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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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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hkim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2일 (금) 10:24 판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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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년 ~ 589년)는 중국에서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가,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 강남에는 (宋)·(齊)·(梁)·(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건업의 새 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을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이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여 도연명·왕희지 등이 활약했다.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씨(탁발부)가 건국한 북위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북방 유목민족의 부족제를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하였다. 북위는 육진의 난을 거치면서, 534년에 동위서위로 분열하였다. 동위는 550년 북제(北齊)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가 대신했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 후, 581년에 수나라의 양견이 북주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른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나라 6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北朝)라고 불렀고, 여기에 수나라도 합쳐야 한다는 설도 있다. 이연수(李延壽)의 《북사》에는 수나라를 북조에 넣기도 하였다.

북조

북위

하지만 북위 내부에서는 선비족의 풍습을 지키려는 세력과 선비족의 풍습을 버리고 한족화를 진행하려는 세력과의 다툼이 일어났다. 한족화를 진행시키려는 세력의 중심은 주로 한족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한족화가 진행되면 자신들의 입장이 유리해지는 동시에 문화를 이민족을 이기는 결과를 가져와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굴욕을 씻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한족파의 대표는 한인인 최호였다. 최호는 외래 종교였던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 교단의 교조 구겸지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폐불(불교 탄압, 삼무일종의 폐불의 제일 첫 번째)을 주장하고 그 일을 실행시켰다. 또한 최호는 한인 관료들을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강제적인 한족화는 선비족의 반감을 사서 450년에 주살되었다. 그 후 북위에서 태무제가 암살당해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문명황후였다. 문명황후는 제4대 황제인 문성제의 황후이자 제5대 황제인 헌문제의 적모(嫡母)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후에 헌문제에게 장남 탁발굉(훗날의 효문제가 태어나자 잠시 물러났으나, 효문제의 생모를 죽인 일로 헌문제와 대립하여 헌문제를 폐위시키고 효문제를 옹립하였다. 북위에서는 외척의 횡포를 배제하기 위해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 통례였다. 문명태황태후는 계속 수렴청정을 하면서 봉록제(封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와 한족화를 추진하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계승되었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후, 대대적인 한화(漢化)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때까지 황실의 성씨였던 탁발씨를 원(元)씨로 고치고, 구품관인법을 부분적으로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기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 조정에서는 제8대 황제인 효명제와 생모 영태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528년 영태후가 효명제를 살해하여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를 진압한 것이 이주영이었다. 이주영은 육진의 난을 진압하고 효장제를 옹립한 뒤 권력을 휘둘렀으나, 효장제에 의해 살해되고, 효장제 또한 이주영 일족에게 살해당했다. 이 틈을 노려 이주영의 부하였던 고환이 이주영 일족을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고환에 의해 옹립된 북위 최후의 황제 효무제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서 관중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군벌의 우두머리였던 우문태에게로 도망쳤다.

고환은 534년 효정제를 옹립하였고, 우문태도 효무제를 살해하고 535년 원보거를 옹립했다(문제. 534년을 기점으로 북위는 사실상 멸망했고,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실력자가 제위를 받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북제

북제(北齊, 550년 ~ 577년)는 국호는 제(齊)이지만 남조의 남제와 구별하기 위해 북제라고 불리었다. 창시자인 고환은 북위의 육진의난에 가담하여 노 계열 부족 중의 하나인 글호족(契胡族)의 추장 이주영에게 귀순하여 커다란 명성을 날렸다. 이주영이 국정을 농단하다가 효장제 원자유에게 살해당하자, 자립하여 이주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고 승상이 되어 북위의 실권을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다.

후에 효무제는 그를 피해 서쪽의 군벌 우문태를 의지했다. 이윽고 고환은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하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동위를 건국하여 서위와 다투었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 직후 하남대행대(大行臺)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후경의 모반을 꺾어버린 고징이었으나, 주벽에 의한 포악한 행동으로 550년 양나라로부터 투항한 난경(蘭京)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징의 동생 고양이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북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번 격퇴하였다. 고씨 가문은 주벽(酒癖)과 기행(奇行)이 많아 피를 부르는 사건이 많은 반면, 대부분 우수한 군사적인 재능을 타고 났기에 익주를 병합하여 경제력을 강화한 북주에 대해 항상 군사적 우위를 지켰으나, 후주 고위는 소인배를 신임하여 그들의 참언으로 인해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률광·고숙 등의 명장들을 처형하는 등의 실정을 거듭하다가, 577년 북주에게 멸망당했다.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65년, 북제의 무성제가 조서를 내려, 신라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주

북주(北周, 557년 ~ 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때 선비족 우문씨(구 우문선비)가 건국한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지만 고대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북주라고 부른다.

실질적인 창시자인 우문태는 북위의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하발악이 죽자 그가 가지고 있던 기반을 계승한 뒤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효무제가 북위의 승상 고환으로부터 도망쳐 그에게로 왔다. 그 후 고환이 동위를 건국하자 우문태도 사이가 나빠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였다. 이것이 서위가 되었다. 그 후, 우문태는 서위의 승상으로까지 승진했다.

우문태 사후 승상 자리를 물려받은 우문각은 557년에 서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으나,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였던 우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초대 효민제(우문각)·제2대 명제(우문육)·제3대 무제(우문옹)를 잇달아 차례로 세우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제가 우문호를 주살하고, 577년에 발해 고씨가 세운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또한 무제는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을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부른다.

제4대 황제인 선제는 온갖 포악무도한 짓을 자행했기 때문에,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에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수국공 양견의 힘이 강해졌으며, 선제가 죽자 양견은 아예 외척이라는 명목으로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실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581년에 제5대 황제인 정제가 양견에게 선양하면서 수나라가 세워지고, 북주는 멸망하게 되었다. 북주의 황족인 우문씨는 전 황제 정제를 포함한 대다수가 양견에 의해 모두 학살당해 단절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치 체계

북주는 유교 경전에 있는 《주례》에 기초해서 관제와 부병제를 만들고, 이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3성 6부는 대총재(大冢宰)·대사도·대종백(大宗伯)·대사마·대사구(大司寇)·대사공의 6관(六官)으로 관제가 변경·개편되었다. 또, 옛 주나라의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주는 북위 효문제 이래의 한화(漢化)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의 풍습으로 회귀함을 표방하였다(호화(胡化)정책).

군사 체계

북주는 군의 요직으로 8주국(柱國) -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武川鎭,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있었던 북위의 군사기지) 출신자들이 많았다. 이들 밑에 24개부를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훗날 수나라를 건국하는 양(楊)씨가 12대장군이었고. 역시 훗날 당나라를 건국하는 이(李)씨가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그대로 수나라·당나라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사회

왕조의 의례 등을 선비족풍으로 행하고, 공용어도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으며, 성씨도 원래의 선비족 성씨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행했다(원(元)씨 → 탁발씨) 거기에 영내의 한인들에 대해서도 선비족풍의 성씨로 고칠 것을 강요했다(호화(胡化)정책).

남조

(宋, 420년 ~ 47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 지방에서 유유가 건국한 남조의 첫 번째 왕조다.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960년 ~ 1279년)와 구별하기 위해 건국자인 유유의 성씨를 따라 유송(劉宋)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이 반란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군 출신의 하급군인이었던 유유(劉裕)는 군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단도제·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제2대 황제인 유의부(소제)를 퇴위시키고, 유의륭을 즉위시켰다(문제).

문제는 왕홍(王弘)·왕화(王華)·은중감(殷仲堪) 등의 귀족들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元嘉之治)"라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문제는 수재의 직을 기한을 두어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438년 유학, 현학, 문학, 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안연지 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과 하서왕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430년, 450년 2번에 걸쳐 북위의 태무제에게 패배하여 회북(淮北)을 빼앗긴 것으로 인해 군사비가 증가하고, 태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송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효무제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면서, 형주·양주·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사족과 공상, 잡호와의 통혼을 금하고 사문에게 왕자를 배알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그린 정치를 추진했다.

전폐제는 남조의 대표적인 포악한 황제로 숙부 유욱에게 암살당했다. 유욱은 명제가 되었으나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를 보내 그를 죽였다. 명제는 채흥종(蔡興宗) 등의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했으나 난의 평정 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제 이후 후폐제가 제위하였으나 숙부 유휴범이 한문 출신의 권력자들의 전횡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위협하자, 무장 소도성이 난을 평정하고 포악한 군주 폐제를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였다. 심유지·유병(劉秉)·원찬(袁粲) 등이 의병을 모아 공격했으나 패퇴하자, 소도성은 모든 군권을 장악하였고, 기어코 479년 순제로부터 소도성이 선양을 받으면서 제나라를 건국한다. 이로써 송나라는 멸망했다.

(齊, 479년 ~ 502년)는 중국 남북조시대 강남 지방에서 건국된 남조의 2번째 왕조이다. 북조의 북제와 춘추시대 제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남제(南齊) 또는 초대 황제인 소도성의 성씨를 따라 소제(蕭齊)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나라 말기 소도성은 난릉(蘭陵) 출신의 하급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482년 고제는 즉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무제가 즉위했다. 제2대 황제 무제는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 파견을 중지했다.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다는 평이 전해졌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어린 군주 두 명의 짧은 재위를 거쳐 명제가 즉위했다.

명제는 남조 특유의 전제군주로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 명을 살해했다. 또한 종실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를 파견하여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그때문에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으며, 귀족, 관인들의 지지는 사라졌다.

제6대 황제인 폐제 소보권은 황족에 그치지 않고 관료,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에선 과다한 사치를 하여 정치를 매우 어지렵혔다. 종족 중 한 사람인 소연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으나 다음해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제나라 문화의 중심은 무제의 둘째 아들 경릉왕 소자량의 저택이었다. 그의 저택에 있던 서쪽처소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였기에 이들 대표적인 8명을 가리켜 경릉팔우(竟陵八友)라고 불렀다. 소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제 말기에 황제였던 동혼후는 폭정을 해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를 살해했다.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인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 뒤 동혼후를 살해한 뒤 화제를 옹립했다. 502년에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무제이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기간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했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역사상 최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무제의 맏아들인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다.

그런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사신(捨身)을 행하는 무모한 짓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르나 재임 도중에 황제를 잃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548년 동위의 무장이었던 후경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했다(후경의 난). 다음해 건강이 함락되었고, 무제는 사로잡힌 뒤 쇠약해져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 않아, 무제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에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은 즉위한 뒤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기니 그가 바로 원제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익주자사 무릉왕 소기와 원제의 대립을 틈타 익주를 점령했다. 또한 양양을 바치고 투항해온 소찰을 이용하여 554년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원제를 죽였고 그곳의 주민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후경의 난을 평정한 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의 압력에 정양후 소연명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민제), 진패선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민제를 퇴위하게 한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 소방지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경제이다. 557년에 경제는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니, 양나라는 멸망하였고 진패선의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陳, 557년 ~ 58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 지방에 건국된 남조 최후의 왕조이다. 남진(南陳)이라고도 한다.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은 미천한 가문의 군인 출신으로 후경의 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북제에게 동조한 소연명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을 타도하고 경제를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한수 유역과 익주 일대는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빼앗겼고, 거기에 장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사실상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진패선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후량 등과 대치했다. 문제는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 때 북주·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숙부 진욱이 그를 폐위하고 즉위하여(제4대 선제)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오명철을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장강 이북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때 북제를 병합한 북주가 진나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정권이 교체되면서 수나라가 이를 대신한다. 문제는 재빨리 남정을 계획하였고, 그동안 진나라는 후주가 즉위해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국력이 피폐했다. 수나라 진왕 양광을 총지휘관으로, 하약필·한금호를 선봉으로 강을 건너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400년에 걸쳐 분열되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진나라는 남조 귀족제가 후경의 난을 거치며 해체되어 무제 때 중서통사사인(中書通事舍人) 채경력같은 한문(寒門) 출신들이 군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담당했다. 후주도 시문경·심용경 등의 한문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하고 국가의 주석이었던 무장 노광달·소마하·임충 등을 멀리했기에 문무 해체가 된 나라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다만 후주의 시대는 문화가 융성하여 문학에 강총·서릉 등이 있었고, 불교도 문무관료에게 신앙받았다. 나라가 멸망할 때 호구 50만, 인구 200만 명이었다. 이후 육조 문화에 근간을 둔 수나라·당나라의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565년 진나라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로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년·567년·568년·570년·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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