

제9동. 당초 ∙ 영륭원년(680) 대감조신상과 내도장지운선사 발원의 조각명이 있고, 영륭동이라고도 함. 주실의 폭 5.8m, 안길이 6.8m. 중앙 팔각대좌상의 좌불과 반육조 협시로 된 오존불. 좌우벽에 신왕, 주위벽 전체에 1만5천체의 소불을 조각함.

  • 사자동(獅子洞)

제10동. 바깥벽에 불탑의 석각이 있고 ‘탑동’이라고도 함. 초당 ∙ 상원2년(675)의 각명(刻銘)이 있다. 폭 2.4m, 안길이 2m의 사각형 평면. 본존은 네모난 좌대 위에 앉아 있고, 두발(頭髮)은 와권상(渦巻狀). 좌우에 보살, 전좌우에 사자가 있다.

  • 혜간동(惠簡洞)

제11동. 남벽 동쪽 구석에 초당 ∙ 함형4년(673) 서경법해사(西京法海寺)의 승(僧) 혜간(惠簡) 발원의 각명(刻銘)이 있다. 폭 3.8m, 안길이 3m. 미륵의 상(倚像)을 중존으로 하는 5존상이 있다.

  • 연화동(蓮花洞)

제13동. 북위 숙종 효명제 정광(520~525) 초년에 대략 완성하였다. 그후 좌우벽에 6비천(飛天)이 조각되었고, 상감(像龕)은 북제~초당(初唐)에 만든 것임. 입구에 화염첨공(火焰尖拱)의 선조(線彫)가 있고 동굴 내부는 폭 5.5m, 안길이 9.8m의 장방형 평면. 본존은 석가입상을 중심으로 천정에는 큰 연꽃 부조가 있다.

  • 위자동(魏字洞)

제17동. 북위 말의 정광~효창(520~527)경에 만들어졌다. 폭 3.9m, 안길이 3.2m. 보단 위에 5존상이 있고, 천정에는 비천부조가 있다. 좌우벽에도 5존상의 불감이 있고 그 주위와 앞벽에 걸쳐서는 석가 ∙ 미륵 ∙ 관음의 상감(像龕)이 정연하게 늘어섰다.

  • 당자동(唐字洞)

제18동. 초당경에 만들었으나 내부는 미완성 상태이다. 외벽에 목조건물을 흉내낸 처마[軒]가 조각되고, 그 밑 입구 좌우에는 많은 초당명(銘)의 상감(像龕)이 있다. 동굴 내부는 폭 4.5m, 안길이 3.5m인 방형평면.

  • 봉선사동(奉先寺洞)

제19동. 서산 중앙의 산허리를 약 30m 사방으로 파헤친 대동굴. 초당 ∙ 함형3년(672) 고종의 칙명으로 건조가 시작되었고, 상원2년(675)에 낙성. 본존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높이 13m, 통견(通肩)인 대불이며 중층연반(重層蓮弁) 8각대좌에 앉아 있음. 대좌의 기부는 현재 흙 속에 묻혀 있고 광배 꼭대기가 약 16m. 좌우에 나한 ∙ 보살 ∙ 역사 ∙ 신왕 등 도합 9체가 서있어 속칭 9간방(九間房)이라고 부른다.

  • 약방동(薬方洞)

제20동. 문양측에 북제의 도읍사(都邑師) 도흥(道興)의 치질방(治疾方) 석조가, 외벽 좌우에는 대비천과 역사(力士)를 배치한 북제시대의 부조가 있다. 동굴내는 폭 3m, 안길이 3m의 방형평면. 본존은 보단(寶壇) 위에 좌불과 환조의 협시 보살 ∙ 나한으로 된 수나라 양식의 5존상. 좌우벽에도 수나라 식의 5존상을 봉납하는 불감이 있으며, 주위의 소상감(小像龕)에는 북위 말(北魏末)부터 당초(唐初)까지의 조상명(造像銘)이 있다.

  • 고양동(古陽洞)

제21동. 속칭 노군동(老君洞)이라고도 한다. 용문 최고(最古)의 석굴. 북위 효문제 태화18년(494년) 경에 착공하여, 선무제(재위 499~515) 말년에 대충 완성하였다. 동굴내는 폭 6.75m, 안길이 13m의 마제형(馬蹄形)평면, 원형천정이며 높이는 약 11m이다. 정면의 2단 보단상(寶壇上)에 본존좌불, 후벽 좌우구석에 양협시보살의 입상, 앞쪽 좌우에 사자상 들어서있다. 주위벽의 상감(像龕) 감(龕) 중에 북위의 것은 석가좌상 24, 미륵교각상(交脚像) 29, 관음입상 11, 그외에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 등이 있고 조상명(造像銘)은 용문20품을 비롯 당대(唐代)의 것을 포함하면 100여개에 달한다.

  • 극남동(極南洞)

제28동. 서산 최남단에 있고 입구는 동남쪽으로 열려 있다. 정토동(浄土洞, 제26동, 본존불은 아미타불의상)과 같이 측천무후 시기(690~705)에 건조하였다. 동굴내는 폭 4.7m, 안길이 3.45m. 본존은 5존상이다.

  • 간경사동(看經寺洞)

동산의 만불구(萬佛溝) 북쪽에 있다. 성당(盛唐) 초기의 조영(造營)이다. 한변이 약 11m의 방형평면이고, 높이 약 6m인 평천정(平天井)에는 대연화를 둘러싼 6비천의 부조가 있다. 본존은 통견(通肩)의 좌불이며 8각대좌 위에 앉아 있음. 좌벽의 4주요벽(四周腰璧)에는 거의 등신대의 행렬하는 나한 29체가 부조되어 있다.

  • 뇌고대삼동(擂鼓坮三洞)

동산 만불구 남쪽에 있다. 남 · 중 · 북동굴 모두 남서로 면해 열려 있으며, 원래에는 성당 초기의 조영. 남동은 폭 7.7m, 안길이 5.8m, 본존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인 좌불상이며, 방형(方形)대좌에 앉아 있고 4벽의 연지상 천불체의 부조는 천정에까지 이른다. 중동굴은 폭 6m, 안길이 5m. 3기의 삼성보단(三成寶壇)에 본존인 수각(垂脚)미륵과 양보살을 안치함. 좌우벽과 천정에 천체불(千體佛), 4주(四周)요벽에 『25조사』를 부조하였다. 북동은 한변 3m인 방형평면이며 둥근천정. 중앙과 좌우벽에 방좌상(方座上)의 좌불을 안치하였다. 앞벽 우측의 11면 4비관음, 좌측의 6비보살은 용문에 있어서 다면다비상(多面多臂像)의 한 예이다.

관광[편집]

뤄양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약 70위안 정도 든다.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되어있어 입장료는 비수기(12월~2월) 100위안, 성수기(3월~11월) 120위안이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 효문제 때부터 수(隋), 당(唐), 송(宋)을 거쳐 400여년 동안 만들어졌다. 용문석굴은 단일 석굴이 아니라 석굴군(群)으로 크고 작은 동굴 2345개가 남북으로 1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에 분포돼 있다. 용문석굴에는 10만여개의 불상이 있으며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무려 17.14미터이고 가장 작은 불상은 2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룽먼석굴 전경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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