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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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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Sarayı)
돌마바흐체 시계탑
돌마바흐체궁전 내 정원
궁전입구.
궁전 내 샹들리에
셀람륵
하렘
케말 아타튀르크가 죽은 침대
핑크홀
돌마바흐체 모스크
돌마바흐체 궁전 정박장 문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Sarayı)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제국궁전이다. 튀르키예어로 '뜰로 가득 찬'이라는 뜻인 '돌마바흐체'라는 이름이 붙고, 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이전에 세운 궁전인 톱카프궁전과 함께 오스만제국의 주요 궁전에 꼽힌다.

이 궁전은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 압둘마지드 1세가 1856년에 재건했다. 1843년에 착공해서 1859년에 완공했으며 베르사유궁전을 모델로 했다. 유럽에서 보낸 수많은 현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들을 보면 당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 후기 술탄 6명이 일부 사용했다.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 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하렘은 왕실 가정으로 술탄과 가족이 살았으며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 곳을 관저로 쓰다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죽었다. 그 때문에 집무실침실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국회의 관할이라 뮈제카르트로 입장이 불가능하다. 입장료는 세람르크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 하렘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 둘 다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있으며 국제학생증이 있으면 5리라에 세람르크와 하렘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된다.

상세[편집]

돌마바흐체 궁전은 동로마제국 시절에 작은 항구였던 지역을 메워 지은 술탄의 별장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외국 귀빈이 배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와 궁궐 접안시설에 내려 술탄을 접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건설되었던 자리는 원래 해상 원정을 나가기 전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이런 행사에 걸맞게 작은 만을 채워 넣어(dolma/돌마 : 채움, 넣음) 만든 정원(bahçe/바흐체 : 정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해상 원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던 본 공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술탄이 건설했던 건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저택이나 여름별장 수준으로 건설되었던 건물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습기로 인해 건물이 훼손되거나, 지진화재 등으로 오래 보존되지 못한다. 셀림 3세(III. Selim, 재위 : 1789년~1807년)에 이르러서는 이 자리에 건축가 멜링(Antoine Ignace Melling, 1763년~1831년)에게 유럽 스타일의 여름 궁전 건설을 명한다. 파손과 철거, 증축을 반복하여 결국 여름 별장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던 복합건물이 되어버린 이곳을 대대적인 수리와 증축을 거쳐 정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술탄 마흐무드 2세(II. Mahmud, 재위 : 1808년~1839년)였다.

당시 이 궁은 베쉭타쉬 해변 궁전(Beşiktaş Sahilsarayı)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마흐무드 2세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은 셀림 3세가 톱카프 궁전에서 살해당해서만이 아니었다. 당시 도시는 확장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돌마바흐체는 새롭게 확장된 도시 범위 내에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마흐무드 2세가 지향하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백성에게 설득하기 용이한 곳에 위치했던 것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된다.

마흐무드 2세의 후계자였던 압둘메지드(Abdülmecid, 재위 : 1839년~1861년)는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건설했던 목조 궁을 철거하고 석재로 다시 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더불어 톱카프 궁전과는 완전히 다른 측량법과 양식을 이용하여 유럽 궁전 스타일로 건설하라 명령한다. 이는 압뒬메디즈가 가졌던 서구화를 향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6년 6월 7일 개장된다.

그러나 정작 압둘메지드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5년밖에 사용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칼리프인 압둘메지드 에펜디(Abdülmecid Efendi, 1868년~1944년)가 출궁하던 1924년까지 궁전이 사용된 해수는 35년, 6명의 술탄과 마지막 칼리프가 머물렀다. 공화국 건립 초창기에는 대통령의 여름 관사이자 해외에서 튀르키예로 방문한 고위층 손님을 영접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1938년)가 이 궁전에서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고, 그가 사망했던 방의 시계는 그의 사망 시간으로 설정되어있다. 이후 관저로는 더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영빈관으로서 일부 사용되었고, 1952년 일반인에게 개방되기도 하나 다시 폐쇄되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일반에게 다시 공개된 것은 1981년 이후이다.

궁전의 전체 설계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건축가 부자(父子)인 가라베트 발랸(Garabet Balyan, 1800년~1866년)과 니코고스 발얀(Nikogos Balyan, 1826년~1858년)이었으며 내부 장식은 파리 오페라 홀의 장식을 담당했던 샤를 세잔(Charles Séchan, 1803년~1874년)이 맡게 되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전체 크기는 110,000m² 가량이며, 주요 공간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셀람륵(Selamlık), 공식적인 업무처리 공간인 마베인(Mâbeyin : 술탄의 궁), 명절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무아예데 홀(Muayede Salonu : 명절 인사의 홀), 여성들의 공간인 하렘(harem)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외에도 돌마바흐체 모스크와 같은 종교 시설뿐만 아니라 극장과 같은 유흥 시설, 시계탑, 군부대, 작은 별궁, 도서관, 시계탑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간이 있었으며 보트 하우스 앞에는 커다란 항구까지 존재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길게 늘어진 형식으로 양측의 날개 부분과 중앙의 큰 부분으로 나뉘고 있다.

건물의 장식은 앙피르, 로코코 및 바로크 양식을 비롯하여 고전적인 오스만 양식이 혼재되어있다. 특히 정문의 경우 바로크 양식과 로마 제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오스만제국의 장려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마베인의 바다를 바라보는 전면 장식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이용하였으며, 무아예데 홀은 서구 예술의 시대별 양식이 복합적으로 사용되었다.

무아예데 홀의 바다를 바라보는 면 쪽에는 앙피르 양식의 꽃병으로 장식한 바로크 양식의 계단이 눈에 띈다. 하렘 역시 바다를 바라보는 공간은 마베인 홀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이고 풍부한 장식성을 자랑한다. 육지 쪽을 바라보는 벽면의 경우 대체로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이외에도 일부분에서는 풍경과 정물화를 차용한 장식이 자리하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당시 오스만제국의 서구화와 근대화 열망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돌마바흐체 모스크[편집]

돌마바흐체 모스크는 1854년 압둘메지드 시대에 돌마바흐체 궁전 인근에 세워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모스크이다. 돌마바흐체 모스크의 정식 이름은 베즈미알렘 왈리데 술탄 모스크(Bezmiâlem Vâlide Sultan Camii)이지만, 돌마바흐체 궁전의 시계탑 방향을 향하여 세워져 있기 때문에 건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돌마바흐체 모스크로 불린다.

1853년 술탄 압둘메지트 (Sultan Abdülmecit, 재위: 1823년~1861년)의 어머니인 왈리데 술탄 베즈미 알렘(Bezm-i âlem Vâlide Sultan, 1807(?)년~1853년)의 명령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베즈미 알렘의 사망 후 술탄 압둘메지트가 완성하였다. 건축가는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축가 중 하나였던 니코고스 발얀(Nikogos Balyan, 1826년~1858년)이다. 주재료는 석재와 대리석이다.

관광[편집]

이스탄불 전차 1호선 종점인 카바타쉬(Kabataş) 정류장에서 왼편으로 쭉 걸어가면 궁 앞에 바다와 면한 돌마바흐체 모스크가 보이고 조금 더 궁 쪽으로 가면 웅장한 시계탑이 있다. 그 방향으로 쭉 가면 정문이 보인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 건물 전반부를 볼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인 돌마바흐체 궁전은 총길이가 600m, 중앙 연회장을 중심으로 왕의 집무실이있는 셀람륵과 술탄의 가족과 여성들의 공간인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85개 방과 43개 홀, 6개의 하맘(터키식 목욕탕)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장식에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됐을 정도로 매우 호화롭게 지어졌다. 중앙 돔의 높이가 36m에 달하는 술탄의 방 한가운데에는 무게 4.5톤의 샹들리에가 장식돼 있다. 이 거대한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궁전 입구로 들어가면 중앙 홀이 나온다. 배를 타고 궁전에 도착하면 바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 중앙홀은 외국의 대사들에게 오스만제국의 위용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반짝이는 크리스털 난간과 샹들리에로 장식하였다. 중앙홀의 크리스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황제의 접견실이 나온다. 가로와 세로가 각 40m이며 중앙 돔의 높이가 36m인 황제의 접견실은 14만 톤의 금으로 장식한 천장에 45톤의 샹들리에와 750개의 촛대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으로 세계 최대의 샹들리에로 살짝 열린 창문으로 미풍이 불면 샹들리에의 장식끼리 부딪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외에 황제의 접견실에서 여행자의 이목을 끄는 것은 흥미로운 접견실 바닥의 카펫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이 카펫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헤레케의 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황제의 접견실의 위층에는 오케스트라와 외국사절들이 자리하고 아래층 중앙에 술탄이 앉았으며 그 맞은편에는 신하들과 남성들이 자리했다 여성들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술탄의 맞은편 창문에 서서 방을 구경하게 되어 있었는데 술탄 이외에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왕의 접견실을 나와 궁전 정원을 지나면 하렘이 나온다.

하렘으로 입장하면 처음 만나는 방이 제26대 술탄인 압둘 아지즈 방이다. 1861년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압둘 마지드의 동생인 그는 형이 사망하자 술탄이 되었으며 탄지 마트 개혁을 계속 추진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결국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가 그의 치세 속에 오스만제국은 해외의 정복 영토를 하나둘씩 잃어가며 쇠퇴의 길만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는 형의 아들 무라트 5세에게 제위를 물려준 뒤 자살하였다.

다음 방은 연회장인 블로 홀이다. 블루 홀은 이슬람 축일에 술탄의 어머니가 술탄의 부인과 애첩을 초대하는 방으로 하렘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푸른색 커튼 푸른색 의자 청자가 특징인 이 곳에서 순금 밥그릇과 산호 손잡이 그리고 유럽 최고의 크리스털 접시 등 화려함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블루홀과 핑크 홀 사이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방이 있다. 술탄과 황후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핑크 홀은 커튼 장식이 화려하고 핑크빛이어서 핑크 홀이라 부른다. 블루홀과 더불어 핑크 홀은 당시 황후의 높은 예술성과 화려함을 보여준다. 핑크 홀을 마지막으로 하렘을 나오면 아름답게 장식된 바다의 문이 보이며 그 문으로 떠난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떠오른다.

17세기 중반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공격하면서 오스만제국은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683년 비엔나에서 일어난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술탄과 관료들은 물론 군인들까지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스탄불로 돌아온 사람들은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끊임없이 이어진 방탕한 생활은 그 욕구를 채울 외부적 공급이 줄어들자 내분으로 치달았고 그 사이 500년간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보았던 유럽 국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00년간의 힘겨루기 끝에 178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힘의 균형은 오스만제국에서 유럽 국가들에게로 기울어지고 결국 거대한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함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독립 전쟁의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약간의 상식

돌마바흐체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집무를 보는 중에 사망한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에 맞춰서 멈춰있다. 그 외에 오스만제국 시절의 시계들을 모아놓은 박물관, 꿩, 공작 등을 모아놓은 새 동물원, 오스만제국판 수정궁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기 마련인데 꼭 들러보자. 물론 이곳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옆에는 현재는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츠라안 궁전(Çırağan Sarayı)이 있고, 베식타쉬(Beşiktaş) 근처에는 압뒬하미트 2세가 거주했던 이을드즈 궁전(Yıldız Sarayı)이 있다. 이곳들도 기회가 되면 방문해 보자.

해외축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돌마바흐체 궁 바로 옆에 베식타스 JK의 경기장인 Vodafone Stadium이 있다. 일정 시간마다 클럽투어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방문해 보자.

교통

트램을 타고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트램역인 카바타쉬(kabataş)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편으로 몇백 미터 쭉 가면 모스크가 나오고 거기서 더 걸으면 시계탑이 있는 정문을 찾아갈 수 있다.

휴무일

휴무일은 매주 월, 목요일과 튀르키예 정부가 지정한 국가 공휴일이다.

요금 정보

전부 보려면 90튀르키예 리라, 본 궁전을 보려면 60튀르키예 리라, 흔히 하렘으로 불리는 후궁들의 거주 공간은 40튀르키예 리라를 내야 한다. 그러나 국제 학생증을 보여준다면 파격적인 20튀르키예 리라로 할인되는 것을 유념할 것. 참고로 이곳은 튀르키예 국회 소유이기 때문에 튀르키예 관광청에서 발급하는 이스탄불 패스나 뮈제카르트(Müzekart)가 통하지 않는다.

—-> 2022년 9월 현재, 입장료가 300리라로 바뀐 상태. 각 공간 구분 없이 무조건 저 가격을 내야함. 그리고 가격이 언제 또 바뀔지 모르겠음

2023년 1월 기준으로 공간 구분 없이 450리라, 국제 학생증 제시 시 70리라로 입장이 가능하다.

입장시 유의할 점

입장표를 사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캐리어는 들고 갈 수 없으며 보안 검색대와 밖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맡아주지 않는다. 덧신을 신고 입장한다. 가는 길은 보통 두텁고 붉은 양탄자로 덮혀져 있다. 외부 촬영은 제한없지만 내부 촬영은 금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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