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산티아고주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칠레 위치

산티아고주(스페인어: Región Metropolitana de Santiago)는 칠레 중부에 위치해 있는 주이다. [1]

개요[편집]

산티아고주의 면적은 15,403.2㎢이며 인구는 6,685,685명(2012)이다. 주도는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이며 칠레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주이자 인구가 가장 많은 주이며 칠레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주이다. 6개 현(산티아고 현, 코르디예라 현, 마이포 현, 탈라간테 현, 멜리피야 현, 차카부코 현)을 관할한다. 동쪽은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이루고, 북쪽과 서쪽은 발파라이소주(州), 남쪽은 오이긴스주(州)와 접한다.

주요 농산물은 곡물·포도·감자·콩 등이다. 산지에서는 구리·석고·석회석이 채굴되며, 강을 끼고 있는 협곡들은 여름과 겨울철 휴양지로 이용된다. 주요 공업은 수도이자 주도인 산티아고와 산베르나르도·푸엔테알토·멜리피야·탈라간테 등 위성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태평양 연안의 발파라이소로 통하는 철도·도로를 비롯하여 팬아메리칸하이웨이와 남북종관철도가 지난다.[2]

자연환경[편집]

비옥한 중앙 종곡평야와 안데스 산계(山系)의 비탈면을 차지한다. 북서류 또는 서류하면서 태평양으로 흐르는 마이포강(江) 상류는 수력발전에 이용되고, 중류부에서는 그 지류인 마포초강(江)과 함께 관개농업에 충당한다.

지중해성 기후이나 일교차 10도씨 정도로 심하다. 지중해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온대 기후에 속하며, 기호는 Cs이다. 여름은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고 건조한 건기가 지속되고, 겨울에는 고위도 저압대의 영향으로 다소 따뜻한 우기가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남북위 30˚~40˚ 사이 중위도 대륙 서안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연 강우량 측면에서는 대체로 온대 기후 중에서 가장 비가 적게 내린다.

겨울은 편서풍에 의해 온대 저기압과 전선 영향으로 인해 비가 자주 내리고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띤다. 이에 반해 여름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으로 매우 건조하고 더운 날씨가 지속된다.[3][4]

역사[편집]

19세기 말엽 산티아고 정부는 아라우카니아 병합 당시 마푸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면서 남쪽 지역도 장악했다.1881년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조약을 맺어 마젤란 해협에 대한 칠레의 영유권을 확정했다.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을 두고 벌어진 태평양 전쟁(1879~1884) 때 페루와 볼리비아와 싸워 볼리비아를 내륙으로 밀어내고 거의 국토의 1/3 넓이의 새 북쪽 땅을 얻었다. 또한 칠레가 볼리비아로부터 점령한 영토(아타카마 사막)에는 초석이 풍부하여 칠레의 번영에 기여했다.

1891년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 분배를 놓고 일어난 칠레 내전이 일어났고, 칠레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내전은 해외 투자자와 강한 연줄이 있던 에드워드 가문처럼 지역 산업 발전과 막대한 칠레의 은행 이자의 혜택을 입은 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칠레 경제는 과두정 정부의 기득권을 지키는 체제로 퇴보했다. 1920년대에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성장해 개혁주의자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보수적인 의회 때문에 좌절됐다. 알레산드리 팔마의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식 정부로 변질되었다.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집단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발흥했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는 1932년까지 정치적 불안정을 겪는다. 이 시기 10개 정부중 가장 오래 지속된 정부는 1925년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사실상 독재정권을 수립한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의 정부였다. 그러나 이는 라틴 아메리카 다른 국가에서 빈번했던 군사 독재의 잔인함과 부패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고, 수십년 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정권에 비할 바도 못 되었다. 이바녜즈 델 캄포는 비록 이념 성향이 모호하고 변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권력을 양도해 30년이 넘도록 대다수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헌정 질서가 복원됐고 강력한 중산층 정당인 급진당이 부상했다. 이후 20년간 급진당은 연정의 주요 세력이었다. 1952년 유권자들은 이바녜스 델 캄포를 다시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선출했다. 1958년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이바녜스 델 캄포를 승계해 칠레 보수 정치를 다시 민주적으로 전환했다.

1964년 기독교 민주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돼 주요 개혁 정책을 폈다. "자유하의 혁명"을 슬로건으로 프레이 정부는 사회 경제 정책, 그 중 특히 교육, 주택,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조합화 등 농업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7년 프레이는 좌우파 양측의 반대에 부딪혔다. 좌파에서는 그의 정책이 불충분하다고 보았고, 우파가 보기에는 너무 과도하다고 본 것이다. 프레이 정부 임기 말에 그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으나 기독교 민주당이 당초 바라본 목표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1970년, 칠레 공산당 후보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이룬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36.62%를 득표해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곧바로 사회 제도 개혁에 착수하는데, 이는 칠레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자본가들과 칠레경제를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목축업자들을 지배하던 스위스 네슬레 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자본가들이 독점한 부의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극심한 빈부의 격차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또한 미국 광산 회사 아나콘다가 소유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여 외국계 기업들에 의한 국부 유출을 막고자 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 정부는 국제 구리 값을 폭락 시키고 칠레 경제는 공황을 겪게 된다. 또한 미국 CIA에서는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어선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아옌데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칠레 국민들은 사회개혁을 실천한 아옌데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러자 칠레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해고와 가축도살을 통한 실업과 식량난을 조장했으며, 친미파 장교들이 지배하던 군부에서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 그럼에도 아옌데 대통령은 국가전복음모를 꾸민 군부를 견제하기보다는, 국민투표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군부에서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기에 이른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군은 공군 장성 출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호크기를 동원해 라 모네다(칠레의 대통령궁)를 폭격하는 와중에 아옌데는 대(對)국민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전하고서는 기관총으로 피노체트 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자결했다.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 및 장성들은 훈타라고 불리는 삼인 체제를 설립하고 곧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된다. 피노체트는 16년간의 군부독재기간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 고문 등의 국가범죄로 탄압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압력을 받아 치루어진 선거에서 패배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났다. 이는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진행된 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다. 1989년부터 2009년까지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협력체 소속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당이 연립정권 형식으로 집권했다. 2010년 대선에서 야권 보수 후보 세바스티안 피녜라가 당선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나, 2014년 3월 11일 미첼 바첼레트가 재선되었고, 현재는 집권 여당인 칠레 사회당이 정권을 재창출 하였다. 현재는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의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극좌 정치를 하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사회[편집]

칠레는 여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처럼 성이 개방적이다. 청소년 시절에 성관계를 갖는 걸 평범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가족끼리 성교육 소재를 넘어 성적 취향이나 소재들로 대화하는 것도 흔하다. 칠레의 사회계층 간 괴리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데, 이는 문화 요소에서도 나타난다. 중-상류층 가정의 경우, 문신, 복장, 남녀 교제 등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닌 부모들이 다수 존재한다. 윗 문단에 언급된 내용이 속칭 '날라리'를 뜻하는 플라이떼(Flaite)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자, 서민계층과 중상류층의 특징은 스포츠, 옷차림, 직업, 피부색, 언어구사 등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를 희화화한 El Cuico Negro(어두운 피부색의 도련님)이라는 꽁트도 있다. 상류층의 전형적인 삶을 유지하지만, 피부색이 어두운 주인공이 고충을 토로하는게 주 내용이다. 특히 관광지가 위치한 산티아고 센트로, 퀸타 노르말, 한인촌이 위치한 레콜레따의 경우 현지의 중산층보다는 이민자, 서민계층이 다수 거주하는 구역이며, 이는 관광객들에게 보여지는 칠레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주로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구역은, 동쪽의 비타쿠라, 프로비덴시아, 뉴뇨아, 라 레이나, 라스 콘데스, 로 바르네체아, 라 데에사 등으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일단 동쪽으로 가게 되면 도시 풍경부터 달라진다. 산티아고 주민들 사이에는 이탈리아 광장(Plaza Italia)가 위치한 바케다노(Baquedano) 역을 기점으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존재한다.

현지 대학을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에 따르면, 칠레 청년들은 대부분 나이를 먹어갈수록 성과 사랑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택한다고 한다. 이는 사랑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삶의 측면을 중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칠레 대중 또한 소득에 비해 턱없이 높은 물가 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부모와 같이 사는 캥거루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관계를 하더라도 임신과 육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현재 칠레의 사회적인 모습은 더욱더 기존 선진국의 사회상을 닮아가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칠레는 혼인절차가 까다로운 편인데, 공무원이 결혼식 장소에 출장을 나와서 혼인서약을 주관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결혼식을 올릴 날짜와 시간을 6개월 전부터 관공서에 미리 예약해야 하며, 이미 예약되었거나 애초에 예약을 할 수 없는 날짜와 시간대에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 이후 혼인을 증명할 증인을 데리고 결혼식 1개월 전 쯤에 다시 관공서를 방문해서 증인을 등록해야 한다. 또한 결혼식날 혼인서약을 할 때 앞으로 부부사이에 형성되는 재산의 처리 방법을 공유 / 개별소유 / 공유+개별소유 중의 한가지로 미리 결정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배우자 한쪽이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통역할 사람이 있어야 하며, 통역할 사람은 해당 언어의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합당한 통역능력이 있음을 공증받아야만 한다.

가톨릭 국가로서 이혼이 불법이었다가 2004년에야 합법이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이혼법이 없는 마지막 나라였고 이혼을 위해 이혼소송이 아닌 혼인무효소송을 냈어야만 했다. 이혼법이 제정된 현재에도 이혼에 합의한 경우에는 1년의 별거기간을 거쳐야 하고, 한쪽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3년을 기다려야 하며 60일 이상의 삼담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법제도의 영향으로 혼인을 하기보다는 동거를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의외로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이 힘을 쓰는 편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가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가 팔레스타인계 자본인 경우가 흔하며, 정계진출도 활발하다. 또한 팔레스티노라는 자체축구팀도 존재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칠레계 자본이 팔레스타인 경제의 밑천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현재까지 통제가 풀리지 않고 있으니 현재로써는 머나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5]

교육[편집]

칠레산티아고대학교[편집]

칠레산티아고대학교(USACH)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연구중심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칠레에서 다섯 번째로 유서 깊은 대학으로 공립대학 중에서는 두 번째로 세워졌다. 1849년 산업기술자를 양성하는 4년제 중등교육기관인 예술공예학교(EAO)으로 출발해 1947년 칠레 전국의 광업학교, 산업디자인학교, 기술교육원을 흡수한 국립기술대학(UTET)으로 전환하며 캠퍼스도 여러 곳으로 늘어났다.

국립기술대학이 피노체트 정부시절이던 1981년 칠레산티아고대학교로 재편되면서 캠퍼스가 34만m2 면적의 산티아고캠퍼스 한 곳으로 집중됐다. 칠레산티아고대학교는 9개 학부 · 대학에서 과학과 기술, 의학, 공학, 건축, 인문학의 광범위한 학위과정을 제공한다. 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초점을 맞춘 9개의 연구소를 운영한다.

칠레산티아고대학교는 영국 대학평가기관 QS의 2023년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465위, 라틴아메리카 대학 중 14위를 기록했다.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THE)의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세계 1201-1500위권, 라틴아메리카 대학 중 38위로 평가됐다. 1,001위 이상으로 평가됐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는 세계 1208위, 라틴아메리카 52위, 칠레 대학 중 11위로 꼽혔다.

세계 50대 천문시청각센터 중 하나로 꼽히는 플라네타리움(Planetario Chile)이 유명하다.[6]

교통[편집]

코모도로아르투로메리노베니테스국제공항[편집]

약어는 AMBIA이다. 파다우엘공항 또는 산티아고국제공항이라고도 한다. 칠레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산티아고의 파다우엘(Pudahuel)에 있다. 1961~1967년 동안 건설하여 파다우엘공항으로 개항하였다. 1970년대에 칠레 공군의 창설자인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994년 여객기와 터미널 건물을 잇는 승강용 통로인 제트웨이(jetway), 면세구역, 호텔, 주차장 등의 시설을 확장했고 2002년 새로운 터미널을 건설했다.

란항공(LAN Airlines)의 허브공항이며 아르헨티나항공·에어캐나다·아비앙카(Avianca)·프랑스국영항공·쿠바항공·스위스국제항공 등 여러 항공사들이 취항한다. 평균해면고도는 474m이다. 국제터미널은 10개의 게이트, 국내선 터미널은 7개의 게이트를 갖추고 있다. 활주로는 2개인데, 아스팔트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각각 3,800m, 3,748m이다. SCL산티아고공항회사(SCL Aeropuerto de Santiago)가 운영한다.[7]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산티아고 수도주〉, 《위키백과》
  2. 두산백과: 산티아고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칠레〉, 《위키백과》
  4. 지중해성 기후〉, 《위키백과》
  5. 칠레〉, 《나무위키》
  6. 세계의 대학: 칠레산티아고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7. 두산백과: 코모도로아르투로메리노베니테스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국가
남아메리카 도시
남아메리카 지리
남아메리카 섬
남아메리카 주변 지역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산티아고주 문서는 남아메리카 행정구역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