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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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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왕각(滕王閣)
등왕각(滕王閣)
등왕각(滕王閣)
당나라 등왕각도
등왕각(滕王閣)

등왕각(滕王閣, téng wáng gé)은 중국 장시성 신건현(남창) 서쪽 공강을 바라보는 곳에 있었던 누각이다. 등왕각은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막내아들 원영(元嬰)이 홍주자사(洪州刺史, 지금의 남창)로 있을 때 지은 전각(殿閣)이다. 등왕(滕王)의 유래는 태종(太宗,626-649) 이세민(李世民)의 동생인 원영이 등왕(滕王)에 봉작(封爵)되었기에 '등왕각'이라 부른다.

개요[편집]

등왕각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汉市, 무한시)의 황학루(黄鹤楼), 후난성(湖南省) 웨양시(岳阳市, 악양시)의 악양루(岳阳楼)와 더불어 강남 3대 명루(江南三大名楼)의 하나. 당의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아들인 등왕 이원영(李元嬰)이 영휘(永徽) 4년인 653년에 처음 건립하였으며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 남창시) 서남쪽, 장강의 지류인 간강(赣江, 감강) 동안, 둥후구(东湖区, 동호구)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 건립 후 20여 년 후 후임 홍주도독(洪州都督)이 이를 재건하고 문인들로 하여금 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중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 Preface to the Pavilion of Prince Téng)가 유명하다. 이후 송(宋), 원(元), 명(明), 청(清)에 걸쳐 수십 차례의 중건 및 복구를 거쳤으며 이에 따라 건물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현재의 등왕각(縢王閣)은 높이 57.5m의 9층, 내부면적 13,000㎡의 위용으로 1989.10월 복원되어 난창시(南昌市, 남창시)의 상징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역사[편집]

당나라 때인 653년(영휘 4년) 당시 이 땅에 봉해진 이원영(당 고조의 22번째 아들)의 도락에 의해서 지어졌다. 그는 처음은 등현(현재의 산둥성 등주시)에 봉토되었기 때문에 《등왕》으로 불렸고, 이것 때문에 《등왕각》으로 불린다. 전란 등에 의해 수차례 파괴되었다. 청나라 동치 연간에 28번째의 재건을 했지만 1929년에 군벌들 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것은 1989년에 재건된 것으로 29번째의 재건을 한 것이다.

등왕각서[편집]

왕발[편집]

왕발(王勃, 650~676)은 양형(楊炯)·노조린(盧照鄰)·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4걸(初唐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왕발의 자(字)는 '자안(子安)'으로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에서 출생했다.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로 6세 때부터 문장을 하였고, 17세 때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일을 하던 중 황제의 아들을 풍자한 ‘격영왕계문(檄英王鷄文, 영왕의 닭을 성토하는 글)’을 지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중앙에서 쫓겨나 사천(四川) 지방을 방랑한 까닭이다.

그 뒤 괵주(虢州)의 참군(參軍)이 되었으나, 관노(官奴)를 죽인 죄로 사형이 내려져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히 사면 받았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교지(交趾, 베트남 북부)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당시 나이가 27세였다고 한다.

시의 탄생[편집]

이 시의 탄생에 대해 재미나는 이야기가 몇 개 전해온다. 때는 당 고종(唐 高宗) 2년(671) 홍주 수호(守護) 염백서(閻伯嶼)가 등왕각을 수리하고 그해 중량일(9월9일)에 손님을 크게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미리 자기의 사위인 오자장(吳子章)에게 등왕각 서문(序文)을 짓게 하고 자랑을 하려 잔치를 베푼 것이다.

행사 당일 염백서는 종이와 붓을 내어놓고 등왕각 서문을 지으라고 손님들에게 청하니 아무도 흔쾌히 지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왕발은 아버지 왕복치의 임지(任地)인 교지에 가려고 장안을 떠나, 등왕각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가장 젊은 손님이었다. 염백서가 낸 지필(紙筆)이 왕발의 앞에 왔을 때, 왕발은 이를 받아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붓을 들었다.

염백서는 왕발이 어떤 글을 짓나 궁금하여 아래 벼슬아치를 시켜 문장이 작성되는 대로 보고토록 했는데, 마침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한 가지로 날고, 가을빛을 띤 강물과 길고 넓은 하늘이 다 같이 한빛을 이루었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구절에 이르자, 이를 칭찬하여 "천하의 천재로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따라서 아래에 소개하는 왕발의 <등왕각> 시는 <등왕각서(騰王閣序>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시이다.

등왕고각임강저(滕王高閣臨江渚)
패옥명란파가무(佩玉鳴鑾罷歌舞)
화동조비남포운(畫棟朝飛南浦雲)
주렴모권서산우(朱簾暮捲西山雨)
한운담영일유유(閑雲潭影日悠悠)
물환성이도기추(物換星移度幾秋)
각중제자금하재(閣中帝子今何在)
함외장강공자류(檻外長江空自流)
등왕 높은 누각 강가에 임했고,
옥 소리 방울 소리 가무도 사라졌네.
아침에는 단청한 마룻대에 남포 구름이 끼이고,
저녁에는 주렴 걷고 서산의 비를 보노라.
떠도는 구름 물에 비쳐 언제나 한가롭고,
세상 바뀌고 세월 흘러 몇 해나 지났던가.
이 누각 속 주인 지금 어디 있는고,
난간 밖 장강 물만 부질없이 흘러가네.

강저(江渚)는 '강기슭'인데 여기서는 장강이 아니라 장강의 지류인 '감강(竷江)'을 말한다. 감강은 장시성을 거쳐 파양호로 흘러 들어간다. 패옥(佩玉)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좌우에 늘려 차는 옥'이고, 명란(鳴鑾)은 '임금의 수레에 다는 방울'이다. 화동(畫棟)은 '단청한 마룻대', 즉 '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도록 된 도리'이고 남포(南浦)는 '남쪽 포구', 주렴(朱簾)은 '붉은 구슬로 꿰어 만든 발'이다. 서산(西山)은 '서편에 있는 산'으로 일명 '남창산'이라고도 한다.

한운(閑雲)은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 담영(潭影)은 '연못에 비친 구름 그림자'로 담(潭)은 강(江)자의 중복을 피하려 쓴 것이다. 참고로 한시에서는 여러 가지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첩자(疊字) 금지'라는 것이 있다. '같은 글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뜻이 같은 다른 글자를 쓴다는 것이다. 유유(悠悠)는 '여유 있고 한가로움'을 말하고, 물환성이(物換星移)는 '사물이 바뀌고 별자리가 옮겨짐'으로 '오랜 세월의 흐름과 세상의 변천'을 뜻한다.

기도추(度幾秋)는 '몇 번의 가을을 보냄(오랜 세월이 지남)'이며, 제자(帝子)는 '제왕의 아들' 곧 등왕각을 세운 당고조(唐高祖, 李淵)의 아들인 원영(元嬰, 봉작이 滕王임)을 가리킨다. 함외(檻外)는 '난간의 바깥', 장강(長江)은 '물줄기가 긴 강'으로 여기서는 '양자강(揚子江)'을 말한다.

관람[편집]

동판에 세긴 <등왕각서>. 송(宋)시대 최고 문필가인 소동파가 썼으며 앞에는 왕발을 청동으로 조작해 놓았다.
등왕각 2층의 '인걸도(人杰圖)'. 장시성의 명사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의 등왕각은 무려 28차례의 흥성과 쇠퇴를 반복한 뒤 마지막으로 1926년 북양군벌 등여탁(鄧如琢) 부대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1989년 29번째로 새로 재건한 지금의 등왕각은 높이가 57m이고, 본채 건물은 5층이지만 내부는 7층으로 되어있다. 남창 시내 서쪽에 우뚝 솟아있으며 뒤편에 감강(竷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각(閣)에 들어서니 등왕각을 주제로 한 예술전당에 온 기분이다.

이제 1층부터 관람해보자. 이곳에는 왕발의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상징할 수 있는 대형 한백옥(漢白玉)으로 부조(浮彫)한 <시래풍송등왕각(時來風送滕王閣)>이 반긴다. 이 글귀는 '때에 불어온 바람이 등왕각으로 보내 주었다'라는 뜻으로 명나라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쓴 《성세항언(醒世恒言》의 <마당신풍송등왕각(馬當神風送滕王閣>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발은 장강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가 난징을 출발해 장시성 펑저(彭澤)의 마당산(馬當山)에 도착했을 때 파도가 험해져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왕발은 태연히 시를 적었다. 마당산의 신선(神仙)은 이에 감동하고 내일 중양절(九월九일)을 맞아 등왕각에 행사가 있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고 난창까지는 700리 길이나 되어 도착하기에는 무리수였다. 그런데 왕발이 탄 배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배를 밀어주니 다음 날 새벽 난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시래풍송등왕각(時來風送滕王閣)> <운퇴뢰굉 천복비(運退雷轟薦福碑)>라는 내용이다. "때가 오니 바람이 불어 왕발을 등왕각으로 날려 보내 주었고, 운이 물러가니 벼락이 천복비를 때렸다'라는 뜻이다.

등왕각 2층에는 '인걸도(人杰圖)'라는 벽화가 이곳 강서성의 명사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인물들은 진(秦)나라로 부터 명조(明朝)까지 모두 80명에 달한다. 도연명(陶淵明), 구양수(歐陽脩),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등 알고 있는 이름들이 보이다. 모두 중국 문학사를 빛낸 문인들이다.

3층에는 난간이 사방을 두르고 회랑의 처마 밑에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남북에는 '강산입좌(江山入座)' '수천공제(水天空霽)' '동숙포운(棟宿浦雲)' '조래상기(朝來爽氣)'라 쓰여 있다.

강산입좌(江山入座)는 '강과 산이 좌정(坐定)했다'는 말로 등왕각 앞으로 감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서산(西山)의 매령(梅嶺)이 우뚝한 것을 가리킨다. 수천공제(水天空霽)는 '강물과 하늘이 쾌청하다'는 말이고, 동숙포운(棟宿浦雲)은 '누각의 용마루에 포구의 구름이 잠든다'는 뜻이다. 조래상기(朝來爽氣)는 '아침마다 상쾌한 기운이 온다'는 말이다. 이 현판들은 모두 청나라 때 채사영(蔡士英) 때 등왕각을 중수하며 걸었던 것들이다.

4층은 장시(江西)의 산천의 신령함을 주제로 한 <지령도(地靈圖)>가 눈에 띈다. 인걸도와 함께 쌍벽(雙璧)을 이루고 있어 관람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지령도>에는 대유령(大庾嶺), 여산(廬山), 파양호 등 강서성의 명산대첩(名山大捷)을 담았다.

5층의 회랑 처마에는 사방에 현판이 걸려 있고, 6층은 난간에 기대여 관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대청에 들어서면 소동파(蘇東坡)가 쓴 천고명편(千古名篇)의 <등왕각서(滕王閣序)>가 보인다. 아울러 여기에는 당나라 음악과 춤을 본뜬 공연프로그램이 열린다고 한다.

등왕각에서 내려와 누각 주변의 정원을 감상하노라면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남원(南園), 오른쪽이 북원(北園), 아래쪽이 동원(東園)이다. 북원에는 석산(石山), 등왕각서인보(滕王覺序印譜) 등으로 멋지게 조성되어 있다. 백옥석상으로 만든 청년 왕발의 모습이 늠름하다. 왕발이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나이는 불과 26세이다.

그에 관한 일화가 또 하나 있다. 그는 시작에 임해서는 먼저 먹을 잔뜩 갈아 놓고는 술에 흠뻑 취하여 잠에 곯아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붓을 잡아 문장을 완성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복고(腹稿)'였다. '배 속에 원고가 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화려하면서도 기려(奇麗)한 시풍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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