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고대 그리스어: Παρθενών)은 그리스 아테네 시에 위치한 거대 대리석 건축물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모시기 위해 건설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높은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아테네 안이라면 어디에 있든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어인 파르테논(Παρθενών)은 현대 그리스어로는 파르쎄노나스(Παρθενωνας)라고 불리는데, 이는 '처녀'를 뜻한다. 따라서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처녀 신전' 혹은 '처녀 아테나 신전'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의 엠블럼이 파르테논 신전을 모델로 디자인 됐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역사와 색이 바래지 않는 예술성을 자랑하며, 서양 건축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목차
개요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명승고적으로,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신전이다. 건축 주 재료는 대리석으로, 기원전 447년 델로스 동맹의 위상이 가장 강성했을 적에 착공하여 기원전 438년에 건물의 뼈대가 완성되고, 외장 공사는 기원전 432년까지 진행됐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 나아가 유럽 문화권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파르테논을 비롯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딸린 여타 기념물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페르시아의 외침을 막아내고 신께 승리를 고하는 의미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전(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의 재무를 담당하는 건물로 쓰였으며,[8][9]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다.
아테네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그 성격이 모스크로 변하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제국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진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1975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장 최근 공사는 2020년에 끝날 것으로 보였으나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이름
이 신전의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프리 M. 허윗(Jeffrey M. Hurwit)에 따르면, '파르테논'은 '처녀의 장소'를 뜻하며, 원래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어떤 특정한 방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느 방인지 그리고 그 방에 어떻게 이 이름이 붙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일설에서는 '파르테논'이 범아테네 축제 때 아테나에게 바치는 페플로스(고대 그리스의 여성 겉옷)를 아레포로이(해마다 아테나 여신을 위해 일하는 네 소녀)가 짜는 방이라고 한다. 크리스토퍼 펠링(Christopher Pelling)은 아테나 파르테노스가 아테나 폴리아스("도시의 아테나")와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같지는 않은 개별적인 아테나 숭배 의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13] 이 이론에 따르면,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아테나 파르테노스 숭배 의식이 이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14] 역시 그 기원이 불명확한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란 별칭은 "처녀,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뜻하며, 특히 야생 동물과 사냥, 식물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전쟁, 수공예 그리고 실용적인 것의 여신인 아테나를 이를 때 쓰는 말이다. 또 이 신전의 이름은 처녀들('파르테노이')를 암시하는데, 처녀들의 최고위 희생 의식은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신전 건축물군 전체를 분명히 일컫는 첫 사례는 기원전 4세기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말에서 나온다. 5세기에 건축 기록에서 이 건축물은 그저 '호 나오스'("신전")으로 불렀다. 건축가 므네시클레스와 칼리크라테스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아테나이 건축에 대해 이들이 쓴 기록에서 이 건물을 '헤카톰페도스'("100피트의 키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4세기와 나중에도 '파르테논'이란 이름 뿐 아니라 '헤카톰페도스' 또는 '헤카톰페돈'으로 불렸으며, 기원후 1세기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 건물을 '헤카톰페돈 파르테논'이라고 칭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인 아테나에게 헌정된 신전이기 때문에 파르테논 신전은 종종 아테나의 로마식 이름, 미네르바의 신전이라고도 불렸다. 특히 19세기 서양에서 파르테논을 미네르바의 신전이라고 일컫는 경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델로스 동맹의 수장 페리클레스가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략자들을 격퇴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했다. 기원전 447년부터 기원전 438까지 9년에 걸쳐서 건설되었다. 완공된 후, 파르테논 신전은 후에 아테네 제국이 될 델로스 동맹의 금고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테나 여신의 신전 시절
기원전 3세기 중반 직후 파르테논 신전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지붕과 신전 내부의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후, 고트족으로 구성된 헤룰리 해적들이 기원전 276년에 아테네 수비대를 격퇴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아테네의 공공 건물들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 파괴에 대한 수리는 700년이 지난 후인 기원후 4세기에 이루어졌으며, 아마도 배교자 율리우스의 치세 동안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해적의 공격으로 붕괴한 대리석 지붕을 대체하기 위해, 기와를 얹은 목조 지붕이 새로 설치되었다. 새로 설치된 지붕은 원래의 지붕보다 더 큰 각도로 경사져있어서 건물의 날개 부분이 외부에 노출되었다.
이후 파르테논 신전은 1,000년 동안 아테나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43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제국의 모든 이교도 사원들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려 신전은 폐쇄되고야 만다. 이교도 사원의 폐쇄 명령은 순차적으로,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르테논 신전의 폐쇄가 5세기 중에 정확히 언제 실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의되고 있으며, 대략 481년에서 484년 사이에 제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러스라는 아테네 정치인이 폐쇄된 그리스 신전들을 재개방하고, 그곳에서 그리스 전통의 헬레니즘 의식들을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때 제논 황제에 대항하고 일러스를 지지하는 헬레니즘(이교도) 그리스인들이 파르테논 신전을 정치적 거점으로 사용했다. 제논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파르테논 신전을 즉각 폐쇄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폐쇄가 진행된 후 5세기 어느 시점에서, 파르테논 신전은 동로마제국의 황제들 중 한 명에 의해 약탈당했다.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보물과 고대 유물들은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아 유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 700년 동안 보관되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약탈하는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기독교 교회 시절
파르테논 신전은 5세기 말에 기독교 교회로 전환되어 성모 마리아 교회가 되었다. 건물의 방향은 동쪽을 향하도록 바뀌었고, 정문은 건물의 서쪽 끝에 놓였고, 기독교 제단은 건물의 동쪽을 향해 위치하도록 바뀌었다. 이 시기에 많은 기독교의 그림들은 벽에 그려졌고, 많은 기독교 비문들이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에 새겨졌다. 이러한 개조 과정에서 파르테논 신전 고유의 조각품들이 제거되고 위치가 옮겨졌다.
파르테논 신전은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테살로니키에 이어 동로마 제국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기독교 순례지가 되었다.1018년, 황제 바실리오 2세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예배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일으켰다. 황제는 불가리아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아테네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 중세 그리스 문헌에서는 테오토코스 아테나이오티사 신전이라고 되는데, 이 시전은 그리스 정교회 사이에서 매우 유명한 것으로 언급된다.
라틴 제국이 점령했을 때, 약 250년 동안 성모 마리아 성당이 되었다. 이 시기에 지하실의 남서쪽 모퉁이에 망루나 종탑으로 사용되고 나선형 계단을 포함하는 탑이 건설되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바닥 아래에 아치형 무덤이 세워졌다.
이슬람 사원 시절
1456년 오스만 튀르크군은 아테네를 침공한다. 아크로폴리스는 피렌체군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투르크군에게 1458년 6월까지 저항하다가 항복했다. 터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복원해 약 100년 간 정교회의 사원으로 사용하게 했다. 하지만 16세기가 되기 이전에 파르테논 신전은 모스크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아테네가 독립을 위한 반란 음모를 꾸민 죄에 대한 처벌로, 모든 아테네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하는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 가톨릭이 파르테논 신전을 점령했을 때 건설된 탑은 위쪽으로 확장되어 미나렛이 되었고, 민바가 설치되었으며, 기독교 제단과 기독교 상징물들이 제거되었으며, 기존에 그려져있던 기독교 성인과 다른 기독교 그림을 덮기 위해 벽이 하얗게 칠해졌다.
파르테논 신전이 교회와 모스크로 개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구조는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1667년, 터키의 여행자 에블리야 첼레비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에 놀라움을 표현했고, 비유적으로 이 건물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묘사했다. 그는 "하늘 그 자체보다 인간의 손이 덜한 작품으로서 신전은 영원히 서 있어야 한다"는 시적 탄원서를 썼다.
파괴
1684년에서 1699년까지 베네치아는 아테네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모로시니가 이끄는 원정대를 보냈다.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아크로폴리스를 요새화했는데, 이때 파르테논 신전는 화약 창고로 사용됐다. 1687년 9월 26일, 베네치아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박격포탄을 다수 발포했다. 이 박격포탄 중 일부는 파르테논 신전의 벽을 부수고 내부에 떨어졌다. 떨어진 박격포탄은 그 즉시 신전 내부에서 보관되고 있던 다량의 화약을 점화시켰고, 그로 인해 강력한 폭발이 발생하여 파르테논 신전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성소의 4개의 벽 중 3개는 완전히 무너졌고, 5분의 3은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갔다. 복원과 수리를 수차례 거치며 살아남았던 신전의 지붕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박살나서 사라졌다. 남쪽에서 6개의 기둥이 쓰러졌고, 북쪽에서 8개의 기둥이 쓰러졌으며, 동쪽에서는 1개의 기둥을 제외하고 모두 쓰러졌다. 그 기둥들이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대리석 아치형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 아래 있던 모든 유물들이 파괴되었다.
이 폭발로 약 300명이 사망했으며, 이 폭발로 인근 튀르크 수비대에 대리석 파편이 쏟아지고 주변 건물에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집이 파괴되었다. 튀르크 군대는 화약 창고가 사라지자 동쪽으로 후퇴하였고, 베네치아 원정대가 아테네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베네치아의 군대는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정군 대장 모로시니가 붙잡은 터키의 탈영병로부터 튀르크의 수비대가 파르테논 신전을 화약고로 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튀르크군 포로는 베네치아의 군대가 역사적 중요한 파르테논 신전을 공격 목표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곳을 화약고로 사용했다고 말했고, 이 정보를 들은 모로시니는 포병들에게 파르테논 신전을 겨냥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베네치아가 아테네를 점령한 후, 모로시니는 폐허에서 조각품들을 약탈하라고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신전은 또 다시 큰 피해를 입는다. 단적인 예로, 그의 병사들이 폭발에서 살아남은 포세이돈과 아테나의 말 조각상을 건물의 서쪽 페디먼트에서 떼어내려고 하다가 땅에 떨어뜨려서 박살을 냈다.
1688년 베네치아는 칼키스에 집결한 대규모 튀르크 병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후퇴했다. 터키군이 아크로폴리스를 탈환한 후, 오스만은 이 폭발로 인해 생긴 잔해의 일부를 폐허가 된 파르테논 신전의 껍데기 안에 작은 모스크를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다음 세기 동안, 바닥에 흩뿌려져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파편들 중 일부가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로서 사용되었다. 파편들로 건설된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작은 이슬람 모스크의 모습은 다음 그림과 같다.
근현대 그리스의 관광지 시절
1832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가 아테네의 지배권을 얻으면서 미나레트의 눈에 보이는 부분은 철거되었다. 곧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이슬람과 관련된 오스만 제국의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지하실 안에 있는 작은 모스크의 이미지는 1842년 르베르의 여행 다게리엔에 출판된 졸리 드 로트비니에르의 사진에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은 그리스 정부가 통제하는 역사적 구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파르테논 신전은 미국/유럽인들에 의해 인류의 위대한 건축물로 널리 여겨졌고, 많은 예술가들의 인기 있는 여행지이자 창작의 주제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에서 파르테논 신전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복원
파르테논 신전에 대한 복원은 1975년 그리스 정부가 ESMA(아크로폴리스 보존/복원 위원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각 분야에서 고도로 숙련된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복원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들을 습득했다. 복원에 필요한 자본은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고고학 전문가들은 파르테논 신전과 고대 아크로폴리스와 관련이 있는 모든 유물과 기록들을 문서화했고, 건축 전문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복원 후 예상 건축물을 구현하고, 이를 기반으로 작업 방식과 순서를 결정했다. 또한 위원회는 복원 작업 시작에 앞서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중요하고 부서지기 쉬운 조각품들은 모두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안치하였다.
가장 먼저 신전의 서쪽에 크레인이 설치됐다. 크레인은 대리석 블록을 옮기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고학자들이 기존에 파손된 대리석 블록을 분해하면, 크레인이 그 블록을 들어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옮기고, 새로 만든 대리석 블록 사본이 기존 블록이 빠진 자리에 놓인다. 무거운 대리석 블록을 놓는 과정에서 신전의 다른 부분을 파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긴 시간이 소요되는 표면 보존 작업이 진행된 이후에 돌을 놓는다. 돌을 교체한 이후에도 돌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서서히 이동하거나, 부피가 임계치 이상으로 변화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광섬유 센서를 사용하고 있다.
파르테논 내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지하실의 북쪽 벽이 2019년에 복원이 승인되어 현재 진행중이다. 지하실의 복원은 신소재 없이 360개의 대리석 블록과 펜텔릭 대리석 90개를 사용해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원되고 있다.
건축
이오니아 양식의 건축적 특징을 가진 도리아식 신전이다. 3개의 지지기반이나 기단 위에 기둥을 세워 만들었다. 다른 그리스 신전처럼 post&lintel 구조로 지어졌다. post&lintel 구조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간이 있고, 기둥 위에 가로로 된 기둥(lintel : 한국 용어 없음)을 올리는 고대 건축 구조이다. 기둥이 흔들리지 않게 기둥의 상단부에서 거대한 가로 기둥이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축 구조의 대표 예시로 스톤헨지가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총 25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양쪽 끝에 8개의 기둥이 있고, 측면에 17개의 기둥이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바닥의 크기는 69.5 x 30.9 미터이다. 지하실은 길이 29.8m, 너비 19.2m였다. 외부의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지름이 1.9m이고 높이는 10.4m이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46개의 외부 기둥과 23개의 내부 기둥이 있었으며, 각 기둥에는 20개의 플루트가 있다. 지붕은 거대한 대리석 기와로 덮여있었다. 지금은 위에서 서술한 폭발 사건 때문에 지붕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정교한 그리스 고대 건축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영국의 귀족 출신 대중 역사가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파르테논 신전을 두고 "고대 그리스 건축의 정교함은 전설적이었으며, 특히 기단의 곡률, 나오스 벽의 테이퍼, 기둥의 엔타시스 사이의 미묘한 일치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엔타시스는 기둥 중앙이 기둥의 상단/하단보다 두꺼운 기둥 구조를 뜻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중앙은 다른 부분보다 4cm 정도 더 굵게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기둥은 멀리서 봐도 기둥이 똑바로 서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지진과 호우에 대비해서 기단이 미세하게 포물선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은 미세하게 안쪽으로 휘어진채로 건설되어있다. 만약 기둥이 하늘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면, 2400미터 위에서 기둥들이 서로 만날 수 있다.
동쪽에서 바라본 파르테논 신전의 광학적 예술성에 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논쟁 중이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동쪽 장면에서 바라봤을 경우 역착시가 일어나게끔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은 서로 평행한 두 선을, 여러 개의 직선으로 교차시켰을 경우 평행한 두 선이 구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알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천장과 바닥이 원래는 완벽히 평행을 이룬 직선이지만, 기둥들로 인해 구부러지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이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곡선 건축을 착시현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파르테논 신전의 정면이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다고 아크로폴리스 연구자 일부가 주장했으나, 최근의 연구는 파르테논 신전이 황금 비율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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