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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파가스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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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위치

안토파가스타주(스페인어: II Región de Antofagasta)는 칠레 북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

개요[편집]

안토파가스타주의 면적은 126,049.1㎢이며 인구는 530,879명(2012)이다. 주도는 안토파가스타이며 3개 현(안토파가스타 현, 엘로아 현, 토코피야 현)을 관할한다. 북쪽으로는 타라파카주, 남쪽으로는 아타카마주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접한다.

1879년까지는 볼리비아령(領)이었으나 대(對)페루·볼리비아 전쟁을 거쳐 칠레령이 되었다. 팬아메리칸하이웨이·남북종관철도를 비롯하여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로 통하는 횡단철도가 지난다.[2]

자연환경[편집]

내륙부에는 질산칼륨 지대가 펼쳐지고, 북부에는 추키카마타·만토스블랑코스 구리광산이 있으며 미개발의 대규모 구리광맥이 뻗어 있다. 그 밖에 황·요오드·붕사(硼砂) 등도 채굴된다. 칠레 북부는 사막 기후이지만 훔볼트 해류의 영향으로 쾌적하다. 사막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건조 기후에 속하며, 기호는 BW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250mm 미만으로 되게 덥고 건조하다. 온난 사막 기후와 한랭 사막 기후로 크게 구분되어 있다. 그러니까 한랭 사막 기후(BWk)의 경우 온난 사막 기후(BWh)보다 강우량이 더 낮다는 특징이 있다. 토양은 사막토로 매우 건조하고 회색을 띤다. 이 기후에 속하는 지역은 식물이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선인장류의 식물이 살기도 한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매우 크다. 그리고 식생 조건이 충족되는 식물군은 대추야자가 대표적이다. 연간 강우량이 251mm가 초과됨에도 불구하고, 증발량이 도리어 많아지게 되면 당연히 BSh, BSk가 아닌 BWh 혹은 BWk로 판정된 지역도 물론 있다.[3][4]

역사[편집]

19세기 말엽 산티아고 정부는 아라우카니아 병합 당시 마푸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면서 남쪽 지역도 장악했다.1881년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조약을 맺어 마젤란 해협에 대한 칠레의 영유권을 확정했다.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을 두고 벌어진 태평양 전쟁(1879~1884) 때 페루와 볼리비아와 싸워 볼리비아를 내륙으로 밀어내고 거의 국토의 1/3 넓이의 새 북쪽 땅을 얻었다. 또한 칠레가 볼리비아로부터 점령한 영토(아타카마 사막)에는 초석이 풍부하여 칠레의 번영에 기여했다.

1891년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 분배를 놓고 일어난 칠레 내전이 일어났고, 칠레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내전은 해외 투자자와 강한 연줄이 있던 에드워드 가문처럼 지역 산업 발전과 막대한 칠레의 은행 이자의 혜택을 입은 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칠레 경제는 과두정 정부의 기득권을 지키는 체제로 퇴보했다. 1920년대에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성장해 개혁주의자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보수적인 의회 때문에 좌절됐다. 알레산드리 팔마의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식 정부로 변질되었다.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집단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발흥했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는 1932년까지 정치적 불안정을 겪는다. 이 시기 10개 정부중 가장 오래 지속된 정부는 1925년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사실상 독재정권을 수립한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의 정부였다. 그러나 이는 라틴 아메리카 다른 국가에서 빈번했던 군사 독재의 잔인함과 부패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고, 수십년 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정권에 비할 바도 못 되었다. 이바녜즈 델 캄포는 비록 이념 성향이 모호하고 변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권력을 양도해 30년이 넘도록 대다수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헌정 질서가 복원됐고 강력한 중산층 정당인 급진당이 부상했다. 이후 20년간 급진당은 연정의 주요 세력이었다. 1952년 유권자들은 이바녜스 델 캄포를 다시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선출했다. 1958년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이바녜스 델 캄포를 승계해 칠레 보수 정치를 다시 민주적으로 전환했다.

1964년 기독교 민주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돼 주요 개혁 정책을 폈다. "자유하의 혁명"을 슬로건으로 프레이 정부는 사회 경제 정책, 그 중 특히 교육, 주택,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조합화 등 농업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7년 프레이는 좌우파 양측의 반대에 부딪혔다. 좌파에서는 그의 정책이 불충분하다고 보았고, 우파가 보기에는 너무 과도하다고 본 것이다. 프레이 정부 임기 말에 그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으나 기독교 민주당이 당초 바라본 목표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1970년, 칠레 공산당 후보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이룬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36.62%를 득표해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곧바로 사회 제도 개혁에 착수하는데, 이는 칠레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자본가들과 칠레경제를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목축업자들을 지배하던 스위스 네슬레 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자본가들이 독점한 부의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극심한 빈부의 격차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또한 미국 광산 회사 아나콘다가 소유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여 외국계 기업들에 의한 국부 유출을 막고자 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 정부는 국제 구리 값을 폭락 시키고 칠레 경제는 공황을 겪게 된다. 또한 미국 CIA에서는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어선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아옌데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칠레 국민들은 사회개혁을 실천한 아옌데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러자 칠레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해고와 가축도살을 통한 실업과 식량난을 조장했으며, 친미파 장교들이 지배하던 군부에서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 그럼에도 아옌데 대통령은 국가전복음모를 꾸민 군부를 견제하기보다는, 국민투표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군부에서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기에 이른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군은 공군 장성 출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호크기를 동원해 라 모네다(칠레의 대통령궁)를 폭격하는 와중에 아옌데는 대(對)국민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전하고서는 기관총으로 피노체트 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자결했다.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 및 장성들은 훈타라고 불리는 삼인 체제를 설립하고 곧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된다. 피노체트는 16년간의 군부독재기간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 고문 등의 국가범죄로 탄압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압력을 받아 치루어진 선거에서 패배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났다. 이는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진행된 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다. 1989년부터 2009년까지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협력체 소속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당이 연립정권 형식으로 집권했다. 2010년 대선에서 야권 보수 후보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당선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나, 2014년 3월 11일 미첼 바첼레트가 재선되었고, 현재는 집권 여당인 칠레 사회당이 정권을 재창출 하였다. 현재는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의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극좌 정치를 하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사회[편집]

칠레는 여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처럼 성이 개방적이다. 청소년 시절에 성관계를 갖는 걸 평범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가족끼리 성교육 소재를 넘어 성적 취향이나 소재들로 대화하는 것도 흔하다. 사회계층마다 차이가 심하다. 칠레의 사회계층 간 괴리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데, 이는 문화 요소에서도 나타난다. 중-상류층 가정의 경우, 문신, 복장, 남녀 교제 등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닌 부모들이 다수 존재한다. 윗 문단에 언급된 내용이 속칭 '날라리'를 뜻하는 플라이떼(Flaite)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자, 서민계층과 중상류층의 특징은 스포츠, 옷차림, 직업, 피부색, 언어구사 등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를 희화화한 El Cuico Negro(어두운 피부색의 도련님)이라는 꽁트도 있다. 상류층의 전형적인 삶을 유지하지만, 피부색이 어두운 주인공이 고충을 토로하는게 주 내용이다. 특히 관광지가 위치한 산티아고 센트로, 퀸타 노르말, 한인촌이 위치한 레콜레따의 경우 현지의 중산층보다는 이민자, 서민계층이 다수 거주하는 구역이며, 이는 관광객들에게 보여지는 칠레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주로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구역은, 동쪽의 비타쿠라, 프로비덴시아, 뉴뇨아, 라 레이나, 라스 콘데스, 로 바르네체아, 라 데에사 등으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일단 동쪽으로 가게 되면 도시 풍경부터 달라진다. 산티아고 주민들 사이에는 이탈리아 광장(Plaza Italia)가 위치한 바케다노(Baquedano) 역을 기점으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존재한다.

현지 대학을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에 따르면, 칠레 청년들은 대부분 나이를 먹어갈수록 성과 사랑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택한다고 한다. 이는 사랑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삶의 측면을 중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칠레 대중 또한 소득에 비해 턱없이 높은 물가 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부모와 같이 사는 캥거루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관계를 하더라도 임신과 육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현재 칠레의 사회적인 모습은 더욱더 기존 선진국의 사회상을 닮아가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칠레는 혼인절차가 까다로운 편인데, 공무원이 결혼식 장소에 출장을 나와서 혼인서약을 주관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결혼식을 올릴 날짜와 시간을 6개월 전부터 관공서에 미리 예약해야 하며, 이미 예약되었거나 애초에 예약을 할 수 없는 날짜와 시간대에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 이후 혼인을 증명할 증인을 데리고 결혼식 1개월 전 쯤에 다시 관공서를 방문해서 증인을 등록해야 한다. 또한 결혼식날 혼인서약을 할 때 앞으로 부부사이에 형성되는 재산의 처리 방법을 공유 / 개별소유 / 공유+개별소유 중의 한가지로 미리 결정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배우자 한쪽이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통역할 사람이 있어야 하며, 통역할 사람은 해당 언어의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합당한 통역능력이 있음을 공증받아야만 한다.

가톨릭 국가로서 이혼이 불법이었다가 2004년에야 합법이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이혼법이 없는 마지막 나라였고 이혼을 위해 이혼소송이 아닌 혼인무효소송을 냈어야만 했다. 이혼법이 제정된 현재에도 이혼에 합의한 경우에는 1년의 별거기간을 거쳐야 하고, 한쪽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3년을 기다려야 하며 60일 이상의 삼담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법제도의 영향으로 혼인을 하기보다는 동거를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의외로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이 힘을 쓰는 편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가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가 팔레스타인계 자본인 경우가 흔하며, 정계진출도 활발하다. 또한 팔레스티노라는 자체축구팀도 존재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칠레계 자본이 팔레스타인 경제의 밑천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현재까지 통제가 풀리지 않고 있으니 현재로써는 머나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5]

교육[편집]

북부가톨릭대학교[편집]

북가톨릭대학교는 칠레 안토파가스타주 안토파가스타에 본부를 둔 사립 가톨릭 종합대학교이다. 1956년 5월 31일 설립되었고, 이듬해 3월 25일 개교했다. 칠레 정부의 허가는 1964년 2월 4일 받았다. 칠레대학교총장협의회(Consejo de Rectores de las Universidades Chilenas, Cruch)에 가입한 6개 가톨릭 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칠레에서 8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가톨릭 대학교 중에서는 3번째로 만들어졌다.

북부가톨릭대학교는 개교 이래 칠레 북부지역의 연구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학술부문은 11개 학부 및 대학과 2개 전문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칠레에서 20위권에 드는 명문대학교로 인정받는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201-1400위권, 라틴아메리카 대학 가운데 93위로 평가되었다. 2023년 세계대학순위센터(CWUR)의 세계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628위, 칠레 대학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1956년 5월 31일 베르타 곤살레스 모레노(Berta González Moreno)의 지원을 받아 예수회가 북부대학교(Universidad del Norte)를 설립했다. 북부대학교는 1957년 3월 25일 교원 20명과 학생 100명으로 첫 수업을 시작했다. 1964년 2월 4일 북부대학교는 정식으로 정부의 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북부대학교는 칠레 대학교 가운데 8번째, 가톨릭 대학교 중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이다.

1964년 북부대학교는 칠레 전통대학교(Universidades Tradicionales)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전통대학교는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고등교육 시스템을 바꾸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피노체트 정권은 저항의 구심점이 되던 공립 대학교나 가톨릭 대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입맛에 맞는 교육기관만을 전통대학교로 지정하여 막대한 지원금을 주었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대학교에는 전혀 지원을 하지 않았다. 피노체트 정권의 '공인'을 받은 칠레의 대학교들이 칠레대학교총장협의회 소속 대학교이다. 북부대학교는 1990년 북부가톨릭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6]

공항[편집]

안드레스 사베야 갈베스 국제공항[편집]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주(州)의 주도 안토파가스타에서 북쪽으로 약 10km 거리에 위치하며, 남태평양 해안과 접하고 있다. 칠레 공군과 공항 시설을 공유하는 상업·군사용의 국제공항이다. 공항 코드는 ANF(IATA), SCFA(ICAO)이다. 1954년 11월 세로 모레노 국립공항(Aeropuerto Nacional Cerro Moreno)으로 개항했으며, 2012년 안토파가스타 태생의 시인 안드레스 사베야 갈베스(Andrés Sabella Gálvez)의 이름을 따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여객 터미널은 한 동이다. 활주로는 2,599mx50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하며, 표면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취항 항공사로는 란항공(LAN Airlines)·스카이항공(Sky Airline)·프린시펄칠레항공(Aerolinea Principal Chile)의 3개사가 있으며 라세레나(La Serena)·칼라마(Calama)·이키케(Iquique) 등의 국내 도시를 연결한다. 교통편으로는 안토파가스타 도심을 연결하는 1번 고속도로가 지난다.[7]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안토파가스타주〉, 《위키백과》
  2. 두산백과: 안토파가스타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칠레〉, 《위키백과》
  4. 사막 기후〉, 《위키백과》
  5. 칠레〉, 《나무위키》
  6. 세계의 대학: 북부가톨릭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7. 두산백과: 안드레스 사베야 갈베스 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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