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자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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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자와주(인도네시아어: Provinsi Jawa Tengah)는 인도네시아 자와섬 중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2][3]
개요[편집]
중앙자와주의 면적은 32,800㎢이며 인구는 37,949,234명(2023)이며 주도는 욕야카르타이다. 서쪽으로는 서자와주, 남쪽으로는 인도양과 욕야카르타주, 동쪽으로는 동자와주, 북쪽으로는 자와해와 접한다.
중앙자와주는 욕야카르타주와 함께 자와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중앙자와주에 위치한 주요 유적으로는 보로부두르가 있다. 자와족 이외에 순다족,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아랍계 인도네시아인, 인도계 인도네시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순다족은 문화와 예술을 발달시킨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부자바주의 토착 원주민은 자바족으로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부자바를 상징하는 식물은 칸틸 꽃(Bunga Kantil)과 동물은 크포당 새(Burung Kepodang)이다. 전통가옥은 조글로(Rumah Joglo)이고, 전통춤으로는 카톳 카차 간드룽춤(Tari Gatot Kaca Gandrung), 본단춤(Tari Bondan)등이 있고, 전통악기로는 크리스(Keris) 칼이 있다. 전통음악으로는 가믈란(Gamelan)과 보낭(Bonang) 등이 있다. 전통음식으로는 분틸(Buntil), 템페 등이 있다.[4]
자연환경[편집]
대순다열도는 동남아시아에 연장되어있는 얕은 바다인 순다 대륙붕(Sunda Shelf)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해수면이 100m 이상 낮아진 빙기에는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바섬 남부를 제외한 다른 섬 들간의 수심은 얕은 편이다. 서쪽의 수마트라섬과는 순다 해협(Sunda Strait)을 통해 분리되어 있으며, 북쪽의 보르네오섬과는 자바해(Java Sea, Jawa Sea)로 서로 떨어져 있다. 동쪽의 발리 섬은 발리 해협(Bali Strait) 을 통해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자바섬 남부에는 인도양과 오스트레일리아가 위치해 있으며, 자바섬 남쪽 해안을 따라 깊은 순다해구가 지난다. 순다해구는 서쪽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서부터 수마트라섬 남단을 거쳐 자바섬 남단을 자니 소순다열도 남단에서 끝나는 해구로 그 깊이가 약 7,290m에 이르는 인도양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해구다.
적도 근방으로 열대기후를 보이며 연중 기온변화가 크지 않다. 다만 산맥의 배치로 인해 동쪽과 서쪽, 고산과 저산지대의 강수량이 다소 차이가 난다. 자바섬의 서쪽과 산지 일원은 연중 고루 비가 내리는 편으로 쾨펜의 기후 구분상 열대우림기후(Af)로 구분되며, 자바섬의 북부와 동부 일원은 이보다는 비가 덜 내리는 열대계절풍기후(Am)으로 구분된다. 고산지대의 경우에는 다소 온도가 떨어져 온대 기후로 분류될 수 있는 지역도 있다. 예를 들어 서부 자바 고산지대인 파라얀간(Parahyangan)일대는 연 강수량이 4,000mm를 초과하나, 자바섬 동북부의 해안지대는 연강수량이 900mm정도다. 우기는 주로 11월에 시작하여 4월에 끝나며, 우기가 아니더라도 스콜 형태의 강우가 오후에 내리는 경우가 잦다.
연 평균기온은 지역에 따라 22~29℃를 보인다. 북쪽 인구 밀집 지역은 상대적으로 더 더운 날씨를 보이며,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 낮 최고 기온이 34℃ 이상을 보이기도 한다. 남부 해안은 북부 해안지대에 비해서 다소 서늘한 편이며, 고산지대는 열대기후로 보기 어려운 온화한 혹은 냉량한 기온분포를 띄기도 한다.[5]
역사[편집]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여 왔으며, 6~8세기부터 문자 기록을 남긴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자바 중부와 동부의 고대 국가들은 비옥한 농경지를 바탕으로 수리 사업에 주력하여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예외적으로 많은 인구를 지탱하였다. 이 지방을 핵심 기반으로 한 옛 국가로는 고대의 마타람 왕국과 이슬람화 이후의 마타람 술탄국이 있다. 마타람 술탄국의 수도였던 수라카르타는 오늘날 욕야카르타와 함께 자바 전통 문화의 중심지이다.
8세기 후반에 사일렌드라 왕조은 도서부와 대륙부 동남아시아를 동시에 호령한 막강한 제국이었다. 그 위력이 현재에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바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군 때문이다. 보로부두르는 크두 평원에 토대를 쌓고, 2,500㎢에 달하는 정사각형 면적에 높이 30m에 이르는 웅장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인도의 대승불교 사원과 전혀 다른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사이렌드라 통치자들은 보로부두르 사원을 힌두-불교의 성지인 메루산(수미산)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부자바시대와 동부자바시대를 잇는 왕국이 마타람 왕국이다. 856년 산자야 가문의 피카탄이 중부자바의 지배권을 되찾으면서 마타람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에 힌두교가 다시 융성하기 시작했고, 마타람은 보로부두르 사원 동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프람바난 힌두 사원군을 건설하며 번영을 구가했다. 마타람은 일명 신독 왕(재위 929~948) 재위 시절에 동부자바의 브란타스강 유역으로 천도하였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치열해진 마타람과 스리비자야 간의 무역 경쟁이 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브란타스강은 천혜의 항구들인 말라카, 순다해협과 말라카 군도 사이에 점증하는 향료무역을 연결하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10세기 후반에 동부자바의 마타람은 해상교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쌀 곡창지대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다음으로 고대 동부자바시대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크게 구분되는데, 전반기에는 케디리왕조, 후반기에는 싱가사리왕조와 마자파힛 왕조 등 많은 왕조의 흥망성쇄의 역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싱가사리는 오늘날 인도네시아 국가 공동체의 원형을 구축한 마자파힛 왕조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국가로 평가된다.
인도네시아 통합의 역사를 시작한 주역은 싱가사리의 마지막 왕으로서 왕호가 '시바부다'인 커르타나가라(Kertanagara, 재위 1268~1292)였다. 이때부터 인도네시아 전통 국가의 영향권이 자바를 넘어 현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공간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365년에 승려인 프라판차(Prapancha)가 집필한 마자파힛의 역사서는 1268년에 즉위한 커르타나가라의 통치시절부터 기록을 시작하였고, 그는 인도네시아 군도를 아우르는 원대한 국가건설을 시작하였고, 1294년에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의 원형을 제공한 마자파힛 왕국이 건설되었다.
이슬람교 전파는 자바를 포함한 말레이세계의 문명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이슬람은 늦어도 13세기 말경 북부 수마트라 지역에 정착한 다음, 14세기부터 15세기 초 사이에 동부 말레이반도, 동부와 북부 자바의 해안지역 그리고 브루나이로 확산했다. 그러나 16세기 초까지도 자바섬에는 대부분 힌두-불교가 더 영향력이 더 컸다. 그러나 1527년 마자파힛을 무너뜨린 중국계 가문은 데막의 라덴 파타로 이슬람교로 개정한 중국 상인의 혈통이었다.
이슬람의 영향이 확대되고 있는 시기에 이어서 외부세계인 유럽의 영향도 자바에 미치기 시작했다. 유럽세력 중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1605년 암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추방할 만큼 힘이 강력했다. VOC는 기독교를 무슬림보다 우대하면서 동부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VOC는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을 점령하고, 자바섬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당시 중부자바의 마타람 왕조 후예인 술탄 하멩쿠부워노 3세의 장남인 디포네고로는 VOC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 대표적인 영웅이다. 1825년에서 1830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던 네덜란드 VOC에 대한 봉기는 일명 '자바전쟁'이라고 불리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 식민지는 1941년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인도네시아도 1945년 일본식민지로부터 독립하였다.
인도네시아 독립은 일본 패망이라는 외적인 상황도 있었지만, 스스로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독립운동이 20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45년 3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였고, 독립을 향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내적인 준비와 일본 패망이라는 외적인 상황에 맞물려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한 이후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들어왔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재점령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전쟁을 인도네시아는 '혁명전쟁'이라고 부른다. 1949년 12월에서야 인도네시아 독립이 완성되었다. 인도네시아는 혁명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 신생독립국가로서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6]
산업[편집]
주요 경제요소는 단연 농업이다. 중부자바주는 매우 비옥한 농경지와 정교한 관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쌀이며, 다양한 채소와 과일도 함께 재배되고 있다. 목축업도 성행하고 있다. 다른 도서 지역뿐 아니라 동부자바나 서부자바에 비해서도 특용 작물의 재배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지역의 중심 도시 스마랑은 1인당 GRDP가 $8,665(2021)에 달하며 다양한 제조업 및 서비스업이 발달한 도시로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수라카르타 역시 중부자바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도시로 관광 및 전통 예술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다.
중앙자와주의 1인당 GRDP는 인도네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2,703으로 추산된다. 이는 자바의 주 가운데 가장 낮고, 인도네시아 전체에서도 중하위권이다. 인간개발지수는 34개 주 중 13위로 인도네시아 평균 수준인 것과 대조적이다. 인구의 10%가량이 빈곤선 아래에 있지만 빈곤 문제는 빠르게 개선되는 중이다.
교육[편집]
스마랑에 소재한 디포느고로 대학교(Universitas Diponegoro, Undip)는 중부자바의 명문 국립대로 꼽히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내 다양한 대학 평가에서 꾸준히 10위 안에 들고 있다. 인도네시아 억만장자 하르토노 형제가 이 곳을 졸업했다. 그 외에 수라카르타에 소재한 3월 11일 대학교(Universitas Sebelas Maret, USM)도 지역 명문으로 꼽히며, 인도네시아 육군사관학교가 중부자바 마글랑(Magelang)에, 인도네시아 경찰학교가 스마랑에 소재한다.
자바의 다른 주들처럼 중부자바 고등학교 가운데도 명문고가 많다. 스마랑과 수라카르타에 물론 유명한 공립고 및 사립고가 많지만, 마글랑, 프칼롱안, 살라티가 등 각지에도 비슷하게 수준 높은 명문고가 고루 분포하고 있다.
스마랑[편집]
인도네시아 중앙자바주의 주도로 인도네시아의 대도시이다. 도시 인구 기준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여덟 번째, 자바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고 인도네시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특히 메단은 도시 인구는 스마랑보다 많지만 도시권 인구로는 밀린다.
이곳 방식으로 만드는 인도네시아식 춘권인 '룸피아'(Lumpia)라는 음식이 특히 유명하여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스마랑식 룸피아를 맛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스마랑은 '룸피아의 도시'(Kota Lumpia)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역 주민 대부분이 자바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인의 비중도 적지는 않으며 자바섬의 화인들은 언어적으로 동화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일상언어로도 자바어가 많이 쓰인다. 사무언어로는 국어인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된다.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에서 정화 함대의 분함대가 현재의 스마랑 인근에 도착한 기록이 있으며 이 지역은 그 이전에도 자바 중부의 항구로서 기능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대도시는 아니었다. 스마랑이 본격적으로 항구로서 개발된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의 드막 술탄국 시대로, 스마랑과 인근이 군(kabupaten)의 지위를 획득한 시점은 공식적으로 1547년 5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스마랑은 마타람 술탄국의 항구로 번영하였는데, 1678년 1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 아망쿠랏 2세의 채무 지불 과정에서 스마랑과 인근의 영토를 마타람으로부터 조차해 갔다. 1705년,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1708) 과정에서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1세(푸그르 공Pangeran Puger)는 자신의 편에서 싸운 대가로 동인도 회사에 스마랑을 영구히 양도하였다. 이 시점부터 스마랑은 공식적으로 동인도 회사령에 편입된다.
이슬람 시대와 식민 시대에는 자바 중북부의 물류 요충지이자 주요 무역항으로서 개발되어 자바 중동부의 농산물이 스마랑을 거쳐 동인도 타 지역 및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를 감안하여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자바에 철도와 도로 등 근대적 물류 시설을 도입할 때 스마랑은 최우선 순위에 놓였다. 1867년 8월 10일 자바 최초로 개통된 철도 노선은 스마랑과 탕궁(Tanggung)을 잇는 25km의 노선이었다. 이렇게 물류의 중심으로 개발되며 19세기 말 스마랑은 점차 근대 도시가 되어 갔으며, 병원, 도로, 전신선 등 근대적 인프라도 조금씩 구비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는 공업도시로도 개발됨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특히 노동조합, 노동운동이 발달하였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주요 거점으로서 '적색 도시'(Kota Merah)로 불리기도 했다.
20세기 초 다양한 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며 스마랑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1910년대 말 증가하는 주택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네덜란드 건축가 토마스 카르스턴(Thomas Karsten)의 설계로 스마랑에 찬디바루(Candi Baru, 오늘날 찬디사리[Candisari] 지역)라는 계획 지구가 건설되었는데, 부유한 유럽계, 중국계, 자바계 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계급적 엘리트주의를 보였지만 흥미롭게도 지구 내 인종적 분리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트적 도시 계획만으로는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식민 정부는 식민 치하에서 동인도가 번영하는 모습을 전시하기 위해 1914년 스마랑에서 식민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박람회에는 동인도의 자바, 발리, 아체, 스마랑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관들이 설치되었으며, 해외에서는 중국, 일본, 호주, 그리고 일본 제국 치하 대만이 박람회에 참가해 전시관을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이 자바를 점령하고 통치하던 1944년 2월, 일본군 장교 등이 이곳에 설치한 '위안소'로 네덜란드계 여성 35명을 강제 연행하여 감금하고 강간하거나 성매매를 시킨 사건이 있었다(스마랑 강간 사건 또는 스마랑 위안소 사건). 이 사건으로 전후인 1948년의 바타비아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일본군 장교 7명과 군속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역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를 추인하였다. 1994년의 네덜란드 정부 후속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 하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의 위안소에서 일하던 200–300명의 네덜란드계 여성 가운데 최소한 65명은 확실한 성매매 강요의 피해자였다고 한다.[7]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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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중앙자와주〉, 《위키백과》
- ↑ 〈중부자바〉, 《나무위키》
- ↑ 〈인도네시아의 주〉, 《위키백과》
- ↑ 〈두산백과:자바섬 도시구조 및 행정〉, 《네이버 지식백과》
- ↑ 〈두산백과: 자바섬 기후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 〈두산백과: 자바섬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 〈스마랑〉,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중앙자와주〉, 《위키백과》
- 〈중부자바〉, 《나무위키》
- 〈인도네시아의 주〉, 《위키백과》
- 〈두산백과:자바섬 도시구조 및 행정〉,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자바섬 기후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자바섬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 〈스마랑〉,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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