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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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 영어: Palace of Versailles)은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시대에 건설된 궁전이다.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건설에는 무려 25,000~36,000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되었다. 궁전 건물의 면적보다 더 넓은 정원이 유명하며, 별궁으로 대 트리아농 궁과 소 트리아농 궁이 있다.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이 거주했다.
유럽에는 이 궁전을 모방한 궁전이 많다.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초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세고비아 근교의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Palacio Real de La Granja de San Ildefonso)이나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지은 토리노 근교의 베나리아 궁전(Reggia di Venaria Reale), 폴란드 바르샤바 교외에 얀 3세가 지은 빌라누프 궁전 등이 베르사유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궁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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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베르사유 궁전은 과거 프랑스에 국왕의 거처이자 프랑스 정치의 중심지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정기의 프랑스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광활한 부지에 건설된 베르사유 궁전은, 메인이 되는 「베르사유 궁전」과「정원」, 그리고 2개의 별궁 「프티·트리아농」과「그랑·트리아농」으로 크게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부지 총면적은 약 1000헥타르(2,420,000평)로 말도 안 되게 커다란 크기이다. 메인 베르사유 궁궐은 길이만 550m로, 700개가 넘는 방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을 도입한 매우 화려한 궁궐이다.
설계는 프랑수아 망사르라는 인물로 프랑스 바로크 양식 건축의 일인자며 절대왕정 군주제를 건축물로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파리 경관의 일부가 된 사방으로 꺾인 이중 경사 지붕을 맨사드지붕이라 하는데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내부 장식은 루이 14세의 화가로 활약했던 샤를 르블랑이 담당했다. 당시 왕족들의 거처이기도 하고, 귀족과 고위 관료들이 이곳에 모여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1~2만 명이 베르사유에 있었다고 한다. 1979년에 베르사유 궁전은 정원 모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베르샤유궁은 단순 사치를 위한 궁전이 아니라 태양왕 루이14세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 지역 귀족을 이 궁으로 모이게하면 그 귀족들을 감시하기 쉽기 때문이였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 루브르궁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건축물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1,400개의 분수들 그리고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베네치아산 거울로 된 길이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었던 베르사유 조약이 1919년 6월 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과 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또한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베르샤유궁을 본격적으로 궁전으로 만든 절대왕정의 태양왕 루이14세는 자신을 상징하는 태양,태양신인 아폴론을 베르샤유궁에 배치했다. 대표적으로 거울의 방 천장화에 아폴론을 그려놓았고 아폴론이 끄는 마차를 동상으로 장식된 분수또한 만들었다. 이러한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지만 베르샤유궁의 위치는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센강의 물을 펌프로 퍼 와야 했다. 또한 아폴론의 동상을 궁정에 놓았고 이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상징하는 것을 궁전에 디자인 장식으로 사용했다.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나중에는 프로이센(프러시아)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궁에서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열리기도했다.
한편, 베르사유 궁전도 그 시절 화장실이 없어 악취와 오물로 악명 높았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당시 루이 14세 왕가뿐만 아니라 당시의 수 천명 귀족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화장실 시설이 없어서 궁전 복도 구석이나 정원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생시몽 공작의 회고에 따르면 아르쿠르 공주는 걸어가면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아 주위 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상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루이 14세의 지시에 따라 오렌지나무들을 궁전 내에 배치해 냄새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역사[편집]
베르사유에 최초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으로, 당시엔 U자형의 날개건물 구조의 궁성으로 외벽은 회칠만 한 상태였으나 1634년 모서리 쪽에 방을 증설하면서 현재의 정면부 파사드의 기초가 되는 붉은색 벽돌과 회색빛 귀퉁이 벽인 우석과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조각상으로 된 파사드로 바꿔졌다. 이때는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루이 13세 사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651년 루이 14세가 한 번 방문한 이후 1661년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보 르 비콩트를 척도로 삼고, 푸케가 자신의 궁성을 설계한 예술가들인 루이 르 보와 샤를 르 브룅, 앙드레 르 노트르를 시용해 각각 건축, 실내 설비, 정원 정비 등을 맡기면서 1665년까지 베르사유 궁성의 확장공사를 시작해, 궁성 남쪽에 궁성의 파사드와 비슷한 건물 몇 채를 신축했고, 옛날 궁성의 손님맞이 뜰을 대리석 포장을 했다.
이후 1668년 르 보의 개축 계획을 실행해 1670년까지 양 측면에 아파트먼트인 뒤 루아(Du Roi), 들라 헨느(De La Reine)라는 두 채의 날개 건물을 증개축 해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바뀌었고, 정원 쪽도 마찬가지로 양면에 새로 증축된 날개건물과 연결되는 두 개의 날개 건물을 증축했고, 양 측면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되었다. 이때 나중에 거울의 방이 들어설 부분이 발코니로 양쪽의 날개 건물과 연결되었다.
이후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왕궁으로 삼겠다는 결정을 했고, 죽은 루이 르 보를 대신해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베르사유 궁전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해 베르사유 궁전의 다음 증축을 계획하게 했다. 그리고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계속해서 대대적인 건설을 하여 1686년 후면 측 발코니를 개축해 거울의 방을 완성했고, 동쪽 측면 측에서 새로 aile du midi라는 새로운 날개 건물을 신축, 다시 궁전 남쪽으로 큰 마구간(Grande écurie)과 작은 마구간(Petite écurie)이 완공, 궁전과 두 마구간 사이에 aile des ministres라는 l자형의 건물 두 체를 신축했다.
뒤이어 aile des ministres와 aile du midi 사이에 정사각형에 중정이 있는 Grand commun이 세워졌고, 다시 서쪽 측면에 북쪽 날개(Aile Du Nord)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이 신축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전체모습은 지금의 ㅠ형의 구조가 완성되면서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다. 또한 귀족들의 권력을 누르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대귀족들은 강제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으며, 베르사유 시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0년 북쪽 날개에 왕실 성당인 생루이 성당이 신축되면서 봉헌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저택인 파리의 팔레 루아얄이 중심이 되고 루이 15세는 튈르리 궁전에 거처했다. 1722년, 성인이 되자 루이 15세도 베르사유로 옮겨와서 다시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몇몇 방을 제외하고,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인테리어 대신 로코코 양식의 인테리어로 리모델링되었고, 1770년 다시 북쪽 날개 끝으로 왕실 극장이 신축되었다.
1789년,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민중의 압력에 밀려 거처를 파리로 옮겨오면서 베르사유는 방치되었고 이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국왕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및 나폴레옹 3세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머물지 않아 궁전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했고,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이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빌헬름 1세가 이곳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출범을 선언한 흑역사가 있다. 이후 1919년에 똑같은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강화회의가 열려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돼 베르사유 체제가 형성됐다.
현재는 박물관 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오디오 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다. 한국어 서비스는 성우 정재헌과 서혜정이 녹음했다.
구조[편집]
거울의 방[편집]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전쟁의 방, 남쪽으로는 평화의 방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다.
이 방 전체를 빼곡히 수놓은 357개의 거울들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 르네상스 이후 거울 제조법은 베네치아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자국의 거울 제조법이 타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베네치아의 거울 장인 2명이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제조법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물론 이 사실은 타국에는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프랑스가 이 방이 완성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베네치아의 사신들을 초빙하여 이 방을 보여준 것인데, 방에 처음 들어선 사신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곳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빌헬름 1세가 신생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를 기록한 그림도 유명하다. 훗날 프랑스는 이를 설욕하고자 이 곳에서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시키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거울의 방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 반세기도 못되어 같은 장소에서 몰락하였다. 독일의 영광과 굴욕을 함께 지켜본 곳이라 하겠다.
이 거울의 방을 본 따서 만든 건물들이 꽤 많다. 파리 중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의 사교장이나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드리드 왕궁, 이탈리아 토리노의 베나리아 궁전 등에도 이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만든 방이 있다. 특히 오페라 가르니에의 것은 한층 더 화려한 편. 하지만 오리지널에 비해서 너무 번잡한 느낌도 있다. 압도적인 거대함보다는 거울 중심의 화려한 장식 및 천장화가 볼거리임으로 꼭 밝은 날씨에 찾아가도록 하자.
전쟁의 방[편집]
거울의 방 북쪽에 위치한 방이다. 국왕을 상징하는 방으로, 거울의 방을 통해 왕비의 처소였던 평화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즉, 거울의 방은 구조상으로 볼 때에 일종의 길쭉한 복도이며 그 북단과 남단에 각기 국왕과 왕비의 방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곳이 왕의 침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왕의 침실와 서재는 거울의 방 중앙에 위치하였다. 즉, 전쟁의 방을 통해 거울의 방에 들어서면 그 한 가운데에 왕의 침실이 있었던 셈이다.
전쟁의 방은 국왕을 상징하는 방 답게 대리석과 황금으로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한쪽 벽면에는 루이 14세를 신격화한 화려한 조각상이 황금으로 된 장식과 함께 놓여 있다.
평화의 방[편집]
거울의 방 남쪽에 위치한 방이다. 국왕의 왕비를 상징하는 방으로, 거울의 방을 통해 왕을 상징하는 방인 전쟁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울의 방이 일종의 복도라면 그 남단과 북단에 평화의 방과 전쟁의 방이 위치하고 있는 구조를 띈다.
전쟁의 방을 통해 거울의 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면 바로 이 평화의 방이 나오는데, 그 곁으로는 왕비의 침실과 접견실, 경호병들의 방 등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왕비의 처소인만큼, 전쟁의 방 만큼은 못해도 몹시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는 호화스러운 방이다.
헤라클레스의 방을 통해 전쟁의 방과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이곳과 연결된 왕의 침실과 평화의 방 등을 구경하는 것은 지금도 베르사유 궁전의 주요 관람 코스이다.
왕실 성당[편집]
부르봉 왕조의 수호성인인 생 루이(성 루도비코)[18]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1689년 쥘 아르두앙 망사르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어 망사르가 죽은 이후 로베르 드 코트에 의해 1710년 완공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프랑스 왕족들의 세례식과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결혼식이 치러졌고, 왕실 가족과 귀족들은 아침 미사에 매일 참례했다. 총 2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은 궁전을 방문하는 관리와 귀족의 자리였고, 2층은 왕족들의 자리였다. 내부에 늘어선 코린트식 원기둥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건물 내부의 수직 비례는 바로크 양식보다 고딕 양식에 가깝다.
프티 트리아농 궁[편집]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5세때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서 별궁으로 18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다. 당대에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왕실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이 설계를 맡았고 공사는 1762년 시작되었지만 정작 완공된 것이 마담 퐁파두르가 죽은 이후인 1768년에 끝이 났기 때문에 궁전은 루이 15세의 마지막 애첩 뒤바리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궁전은 왕비나 왕의 애첩들에게 주어졌으며 이 별궁에서 즐겨 머무르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였던 마리 루이즈 등이 대표적이다.
궁전은 로코코 양식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변해가는 18세기의 건축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총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간결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내부는 궁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방 일부가 공개되고 있으며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희귀한 가구와 아름다운 장식품,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그랑 트리아농 궁[편집]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 소운하 근처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4세 때 그의 애인인 매트농 부인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명한 왕실 건축가 망사르가 설계를 맡았다. 공사는 1687년 시작되어 1688년에야 끝이 났다. 단층 건물로 완공된 그랑 트리아농은 아름다운 분홍빛 대리석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리석 트리아농’이란 별칭으로도 불렸고 방마다 기다란 창문이 나있으며 기둥의 끝 부분은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내부 또한 매우 화려하며 조각상, 그림, 가구 등을 비롯한 다양한 왕실 장식품 및 예술품 등을 볼 수 있으며 건물 주변에는 잘 정돈된 정원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기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나폴레옹 시기에 다시 사용되었다. 현재는 베르사유를 찾는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국빈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1979년 베르사유 궁전 지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편집]
베르사유 궁전 지역 내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 촌락 형식의 별궁. 18세기 귀족들 사이에서 시골 생활 체험이 유행했는데,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이러한 유행에 심취하여 1783년 촌락 형식의 별궁을 베르사유 궁전 내에 조성했다. 촌락은 커다란 호수를 기점으로 총 10여 채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전보다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왕비의 집을 비롯하여 시골의 전형적인 물레방아와 그 밖에 다양한 농가 시설, 단층집, 마리 앙투아네트 농장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밭 등을 볼 수 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재미 삼아 낚시, 소 젖 짜기, 농작물 재배와 같은 시골 농사일을 경험했다. 오늘날의 전원 생활이나 주말 농장의 시초나 마찬가지.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대리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비디오 게임과도 맥락이 통한다. 현재는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로열 오페라 극장[편집]
로열 오페라 극장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연 관람하는 것이지만, 여의치 않다면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베르사유 궁전을 대표하는 공연 장소로, 최대 1,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음향 시설이 뛰어나며, 포페인팅(Faux painting)이라고 하는 특수기술로 제작된 대리석과 유사한 나무로 지어졌다. 오페라, 오케스트라, 연극 등 현재까지도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으니, 여유가 된다면 미리 공연 티켓을 예매해보자.
관광[편집]
파리 관광 시 하루 정도가 베르사유 관광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뮌헨 관광 시 하루 정도가 퓌센 관광으로 채워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 별도의 교통수단을 고려할 수 있는 부자가 아닌 이상 RER을 타는 것이 일반적. RER은 도시교통망이 아니라 광역교통망이므로 일반 패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별도의 표가 필요하다. 대신 RER 매표소에서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고 RER 승차권을 요구하면 날짜를 하루 까고 표를 받을 수 있으니 현명하게 이용하도록 하자.
루브르, 오르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역시 파리 뮤지엄 패스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아침 일찍 이동하여 개장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 좋다. 또한 베르사유 궁의 내부는 사람이든 물가든 당황스러울 수준이기 때문에 빵 혹은 샌드위치를 싸가는 것을 추천. 보통 궁전 내부를 구경하고 나와 정원으로 나오면 딱 점심시간이 된다. 멋모르고 관람 도중 출구로 나오지 않도록 주의. 재입장 시 다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일찍 도착하지 못해 대기 중인 사람이 많은 경우 정원을 먼저 구경하고 궁 내부를 나중에 보는 것도 좋다. 길게 늘어선 줄은 모두 궁 내부 관람대기 줄이다. 보통 궁 내부를 먼저 보고 다들 정원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반대 순서로 돌면 사람을 피해 한적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정원은 궁전 들어갈 때와 달리 표가 없어도 되고 짐 검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관람은 짐 검사 때문에 궁전에 들어가는 것도 오래 걸리지만 표 사는 데도 꽤 오래 걸린다. 표 파는 창구 왼쪽 방에 티켓을 파는 기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걸 잘 모르거나 티켓 창구를 이용하는 걸 선호해서 티켓 파는 기계 쪽은 한산하다. 일단 표 사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티켓 기계 쪽을 살펴보자. 어지간하면 10분도 안 돼서 표를 살 수 있다. 이런 것도 귀찮으면 그냥 인터넷 예매를 하고 표를 인쇄해 가자.
일반적인 경우 프티 트리아농과 그랑 트리아농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적극적으로 베르사유를 감상하려는 경우에나 포함되는 코스. 그도 그럴 것이 이곳까지 오려면 베르사유 내부의 이동 셔틀을 이용하거나 3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며, 때때로 특별 전시가 있기도 하다.
사족으로 정원 내부에 심각하게 벌이 많다. 그만큼 꽃과 식물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관람객에게는 공포스러울 수도 있다. 특히나 아이스크림이나 단맛이 나는 식품을 가진 경우 벌이 떼 지어서 몰려드니 조심해야 한다. 립톤은 뚜껑을 닫아도 병 입구로 벌들이 다닥다닥 붙는다. 참고로 내부에 인근 오랑쥬리에서 수확한 오렌지를 즉석으로 착즙하여 주스를 만들어 주는 오렌지 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주스의 양에 비해 꽤 비싸지만 그래도 먹을 만 하다.대신 앞서 말한 벌을 조심하자.그냥 웬만하면 생수만 가지고 가는 게 편하다. 더불어 고양이도 많아서 고양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겐 천국이다. 하지만 붙임성은 없으니 무시한다고 슬퍼말자.
분수가 꽤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센 강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높이도 더 높기 때문에 분수쇼를 하기 위해 물을 멀리서 끌어와야 한다. 지금이야 기계를 쓰지만 예전엔 인력만으로 이걸 유지하는 것도 벅차서 왕의 행차 때에나 겨우 쓸 수 있었다 한다.
26세 이하의 학생은 국적 불문하고 유학사증이나 (국제)학생증만 제시하면 일부 코스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파리 내 박물관이라면 대부분 통용되니 관람료를 지불하기 전에 유학사증이나 (국제)학생증을 제시하고 무료 관람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베르사유 궁전 운영 측에서 미술 전시도 가끔 병행하고 있다. 한국 출신 작가로는 이우환이 이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또한 세월호 참사로 논란이 된 유병언이 전시를 열기도 했다. 때문에 돈만 대주면 전시를 열어주는 곳이란 오명을 쓰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쇄신하고 있다는 듯.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베르사유 궁전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chateauversailles.fr/
- 〈베르사유궁〉, 《위키백과》
- 〈베르사유 궁전〉, 《나무위키》
- 〈베르사유 궁전〉, 《두산백과》
- 〈베르사유 궁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 〈베르사유 궁전 여행 정보 총 정리 : 파리여행 정보〉, 《유로메이트》
- 주오이시디대표부, 〈프랑스 문화가산책: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주오이시디 대한민국 대표부》, 2016-06-17
- 〈파리 베르사유 궁전 완벽 가이드: 꼭 가야 할 명소부터 추천 맛집까지 한 번에!〉, 《아고다》, 2019-08-0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